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 회사원이 선넘으면 생기는일-117화 (117/263)

117. 그냥 마케팅만 잘하면 안 될까?

“스크린 설치는 꼭 필요합니다. 그게 없으면 ‘더 서울’과의 협업은 그냥 고흐전 홍보에서 끝나니까요. 방송에서 <러빙 고흐>의 영상을 보여줘야 제대로 된 마케팅 효과가 나올겁니다.”

-최슬아가 ‘더 서울’의 고흐전을 혼자서 관람한다. 아름다운 고흐의 그림에 흠뻑 빠진 최슬아.

그리고 전시회장의 불이 꺼지고, 최슬아가 퇴장하려는 순간-

그 순간 눈앞에서 고흐의 그림들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게 한록이 구상하고 있는 이번 마케팅의 결정적인 장면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스크린 설치가 꼭 이뤄져야 하는 상황.

그러나 현차장은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듯한 얼굴이었다.

현차장은...

“이과장. 오랜만에 ‘그거’ 하는 거야?”

무언가 기대하는 듯한 눈빛이었다.

“그거요?”

한록의 말에 턱을 손에 괴고 멋진 포즈를 잡는 현차장. 현차장이 목소리를 내리깔고 말했다.

“나 이한록이다. 날 이길 자신 있으면 반대해라. 이거.”

현차장이 말하는 ‘그거’.

바로 한록의 특기인 압도적인 프레젠테이션이었다.

“...제가 그렇게 말합니까?”

“아니. 좀 더 무섭게 하지. 대답도 못 할 만큼 무섭게.”

“...”

‘내가 저런다고...?’

순간 자신의 회사생활을 되돌아보는 한록.

하지만 현차장이 이렇게 나오는 것도 이해는 간다.

반박을 불허하는 프레젠테이션과 회의. 그건 모두가 아는 한록의 특기니까.

“글쎄요. 이번엔 안 통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건 상대와 한록이 동등한 위치를 가졌을 때. 그래서 한록에게도 어느 정도 결정권이 있을 때 쓸 수 있는 방법이다.

“음. 그건 그렇지. 전시회 구성은 전적으로 ‘더 서울’ 권한이니까.”

지금은 한록이 아무리 좋은 아이디어를 가져가도 ‘더 서울’이 반대하면 그만인 상황.

그래서 회의가 2주나 지지부진하게 늘어진 것이었다.

“그렇죠. 제가 말을 아무리 잘한다고 해도 ‘더 서울’이 쉽게 말을 듣진 않을 겁니다.”

“그럼 어떡하려고?”

“다른 식으로 접근해야죠.”

하지만 그렇다고 한록이 2주간 헛짓거리만 하고 온 건 아니었다.

필름마켓에서 최대리와 일하면서 한록이 느낀 것들이 있었다.

‘판권부서에서 신경쓸 건 고부장님 뿐이에요. 강과장님은 무시하세요.’

상대에 대한 분석.

‘이거 팔리기 직전이에요. 지금 안 사가면 다른 사람이 사 갈 걸요?’

그리고 적당한 거짓말까지.

한록이 누가 들어도 맞는 말로 반박을 틀어막는 타입이라면, 최대리는 자기가 대화하는 사람이 듣고 싶어 하는 말로 마음을 움직이는 타입이었다.

과거라면 융통성 없는 한록이 절대 사용하지 않았을 방식이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자신이 그런 방식으로 사람을 설득할 수 있으리란 확신이 없었다.

하지만 필름마켓을 거치고 팬덤마케팅까지 도전한 지금.

“다른 식? 어떻게?”

“영악하게요.”

“...이과장이? 할 수 있겠어?”

“지금 아니면 또 언제 해보겠습니까.”

이제는 새로운 시도를 해봐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다음날. 아침부터 ‘더 서울’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과장님. 어제 말씀하신 내용 부서회의 끝났습니다. 스크린은 절대 안 된다고 결론 나왔습니다. 대신 영화 포스터 정도는 설치할 수 있습니다.]

한록에게 부서회의 내용을 전달하는 ‘더 서울’의 한과장. 한과장의 말을 들은 한록이 생각했다.

‘확실히 말이 아예 안 통하는 건 아니다,’

사실 ‘더 서울’은 이전 회사들에 비해 크게 비협조적으로 나오는 편은 아니었다.

가장 큰 이유는 하정엽이 직접 한록과의 협업을 지시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단순히 그 이유 하나로 더 서울이 협조적으로 나오는 것은 아니었다.

