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 회사원이 선넘으면 생기는일-121화 (121/263)

121. 과장님이 책임질 거예요?

또다시 찾아온 제롬의 스카웃. 사실 전화를 받을 때부터 한록 역시 예상했던 부분이었다.

하지만 ‘제작에도 참여시키고 싶다’는 말은 의외였다.

‘당황스럽긴 해도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네.’

마케팅 포인트. 다시 말해, ‘사람들이 이 영화를 왜 보러 오는가’에 대한 분석.

그건 당연히 영화 제작부터 신경 써야 하는 부분이었다.

그래서 마케팅부서의 리뷰가 제작에 영향을 미치는 경우도 꽤 있었다.

하지만 그건 흔히 ‘영화 업계에서 꽤 굴렀다’고 할 수 있는 차장급부터의 얘기였다.

지금 한록의 나이는 서른살. 업계 어디를 가도 막내 바로 윗급이다.

그런 한록에게 제작에 참여할 권한을 주겠다는 제안이 들어왔다.

업계 사람들이 듣는다면 모두 놀랄만한 얘기였다.

‘난 경력으로 치면 아직 햇병아리인데. 내가 회귀자인 걸 알기라도 하나.’

우드 엔터터인먼트의 사장, 제롬.

인재를 보는 안목은 물론이요, 마음에 드는 인재에게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파격적인 제안을 한다.

과연 우드 엔터테인먼트를 헐리웃 베테랑 영화사로 성장 시킨 사람다웠다.

[고민할 내용이 아닐 텐데요. 빨리 답을 주길 바랍니다.]

평소와는 다르게 답을 재촉하는 제롬. 한록이 놀란 틈을 타 잽싸게 낚아채 가려는 속셈인 듯했다.

그 속셈을 눈치챈 한록이 솔직하게 답했다.

<제작에 대해서...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죠.>

[당연한 얘기를 하는군요. 영화 업계에서 일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영화를 만들어보고 싶다고 생각하죠. 물론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건 거짓말이죠.>

[잘 아는군요.]

한록이 단호하게 말하자 제롬 역시 그 말에 동의했다.

영화를 좋아해서 돈 안 되고 고달픈 이 업계로 모여든 사람들.

그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제작에 참여하고 싶다는 생각을 안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한은 어떻습니까. 나한테 거짓말을 하진 않을 테죠.]

<저 역시 경력이 쌓이면 제작에 참여할 생각이었습니다.>

그리고 한록은 그 중에서도 제작에 대한 의욕이 큰 편이었다.

‘하지만 아직 우드 엔터테인먼트로 옮기는 건 이르다.’

다만, 지금은 시기가 너무 빨랐다.

이미 CK와 계약이 된 <식물>의 장편 버젼. <식물>은 차후 3대 영화제를 휩쓸며 영화계의 한 획을 그을 영화였다.

거기에 앞으로 세계에 한국 영화계를 알릴 CK 소속의 영화들.

아직은 그 영화들을 두고 굳이 미국 영화에 참여하고 싶단 생각이 들지는 않았다.

무엇보다-

<제작에 참여한다면, 제 권한은 어느 정도입니까?>

[투자 부서에 소속될 겁니다. 시나리오를 검수하고, 상업적 포인트가 있는 영화를 고르게 되겠죠.]

<제가 시나리오에 관여할 순 없습니까?>

[그건 디렉터급이나 가능한 일이죠.]

우드 엔터테인먼트에서 자신의 영향력이 그다지 크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지금 제롬의 열렬한 스카웃 제의를 받고 있는 한록.

하지만, 우드 엔터테인먼트의 다른 사람들 역시 한록처럼 제롬이 선택한 사람들이다.

‘본부장님이 팀장 자리를 생각해보라고 하셨지. 그리고 인수전이 끝나면 본부장 자리까지 단계적으로 올라갈 거라고 하셨고.’

