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 회사원이 선넘으면 생기는일-122화 (122/263)

122. 이과장님 진짜 성격 나쁘시네!

“영화계 너무 힘들지 않아요? 이쪽으로 넘어와요.”

장난기가 섞인 김PD의 러브콜.

처음 만났을 때의 그 죽어가던 사람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변화였다.

“과장님 말처럼 대본 없이 가길 잘했어요. 여태 <스타의 하루> 에피소드 중에 제일 잘 나왔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방송이 잘 나와서’란 이유 하나 때문이었다.

자기가 담당한 작품이 훌륭하게 완성된 걸 보는 기분.

‘창작의 즐거움이란 이런 걸가?’

김PD를 보니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재밌기도 하고, 또 가슴에 와닿기도 하고...저희가 쓴 대본처럼 갔으면 큰일날 뻔 했어요. 고맙습니다, 과장님.”

“별말씀을요. 그런데 최슬아와 이은솔 둘이 어떤 얘기를 했습니까?”

김PD의 말을 듣고 있던 한록이 질문을 던졌다. ‘대본 없이 가자’고 했을 때부터 한록이 가장 궁금해하던 부분이었다.

최슬아는 이은솔에게 대체 뭐라고 했을까? 대체 무슨 대화를 나눴길래 김PD는 왜 이렇게까지 좋아하는 걸까?

그리고 그에 대한 김PD의 대답.

“음...제가 말해봤자 안 와닿지 않을까요? 영상으로 보시는 게 좋을 거 같아요. 안 그래도 지금 CK쪽으로 가편집본 보내드리려 했습니다.”

“제가 외국에 있어서요. 메일로 보내주셨으면 합니다.”

“어...보안 때문에 그건 어려울 것 같아요.”

그러나 아쉽게도 영상은 한국으로 돌아간 후에야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김PD와의 통화를 마치고 다시 침대에 누운 한록.

‘빨리 돌아가고 싶네.’

<스타의 하루>에 대한 기대감 때문에 미국에 와서 처음으로 빨리 한국에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30분 정도가 지났을까.

[이과장. 전화 가능해요?]

이번엔 백부장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지금 뉴욕의 시간은 벌써 새벽 1시. 하지만 한국은 아직 대낮이라 그런지, 계속 업무 전화가 걸려오고 있었다.

잠에 막 빠져들려던 한록이 겨우 침대에서 일어나며 대답했다.

“네, 부장님. 무슨 일이십니까.”

[<스타의 하루> 가편집본 얘기 좀 하려고요. 우리끼리 의견 취합해서 전달해야 하니까요.]

“아직 제가 해외에 있어서 영상을 못 봤습니다. 그래도 수정하실 부분 있으면 먼저 말씀해주세요.”

한록의 말에 백부장이 기다렸다는 듯 말을 이었다.

[전혀 없어요. 너무 잘 나왔고, 고흐전에 딱 어울리는 것 같아요. 우리는 이대로만 갔으면 좋겠어요.]

김PD와 마찬가지로 <스타의 하루>에 대해 아주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는 백부장.

“수정할 부분이 전혀 없다는 말씀이신가요?”

[맞아요. 전시회랑, 영화 둘 다 서로한테 안 밀리고 매력적으로 보이게 나왔어요. 남차장도 아주 좋아하더라구요.]

백부장은 김PD처럼 대본 없이 진행되는 촬영에 많은 우려를 보였었다.

그런데 그런 백부장마저 백부장은 <스타의 하루>에 대해 아주 만족하고 있었다.

‘얼마나 잘 나왔길래 다들 이런 반응이지?’

그런 생각에 한록이 백부장에게 질문을 던졌다.

“엔딩 부분은 어떠셨습니까? 대본 없이 촬영한 부분이라 걱정하신 걸로 아는데요.”

[괜한 걱정이었어요. 그 부분이 제일 마음에 드네요.]

백부장이 아주 기쁜 목소리로 말했다.

다행히 김PD의 말대로, 한록이 제안한 장면이 정말 잘 나온 모양이었다.

[우린 그냥 이대로 더 손대지 말고 나갔으면 좋겠네요. ENM쪽 의견도 취합되는 대로 말해줘요.]

“알겠습니다. 귀국하고 모레까지 연락 드리겠습니다.”

[네. 되도록 빨리 연락 주세요.]

그렇게 통화는 끝났고, 한록은 다시 침대에 누웠다.

김PD. 백부장. 남차장. 모두가 마음에 들어하는 <스타의 하루>. 그리고 자신이 제안했던 파트.

지금 당장이라도 영상을 보고 싶었지만, 귀국까지는 아직 시간이 좀 남았다.

‘빨리 자자.’

지금 영상에 대해 생각해봐도 알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그렇게 생각하고 눈을 감은 한록.

하지만...

‘...궁금해 죽겠네.’

아무래도 잠이 올 것 같지 않았다.

*

다음날. 출국하기 전까지 또 타임스퀘어에 죽치고 앉은 한록과 현차장, 그리고 최대리.