‘PPL이라. 좋습니다. 최대한 맞춰보겠습니다.’

최슬아의 섭외. 그리고 방송 광고에 무척이나 호의적이던 더 서울의 백부장.

미술관은 기본적으로 돈이 안 되는 사업이고, 그러다보니 언제나 적자에 시달리곤 했다.

그런데 다른 회사가 나서서 전시회를 대신 홍보해준다. 더 서울 입장에선 쌍수 들고 환영할 일이었다.

그래서 ‘더 서울’과의 협의는 스크린 설치 전까지는 잘 진행되고 있었다. 그런데 스크린 설치부터 갑자기 제동이 걸린 상황.

‘포스터는 걸어주겠다라.’

게다가 한과장의 말을 들어보면, 이 역시 막무가내로 반대를 하는 것도 아니었다.

‘분명 이유가 있는 거야.’

2주간 ‘더 서울’과 많은 얘기를 나눴던 한록. 한록이 그간 짐작해 왔던 부분을 물었다.

“한과장님. 혹시 *미디어 아트가 문제인 겁니까? <러빙 고흐> 영상 때문에 고흐전이 미디어 아트 전시가 될까 봐 걱정하시는 것 같아서요.”

*미디어 아트: 영상, 음악 등을 결합한 예술. 보통 디지털을 활용한 예술을 칭함.

미디어 아트 전시. 요새 전시회의 트렌드로, 그림을 원본으로 전시하는 게 아니라 스크린에 상영하거나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등 다양한 방법으로 변형해서 전시하는 것을 의미했다.

움직이는 고흐의 그림과 거기에 삽입된 음악. <러빙 고흐>는 사실 영화로 이루어진 미디어 아트 전시나 마찬가지였다.

한록의 질문에 한과장이 살짝 날을 세운 목소리로 물었다.

“갑자기 왜 그런 질문을 하세요?”

“<러빙 고흐> 자체가 미디어 아트에 가까우니까요. 아무래도 미디어 아트 때문에 전시 분위기가 훼손될까봐 걱정하시는 것 같아서 여쭤봤습니다.”

최근 기존 전시회보다 훨씬 많은 관심을 받고 있는 미디어 아트 전시.

다만 미디어 아트 전시는 관객들의 체험에 중점을 둔 전시였고, 사진을 찍거나 대화를 하는 등 기존 전시회보다 편안한 분위기로 진행되는 편이었다.

그러다보니 기존의 그림에 집중하는 전시를 선호하는 사람들은 싫어하는 방식이기도 했다.

[뭐, 그런 것도 있고...마음에 걸리는 점은 여러 가지죠. 아무튼, 스크린은 어렵고 포스터로 진행하시죠.]

한록의 질문에 한과장은 명확한 답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부정도 긍정도 아닌 그 애매한 답이 오히려 확신을 가지게 했다.

‘아니란 말은 안 하는군. 미디어 아트 때문이 맞아.’

역시 자신의 추측이 맞았다. 그렇다면 통할 만한 방법이 있었다.

“그 부분은 내일 회의 때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또요?]

“저희 측도 그냥 끝낼 수는 없는 문제라서요.”

[하...알겠습니다.]

한록의 말에 한과장이 한숨을 푹 쉬며 답했다.

*

“미디어 아트 때문에 스크린을 반대한다고? 왜?”

점심시간. 한록의 말에 현차장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미디어 아트 전시와 일반 전시회는 타겟층이 다르니까요. 고흐 전에 방해가 될까봐 걱정하는 것 같습니다.”

“아, 그렇지. 보통 미디어 아트는 애들 데리고 사진 찍으러 많이 가니까. 좀 시끄러워질 수 있겠네.”

“그리고 사실 그것보단, 기껏 구상한 전시회가 미디어 아트에 이목을 뺏기는 게 더 싫은 것 같습니다. 요즘은 그냥 전시회보다 미디어 아트 전시가 더 인기가 많으니까요.”

“어이구. 또 그거구만.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네.”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현차장. 잠시 후 현차장이 걱정되는 듯한 얼굴로 한록에게 물었다.

“근데 이러면 설득이 어렵겠는데? 미디어 아트 자체가 싫다는 거면 아예 <러빙 고흐> 영상은 불가능하단 거잖아.”

“‘더 서울’ 전체가 그런 입장인 건 아닙니다.”

