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화. 어떤 은퇴를 바라느냐.
“다들 충분히 쉬셨죠? 이제 다시 한 번 해볼까요?”
현차장의 말과 함께 다시 시작된 회의. 우감독이 가장 먼저 말을 꺼냈다.
“투표 말고, 라이벌 구도를 부각할 다른 방법을 생각해봤습니다. 관객을 <수면>과 <도착지> 두 편으로 나눠서 관객토론 시간을 가지는 겁니다.”
서감독에게 많이 기가 죽었다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의욕적으로 나오는 우감독.
한물 갔다고는 하지만, 역시 정글 같은 연예계에서 20년을 버틴 사람다운 모습이었다.
“그거 좋네요, 선배님. 거기에 투표도 넣고요. 그럼 더 피 튀기겠어요.”
문제는 서감독이 한층 더 독이 올랐다는 것이었다.
“난 투표는 반대라니까.”
“전 하고 싶은데요.”
“그게 우리 영화랑 어울릴 것 같아?”
“애초에 <수면>이랑 <도착지>가 라이벌이란 것 자체가 안 어울리지 않나요?”
서감독은 웃는 얼굴로 할 말을 다 하고 있었다.
“어떻게 생각하세요, 과장님?”
한록에게 묻는 서감독. 한록이 서감독의 말에 답했다.
“전 잘 어울린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중요한 건 두 분의 의견이죠.”
짧게 말을 아끼는 한록. 한록 역시 할 말이 많았지만, 어쨌든 오늘 회의는 GV에 대한 감독의 의견을 받아보는 회의였다. 지금은 한록이 나설 자리가 아니었다.
“자, 저희 의견은 나중에 들으시고. 일단 두 분이 대화를 나눠보세요. 우감독님 더 할 말 있으신거 같은데?”
현차장이 다시 한 번 능숙하게 서감독의 말을 잘랐다. 현차장의 말에 우감독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배우들이 서로의 영화를 해석하는 건...”
“그럴 거면 굳이 감독 GV일 필요가 없죠.”
“아니면, 우리가 아는 감독들을 데려와서 심사위원으로 투표를 하는 건?”
“싫어요. 제가 왜 관객도 아니고 다른 감독님들한테 평가 받아야 하죠?”
그러나 서감독은 우감독의 기획을 전부 단칼에 잘라버렸다. 우감독이 서감독에게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얼굴로 물었다.
“왜 이렇게까지 하려는 거야? 이러다 우리 둘이 싸우겠어. 적당히 하면 안 될까?”
“전 원래 이 정도는 하려고 했어요.”
서감독이 이렇게까지 나오는 이유. 그건 한록에 대한 분노 때문만은 아니었다.
“2년 동안 잠도 안 자고 만든 영화고, 그만큼 잘 만들었어요. 그럼 할 수 있는 건 다 해봐야죠. 전 대상도 받을거고, 천만 관객도 달성할 거예요. <수면>이랑 같이 가고 싶으면 선배님이 맞추세요.”
‘난 좋은 영화를 만들었고, 그러니 할 수 있는 건 다 할 거다’란 말.
자기 영화에 대한 프라이드와 자신감, 그리고 독기가 느껴지는 말이었다. 그 말에 우감독은 대답이 없었다.
“...그래. 무슨 말인지 알겠다.”
서감독은 무례하게, 그리고 지나치게 공격적으로 나오고 있었다.
“할 수 있는 건 다 해야지.”
하지만 그런 서감독의 마음을 아예 이해할 수 없는 건 아니었다. 내 영화가 잘 됐으면 좋겠다. 그걸 위해선 뭐라도 할 수 있다. 그게 모든 감독들의 마음이니까.
“그럼 이대로 진행해요. 더 자극적으로 갈 수 있으면 좋고요.”
서감독의 질문에 우감독은 대답을 하지 못하고 망설였다.
“선배님.”
그런 우감독을 재촉하는 서감독.
“...지금은 대답을 못하겠다. 생각해볼게.”
그리고 우감독의 대답.
우감독의 대답에 서감독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되도록 빨리 답해주세요. 시간이 얼마 없으니까요.”
*
결국 그렇게 서감독의 일방적인 공격으로 끝난 회의.
두 감독을 배웅하고 다시 사무실로 올라온 현차장이 한록과 최대리에게 말했다.
“이거 합동 GV 자체가 어려울 수도 있겠는데?”
