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 회사원이 선넘으면 생기는일-125화 (125/263)

125화. 해피엔딩이었다.

‘어떻게 될까.’

한록은 턱을 괴고 두사람의 발걸음을 지켜보았다.

<러빙 고흐>의 마케팅 초반부터 기획해 온 이 마케팅의 하이라이트.

1인 관람으로 전시회의 몰입감을 조성했고, 시청자에게 던지는 질문을 통해 고흐에 대한 관심을 만들었다.

이제 남은 건 이 휴게실에서 벌어지는 일들뿐.

고흐의 움직이는 그림이 얼마나 아름답게 연출되는지, 그리고 최슬아와 이은솔이 이 곳에서 어떤 대화를 하는지에 따라서 <러빙 고흐>의 결과가 결정될 것이었다.

[들어가자.]

그 말과 함께 휴게실의 문을 여는 최슬아.

휴게실의 문이 열리자마자 이은솔의 눈에 보인 것은 창문 너머로 고개를 숙이고 있는 고흐의 해바라기들이었다.

그리고 이은솔과 최슬아가 휴게실로 발을 들이는 순간, 어둠에 잠겨있던 해바라기가 둘을 바라보더니 하나하나 피어나기 시작했다.

해바라기를 닮은 강렬하고 매혹적인 노란색 조명이 휴게실을 가득 메웠고, 이은솔의 얼굴을 물들였다.

[헉...]

그 모습에 저도 모르게 숨을 들이키는 이은솔.

아무도 없는 고요한 미술관. 침묵에 잠긴 복도.

그리고 어둠 속에서 피어나는 태양을 닮은 꽃.

영화의 한 장면 같은, 아니 정말 영화의 한 장면에 라운지에서 방송을 지켜보던 모두가 숨을 죽이고 화면을 지켜보았다.

해바라기가 모두 피어나자, 이제 벽에 비치는 영상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이어지는 그림은 고흐의 대표작 <별이 빛나는 밤에>였다.

-Starry, starry night. Paint your palette blue and gray...

게다가 영상과 함께 흘러나오는 돈 매클린의 . 고흐에 대한 헌정곡이자, <러빙 고흐>의 엔딩 크레딧에 나오는 음악이었다.

[와...]

태양처럼 피어나는 해바라기. 눈앞에서 흘러가는 고흐가 그린 밤하늘과, 아름다운 음악.

그 앞에서 이은솔은 그저 감탄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와, 뭐야.”

“끝내주는데...”

“더 서울이면 직원 할인 있나? 한번 가볼까?”

“우리도 저런 거 해볼까?”

한록의 뒤에서 감탄하는 ENM의 사람들.

대화를 주고받으며 TV를 보던 사람들은 어느새 TV에 좀 더 가까이 다가오거나, 아예 근처 의자에 자리를 잡고 앉기 시작했다.

단순히 TV가 틀어져 있어서 보는 게 아니라, 정말 본인이 보고 싶어서 하는 행동들.

“다들 엄청 몰입했구만.”

현차장의 말처럼 사람들이 지금 이 장면에 완전히 몰입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한참이나 고흐의 반짝이는 밤하늘을 바라보던 이은솔이 최슬아에게 물었다.

[이거 뭐야? 그림이 왜 움직여?]

[아까 2전시실에서 봤던 영상 있잖아. 이것도 그것처럼 영화 영상이야. <러빙 고흐>.]

[이런 영화야? 그러니까, 그림이 움직이는 영화?]

[응. 고흐 그림으로 만든 애니메이션이야. 영화 내내 그림이 움직여.]

‘휴게실에 들어갔을 때, 이 영상이 <러빙 고흐>의 영상이란 걸 꼭 말해주세요.’

한록이 최슬아에게 얘기한 유일한 요구사항. 최슬아는 그 요구사항을 충실히 이행하고 있었다.

[며칠 전에 개봉했어. 난 보고 왔는데, 재밌더라.]

거기에 최슬아의 개인적인 감상까지.

“과장님. 지금 <러빙 고흐> 검색어 순위 10위로 올라왔어요.”

‘됐다.’

사람들은 이제 <러빙 고흐>에도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진짜 <러빙 고흐>가 검색어에 오르네요. 전 솔직히 어려울 거라고 생각했어요.”

하대리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 말했다.

제작비 60억, 한 시간 반짜리 애니메이션 영화 <러빙 고흐>. 과거에는 불과 50만명이 봤던 영화.

그 영화가 지금 이 순간만큼은 한국에서 가장 주목받는 영화가 되었다.

“또 기록 하나 나왔네요.”

안도의 한숨을 쉬는 하대리. 하대리는 처음 TV 앞에 앉을 때와는 달리 긴장이 많이 풀린 얼굴이었다.

그러나 한록은 여전히 집중해서 TV를 보고 있었다. 그건 현차장 역시 마찬가지였다.

“여기서 만족하면 안 되지, 하대리.”

현차장의 말처럼, 아직 한록과 현차장이 기다리고 있는 장면이 남아있었다.

“검색어 순위도 올라오고, 지금 <부산 열차>에 이어서 예매율 2위인데...뭐가 더 있어요?”

하대리의 말에 한록이 입을 열었다.

[은솔아. 요즘 좀 어때?]

화면 속에선 최슬아가 머뭇거리면서 이은솔에게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대본도, 연출도 없는 이 에피소드의 마지막 장면.

사람들이 이 두 사람의 얘기를 사랑하고, 팬이 되고, 그래서 <러빙 고흐>를 보러올 수 밖에 없게 만들 장면.

“엔딩이 남아있잖아요.”

오늘의 엔딩이 남아있었다.

*

[요즘 좀 어때?]

누구보다 열심히 활동했지만, 번아웃과 슬럼프 때문에 3년이나 방송을 중단하고 어떤 작업물도 내지 못하는 이은솔.

그런 이은솔에게 최슬아가 친구로서 묻는 말.

[그냥 똑같지.]