현차장의 말에 한록은 지난 2주간의 회의를 떠올렸다.

처음에는 전시 중간에 <러빙 고흐>의 영상을 삽입할 수 없냐고 물었던 한록.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겁니까? 그게 말이 돼요?

이번 전시회의 담당자인 남차장은 그 말에 거의 치를 떠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아무래도 본인이 기획한 전시회다 보니, <러빙 고흐>로 시선이 쏠리는 것 자체가 싫은 듯한 모습이었다.

-남차장. 말 좀 가려서 하자.

하지만 부장의 의견은 조금 다른 듯 했다. ‘더 서울’ 서양미술부서의 백부장. 이 전시회의 결정권자.

-이과장. 일단 더 얘기해봐요.

그녀의 실은 <러빙 고흐>에 대해 얘기할 때마다 한록에게 조금씩 가까워지고 있었다.

게다가 한록이 스크린을 설치하는 것에 대해 얘기할 때도 백부장은 크게 반대하는 반응이 아니었다.

-확실히 <러빙 고흐> 영상까지 나오면 사람들이 더 관심을 가지겠네. 요즘은 미디어 아트 전시가 훨씬 관객이 많이 들잖아.

그 말과 함께 한록의 어깨에 닿을 듯 말 듯 움직이던 그녀의 실.

-부장님. 이제 와서 어떻게 전시회 구조를 바꿉니까.

-음...그건 그렇지.

그러나 그녀의 실은 남차장의 강력한 반대에 다시 슬그머니 후퇴를 해버렸다.

그 실을 보고 한록은 지금 ‘더 서울’ 안에서 벌어지는 일을 알 수 있었다.

‘백부장은 스크린 설치를 싫어하는 게 아니야. 오히려 해볼만하다고 생각한다. 다만 확신이 없는 거야.’

새로운 방식을 시도해보고 싶은. 그러나 그러기에는 우유부단한 백부장.

그리고 그 뒤에서 부서의 의견을 좌지우지하는 남차장.

담당자와 결정권자의 충돌. 그게 지금 ‘더 서울’에서 일어나는 일이었다.

*

회상을 마친 한록.

2주간의 회의를 통해 느낀 것이 있다면, 남차장은 무슨 말을 해도 마음을 바꾸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그렇다면-

‘강과장님은 신경쓸 거 없어요. 어차피 결정은 고부장님이 하니까.’

‘중요한 것만 가져가고, 나머지는 버립시다.’

필름마켓때 들었던 최대리의 말.

그 말을 한 번 활용해볼 때였다.

“결정을 내리는 건 백부장님입니다. 중요한 건 백부장님을 설득하는 겁니다.”

한록의 말에 현차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어차피 결정권자는 백부장이니까. 근데 거기도 망설이고 있다며?”

“맞습니다. 미디어 아트가 전시의 스포트라이트를 가져가는 것도 맞고, 전시 분위기를 훼손할 가능성도 있는 건 사실이니까요. 그래도 시도해볼만한 장점들도 함께 있죠. 백부장님한테 이 장점에 대한 확신을 주면 됩니다.”

“그럼 남차장은?”

“남차장님이 반대하든 말든 상관 없습니다.”

“음, 신기하네. 이건 이과장이 일하는 스타일이 아닌데.”

현차장이 놀랍다는 듯 한록을 바라보았다. 한록이 새로운 업무 방식을 선택했다는 걸 눈치챈 듯한 얼굴이었다.

그 말에 한록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시간이 많지 않으니 이번에는 효율적으로 가보려고 합니다.”

촬영 기획안까지 남은 시간은 일주일. 그리고 당장 내일 회의가 있는 상황. 그렇다면 이제는 그간 배워온 걸 모두 활용해볼 때였다.

자신의 특기인 설득과 협박.

거기에 최대리가 보여준 효율성을 더한다.

그리고...

“그래서 차장님이 해주셔야할 게 있습니다.”

한록이 가장 신뢰하는 사람의 방식까지.

“나? 나 뭐하는데?”

한록의 말에 현차장이 얼떨떨한 얼굴로 물었다.

*

그리고 다음날. 한록과 현차장으 회의를 위해 ‘더 서울’을 찾았다.

“몇 주 째 똑같은 얘기를 하는 겁니까. 영상을 트는 건 안 된다고요.”

회의실에 앉자마자 불쾌한 얼굴로 말하는 남차장.