“이과장. 나 광고 앞에서 사진 좀 찍어줘.”

“네, 알겠습니다.”

“이과장은 안 찍어?”

“어제 100장 정도 찍었습니다.”

“진짜...대단하다. 대단한 사람이다, 이과장.”

현차장이 한록에게서 핸드폰을 건네받더니 바로 딸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흐흐. 은서가 친구들한테 자랑한대.”

흐뭇한 표정의 현차장. 그리고 말없이 계속 광고를 찍고 있는 한록.

둘 다 구름 위를 날아갈 것 같은 기분이었지만, 사실 이 중 가장 기뻐하고 있는 건 최대리였다.

사진도 찍지 않고 계속 광고를 바라보는 최대리.

“최대리, 그렇게 좋아?”

현차장의 말에 최대리가 평소의 능글맞은 태도와 달리 쑥스러워하는 듯한 얼굴로 말했다.

“차장님.”

“응?”

“저 캐릭터, 제가 비중 늘리자고 얘기했던 캐릭터예요.”

최대리가 가리킨 것은 힘으로 좀비를 제압하는 거구의 캐릭터였다.

“오. 정말?”

“네. 처음 볼 때부터 인기 많을 것 같더라고요. 그리고, 저 장면 카메라 연출. 저것도 제가 제안한 거예요.”

“최대리님. 그 말 열두 번째 하고 계십니다.”

“차장님한테는 처음이잖아요.”

어제 한록에게 그랬던 것처럼, 현차장을 붙잡고 자신의 손길이 들어간 부분에 대해말하는 최대리.

그 모습에 한록이 피식 미소를 지었다.

‘김PD님도 그렇고...정말 좋아하네.’

김PD와 전화를 할 때도 느꼈던 감정이지만, 아무래도 창작에 직접적으로 참여했던 사람들은 그 감동이 더 클 수밖에 없는 모양이었다.

아마 최대리는 한록만큼, 아니 그보다 몇 배는 더 즐거운 감정을 느끼고 있을게 분명했다.

‘내가 만든 영화가 타임스퀘어에 걸리는 기분이라.’

그렇게 생각하니 떠오르는 작품이 있었다.

‘가능성이 있는 건 식물이지.’

곧 제작에 들어갈 <식물>의 장편 버전이었다.

식물은 2,3편으로 진행되면서 해외에서도 크게 인정받는 영화가 되었고, 한록의 커리어를 세계적으로 이끌어준 장본인이기도 했다.

하지만 <식물>의 1편은 평단의 호평에 비해 관객들에게 큰 사랑을 받지는 못했다. 마케팅이나 영화 외적인 문제는 아니었다. 그저 감독의 첫 장편 영화이기에 여러 부분에서 미숙한 부분들이 있었던 것이다.

‘귀국하면 본부장님께 이 얘기부터 드려야겠군.’

안 그래도 제작에 참여해 <식물>의 1편 또한 성공시키고 싶다는 생각을 해오던 한록.

마침 제롬에게서 제안이 왔으니, 최경준에게 제작에 참여하고 싶다는 얘기를 꺼내기에 아주 좋은 핑계란 생각이 들었다.

“이제 출발할까요.”

“그래. 비행기 놓치겠다.”

“아잇, 아쉬워 죽겠네.”

한록의 말에 현차장과 최대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하철역으로 가기 위해 걸음을 옮기는 한록과 현차장. 그러나 최대리는 아직도 광고판 앞에 서 있었다.

“최대리님. 갑시다.”

“네.”

한록의 부름에 최대리가 마지막으로 핸드폰을 꺼내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한록을 돌아보며 말했다.

“이과장님.”

“네.”

“고마워요.”

최대리답지 않게 아주 솔직한 어투의 말. 자신에게 각별한 영화를 이곳에 데려와 줬다는 고마움이 담긴 말이었다.

‘고맙다’.

윤감독이, 김PD가, 최대리가 한 말.

이제는 익숙한, 하지만 들을 때마다 기쁜 말이었다. 그 말에 한록이 웃으며 최대리에게 말했다.

“시간 없어요. 빨리 갑시다.”

“에이. 감동 모드 안 통하네요.”

최대리가 아쉽다는 듯 웃으며 현차장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

지하철이 있는 곳으로 내려가기 전. 한록은 마지막으로 고개를 돌려 광고가 걸린 전광판을 바라보았다.

전광판 밑에 모여 사진을 찍는 사람들. <부산 열차>. 하염없이 광고를 바라보던 최대리.

‘그 마음은 대체 어떤 기분일까?’

그리고 언젠가 저곳에 걸릴 자신이 사랑하는 영화들.

다음에는 가장 사랑하는 영화를 가지고 이곳으로 돌아올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며, 한록은 계단을 내려갔다.

*

다음날. 한국으로 돌아와 출근을 한 한록.

<스타의 하루> 가편집본을 확인하고 있던 한록에게 최대리가 말을 걸었다.

“과장님. 잠깐 시간 되세요?”

“네. 말씀하세요.”