당장 눈앞에 보이는 차장과 팀장이라는 위치. 그리고 머지 않아 떨어질 본부장의 자리까지.

팀장부터는 마케팅만이 아니라 영화 제작 전반에 관여할 수 있는 자리다.

그 모든 것을 두고 우드 엔터테인먼트에 갈 마음은 들지 않았다.

<죄송합니다. 이번에도 어렵다고 말씀드려야겠습니다.>

[정말 고집이 세군요. 얼마든 줄 수 있다고 해도 어렵습니까?]

연봉을 얼마든 줄 수 있다. 평범한 회사원이라면 ‘내일부터 출근하겠습니다’라고 할 비장의 카드.

그러나 한록은 별로 놀라지 않은 얼굴이었다.

<연봉 정도는 지금 회사에서도 맞춰 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자신이 부르는 것이 곧 연봉이 되는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너무 뛰어난 사람은 이런 걸로는 회유가 안 되는군요.]

한록의 말에 담담히 답하는 제롬. 다소 건방진 말이었지만 제롬은 전혀 기분이 상하지 않은 것 같았다.

자신이 발견한 인재가 이렇게 대단한 사람이며, 그 사람도 스스로 그 사실을 알고 있단 사실이 퍽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이렇게까지 얘기한다면 짧은 시간 안에 마음을 바꾸긴 어렵겠군요.]

<그럴 것 같습니다. 앞으로 연락을 주셔도 마음은 바뀌지 않을 겁니다.>

[그럼 다른 방법을 쓰는 방법밖에 없겠습니다. 다음엔 전화가 아니라 시장에서 만납시다.]

‘시장에서 만나자’.

그 말이 의미하는 것.

[헐리웃과 경쟁해보면 알겠죠. 당신이 있는 곳은 우물 안에 불과하다는 걸.]

각자의 영화를 가지고 시장에서 경쟁을 하자는 말이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조금 달랐다.

헐리웃. 우드 엔터테인먼트. 그리고 제롬.

[그 나이엔 얻어맞고 나서야 알게 되는 일도 있는 법입니다. 그때까지 기다리겠습니다.]

자신의 회사가 얼마나 대단한지 보여주겠다는 말이었다.

불과 5분 전까지 자신을 스카웃하려던 사람이 이제 자신에게 본때를 보여주겠다고 말하는 상황.

그럼에도 한록은 당황스럽거나, 무서운 감정은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네. 저도 기다리겠습니다.>

그저 앞으로 펼쳐질 또 다른 경쟁에 기분 좋은 긴장감이 들 뿐이었다.

[그렇게 나올 줄 알았습니다.]

그 말에 제롬이 기다렸다는 듯 답했다. 그리고 통화를 끊기 직전 말했다.

[다음번엔 영화로 만납시다.]

한록이 잘못 들은 것이 아니라면, 아주 조금...

[기대되는군요.]

웃음이 섞인 목소리였다.

“제롬이에요? 뭐래요?”

제롬과의 통화를 끊자, 옆에서 통화가 끝나길 기다리던 최대리가 바로 한록에게 물어왔다.

'오늘 통화를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짧게 생각한 한록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절 가만 안 두겠다네요.”

제롬의 선전포고였다.

*

세계의 중심 뉴욕. 그리고 뉴욕의 중심 타임스퀘어.

그곳에 자신들이 만든 광고가 걸려있고, 사람들은 그 밑에 모여 웅성거린다.

“과장님. 점심 대충 사와서 여기서 먹을까요?”

“그럽시다.”

“저녁도요.”

“당연하죠.”

그 엄청난 고양감에 하루종일 타임스퀘어에 죽치고 있기로 결정한 한록과 최대리.

