소설리스트

천재 회사원이 선넘으면 생기는일-129화 (127/263)

129화. 결정했어요.

회귀 전의 기억을 떠올리는 한록.

어느 날 enm에 도착한 시나리오. 그건 바로 우감독이 보낸 것이었다.

‘우감독님이? 그분 <도착지>로 은퇴하시지 않았나?’

‘그랬지. 그런데 또 무슨 시나리오래.’

‘<도착지> 성적도 별로였으면서.’

우감독의 시나리오를 읽지도 않고 혹평을 하는 사람들.

그 모습을 보고 한록은 우감독이 <도착지>가 마지막 작품이라고 말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하고 싶은 이야기를 모두 다 해서?

이제 더 이상 영화를 만들고 싶지 않아서?

‘아니, 거짓말이다.’

멋진 작품을 내지 못할 것 같아서.

그래서 사람들이 나를 실패한 감독으로 기억하는 게 두려워서.

과거에 그랬던 것처럼, 그리고 지금 한록에게 말한 것처럼, 우감독은 멋진 은퇴를 하고 싶은 게 아니었다.

그저 아무도 불러주지 않는 감독. 자신에게 쏟아질 비판. 그 초라한 마지막을 두려워하는 것이었다.

“적당히 관객이 들어오고, 그렇게 끝나면...그러면 만족하실 것 같습니까?”

한록의 질문에 흔들리는 우감독의 눈빛.

‘내 본심은 그게 아니다’라고 말하는것처럼, 우감독의 실이 한록을 향해 서서히 다가왔다. 우감독이 입을 열었다.

“사실은-”

사실은.

내가 진짜 원하는 건.

그리고 우감독이 자신의 진심을 말하려는 그 순간.

“선배님.”

서감독이 나타났다.

*

우감독이 한록에게 답하려는 순간 로비에 나타난 서감독. 서감독의 옆에는 최대리가 함께 있었다.

“선배님, 이과장님. 안녕하세요.”

“어, 안녕, 우감독.”

“선배님도 오늘 인터뷰 하시나요? 저만 하는 건 줄 알았는데.”

“인터뷰?”

“네. 시네 31이랑 하는 거요.”

“어...난 못 들었는데.”

시네 31. 영화 전문지와의 인터뷰란 말에 우감독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최대리가 둘의 대화에 답했다.

“아, 이번 인터뷰는 서감독님 단독입니다.”

“어...응. 같이 하는 게 아닌가 보네.”

“아, 네. 그럼 먼저 올라가 보겠습니다.”

그 말과 함께 엘리베이터로 향하는 서감독과 최대리.

서감독과 우감독의 대화는 짧았다. 하지만, 서감독과의 대화를 마친 후 우감독의 실은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 있었다.

‘설마...’

“아, 과장님. 말씀은 정말 감사하지만...역시 전 좀 부담스럽습니다.”

그리고 한록의 불길한 예감은 사실이 되었다.

영화 잡지와 인터뷰를 하러 간다는 서감독의 말. 자신에게는 오지 않았던 제안.

서감독의 말은 우감독에게 서감독과 자신의 격차를 일깨워 준 것이었다.

“과장님. 걱정 많이 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도착지>가 대상을 받을만한 영화는 아니에요.”

우감독이 웃으며 한록에게 마지막 말을 건넸다.

결국 <도착지>에 대한 마음을 바꾸지 않은 우감독.

하지만 한록에게 고맙다는 말만은 진심이었는지, 우감독의 실이 한록의 손을 살짝 어루만지고 사라졌다.

*

퇴근 후, 회사 1층의 카페에서 커피를 노려보고 있는 한록.

한록은 마지막까지 한록에게 다가오던 우감독의 실을 떠올리는 중이었다.

‘우감독님은 분명 미련을 가지고 있다.’

우감독이 정말로 소박한 은퇴를 바란다면, 그건 존중받아야할 일이다. 하지만 우감독이 원하는 게 그것만은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도착지>를 이대로 끝내고 싶지 않단 생각이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때 한록의 앞에 앉은 누군가.

“과장님. 퇴근 안 하세요?”

최대리였다.

‘최대리님이랑 서감독님만 없었으면...그때 우감독님이 마음을 바꿨을 수도 있었는데.’

최대리의 얼굴을 보니 아까 낮의 일이 떠오른 한록. 울컥 치밀어오른 아쉬움에 한록이 최대리에게 말했다.

“왜 하필 그 시간에 로비를 지나가신 겁니까?”

“예?”

“아뇨. 아무것도 아닙니다. 신경 쓰지 마세요.”