최슬아의 질문에 이은솔이 짧게 답했다. 그 말에 최슬아가 머뭇거리며 말했다.

[이 노래 좋지?]

[응. 나 원래 좋아하는 노래야.]

[나 너한테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뭔데?]

[<러빙 고흐> 보면서 네가 이 노래를 불러보면 좋겠다고 생각했거든. 내가 편곡하고, 네가 부르고. 어때?]

‘나랑 같이 해보자.’ 오랜 방황을 겪고 있는 오랜 친구를 위한 최슬아의 제안.

-최슬아가 이은솔에게 함께 작업을 하자고 말한다.

<러빙 고흐>의 엔딩곡이라는 구체적인 내용이 추가되었을 뿐, 최슬아가 <스타의 하루>에 섭외되었을 당시 미리 제안했던 내용이었다.

이은솔 역시 이 내용을 대본으로 받아 미리 알고 있었으며, 이 뒤에 나올 장면 또한 정해져 있었다.

-최슬아의 제안에 망설이는 이은솔. 최슬아가 이은솔을 위로하고, 이은솔은 마음을 다잡고 번아웃을 극복한다.

최슬아의 제안에 망설이는 장면.

이제 나올 장면은 그래야 했다.

[나는...]

‘나는 못하겠어.’

그리고 그 말을 하기 위해 입을 여는 순간, 이은솔은 깨달았다.

‘이제 어떻게 노래를 했는지 도저히 기억이 안 나. 아무것도 하기 싫어. 그냥 쉬고 싶어. 내가 잘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

이건 대본에 있는 말이 아니다.

[나는 못하겠어.]

정말 자신의 진심이었다.

*

[나 지금은 아무것도 못하겠어, 슬아야. 내가 이 일을 더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어.]

최슬아에게 아주 솔직하게 답하는 이은솔.

이제 대본대로라면 최슬아가 이은솔에게 용기를 줘야할 타이밍이었다.

‘아냐, 넌 할 수 있어.’

‘잘 될 거야.’

‘지나고보면 별 거 아니야.’

‘조금만 더 힘내자.’

처음에 대본에 쓰여있던 말들.

‘이게 무슨 의미가 있지?’

그리고 대본을 보며 한록이 한 생각.

*

일주일 전, 김PD가 건네준 대본을 넘겨보던 한록.

대본 속에서 번아웃을 겪는 이은솔을 보고 있자면 떠오르는 사람들이 있었다.

유선, 현차장, <식물>의 박감독. 나이도, 직업도 다르지만 각자의 위치에서 벽을 만났던 사람들이었다.

비록 연예인이라는 화려한 삶을 살고 있지만, 이은솔이 겪고 있는 슬럼프가 이들과 다를 거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누구에게나 자신의 일에서 도망치고 싶은 순간은 생기기 마련이니까.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계속해서 의문이 들었다.

‘이런 말을 사람들이 좋아할까?’

<스타의 하루>의 마지막 장면은 사람들이 최슬아와 이은솔의 얘기를 사랑할 수 밖에 없도록 만들어야 한다.

이들이 너무 좋고, 이들의 얘기가 좋기에, <러빙 고흐>마저 보고 싶게 만들어야 한다. 그게 PPL의 핵심이었다.

‘사랑할 수밖에 없는 등장인물들. 사랑할 수밖에 없는 얘기들.’

한록이 원하는 <스타의 하루>의 결과물.

그런데 이런 대본으로는 턱없이 부족하단 생각이 들었다.

정말 최슬아는 이렇게 말할까.

정말 이은솔이 이런 말을 바랄까.

정말 사람들이 이 방송을 보고 감동을 느낄까.

‘정말 사람들이 힘든 순간에 소중한 사람한테 듣고 싶은 말이 이걸까?’

최슬아와 이은솔. 아니, 당장 우리 주위의 사람들이 겪고 있는 일.

그 사람들이 하고 싶은 말은, 듣고 싶은 말은 대체 뭘까.

-어떻게 해야 사람들이 이 얘기를 사랑하게 될까?

며칠 동안 생각하고 나니 드디어 그 답을 알 수 있었다.

‘그건 아무도 모른다.’

여기 들어갈 말은 누군가 짐작해서 하는 말이 아니라, 정말 최슬아가 이은솔한테 하고 싶은 말이어야 한다.

그게 아니라면 사람들에겐 아무것도 전달되지 않을 것이다.

‘이 장면부터 대본은 없습니다.’

그래서 한록은 대본을 없애자고 제안했다.

한록의 말에 최슬아는 많이 놀란 얼굴이었다.

‘그럼 무슨 말을 하나요?’

그리고 그 답.

‘하고 싶은 말을 하세요.’

다른 사람은 아무도 모르는, 최슬아만 아는 말. 정말 소중한 사람에게 하고 싶은 말.

‘최슬아씨가 이은솔씨한테 해주고 싶은 말이요.’

대본으로는 만들 수 없는. 최슬아와 이은솔 둘만이 만들 수 있는 얘기.

한록이 보여주고 싶은 얘기는 바로 그것이었다.

사람들이 듣고 싶은 말. 사람들이 좋아하는 등장인물. 그리고 사람들이 사랑할 수밖에 없는 얘기.

‘과연 내가 그런 얘기를 만들었을까?’

한록이 바라는 엔딩.

[이제 어떻게 해야할 지 모르겠어.]

이제 <러빙 고흐>의 운명을 결정짓는 엔딩이 시작되고 있었다.

*

[이제 어떻게 해야할 지 모르겠어.]

이은솔의 말에 최슬아는 아무런 답이 없었다.

이은솔은 지금 정말로 괴로워하고 있었다. 자신도 그런 적이 있기 때문에 잘 알 수 있었다.

어느 날 갑자기 출근을 하는 순간 느껴지는 생각. 아니, 아주 오랫동안 알고 있었지만 외면해오던 생각.

‘힘들어.’

매일, 열심히, 힘을 내서 일하는 삶.