[현주훈 : 이과장. 어디 있어? 난 2시쯤 도착. (12:03)]

[이한록 : 타임스퀘어입니다. (12:05)]

[현차장 : 비행기 지연이다. 7시쯤 갈 것 같아. 지금은 어디? (14: 27)]

[이한록 : 타임스퀘어입니다. (14:52)]

[현차장 : 왜 아직도...? (15:11)]

[김유선 : 과장님. 차장님 결항으로 밤에 도착하실 것 같대요. 지금 어디 계세요? (17: 52)]

[이한록 : 타임스퀘어예요. (18 : 08)]

[김유선 : 왜요...? (18 : 12)]

“아니, 이 인간들아! 여기서 뭐 하고 있는 거야?”

둘은 현차장이 도착할 때까지 타임스퀘어에 깔린 의자에 장장 8시간을 앉아있었다.

현차장이 한록과 최대리를 보며 안타까운 듯 말했다.

“기껏 여기까지 왔는데 좀 돌아다니기라도 하던가! 둘 다 하루 만에 아주 꾀죄죄 해졌네.”

그 말에 한록이 진지하게 답했다.

“차장님. 여기서 사람들 반응 보는 게 제일 재밌습니다.”

“그렇다고 그걸 8시간이나 봐?”

“시간대마다 오가는 사람이 다릅니다. 아침에는 출근하는 사람들. 낮에는 관광객. 오후에는 거주민이 광고를 보러 옵니다.”

“이걸 그렇게 진지하게 분석하면서 기다렸다고...?”

한록의 말에 경악하는 표정을 짓는 현차장. 현차장이 한록에게 말했다.

“이과장은 진짜...”

“네.”

“이상한 사람이야.”

“최대리님도 같이 기다렸...”

“최대리도 이상한 사람이고. 아무튼, 이제 볼 사람은 다 봤겠네. 이제 가자. 뉴욕에 왔는데 여기에만 앉아있을 거야?”

단호하게 답한 현차장. 그러나 단호한 건 현차장만이 아니었다. 최대리 역시 비장한 눈빛으로 답했다.

“아뇨, 아직 하나 남았어요.”

“뭐가 남았어?”

“이제 뉴욕파 인간들이 퇴근할 시간이거든요.”

보통 사람들은 미국의 영화시장이라고 하면 헐리웃만을 떠올린다.

하지만 애초에 미국에서 영화산업이 시작된 곳은 바로 뉴욕.

지금도 뉴욕은 헐리웃과 함께 미국 영화계를 책임지는 곳이었다.

우디 앨런, 그리고 마틴 스콜세지 등 예술 영화를 중심으로 움직이는 뉴욕 영화계.

그런 뉴욕을 기점으로 활동하는 영화인들을 사람들은 ‘뉴욕파’라고 통칭하곤 했다.

“보통 영화업계 사람들이 이 주위에 살거든요. 차장님. 뉴욕파 사람들이 <부산 열차>를 두고 뭐라고 말할지 궁금하지 않아요?”

헐리웃과 버금가는. 아니, 어쩌면 예술성에서는 헐리웃보다 앞서 나가는 뉴욕 영화계.

그 곳에서 <부산 열차>가 어떤 평가를 받을까. 그게 바로 한록과 최대리가 저녁까지 타임스퀘어에 남은 이유였다.

“아니, 근데 나 밥을 안 먹었는데...”

“저희가 케밥 사왔습니다.”

“...그럼 30분만 기다려볼까?”

그리고 현차장이 빠르게 설득된 이유이기도 했다.

결국 타임스퀘어 한가운데서 케밥을 먹으며 오가는 사람을 관찰하는 한록과 최대리, 그리고 현차장.

[로라. 저번에 봤던 영화다.]

[아, 저 영화 재밌었어.]

[내 친구가 <부산 열차>의 광팬이야. 그 영화 때문에 한국어를 배운대.]

[나도 하나 외웠어. ‘아빠’.]

[저 광고 때문에 영화를 보러 갔지. 정말 잘 만들었어.]

[영화관에서 안내방송도 좋았어. 다른 영화들도 이렇게 재밌는 이벤트가 있으면 좋을텐데.]

타임 스퀘어를 오가는 수천명의 사람들.