“그러게요. 감독님들끼리 의견 통일이 전혀 안 되네요. 다른 방법도 생각해야겠어요.”
현차장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최대리. 그러나 한록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투표도, GV도 좋은 아이템이 분명한데...'
한록의 입장에선 서감독이 제안한 투표도 꽤 매력적인 방법 중 하나였다.
모두의 주목을 받는 <수면>을 이긴 영화, 도착지.
그 타이틀 하나가 얼마나 강한 홍보효과가 되는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과장 생각은 어때?”
“전 GV는 꼭 진행해야 하고, 투표를 하는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흠...그러다 <도착지>가 크게 밀리면? 그렇게 되면 처음부터 <수면>에 졌다는 인식을 박고 가는 건데.”
“맞아요. 그리고 거기서 끝나는 게 아니죠. <도착지>가 투표에서 참패하면 둘의 라이벌 구도 자체가 성립이 안 될걸요. 그럼 여태까지 잡아온 라이벌 구도가 다 우스워지는 거죠.”
최대리의 지적은 사실이었다. GV와 투표에서 <도착지>가 <수면>에 크게 밀린다는 인상을 준다. 그렇게 되면 ‘라이벌 구도’라는 이번 마케팅 자체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었다.
‘<도착지>가 참패를 할 리는 없는데.’
하지만, 미래를 알고 있는 한록의 입장에서 아쉬운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회귀 전 <도착지>는 많은 관객이 든 영화는 아니었다.
하지만 300만 관객으로 제작비는 충분히 회수한, 실패작도 아닌 영화.
무엇보다 <도착지>는 상영이 종료된 후에도 사람들 사이에서 ‘좋은 영화’로 꾸준히 화자 되곤 했다.
영화관에서 볼만큼 거창하진 않은. 하지만 본 사람들이라면 ‘좋은 영화’였다고 말할만한 가족 영화.
한록은 <도착지>도 충분히 사람들에게 사랑받을 만한 영화라고 계속 생각해오고 있었다.
“저는 <도착지>가 GV에서 크게 밀릴 거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투표도 관객구성을 잘하면 동점은 아니더라도 비슷한 점수는 나올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건 저도 동의하는데...지금 우감독님 상황을 보면, GV가 제대로 진행될 것 같지가 않거든요. 애초에 우감독님이 <도착지>가 <수면>의 라이벌이 아니라고 생각하시잖아요.”
“응. 나도 그게 문제라고 봐.”
최대리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현차장.
“나도 <도착지>는 좋은 영화라고 생각하거든. 이과장이 맡았으니까 관객도 많이 들어올 것 같고. 근데 우감독님이 저렇게 나오면...시작부터 어려워지지.”
결국 문제는 우감독이 어떻게 나오느냐.
“이건 우리가 정할 문제는 아니고. 우감독님 얘기를 좀 기다려 봐야겠다.”
“네, 알겠습니다.”
그 말에 한록이 고개를 끄덕였다.
*
회의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려는 한록.
“이과장. 잠깐 얘기 좀 할까?”
그런 한록을 현차장이 불러세웠다.
한록이 자신의 자리 옆에 앉자 현차장이 입을 열었다.
“우리끼리 부탁 좀 해도 되나?”
“네. 말씀하세요.”
“<도착지> 말이야. <수면>이랑 라이벌 구도 말고, 다른 마케팅 방안도 좀 생각해놔야 할 것 같아.”
“GV가 없어도 라이벌 구도는 가져갈 수 있습니다. 그게 흥행에 더 도움이 될 거고요.”
“응. 그건 그런데...이거 우감독님 은퇴작이잖아. 그러니까, 이건 좀, 회사에서 할 말은 아니긴한데...”
어렵게 말을 꺼내는 현차장.
“관객이 덜 들어오더라도 멋있게 보내드리는 것도 좋을 것 같아서.”
현차장이 말하는 것은 바로 우감독에 대한 것이었다.
“<수면>이랑 라이벌 구도를 붙이면 관객은 더 많이 들어오겠지. <수면> 없이 가는 것보다 최소 두 배는 흥행할 거고. 근데 그렇다고 <도착지>가 <수면>에 이길 것 같지는 않거든. 사람들이 이 두 개를 진짜 라이벌로 받아들여 줄지도 모르겠고.”
예상보다 몇 배는 흥행한 영화. 하지만 라이벌인 후배 감독의 영화에 밀린 영화.
아니, 라이벌이 될 수도 없는데 마케팅 때문에 라이벌 구도로 붙여진 영화.