이제 더이상 그렇게는 못 살겠다고 느끼는 순간들이 있다. 최슬아 역시 겪어 본 적 있는 일이었다. 그걸 눈앞의 친구가 겪고 있다.

그런데 도저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최슬아는 며칠 전 김PD와의 대화를 떠올렸다.

‘이 부분은 대본 없이 가기로 했어요. 알고 계시죠?’

‘네. 얘기 들었어요.’

‘무슨 말 하실 거예요?’

‘어...’

김PD의 질문에 제대로 답을 하지 못했던 최슬아. 최슬아의 망설임에 김PD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말했다.

‘생각나는 게 없으시면 대본을 따라가는 것도 좋죠.’

재계약 얘기에 ‘대본 없이 가자’고 결정이 나긴 했지만, 김PD는 은근히 최슬아가 대본을 따라주길 바라고 있었다.

최슬아 역시 그걸 느꼈고, 김PD의 말처럼 떠오르는 말도 없었다.

‘대본에 있는 그대로 갈 것 같아요.’

그래서 촬영 전날 대본을 따르기로 결정한 최슬아.

그런데, 막상 눈앞의 친구를 보니 도저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잘 될거야.’ ‘아무것도 아니야.’ ‘힘내.’

최슬아도 믿지 않는, 지금 이은솔에게는 아무런 위로가 되지 않는 말들.

그리고...

‘하고싶은 말을 하세요.’

그때 한록이 했던 말.

‘이제 알겠다.’

최슬아는 이제야 한록이 무슨 말을 했는지 알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지금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은솔아. 이 영화를 보면서 네 생각이 많이 났어. 그래서 너랑 보고 싶다고 생각했어.”

그리고 듣고 싶었던 말은.

“이 영화에 이런 말이 나오거든. 아주 강한 사람도 삶 앞에서는 무너지기 마련이다. 그렇다고 그게 그 사람의 잘못은 아니다.”

살다 보면 누구나 벽을 마주할 수 있다는 말. 자기도 그랬고, 누구라도 그럴 거라는 말. 그게 이은솔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는 말.

그러니...

“지금이 아니라도 좋아. 꼭 같이 노래를 만들지 않아도 좋고.”

그러니까. 잘하고 있지 않아도 좋고, 열심히 하지 않아도 좋으니까.

“난 계속 기다릴 수 있어.”

언제까지라도 곁에 있겠다는 말.

김PD도, 한록도, 작가도, 그 누구도 대본에 쓸 수 없는 말이었다.

대본으로는 나올 수 없는, 정말 아주 소중한 사람에게만 할 수 있는 말. 한록이 준비한 오늘의 엔딩.

준비했던 건 모두 끝났다. 이제 한록이 할 수 있는건 없고, 그저 사람들이 이 얘기를 좋아해주길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내 얘기가 받아들여지길, 그리고 사람들에게 사랑받길 바라는 마음.

마치 영화의 개봉을 기다리는 감독이 된 것 같은 마음이었다.

‘사람들은 이 말을 어떻게 생각할까.’

‘이은솔과 최슬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까.’

‘내가 만든 이 얘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까.’

한록의 생각.

그리고-

“...좋다.”

라운지에 있던 누군가의 대답.

*

최슬아의 말에 이은솔이 고개를 들었다. 한참 동안 <러빙 고흐>의 영상을 바라보던 이은솔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나랑 이 영화가 보고 싶었어?”

“응.”

눈앞에서 움직이는 고흐의 그림. 아름다운 음악.

그리고 언제까지나 자신을 기다리겠다는 친구.

“그럼 우리...”

다음엔 같이 곡을 만들자. 그런 말을 할 순 없었다. 하지만 하고 싶은 말은 있었다.

내일도, 모레도, 그 다음 날도. 하루하루는 여전히 힘들고 희망도 보이지 않겠지만. 그래도.

“내일은 영화 보러 가자.”

네가 곁에 있다면 괜찮아.

*

이은솔의 대답. 그리고 최슬아의 미소로 끝난 <스타의 하루> 최슬아 파트.

“큼.”

다음 파트로 넘어가자, 라운지 여기저기서 헛기침을 하는 소리가 들렸다.

둘의 대화에 울컥한 사람들이 목을 가다듬는 소리였다.

그리고 현차장의 붉어진 눈시울과-

“우리도 저거 한번 보러 갈까?”

누군가의 말.

사람들은 최슬아와 이은솔의 얘기에 깊게 빠져들고 있었다.

-당신들이 궁금해서 미칠 것 같은, 다음이 보고 싶은, 결말을 알고 싶은, 응원하고 싶은, 그리고 사랑할 수밖에 없는 얘기들을 보여주겠다.

-그래서 이 영화를 보러오게 만들겠다.

<러빙 고흐>를 담당하기 시작했을 때 한록이 했던 다짐. 이제 그 결과가 드러나고 있었다.

한록이 옆자리의 유선에게 물었다.

“유선씨. 반응은 어때요?”

“아, 잠시만요!”

한록의 말에 유선이 눈물을 살짝 닦고 노트북을 확인했다.

유선의 노트북에 떠 있는 수많은 화면들과, 그 속에서 얘기를 주고 받는 사람들.

해바라기 광고. 1인 관람. 그리고 오늘 최슬아와 이은솔의 대화를 지켜봤을 사람들.

‘이 얘기는 사람들이 사랑할 만한 얘기였을까.’

그들에게 오늘의 에피소드는 과연 어떻게 기억될까.

“네이버 검색어, 카페 검색어, 실시간 뉴스 키워드. 이은솔이 1위예요. <러빙 고흐>는 4위구요. 그리고 CKV 영화순위는...”

유권호, 최슬아, 이은솔이 나오는 한록의 대본 없는 드라마. 그 드라마의 결말은-

“2위 <부산 열차>.”

“1위는 <러빙 고흐>예요.”

해피엔딩이었다.

126화. 두분이 열심히 싸울수록 사람들은 좋아할 테니까.

그 시기 가장 사랑받는 영화만 차지할 수 있다는 예매율 1위.