“<수면> 때문에 과장님 도움이 필요하거든요. GV를 좀 빌려 가도 괜찮을까요?”

최대리가 말한 것은 한록이 만든 감독 GV에 대한 것이었다.

“<수면>이 해석할 거리가 많은 영화니까 GV를 열면 반응이 좋을 것 같아요. 서감독님도 GV에 대해 관심이 많으시더라구요.”

“현차장님한텐 말씀하셨죠?”

“네. 근데 과장님한테도 말씀드리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사실 이미 GV팀 회의에서 이미 얘기가 나왔던 <수면>의 감독GV.

한록 역시 현차장에게서 내용을 전달받은 상황이었다.

‘이걸 받아들여도 되나? 이과장은 어때?’

GV를 전담하기 위해 만들어진 GV팀. 그런데 다른 팀에서 GV를 이용하겠다고 말하는 상황이다.

현차장은 자신의 프로그램을 뺏길까봐 걱정이 되는 얼굴이었다.

‘나쁘지 않습니다. GV의 인지도를 올릴 기회 같기도 하네요.’

그러나 한록의 생각은 좀 달랐다. 감독 GV가 탄생한지 얼마 안 된 만큼, 지금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GV를 홍보할 때라는 게 바로 한록의 생각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저도 최대리님께 제안드릴 게 있습니다.”

“뭔데요?”

“<수면> GV를 <도착지>와 함께 했으면 합니다.”

<수면>과 <도착지>의 라이벌 구도를 엮기에 GV가 제격이란 생각이 든 것이다.

‘<수면>은 지금부터 주목을 받고 있으니까. GV를 통해 <수면>과 함께 언급될 수 있다면 <도착지>도 큰 이슈가 될 거다.’

“어떤 식으로요?”

“GV를 아예 같이 열거나, 아니면 서로의 GV에 상대 감독을 초대하는 식으로요.”

“으음...”

한록의 제안에 최대리가 팔짱을 끼고 생각에 잠겼다.

최대리가 고민하는 건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이제 과거의 명성을 잃은 우감독. 긜고 그런 우감독의 은퇴작 <도착지>.

<도착지>는 사람들에게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었고, 그런만큼 <수면>과 함께하는 GV가 큰 도움이 될 게 분명했다.

서감독은 아시아의 천재감독으로 불리는 사람이었고, <수면> 역시 개봉 전부터 많은 기대를 받고 있는 상황이었으니까.

“음...서감독님이 할 만한 말을 생각해봤어요. ‘급이 떨어진다.’”

그리고 그건 <수면>은 <도착지>와 함께해도 아무런 이점이 없다는 말과 같은 뜻이기도 했다.

한록이 최대리에게 물었다.

“최대리님도 그렇게 생각하시나요?”

“전 아니죠. 전 우감독님 영화 좋아하거든요. 그래도 영화 규모가 다른 건 사실이에요.”

감독의 급도, 관심도도, 제작비도, 너무나 차이가 나는 <수면>과 <도착지>. 최대리가 아쉽다는 듯 말했다.

“저는 같이 하면 재밌을 거 같은데, 아무리 생각해도 서감독님이 싫어하실 것 같아요.”

그러나 최대리와 달리 한록은 여기서 포기할 마음이 없었다.

“최대리님. 제 말 좀 들어보세요.”

“네.”

“보통 GV에 다른 감독을 초청하는 경우는 거의 없잖아요.”

“그렇죠. 감독들이 자기 영화에 입대는거 싫어하니까.”

“그런데 그걸 저희가 최초로 시도하는 겁니다.”

“...”

“그것도 동시에 개봉하는 영화로.”

“........”

“그것도 분위기가 정반대인 영화로.”

“.................”

“그것도 원로 감독이랑, 젊은 스타 감독을 데리고요.”

“.......................”

한록이 말을 할 때마다 조금씩 흔들리며 한록에게 다가오는 최대리의 실.

바로 흔들리는 최대리의 마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아, 깜짝이야. 넘어갈 뻔했네.”

한록의 말에 빠져들고 있던 최대리가 얼른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끌리긴하는데, 같이 작업해도 좋게 끝나진 않을 거예요. 서감독님이 <도착지>에 대해 엄청 비판하지 않을까요.”

그리고 그 말에 한록이 마지막 결정타를 날렸다.

“최대리님.”

“네.”

“그게 더 재밌지 않을까요?”

“......”

한록의 말에 최대리의 머릿속에 어떤 상상이 떠올랐다.

서로 동시에 개봉하는 두 영화. 그리고 객석에 앉아 서로의 영화에 대해 날카로운 질문을 던지는 원로감독과 신예감독.

[실시간 영등포 GV상황.JPG]

[ㅋㅋㅋ여기 싸움난 거 같은데요ㅠㅠ]

그리고 인터넷에 올라올 글까지.

그 모습을 상상하던 최대리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이과장님 진짜 성격 나쁘시네!”

그건-

“제가 서감독님 설득해올게요. 됐죠?”

한록의 작전에 참여하겠다는 뜻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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