“나라면 <도착지>가 <수면>한테 참패하고 몇백만이 들어오는 영화가 되는 것보단, 그냥 관객은 적당해도 좋은 영화로 기억되는 게 더 좋을 것 같아.”
“...”
한록은 현차장의 말에 대답이 없었다. 현차장의 말도 나름의 일리가 있는 말이기 때문이었다.
“이게 그냥 영화면 당연히 관객수가 중요하지. 근데 은퇴작이니까. 손익분기점만 넘을 수 있다면 좋은 기억으로 끝내는 게 더 중요하지 않을까? 물론 이건 우감독님이랑 얘기해야 할 문제지만.”
영화계의 거물이라고 불리는 후배와 싸워서 참패하기보다는, 소박하더라도 박수를 받으며 떠나가고 싶다.
‘우감독이 어떤 은퇴를 바라느냐’에 대한 현차장의 생각이었다.
현차장의 말에 한록이 망설이다가 답했다.
“...네. 알겠습니다.”
현차장에게 진심으로 답하는 한록. 한록의 답에 현차장이 약간 놀란 얼굴로 물었다.
“웬일이지? 절대 안 된다. <도착지>는 대상을 받을거다. 이럴 줄 알았는데?”
“물론 그렇게 생각합니다.”
현차장의 말에 한록이 순순히 답했다.
“저는 <도착지>가 대상을 받을 수 있고, 그러지 못해도 좋은 평가를 받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모두가 아니라고 하지만, 한록은 <도착지>는 좋은 영화고, 그런 영화는 사랑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이건 우감독님이 결정할 문제니까요.”
하지만 그건 자신의 의견일 뿐.
어떤 방식으로 마지막을 맞이하고 싶은지는 결국 우감독이 선택할 문제라는 생각이 든 것이었다.
“그래. 아무튼 잘 끝났으면 좋겠네.”
한록의 말에 현차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
그날 밤, 집에 돌아온 한록은 침대에 누워 생각에 잠겼다.
회의 내내 망설이던 우감독의 목소리. 그리고 우감독은 멋진 은퇴를 바랄거라는 현차장의 말.
한록이 생각해도, 지금 우감독은 <수면>과의 라이벌 구도에 큰 부담을 느끼고 있는게 분명했다.
그리고 <도착지>를 대상으로 만들겠다는 건 우감독도 원치 않는 한록만의 욕심일수도 있었다.
‘...진짜 나만의 욕심인 걸까?’
하지만 한록이 계속 입장을 고수하는 이유가 있었다. 한록은 회사에서 가져온 <도착지>의 영상을 보며 회귀 전의 기억을 떠올렸다. 우감독이 은퇴를 하고 3년 정도가 지났던 시점이었다.
-어느날 ENM에 도착한 시나리오.
조금 옛날 스타일의, 하지만 능숙한 구성.
그리고 작가의 익숙한 이름...
그걸 보고 한록이 했던 생각.
그때 한록에게 문자가 하나 도착했다.
[과장님. 혹시 내일 시간 되십니까?]
우감독이었다.
*
다음날, 월요일 아침. 우감독이 다시 한번 ENM에 방문했다.
“이쪽으로 오시죠.”
한록과 우감독은 회의실로 향했다. 어제 서감독과의 미팅이 있던 회의실이었다.
화이트보드에 남은 어제 회의 흔적을 바라보는 우감독. 우감독이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과장님. GV는 못할 것 같습니다.”
우감독의 기권. 어제부터 모두가 걱정해오던 일이 현실이 되어 버렸다. 한록이 우감독에게 말했다.
“감독님. 투표는 객석을 어떻게 채우느냐에 따라서 결과가 크게 달라집니다. 그 부분은 크게 신경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투표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런 말씀 죄송하지만...<수면>과 라이벌 구도 자체가 없었으면 합니다.”
어제 현차장이 얘기했던 부분을 말하는 우감독. 한록은 설득 대신 우감독의 얘기를 기다렸다.
“과장님. 과장님이 맡은 영화를 다 봤습니다. 부산 영화제 때도 <삼일의 삶> 개봉 현장에 있었고, 이번 <스타의 하루>도 봤죠. 과장님이 얼마나 대단한지, 왜 그렇게 자신감이 있으신지 압니다. 그래서 저도 <도착지>를 맡겨보려고 했고요. 그런데 어제 대화하다 보니까 알겠습니다. 그건 말도 안 되는 얘기였죠.”