“1위다! <부산 열차>를 제쳤어!”

그 사실에 현차장이 자리에 일어나서 주먹을 쥐고 외쳤다.

“이럴 줄 알았어! 너무 감동적이잖아!”

라운지의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현차장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현차장은 <러빙 고흐>의 활약에 그런 건 신경도 쓰이지 않는 듯한 모습이었다.

하대리가 당황하며 현차장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차장님, 차장님. 앉으세요. <부산 열차>도 저희가 한 거잖아요.”

“헛.”

그 말에 정신이 돌아온 모양인지 현차장이 행동을 멈췄다. 그리고 주위를 둘러보다가 조심히 자리에 앉으며 변명을 하듯 말했다.

“아니, 너무 감동적이니까...”

아무래도 현차장은 <부산 열차>보다는 <러빙 고흐>가 훨씬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스타의 하루> 가편집본을 보면서 눈물을 흘리던 현차장이니, 그런 마음이 이해가 안 가는 것도 아니었다. 한록이 현차장에게 웃으며 물었다.

“차장님은 <부산 열차>보다 <러빙 고흐>가 더 좋으신가 봅니다.”

“<부산 열차>는 너무 징그럽잖아. 우리 팀 영화니까 겨우 본 거지.”

“최감독님이 이거 들으면 서운해하시겠어요.”

“헉. 안돼. 이건 비밀이야. 알았지?”

“생각해보겠습니다.”

“이과장!”

현차장에게 장난을 치며 유선의 노트북을 받아든 한록.

아무래도 <러빙 고흐>가 마음에 든 건 현차장만이 아닌 모양이었다.

[방금 최슬아가 말한 영화가 뭐였죠? 아시는 분?]

[오늘 내용 너무 감동이네요. 둘이 영화보러 가는 것도 나오면 좋겠어요~]

[이번 <스타의 하루> 좋았던 사람들은 <러빙 고흐>도 꼭 봐ㅠㅠㅠ]

<스타의 하루>를 통해 사람들에게 주목받기 시작한 <러빙 고흐>. 한록의 말처럼, 최슬아와 이은솔의 얘기를 지켜본 사람들은 이제 <러빙 고흐>에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사람들의 뜨거운 관심. 예매율 1위. 예상처럼 좋은 반응을 보여주고 있는 <러빙고흐>.

그러나 아직 한록이 기다리고 있는 게 하나 더 있었다.

‘지금이...’

시계를 확인하는 한록. <스타의 하루> 최슬아편이 끝난지는 10분 정도가 지났다.

‘곧 오겠군.’

한록이 기다리는 연락은 머지 않아 도착할 게 분명했다. 그렇게 생각하며 ‘더 서울’과 연락을 주고 받던 한록.

5분 후, 마침내 한록이 기다리던 연락이 도착했다.

[과장님, 추가 촬영 진행합시다!]

김PD였다.

[과장님 말이 맞았어요. 지금 시청률 역대 최대입니다. 무조건 다음주 안에 내보내야 합니다!]

이제 한록보다 더 추가 촬영을 원하는 김PD. 기다리던 연락에 한록이 미소를 지으며 유선에게 속삭였다.

예능. 추가촬영. 걱정하던 오늘의 일이 모두 무사히 끝났다.

그렇다면 이제 한록이 해야할 것은-

“이제 퇴근합시다.”

즐거운 퇴근 뿐이었다.

*

다음날. 토요일임에도 불구하고 추가촬영 회의를 위해 회사로 출근한 한록.

[은솔이랑 영화보러 가기로 했어요. 다음주 <스타의 하루>에서 확인하세요! #러빙 고흐 #스타의하루]

최슬아의 게시글 덕분인지 <러빙고흐>는 아직도 예매율 1위를 차지하고 있었고, 인터넷의 반응도 그대로였다.

“과장님, 저 진짜 놀랐어요. <러빙 고흐>가 예매율 1위라니. 과장님이라면 애국가를 틀어도 예매율 1위로 만들 수 있을 것 같아요.”

한적한 사무실에서 한록에게 말을 거는 사람. 최대리였다.

최대리가 한록에게 말했다.

“근데, 이 추세로 가면 한 300만 정도지 않을까요? 남은 200만은 어떻게 할 거예요?”

“이런 영화는 개봉 후반부로 가도 관객수가 떨어지지 않습니다. 입소문을 타면 관객수는 더 높아질 거예요.”

“아무리 그래도 350만 정도가 한계일 것 같은데.”

“아깐 제가 마케팅하면 애국가도 1위로 만들 수 있다면서요?”

“과장님이 대단한 건 대단한 거고. 500만이 어려울 것 같다는 건 현실적인 예측이죠.”

애초에 <러빙 고흐>의 관객수를 50만 정도로 예상했던 최대리. 최대리는 추가 촬영에 대해서 알지 못했고, 그래서 <러빙 고흐>가 500만을 달성하지 못할 것이라 생각 하는 듯 했다.

“그럼 우리 내기할까요? 넘는지, 안 넘는지.”

“대가는요?”

“<도착지>랑 <수면> GV회의 때 상대방 말에 절대 반박하지 않기요.”

추가 촬영에 대해 얘기해주는 대신, 최대리에게 장난을 거는 한록. 그러자 최대리가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앗. 과장님이 이럴 땐 자신감이 있단 거잖아요. 절대 싫어요.”

아쉽게도 최대리는 눈치 빠르게 한록의 계략을 파악해버렸다. 최대리가 한록의 곁에 앉으며 말했다.

“안 그래도 GV 때문에 할 말이 있었어요. 서감독님 GV 하신대요.”

“벌써요?”

<도착지>와 <수면>의 공동 GV를 진행하려던 한록.

라이벌 구도는 언제나 사람들의 뜨거운 관심을 불러오는 소재였고, 한록은 그를 통해 <도착지>와 함께 연말 시상식까지 사람들의 관심을 이어갈 생각이었다.

“서감독님 섭외가 제일 어려울 거라 생각했는데요. 의외로 마음에 들어하셨나 봅니다.”