그 사람들이 말하는 <부산 열차>와 <부산 열차>의 광고.

“흐흐...미국놈들아, 이게 바로 한국 영화다. 이게 바로 한국의 국뽕이다...!”

현차장의 입은 이미 귀에 걸려있었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아. 우드 엔터테인먼트의 <부산 열차>잖아.]

드디어 관심이 갈만한 얘기가 들리기 시작했다.

셋은 익숙한 회사의 이름에 귀를 쫑긋 기울였다. 네 명의 남자가 <부산 열차>의 광고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타블로이드가 저 영화보고 ‘한국의 문화 침공’이라고 하더라. 한국이 이런 영화를 만들 줄이야. 작년만 해도 상상도 못했어.]

<부산 열차>에 대해 긍적으로 평가하는 사람. 누가봐도 업계 관련인. ‘뉴욕파’ 사람이었다.

[지금 웃을 때가 아니야. 영어 한 마디도 없는 영화가 타임 스퀘어에 올라왔다고.]

[그래. 극장은 몰라도 타임 스퀘어라니.]

[타임스퀘어에 걸려면 박스 오피스 1위는 해야하는 거 아니야?]

[그러게. 사람들 보기 부끄럽지도 않나.]

그러나 주위의 남자들은 부정적인 반응이었다.

자신들의 나라 미국.

그런데 그 미국의 심장부라 할 수 있는 타임스퀘어 광고를 헐리웃도 아니고 다른 나라의 영화가 가져갔다.

그 사실에 기분이 잔뜩 상해버린 것이다.

[사람들은 다 좋아하는데?]

그러나 정작 눈앞의 대중들은 <부산 열차>의 사진을 찍으며 큰 관심을 보이는 상황.

그 모습에 <부산 열차>에 대해 긍정적인 얘기를 하던 남자가 말했다.

[이거, 재밌겠는데...]

[뭐가?]

[토마스. 너 <삼일의 삶>이라고 알아?]

그리고 그의 입에서 나온 것은 놀랍게도 <삼일의 삶>에 대한 말이었다.

[아, 알아.]

[영화 좋다며.]

<삼일의 삶>에 대해 잘 알고 있는듯한 남자들.

과연 예술영화, 그리고 독립 영화 중심인 뉴욕파다운 반응이었다.

[그거 알렉산드로 감독이 엄청 좋아했대.]

[아. 그것도 한국 영화였지. 요즘 한국 영화가 제법 괜찮네.]

자신이 담당한 또다른 영화에 현차장이 콧구멍을 벌름거리며 웃음을 참았다.

그러나 누가봐도 기뻐서 소리라도 지르고 싶은 듯한 표정.

‘봤냐. 그것도 내가 한 거다. 그것도 우리 영화다.’

그 심정은 애써 침착한 얼굴을 유지중인 한록 역시 마찬가지였다.

<부산 열차>. 그리고 <삼일의 삶>을 담당한 사람들이 바로 눈앞에 있다.

그 사실을 모르는 뉴욕파 사람들은 계속 얘기를 이어갔다.

[그건 언제 개봉이지?]

[올해는 필름마켓에 안 나왔어. 나오는데 좀 걸리려나 봐.]

[아쉽네. 그런데 그게 왜?]

[음...]

동료의 질문에 남자는 말을 멈췄다. 그리고 확신이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거 <부산 열차>만큼 잘 될 거 같아.]

[그게? 음. 아무튼 그런데?]

[그럼 진짜로 ‘한국 영화의 침공’이 시작 될 것 같은데.]

그리고 그 말에...

[하하!]

남자의 동료들이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

[뭐야, 에디. 진짜 ‘한국 영화의 침공’이 걱정되는 거야?]

[<삼일의 삶>이 <부산 열차>만큼 잘 될 거라고? 에디. 그건 수입이 될지 말지부터 걱정해야 하는 영화야.]

남자의 말에 동료들은 하나같이 말도 안 된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러자 남자가 억울하다는 듯 말했다.