우감독이 차분하게 얘기를 이어나갔다.
“저도 서감독이랑 똑같은 생각을 합니다. <도착지>가 좋습니다. 정말 열심히 만들었고, 잘 만들었다고 생각하고, 잘 되길 바랍니다. 하지만 그건 제 바램일 뿐이죠. <도착지>는 절대 대상을 받을만한 영화는 아닙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처음으로 우감독의 말에 끼어든 한록. 한록의 말에 우감독이 살짝 미소를 보였다.
“그렇게 생각해주니까 정말 고마운데. 그래도 제가 더 잘 압니다.”
우감독이 한록을 바라보며 말했다.
“살다보면 느껴지지 않습니까. 내 한계는 여기까지라는 걸 깨달을 때가 있어요.”
우감독이 은퇴를 발표한 이유.
“나이는 들고. 영화 트렌드는 바뀌고. 관객은 줄어들고. 제작사에서 연락은 안 오고...그러다가 어느 날 대단한 영화를 봤을 때. 근데 그 영화의 감독이 서감독처럼 아주 젊은 사람일 때. 그럼 그때 알게 되죠.”
지금 우감독이 하는 말은-
[이제 내 시대는 지나갔구나.]
한록도 회귀 전 우감독의 인터뷰에서 읽은 적이 있는 말이었다.
“그래도 난 마지막 영화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영화에 자부심이 있어요. <도착지>는 내가 만든 영화 중 가장 좋은 작품이고, 자랑스러운 은퇴작품입니다.”
자신의 마지막을 말하는 우감독의 목소리는 마냥 어둡지만은 않았다.
서감독과는 조금 다른 종류의 자부심이 느껴지는 말.
한 분야에서 모든 노력을 해보고, 마지막을 결심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말이었다.
“그러니까 전 <도착지>에 멋진 마무리가 있었으면 합니다. 다른 작품이랑 비교당하고, 그래서 <도착지>가 깎아내려지는 건 원치 않아요.”
현차장의 예상은 정확했다. 우감독은 관객이 많이 드는 것보다는, 자신의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과 마지막 인사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더 큰 것 같았다.
‘그래. 이건 내 욕심이었구나.’
<도착지>를 올해 최고의 영화로 만들겠다. 모두가 사랑하고, 모두가 기억하는 영화로 만들겠다.
그게 아무래도 자신만의 욕심인 것 같다는 생각.
우감독의 말에 한록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좋아하는 영화들을 만든 사람. 우감독이 이렇게까지 나오는데 자기만의 의견을 강요하고 싶진 않았다.
“...네. 알겠습니다.”
한록의 대답에 우감독이 밝은 목소리로 답했다.
“물론, 그래도 관객은 되도록 많이 들어왔으면 좋겠어요. <수면> 얘기말고는 다 협조하겠습니다.”
“네. 저도 노력하겠습니다.”
“이것저것 신경쓰게 해서 죄송합니다. 과장님이 영화를 맡아주겠다고 하셔서 기뻤어요. 그래도 마지막 영화니까, 잘 됐으면 좋겠거든요.”
한록이 영화를 맡아줘서 기뻤다는 말. 그 말이 거짓말은 아닌 모양인지, 오늘 회의 내내 축 처져 있던 우감독의 실이 한록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바쁘실텐데 가보세요.”
그 말과 함께 우감독이 자리에서 일어났고, 한록은 우감독을 배웅하기 위해 함께 로비로 내려왔다.
“들어가보겠습니다.”
“네, 조심히 가세요.”
한록에게 인사를 하는 우감독과, 한록에게 다가오다가 아쉽다는 듯 멀어지는 우감독의 실.
그 실을 보던 한록이 우감독에게 진심으로 말했다.
“감독님. 전 정말 <도착지>가 대상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말에 반짝이는 우감독의 실.
“저도 그러길 바랬어요.”
그리고 무심코 나온 우감독의 진심과-
[어느날 ENM에 도착한 시나리오. 조금 옛날 스타일의, 하지만 능숙한 구성.
그리고 익숙한 작가의 이름.]
-이거 누구 시나리오야?
-아, 그거...
-우감독님이 보내셨어.
마지막을 말하던 감독이 다시 한번 보내온 시나리오.
“감독님. 마지막으로 묻겠습니다.”
한록이 우감독을 붙잡고 말했다.
“정말 여기서 끝이라고 생각하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