하지만 최대리는 서감독이 <도착지>와 얽히는 걸 좋아하지 않을 거라고 말했고, 한록 역시 그에 동의했다.

<수면>은 개봉도 전에 이미 사람들에게 주목을 받고 있는 영화였고, 우감독과 같은 급으로 묶이기에 서감독은 너무 거물이었으며-

“아뇨. 자기가 왜 우감독님이랑 이런 걸 해야 하냐고 하시던데요.”

너무나 싸가지가 없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어쨌든 서감독을 잘 구슬러서 허락을 받아온 최대리. 한록이 최대리에게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그럼 어떻게 설득하셨습니까?”

“대신 마케팅 효과는 확실할 거라고 말했죠. 그리고 과장님을 좀 팔았어요.”

“저를요? 어떻게요?”

“서감독님이 과장님한테 이를 갈고 있잖아요. 이건 우감독님을 상대로 하는 게 아니라 과장님이랑 싸우는 거라고 말했죠.”

최대리의 솔직한 말에 한록이 어이가 없어 웃음을 터뜨렸다.

자신은 상상도 못할 방법. 하지만 그 내용이 어찌됐든, 최대리의 전략은 아주 잘 먹혔고 결국 서감독을 설득해왔다.

‘정말 웃기는 사람이다.’

자신과는 정말 다른, 하지만 그만큼 관심이 가는 사람. 한록은 최대리가 왜 꾸준히 자신에게 관심을 보였는지 알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한록이 최대리에게 물었다.

“그랬더니 뭐래요?”

“뭐라더라...”

서감독의 말을 떠올리는 최대리. 최대리가 잠시 후 말했다.

“‘그럼 어디까지 공격해도 되냐’고 했어요.”

오만함이 가득 담긴 서감독의 말.

누구나 인정하는 천재 영화감독. 그런 자신의 영화를 거절한 한록을 가만두지 않겠다는 듯한 말이었다.

“그래서 뭐라고 하셨어요?”

“할 수 있는 만큼 해보시라고 했죠. 두분이 열심히 싸울수록 사람들은 좋아할 테니까.”

최대리의 말이 맞았다. 감독 둘이 서로의 영화에 대해 비평하는 GV. 이 GV가 치열하면 치열할수록 사람들은 <도착지>와 <수면>에 더 큰 관심을 보일 게 분명했다.

그렇다면...

“저도 그래도 되죠?”

한록 역시 이 기회를 놓칠 마음은 없었다.

한록에게 살벌한 적의를 보이는 서감독. 그리고 그런 서감독의 도전을 받아주겠다는 한록.

영화계에서 소문이 난 두 싸움꾼 사이에 낀 최대리가 즐겁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래야 재밌죠.”

*

최대리마저 퇴근을 해버린 저녁 7시. 한록은 사무실에 혼자 남아 앞으로의 계획을 점검하고 있었다.

‘<러빙 고흐>는 다음주 추가촬영까지 공개되면 500만은 달성할 거고. 이제 <도착지>에 집중해야 할 때인데...’

<도착지>를 연말 시상식에서 대상으로 만들겠다고 다짐한 한록.

하지만 한록 역시 <도착지>가 대상을 받을 것이란 확신은 없었다. <수면>이라는 쟁쟁한 영화가 앞에서 버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그것만이 아니었다.

‘이런 영화는 보통 집에서 보지.’

<도착지>는 할머니와 가족들의 사랑을 다룬 가슴 따뜻한 가족영화였고, 당연히 멋진 액션이나 CG 같은 건 없었다.

<수면>을 제외하고서라도 <도착지>가 대상을 받으리란 보장은, 아니 많은 관객을 동원할 수 있으리란 보장도 없는 상황.

‘GV말고 다른 마케팅도 필요하다.’

<수면>과 함께하는 GV는 그저 사람들에게 <도착지>를 알리는 수단일 뿐이다. <도착지>가 정말 대상을 받기 위해선 여기에 추가적으로 사람들이 영화관으로 나올 이유가 필요했다.

‘어떤 방법이 있을까.’

생각에 잠긴 한록.

그때 한록의 핸드폰이 울렸다. 김PD였다.

[과장님. 저희 곧 도착합니다.]

<스타의 하루>의 추가촬영은 최슬아와 이은솔이 <러빙 고흐>를 관람하는 것이었고, 촬영이 가능한 영화관이 필요했다.

그래서 CKV 내부의 상영관에서 촬영을 진행하기로 한 상황. 그리고 오늘은 촬영을 위한 리허설이 있는 날이었다.

“네. 로비에서 기다리겠습니다.”

한록이 김PD의 전화에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

“안녕하세요. 이쪽으로 오시면 됩니다.”

로비에서 김PD와 <스타의 하루> 제작진, 그리고 이은솔을 만난 한록. 한록이 상영관으로 사람들을 안내했다.

“저희 동선 좀 보겠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제작진은 상영관에 카메라를 설치하기 시작했고, 한록은 이은솔과 함께 상영관 뒤편에서 제작진을 지켜보았다.

최슬아는 스케줄 때문에 한시간 뒤에 도착한다고 말했고, 한록은 매니저도 없이 혼자 다니는 이은솔과 단 둘이 남겨진 상황. 한록이 어색한 분위기를 깨기 위해 이은솔에게 물었다.

“...물이라도 드시겠습니까?”

“아, 아뇨. 괜찮아요.”

이은솔 역시 어색한 건 마찬가지인지, 한록의 제안에 얼른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그 뒤로 한참동안 아무런 대화가 없던 둘. 침묵을 견디지 못한 이은솔이 한록에게 말을 건넸다.

“그...대본 없이 간 것 때문에 방송 반응이 좋았던 것 같아요. 처음엔 많이 놀랐는데...”

한록과의 두 번째 만남을 떠올리는 이은솔.

한록은 이은솔과 최슬아에게 ‘대본 없이 가자’고 얘기했고, 그때 이은솔이 한록에게 가졌던 생각은 한가지였다.