[그치만 알렉산드로 감독이 좋아했다잖아. 그리고 나도 봤는데, 그거 진짜 괜찮았어.]

[그래봤자 외국 영화야. 거기에 한국 영화. ‘코리안 무비 인베이젼’은 무슨.]

[그래. <부산 열차> 말고 미국 사람들이 아는 한국 영화가 대체 뭐가 있는데?]

[난 아시아 영화는 안 봐. 아, 고레에다 감독 영화는 몇 개 보지. 그런데 한국 영화는 그럴 가치가 없고.]

[그래. 한국 영화는 일단 관객들이 좋아하지 않는다고.]

남자의 동료들이 말하는 한국영화에 대한 날카로운 지적.

그 말에 헤벌쭉 미소를 짓고 있던 현차장의 얼굴이 점점 굳어갔다. 한록과 최대리 역시 조금 굳은 표정으로 사람들의 얘기를 듣고 있었다.

[에디. 걱정하지마.]

남자의 동료가 남자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그리고 남자를 전광판과 다른 방향으로 이끌며 말했다.

[아니, 나는 진지하다고. 빌. 나랑 내기할래?]

[그래. 해. 내가 장담하지.]

자기들끼리 대화를 주고받으며 어느새 멀어져버린 뉴욕의 영화사 직원들.

[저기 올라갈 두 번째 한국 영화는 없어.]

그리고 그들이 <부산 열차>와 <삼일의 삶>에 대해 남기고 간 말.

“...으휴, 진짜 짜증나는 인간들이네. 그치?”

한록에게 말하는 현차장. 가볍게 말했지만, 속에는 차분한 분노가 담겨있는 말이었다.

“그렇네요.”

그러나 정작 <삼일의 삶>과 <부산 열차>의 메인이었던 한록은 덤덤한 얼굴이었다. 현차장이 놀란듯한 표정으로 한록에게 물었다.

“이과장은 화도 안 나? 이과장이 그렇게 태평한 사람은 아닐텐데?”

“아니죠.”

현차장의 말이 맞았다. 한록이 지금 현차장만큼 화가 나지 않은 이유.

그건 한록이 태평한 사람이어서도, 마음이 넓은 사람이어서도 아니었다. 그저-

“저런 반응 정도는 있어야지 싸워볼 맛이 나죠.”

분노보다는 승부욕이 더 강한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본때를 보여주겠다’는 제롬의 태도. 그리고 ‘한국 영화의 시대는 없다’는 뉴욕파 사람들의 얘기까지.

그 모든 반응들을 보고 든 생각은 단 두가지였다.

“최대한 빨리 두번째 영화를 걸어야겠네요.”

각오.

“저 사람들이 저 대화를 잊어버리기 전에요.”

그리고 자신감.

*

잠시 후, 타임스퀘어 바로 앞의 호텔로 돌아온 한록과 현차장, 그리고 최대리.

한록이 자리에 누웠을 때 전화가 한 통 걸려왔다.

[이과장님! 통화 가능하세요?]

<스타의 하루>의 김PD였다.

[앗. 거기 혹시 저녁인가요? 나중에 전화드릴까요? 아니, 근데 지금 말씀드리고 싶은데-]

상당히 신이 난 목소리의 김PD.

자신이 알던 김PD와 너무 다른 목소리에 한록은 김PD와의 첫 만남을 떠올렸다.

*

최슬아, 이은솔이 함께 출연하기로 결정하고나서 <스타의 하루> 제작진과 미팅을 가졌던 한록.

당시 김PD는...

“네, 안녕하세요...김정현 PD입니다.”

방송국 사람들이 대부분 그렇듯 과로로 죽어가는 얼굴이었다.

일주일에 하나씩 방송을 내보내야 하는 살인적인 스케쥴. 거기에 광고주인 한록과의 미팅까지.

“네, 알겠습니다...네.”