“오늘 왜 이러신대?”

한록을 살피던 최대리. 잠시 후, 최대리가 무언가 알겠다는 듯 말했다.

“아, 알겠다. 우감독님이 GV 안 하신대요? 낮에 그거 얘기하러 오신 거고?”

“...맞습니다.”

순식간에 오늘 있었던 일을 파악한 최대리. 최대리가 한록에게 물었다.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는데요?”

*

한록은 최대리에게 오늘 있었던 일을 설명했다.

‘그래. 서감독님을 봤다고 마음이 바뀔 정도면...어차피 제대로 설득이 된 건 아니다.’

말을 하다 보니 느껴진 건, 자신이 우감독을 제대로 설득하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그 자리에서 우감독이 솔직하게 ‘영화가 잘 됐으면 좋겠다’라고 말해도, 어차피 달라질 건 없다는 생각이었다.

우감독이 가지고 있는 두려움이 풀리지 않는다면 이 문제는 계속 되풀이 될 것이 뻔했다.

“음...”

한록에게 상황 설명을 모두 들은 최대리. 최대리가 무언가 생각하다가 한록에게 말했다.

“많이 아쉬우시면 그냥 밀어붙이면 안 되나요? 우감독님이 싫어하셔도 어쩔 수 없죠. 그냥 이게 제일 좋은 마케팅이라고 해요. 과장님이라면 그럴 수 있잖아요.”

최대리의 말처럼, 한록은 마음만 먹으면 우감독이 원치 않더라도 <수면>과 <도착지>의 라이벌 구도를 계속 이어갈 수 있었다. 최경준이 한록의 마케팅을 전폭적으로 지지할 테니까.

그러나 한록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감독님이 싫어하시는데 그럴 순 없죠.”

“그래도요. 아쉽다면서요.”

“우감독님이 경쟁을 해볼 의지 자체가 없으시잖아요. 이게 인터뷰나 GV에서 드러나면 라이벌 구도도 아무런 쓸모가 없을 거예요.”

“그럼 결국 우감독님의 마음을 바꿔야 한다는 건데...”

아까 전 한록이 그랬던 것처럼, 최대리 역시 테이블에 놓인 커피잔을 노려보기 시작했다. 잠시 후 최대리가 말했다.

“이건 어때요?”

최대리의 제안은 이랬다.

“우감독님이 저렇게 나오는 것도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거든요. 전작도 성작이 별로였고, 전전작도 별로였고. 사람들이 자기 영화를 좋아할 거란 확신이 없을 거예요.”

“그렇겠죠.”

“그럼 자기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는 걸 보여주면 되지 않을까요?”

꽤 설득력 있는 최대리의 말에 한록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도착지> 기대평을 모집중인데...그걸 보여드리면 좋겠네요.”

“그거 좋죠. 그리고 음...과장님말고, 좀 친분이 있는 사람이 설득하면 더 좋을 것 같은데...”

우감독과 친분이 있는 사람.

그 말에 바로 떠오르는 사람이 있었다.

“이은솔씨가 예전에 우감독님 영화의 OST를 부른 적이 있습니다.”

물론 그 영화도 흥행에 성공하진 못했다. 하지만 이은솔은 방송에 나와서 자주 그 영화에 대한 얘기를 하곤 했다.

자신의 영화를 좋아하는 누군가. 우감독의 말처럼 그런 사람을 보여주기에 이은솔은 아주 적합한 사람이었다.

“음...근데 이은솔씨는 지금 남한테 뭐라고 해줄 만한 상황이 아니지 않아요?”

최대리의 말처럼, 이은솔은 지금 당장 자신의 미래를 걱정해야하는 상황. 이은솔에게 남을 위로한 여유가 없는 것은 당연했다.

“이은솔씨와 직접적으로 대화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지만 한록의 생각은 좀 달랐다.

지금 우감독에게 필요한 건 대화나, 설득이 아니다. 그랬다면 오늘 낮 한록과의 대화에서 이미 마음을 바꿨을 테니까.

지금 우감독에게 필요한 건...

“감독님에게 확신을 줘야 합니다.”

이은솔의 긴 슬럼프. 우감독의 수많은 실패작.

그럼에도 모두가 그들을 실패했다고 생각하진 않는다는 것.

그럼에도 그들을 기다리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

바로 그 확신이었다.

그리고 추가 촬영의 내용은 바로 이은솔이 사람들 앞에서 <러빙 고흐>의 엔딩곡을 부르는 것.