‘이 사람, 대체 무슨 생각이지?’

언제나 철저하게 대본 아래서 움직이는 방송계.

사람들이 사실을 그대로 담는다고 믿는 예능이나 뉴스, 다큐멘터리마저 제작진이 원하는 장면을 찍기 위한 대본이 있고, 출연자는 제작진이 원하는 그 장면을 찍기 위해 연기를 한다.

하지만 한록은 방송의 가장 중요한 파트인 엔딩에서 ‘대본 없이 가자’고 제안했다. 그리고 이은솔은 처음부터 계속 그 이유가 알고 싶었다.

“왜 대본 없이 가자고 하셨던 건가요?”

이은솔이 한록에게 참아오던 질문을 던졌다.

“처음 대본이 마음에 안 들었거든요.”

한록의 답에 이은솔은 처음 받아봤던 대본을 떠올렸다. ‘힘내’. ‘잘 될거야’. 그런 말이 적혀 있던 첫 대본.

많은 사람들이 이은솔에게 한 말이었고, 그 사람들 역시 좋은 마음으로 한 말이란 걸 이은솔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아무런 감흥이 들지 않는 말이었다.

“그건 은솔씨한테 필요한 말들이 아닌 것 같았거든요.”

그리고 자신에게 다른 말을 해주고 싶었다는 한록의 대답.

누군가를 진심으로 위로해본 적이 없다면 할 수 없는 생각이었다.

‘...신기하네.’

한록의 답에 생각에 잠긴 이은솔.

분명 한록을 만나지 몇 번 되지도 않았는데, 이 사람이 아주 다정한 사람이란 생각이 들었다.

“두분 덕분에 에피소드가 잘 나왔어요. 감사합니다.”

“아...네. 슬아가 정말 잘해줬죠.”

한록의 말에 이은솔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그러나 이은솔의 말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음...”

이은솔은 아무래도 무언가 더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눈치였다. 한록은 잠자코 이은솔의 말을 기다렸다.

그러나 이은솔은 계속 말이 없었다. 그때 멀리서 김PD가 이은솔을 불렀다.

“은솔씨, 화면 좀 체크하겠습니다!”

“네!”

그 말에 김PD에게로 향하는 이은솔. 한록이 김PD에게 뛰어가는 이은솔의 뒷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할 말이 있는 것 같았는데. 내 착각이었나?’

그렇게 생각한 순간, 이은솔이 뒤로 돌아 한록을 바라보았다.

“저도 감사합니다.”

그리고 작지만 분명한 목소리로 말했다.

127화. 다음 영화는 또 저한테 부탁하실 거란 말이군요.

“...제가 뭘 했다고요.”

한록은 이은솔의 말에 머쓱한 얼굴로 말했다.

자신이 한 것은 그저 대본 없이, 최슬아가 자유롭게 얘기할 수 있도록 내버려 두자고 제안한 것뿐이었다.

“과장님 말씀이 맞아요. 저도 대본에 있는 얘기를 듣고 싶진 않았어요.”

“제가 얘기한 건 대본을 없애자는 것 뿐이었습니다. 정말 중요한 건 두 분이 하신 거죠.”

“그건 그렇죠.”

한록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이은솔.

“그래도 전 감사했어요.”

그리고 이은솔은 그 말을 마지막으로 김PD에게 가버렸다.

‘...’

이은솔의 뒷모습을 지켜보는 한록.

‘감사를 받을 사람은 내가 아닌데.’

자신은 그저 <러빙 고흐>를 위해 일을 했을 뿐이다.

대본 없이 촬영을 진행하자고 말한 것도 사람들에게 <러빙 고흐>의 메시지가 제대로 전달되길 원해서였지, 대단히 이은솔을 걱정하는 마음으로 제안을 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은솔의 말이 무슨 뜻인지는 알 것 같았다.

살다 보면 정말 누군가의 이해가 필요한 순간이 있기 마련이니까.

‘이런 것도 나쁘지 않네.’

여전히 얼떨떨한 기분. 그래도 솔직히 말하자면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아니, 자신은 그저 일을 했을 뿐이지만 그걸로 누군가가 위로를 받았다. 그렇다면 그것도 나름대로의 보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의 손목에 묶인 실을 바라보는 한록.

윤감독. 유선. 최대리. 현차장....

회귀 후 자신을 도와줬던 사람들. 그리고 자신이 도와줬던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그들 역시 일을 하며 만난 사람들이었다.

아주 사소한 일로 누군가를 미워하고, 그만큼 작은 일로 누군가를 좋아하고, 또 생각지도 못한 일로 누군가에게 감사를 받는 것. 이전 생에서는 절대 알지 못했던 회사생활의 한 모습들이었다.

'나도 많이 달라졌구나.'

회귀 후 달라진 자신을 볼 때마다 새삼스레 드는 생각. 그런 생각에 한록은 다시 한번 마음 속으로 속삭였다.

‘내일도 열심히 일하자.’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서.

‘그리고 조금 더 좋은 사람이 되자.’

또 누군가의 마음에 닿을 수 있게.

*

그리고 다음날. 일요일이어서 인적이 드문 회사에 출근을 한 한록. 사무실에는 현차장과 최대리만이 있었다.

“과장님. 표정이 왜 그러세요?”

최대리가 한록의 굳은 얼굴을 보고 물었다.

“어제 잘못된 다짐을 한 거 같아서요.”

“무슨 다짐을 했는데요?”

“열심히 일하자고...”

‘열심히 일하자’고 다짐한 게 불과 12시간 전이다.

그런데 토요일에 이어 일요일까지 회사에 나오니, 그 마음은 순식간에 빛을 잃었다.

“무슨 그런 다짐을 토요일에 해요. 그런 건 수요일쯤에 하고 금요일에 잊는 거죠.”

“맞는 말입니다.”

심각한 얼굴로 쓸데없는 얘기를 하는 한록과 최대리.

“이과장. 열심히 할 거면 혼자 열심히 하란 말이야. 왜 나를 부른 거야...”