김PD는 영혼이 반쯤 사라진 목소리로 회의에 임했다. 그런데 김PD가 갑자기 정신을 차리고 소리를 지른 순간이 딱 한번 있었다.

“대본 없이 가자구요? 절대 안 돼요! 절대요!”

바로 한록의 제안에 거절을 하기 위해서였다.

“PD님. 잠시만요. 제 얘기 좀 들어보세요.”

섭외가 완료되고 이은솔에 대해 조사를 해 본 한록.

이은솔은 인기가수였지만 3년째 활동을 중단한 상황이었고, 그 이유는 바로 깊은 슬럼프 때문이었다.

그런 이은솔이 오랜만에 방송에 나온다.

그것도 자신과 친한 동료이자 친구 최슬아와 함께.

슬럼프를 겪고 있는 친한 친구. 그리고 고흐의 전시회.

한록은 최슬아가 이은솔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을 것이고, 사람들이 둘의 드라마에 관심을 가질 것이라 생각했다.

“과장님. 예능은 어차피 다 대본 가지고 연기하는 거예요. 게스트는 그냥 연기자라고요.”

그러나 예능이란 원래 작가들이 쓴 대본 아래서 움직이는 것. 그래서 김PD가 기를 쓰고 반대를 하는것이었다.

“아예 아무런 대본이 없이 가자는 건 아닙니다. 고흐의 생애에 대해서 최슬아 작곡가에게 미리 자료를 보낼 거예요. 그럼 최슬아 작가가 거기서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고르고 엔딩 때 말하는 거죠. 이은솔씨는 그 얘기를 듣는 거고요.”

“그거 그냥 우리가 고르고, 이은솔씨한테 이렇게 반응해 달라고 말하면 되는 거 아닌가요?”

“거기까지 지시하면 사람들이 대본이란 걸 다 알텐데요. 최슬아씨랑 이은솔씨 둘 다 전문 연기자가 아니잖아요.”

“아니, 그럼 우리는 뭐 다큐멘터리 찍나요? 다른 것도 아니고 엔딩 부분에 대본이 없이 가자구요?”

엔딩 부분에 리얼리티 요소를 넣겠다는 말에 치를 떠는 김PD. 김PD가 아무리 한록이 갑이라도 이건 참을 수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반응 잘 안 나오면요. 그래서 이번 화 망하면요? 과장님이 책임지십니까?”

그리고 한록은...

“네.”

본부장의 총애를 받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답변을 했다.

“어...어떻게요?”

그냥 해본 말이었는지, 본인이 더 놀라서 묻는 김PD. 김PD에게 한록이 간단히 답했다.

언제나 광고를 따오는 게 숙명인 방송국 사람들의 삶. 그들이 가장 원할만한 답.

“반응 제대로 안 나오면 다음 영화도 <스타의 하루>에 PPL 넣겠습니다. 가격은 최고가로요. 지금 계약서에 조항 작성하죠.”

한록의 간단한, 그러나 파괴적일 정도로 강력한 답변. 그 말에 김PD가 얼른 답했다.

“좋습니다!”

*

그렇게 깔끔하게 끝난 회의.

김PD는 한록의 의견을 받아들여 엔딩 부분을 대본 없이 촬영 하기로 했다.

그리고 방금 전.

[가편집본 나와서 제작진들끼리 한 번 돌려봤거든요?]

한록이 미국에 나와 있는 사이, <스타의 하루>의 촬영과 가편집이 끝난 것이었다.

“잘 나왔습니까?”

한록이 아이디어를 낸 첫 방송.

고흐의 생애 역시 한록이 정리해서 보내준 것이므로, 어찌 보면 제작에 참여한 첫 방송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 결과는-

[과장님. 작가 하실 생각은 없으신 거죠?]

또 다른 러브콜.

오늘 하루에, 그것도 다른 분야에서 쏟아진 두 개의 러브콜을 떠올리며 한록은 생각했다.

‘요새 인력난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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