자신을 기다리는 사람을 위해 두려움을 극복한 이은솔을 본다면 우감독에게 아주 좋은 자극이 될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결정했습니다. 우감독님을 촬영장에 초대해야겠어요.”

결정을 내린 한록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거면 감독님을 설득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확신이 담긴 한록의 말에 최대리가 답했다.

“혼자 결정할 거면 저한테 질문은 왜 하셨대요?”

*

수요일. <스타의 하루> 촬영이 있는 날.

“감독님, 현주씨.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과장님.”

우감독, 그리고 <도착지>의 주연배우인 오현주가 ENM의 건물에 나타났다.

‘<스타의 하루>요? 거기 저랑 현주씨가 나간다고요?’

‘비중이 큰 건 아니고, 그냥 ENM에 방문했다가 갑자기 마주친 정도로 나오실 겁니다. 이은솔씨가 감독님 저번 영화 OST를 불렀으니 나오실 명분은 충분합니다.’

‘그래도 너무 갑작스럽지 않나요?’

‘<도착지>의 인터뷰를 위해서 방문하신 거라고 하면 됩니다. 영화 홍보도 될 거예요.’

‘아...네. 알겠습니다.’

빠르게 섭외가 완료된 우감독과 오현주.

<스타의 하루>측도 오현주를 마다할 이유가 없었고, 추가촬영은 촬영 중간에 우감독이 우연히 촬영장에 방문하는 것으로 대본이 수정되었다.

그렇게 ENM에 모이게 된 우감독과 오현주, 그리고 최슬아와 이은솔.

오현주와 최슬아, 이은솔이 메이크업을 받으러간 사이, 우감독은 한록과 둘이 남아 촬영장을 지켜보고 있었다.

우감독은 TV출연이 오랜만인지 잔뜩 긴장한 듯한 얼굴이었다. 한록이 우감독을 지켜보다가 물었다.

“감독님. 저번주 <스타의 하루>도 보셨다고 하셨죠?”

“아, 네. 봤습니다.”

“어떠셨어요?”

“마음이 아팠죠. 분명 저번 통화에서는 곧 컴백할 거라고 했는데...”

아무래도 우감독은 이은솔은 나름대로 친분이 있는 사이 같았다.

‘...그렇다면...’

어쩌면 우감독은 이은솔의 상황에 생각보다 더 공감을 할 수도 있다. 한록이 그런 생각을 하며 신중하게 말을 꺼냈다.

“은솔씨가 이게 3년 만의 공연이라고 하더라고요.”

“...부담이 크겠네요. 그럼 실력 발휘가 안 될 텐데.”

“그렇죠. 사람들 반응이 안 좋을까 봐 걱정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 말에 우감독이 고개를 저었다.

우감독과 최슬아가 가진 같은 고민.

‘사람들에게 외면 받을까 봐 두렵다’는 생각.

우감독은 이제 그걸 다른 사람의 시선에서 바라보고 있었다.

“괜한 걱정을 하네요. 기다리는 사람이 더 많을 텐데요.”

“그렇죠. 그래도 완벽한 걸 바라는 사람들이 있으니까요.”

“완벽한 게 어딨어요. 은솔씨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을 거고, 그 사람들만 만족시키면 되는 건데.”

한록의 말에 우감독이 안타깝다는 듯 말했다. 한록은 그 말에 잠자코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아직 은솔씨의 노래를 사랑하는 사람이 있겠죠.”

이은솔이 모르는 것.

그리고 우감독도 모르는 것.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사랑받을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맞아요. 은솔씨의 노래를 들을 사람들은 그 사람들인데.”

“감독님.”

하지만 그래도 어딘가에는 그 사람을 기다리는 사람이 있고.

“<도착지>도 그럴 겁니다.”

그건 <도착지> 역시 마찬가지였다.

“누군가는 <도착지>를 보고 진부하다고 하겠죠. 누군가는 <수면>의 상대가 안 된다고 말할 거고요.”

메이크업이 끝났는지, 출연진들이 다시 촬영장에 나오기 시작했다. 한층 시끄러워진 촬영장 속에서 한록과 우감독 사이에만 고요한 공기가 흘렀다.

“하지만 누군가는 <도착지>가 좋은 영화라고 말할 겁니다.”

그 말에 아무런 말 없이 한록을 바라보는 우감독. 우감독이 한록에게 물었다.

“누가 그런 생각을 할까요?”

그리고 한록의 답.

“제가요.”

그 말에 한록에게 뻗어오는 우감독의 실과-

“촬영 시작합니다!”

김PD의 외침소리.

잠시 후, <스타의 하루> 마지막 촬영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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