그리고 주말 출근이란 고통에 축 늘어진 현차장까지.

오늘 한록과 최대리, 그리고 현차장이 회사에 출근한 것은 <수면>과 <도착지>의 GV 때문이었다.

서감독도 GV에 참여하겠다고 말했고 이제 본격적으로 GV의 기획을 짜야하는 상황.

개봉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두감독의 의견을 조율해서 기획을 짜야한다. 때문에 한록과 최대리, 그리고 현차장은 일요일마저 회사에 불려 나온 것이었다.

“회의실은 제가 준비해놨어요.”

최대리의 말에 한록은 시계를 바라보았다.

‘그럼 시간이 좀 남는군.’

회의 시간은 10시 30분이고, 지금은 10시 10분이었다. 시계를 확인한 한록이 자리에 앉아 파일 하나를 꺼내들었다.

“과장님. 일해요? 진짜? 이 시간에?”

주말 출근. 거기에 회의를 기다리는 20분까지 일을 하겠다는 한록이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의 최대리.

한록이 보고 있는 것은 <도착지>의 마케팅 기획안이었다. 최대리가 한록의 파일을 보더니 말했다.

“우감독님한테 얼마 받았어요?”

“안 받았어요.”

“그럼 왜 이렇게까지 해요?”

“제가 좋아하는 영화거든요.”

“저도 우감독님 영화 좋아해요. 서감독님 영화도 좋아하고요. 그래도 나는 일요일엔 일하고 싶지 않은데.”

일요일에는 쉬고 싶다는 최대리의 말. 그건 한록도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어제도 <스타의 하루> 리허설 때문에 늦게까지 회사에 남아있었다.

한록은 평소보다 많이 피곤한 상태였고, 집에 돌아가고 싶단 마음이 굴뚝같은 것도 사실이었다.

“많이 좋아하는 영화입니다.”

하지만 <도착지>를 더 많은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다는 마음이 그 모든 것을 이겼을 뿐이었다.

한록의 말에 최대리가 정말로 궁금하다는 듯한 얼굴로 물었다.

“왜요?”

‘이렇게까지 할 정도로 <도착지>를 좋아하는 이유가 뭐냐’는 최대리의 물음.

“이유는...”

그 말에 한록은 과거를 떠올렸다.

가족에 대한 애정이 깊지만, 그만큼 말 못할 사연들을 가진 한록. 그러나 한록은 남에게 잘 기대지 못하는 성격을 가진 사람이었고, 그런 한록이 위로가 필요할 때 찾는 것은 영화였다.

누군가는 뻔하다고 말하고, 누군가는 지루하다고 말하지만, 그만큼 사람을 위로하는 영화. 그게 바로 우감독의 영화고 한록이 <도착지>를 좋아하는 이유였다.

‘이런 걸 회사에서 말할 순 없지.’

하지만 이걸 영도도 아니고 최대리한테 말할 순 없다. 그렇게 생각한 한록이 짧게 답했다.

“그냥요.”

“엥?”

한록의 말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 최대리. 한록이 핸드폰을 꺼내며 말을 돌렸다.

“우감독님 좀 일찍 오신다고 하네요. 곧 도착하신다고 합니다.”

“아니, 왜 말을 안 해줘요?”

“우감독님 모시고 바로 회의실로 가겠습니다.”

“과장님 이렇게 나오시면 저 삐질 거예요.”

“그러세요.”

“안 통하네.”

“통할 리가 있겠습니까.”

“정말 냉정하시네요. 이러니까 여자친구가 없지.”

한록의 말에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이는 최대리.

잠시 후 우감독과 서감독이 ENM에 도착했고, 한록과 최대리는 함께 로비로 내려갔다.

*

회의실로 향한 한록과 최대리, 현차장. 그리고 우감독과 서감독.

“주말에 여기까지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은 감독님들이 원하는 기획안을 편하게 말씀하세요.”

우감독과 서감독에게 말하는 현차장.

현차장의 말에 서감독이 기다렸다는 듯 말을 꺼냈다.

“저는 지금 기획안이 마음에 들어요. 저랑 우감독님이 서로의 영화에 대해 비평하는 거요. 그걸 강조했으면 좋겠네요.”

“어떤 식으로 말입니까?”

“글쎄요. 되도록 살벌하게? 비평으로 끝내지말고, 관객들한테 어느 영화가 좋았는지 투표도 받고, 그런 식으로요. 투표수도 공개해요.”

한록을 바라보며 말하는 서감독. 서감독의 말에 우감독이 고개를 저었다.

“투표까지 가면...그건 비평이 아니고 영화로 승패를 정하는 거잖아. 굳이 그렇게까지 갈 필요가 있을까?”

우감독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GV에 올 만큼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이면 거의 <수면>에 투표를 할 거야. <도착지>는 한 표도 못 받을수도 있어.’

우감독이 우려하는 것은 승패의 문제가 아니라 바로 투표수가 공개되는 것이었다.

팬도 많고, 그만큼 작품성과 흥행도 대단한 서감독의 영화들. 사람들은 아마 <수면>에 몰표를 할 것이 분명했다.

“그런 게 재밌잖아요.”

그리고 그건 서감독이 원하는 것이기도 했다.

우감독에게 웃으며 답한 서감독이 한록에게 말했다.

“과장님도 이런 걸 원하죠?”

우감독이 눈앞에 있는데도 불구하고 대놓고 한록에게 시비를 거는 서감독.

‘내 상대는 우감독이 아니라 너다’라는 걸 온몸으로 보여주는 태도였다.

“제가 원하는 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 GV는 두분의 의견을 반영해서 만드는 프로그램이니까요.”

“저한테 그러셨잖아요. <도착지>가 <수면>을 제치고 연말 시상식에서 대상을 받았으면 좋겠다고요.”

그리고 한록을 대놓고 도발하는 듯한 서감독의 말.

“그러려면 노력 많이 해야 할 텐데요.”