“남차장. 지금 그거 조율하려고 회의 하는 거잖아.”

그런 남차장을 말리는 백부장.

“처음 뵙겠습니다, 현주훈 차장입니다.”

더 서울과의 회의에 처음으로 등장한 현차장과-

“저도 몇 번이나 말씀 드립니까. 꼭 영상이 들어가야 합니다.”

평소보다 더욱 사나워진 한록.

그들이 함께 하는 회의가 드디어 시작되었다.

*

“다시 말씀드리지만, 스크린 설치는 안 됩니다. 포토존도 절대 안 돼요. 그런 거 하는 순간 전시회 시장통 된다구요. 포스터에서 끝냅시다.”

회의가 시작하자마자 다짜고짜 들어오는 남차장. 현차장이 그에 답했다.

“네, 미디어 아트 전시들이 좀 시끄러운 건 사실이죠. 걱정하시는 것도 이해가 갑니다.”

현차장의 말에 백부장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현차장이 한록처럼 스크린을 설치해야하는 이유를 끈질기게 설득하리라 예상한 것이었다.

그러나 현차장은 일단 남차장의 말을 수긍하고 얘기를 시작했다.

“더 서울분들이 워낙 걱정하시니까. 저도 전시회에 대해서 공부를 좀 했어요. 전시회란게 그냥 그림을 거는 게 아니라 동선부터 조명까지 하나하나 고려해야하는 거잖아요. 얼마나 고생이 많으셨겠어요. 그런데 거기에 미디어 아트가 들어가면 좀 조화가 깨지기는 하죠.”

“...이과장님이랑 의견이 좀 다르신가 봅니다?”

“저희도 의견이 좀 갈리는 부분이 있어서요.”

더 서울을 다 이해하는 듯, 심지어 한록의 말에 반대하는 듯한 태도로 나오는 현차장.

‘...말이 좀 통하는 사람이 왔나?’

현차장의 말에 마음이 조금 누그러진 남차장.

‘대화하기 편한 사람이네. 이과장처럼 무조건 자기 주장만 얘기하는 게 아니고.’

그리고 현차장에게 호감을 가진 백부장까지.

현차장은 순식간에 ‘더 서울’과의 회의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해버렸다.

‘현차장님. 차장님이 백부장의 호감을 사주셨으면 합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의 뒤에는 한록의 계획이 있었다.

*

전날 밤. 더 서울과의 회의를 준비하는 한록과 현차장.

한록이 내민 자료에 현차장이 의아한 듯 물었다.

“이걸 전부 내가 말하라고? 이과장이 말하는 게 낫지 않아?”

“제 의견에는 일단 반대하고 보는 사람들이 있으니까요. 차장님이 최대한 중립적인 입장으로 더 서울의 신뢰를 받으셔야 합니다.”

한록의 말에 현차장이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말을 멈췄다. 잠시 기억을 더듬던 현차장.

잠시 후, 현차장이 드디어 떠오른 기억에 한록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거 굿캡 배드캡 전략이네.”

악역을 담당하는 사람과 친절한 역할을 담당하는 사람이 조를 짠다. 그리고 설득과 협박 두가지 방법으로 사람을 설득한다.

전통적인 취조 기술.

“내가 좋아하는 방식인데?”

그리고 현차장이 <퀸> 상영 당시 락 페스티벌에서 관객들의 원성을 잠재우기 위해 썼던 방식이었다.

현차장의 말에 한록이 씩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네, 차장님한테 배웠습니다.”

설득. 협박. 연기. 최대리. 그리고 현차장.

한록은 그간 자신이 보기에 좋아보였던 방식들을 그대로 흡수해서 적용하고 있었다.

‘이과장이 마케팅은 잘해도 다른 부분에서 머리를 굴리는 타입은 아니었는데. 엄청 똑똑하게 구네.’

인간 관계와 정치. 자신이 약하던 부분에서 빠른 성장을 보이고 있는 한록.

그런 한록의 모습에 현차장이 혀를 내두르며 말했다.

“이과장.”

“네.”

“그냥 마케팅만 잘하면 안 될까? 이과장 요즘 너무 무서워졌어.”

“안 됩니다.”

“왜?”

현차장의 말에 한록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사람의 마음을 어떻게 움직이는가. 어떤 식으로 남을 회유하는가.

“이제는 어떻게 해야할지 알 것 같거든요.”

그 답이 이제 눈앞에 보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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