‘이과장. 이 인간이랑은 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서감독의 살벌한 도발에 현차장이 한록과 우감독의 눈치를 봤다.

‘또 이러는군.’

한록은 서감독의 말에도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그저, 우감독이 이 자리가 불편하겠다는 생각이 들 뿐이었다.

“선배님. <수면> 지금 잘 나가는데. 붙어보면 꽤 재밌을 거예요.”

한록에 이어 이번엔 우감독을 도발하는 서감독. 회의실의 분위기가 점차 무거워지고 있었다.

“잠깐만요.”

그리고 이럴 때 꼭 필요한 누군가의 말.

“우리 감독님들. 조금만 쉬었다 갑시다.”

현차장이었다.

“서감독님 의견 좋아요. 좋은데, 투표수 공개는 너무 자극적이야. <수면>이랑 <도착지>가 이런 게 어울리는 영화일지는 우리도 상의를 좀 해봐야겠어요. 그러니까 잠깐 쉬었다 가요.”

담당자도 아닌 현차장이 오늘 주말 출근을 한 이유이자, 한록이 현차장을 부른 이유.

바로 회의가 이런 식으로 진행될 것이란 걸 예상했기 때문이었다.

“라이벌 구도를 잡았으면 자극적으로 가야죠.”

“너무 자극적이면 결재가 안 떨어질 거예요. 2안을 생각해두는 것도 좋죠.”

거기에 현차장의 말을 거드는 최대리까지.

“맞아, 맞는 말이야. 최대리는 맞는 말만 한다니까. 그러니까 이건 일단 킵해두고, 좀 쉬었다가 다시 회의해봅시다. 아셨죠?”

“...알겠습니다.”

현차장과 최대리의 공세에 서감독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서감독은 마음이 바뀐 것 같지는 않았다. 서감독은 오히려...

“한번 생각해보세요. 선배님.”

‘어차피 내 말대로 가게 될 거다’라는 듯한 표정이었다.

*

현차장의 적절한 중재로 잠깐 중단된 회의. 한록은 담배를 피우기 위해 옥상으로 향했다.

‘...관객만 잘 모을 수 있다면, 투표를 해도 <도착지>가 밀리지 않을 수 있을텐데.’

옥상의 의자에 앉은 한록은 미리 가져온 <도착지>의 파일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투표를 하고, 그 승패를 공개한다. 거기에 투표수까지 공개하겠다.

우감독은 그 말에 겁을 먹은 것 같았지만, 한록은 <도착지>에 아예 승산이 없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살인범으로 몰린 아들과 그 어머니의 이야기, <수면>.

<수면>은 지금 개봉한 그 어느 영화에도 밀리지 않는 영화다.

‘아니, 역대 한국 영화 중에서도 손에 꼽는 걸작이지.’

하지만 투표란 어차피 현장에 모인 사람들의 반응으로 결정 되는 것.

<도착지>에 호의적인 반응을 할 만한 관객을 모으고, 현장의 분위기를 이끌어올 수만 있다면 <도착지>에게도 가능성은 있었다.

‘만약 투표에서 <도착지>가 이긴다면...꽤 홍보가 될 거야.’

서감독이 ‘우감독을 압도적으로 눌러버리겠다’는 생각으로 제안한 투표.

하지만 여기서 이기기만 한다면, 오히려 <도착지>에게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서감독의 제안이긴 해도, 이걸 거절하기엔 아깝다.’

그런 생각을 하며 <도착지>의 파일을 바라보는 한록.

그때 한록의 머리 위로 그림자가 지며 매캐한 담배냄새가 났다.

“...안녕하십니까.”

서감독이었다.

*

한록과 눈이 마주쳤는데도 여전히 담배를 끄지 않고 한록을 바라보는 서감독.

“진짜 열심히 하시네요.”

서감독이 <도착지>의 파일을 보고 말했다.

“과장님. 우감독님은 대단한 분이에요. <우리 집>도, <도착지>도 좋은 영화고요.”

우감독에 대한 존중이 담긴 서감독의 말.  우감독의 영화를 좋은 영화라고 말하는 서감독의 말은 거짓말은 아닌 것 같았다.

“다만 문제는 상대가 저라는 거죠.”

마치 선전포고 같은 서감독의 말. 그러나 한록은 여전히 태연한 얼굴이었다.

“과장님. 정말 <도착지>가 대상을 탈 수 있다고 생각하세요?”

“확신하진 않습니다. 그러길 바랄 뿐입니다.”

한록의 말에 서감독이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그럼 절 이겨야 하는데요?”

‘날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냐?’란 질문.

“네. 대상을 타려면 그래야죠.”

그리고 그에 대한 한록의 답.

“과장님. 이번 일이 끝나면...”

한록의 답에 서감독은 화를 내는 대신 다시 한 번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한록에게 말했다.

“다시는 제 영화를 거절하지 못하실 겁니다.”

한록의 거절을 마음에 품고 있는 듯한 말이었다.

“저한테 시비를 거시는군요.”

“과장님도 그러셨으니까요.”

“그런 적 없습니다.”

“전 그렇게 느꼈어요.”

한록의 거절에 단단히 화가 난 듯한 서감독.

세계적인 감독이 자신에게 앙심을 품고 있다. 누구라도 난처할 만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한록은-

“다음 영화는 또 저한테 부탁하실 거란 말로 알겠습니다.”

이 정도 말로는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었다.

“정말 사람 속을 긁으시네요.”

조금도 굽히는 게 없는 한록의 태도에 얼굴을 찌푸리는 서감독. 그러나 서감독의 불만에도 한록은 태연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날 뿐이었다.

“감독님.”

“네.”

“들어갑시다. 또 회의 해야죠.”

“전 마음 안 바꿔요. 투표도 할 거고, 공개도 할 거예요. 저랑 싸우겠다고 했으니 그 정도는 각오하셔야죠."

절대 봐주지 않겠다는 서감독의 말.

서감독의 말에 한록이 바닥에 담배를 끄며 말했다.

“네. 바라는 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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