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 올해의 주인공은.
최경준이 한록에게 물었다.
“자네가 이런 식으로 말하는 건 의외군. 항상 할 수 있다고 말하지 않았나?”
언제나 남들이 안 될 거라는 일을 가지고 ‘할 수 있다’라고 말하던 한록.
‘지나친 자신감이 본인 성격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군.’
아무래도 한록은 자신의 생각보다 더 냉철한 타입인 것 같았다.
“제가 그런 말을 할 때는 정말 확신이 있어서 하는 말입니다. 이번에는 모릅니다.”
한록이 아주 솔직하게 말했다.
<삼일의 삶>, <퀸>, 그리고 <러빙 고흐>와 <부산 열차>까지.
지금까지의 영화들은 모두 한록이 미래를 보고 왔기 때문에 ‘이 영화라면 마케팅이 바뀌는 것만으로도 성공할 수 있다’고 말한 작품들이었다.
하지만 <도착지>는 그렇게 확신할 수는 없는 작품이었다.
‘<도착지>는 마케팅이 부족해서 망한 영화는 아니었으니까.’
“그렇다면 <수면>을 담당하는 게 나을 텐데. 자네가 <수면>에 들어가면 천만 영화는 따놓은 거나 마찬가지 아닌가. 자네가 말하는 대상 역시 마찬가지고.”
최경준이 아깝다는 듯한 말투로 말했다. 아무래도 최경준은 한록이 서감독의 <수면>을 담당하길 원하는 것 같았다.
“네, 저도 그러리라 생각합니다. <수면>은 좋은 영화니까요. 하지만 제가 <도착지>를 성공시키면 대상 후보가 둘이 생기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마음을 바꿀 생각이 없는 한록.
“본부장님.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최경준이 말하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한록은 최경준에게 자신이 세운 계획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저는 <도착지>를 연말 시상식을 타겟으로 마케팅 하려 합니다.”
연말 시상식.
베니스 영화제나 칸 영화제 같은 권위는 없다하더라도, ‘한국에서 올해 최고의 영화는 무엇이었냐’가 결정되는 곳이다.
“또한 <삼일의 삶>과 <지구 특공대> 역시 수상하도록 만들겠습니다.”
시청자. 스타배우. 천만 영화가 모이는 곳.
그리고 올해 영화계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결정하는 곳.
한록은 그곳의 주인공이 누가 될지 이미 알고 있었다.
“본부장님. 올해의 주인공은...”
한록이 담당한 영화들. <삼일의 삶>. <지구 특공대>. <부산 열차>. <도착지>.
“제가 될 겁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
그 말에 최경준은 한록이 그리는 미래를 떠올렸다.
눈부신 조명과 레드카펫. 그리고 그 곳을 휩쓸 CK의 영화들과 한록.
거기에 <도착지>와 <수면>이 대상의 자리를 두고 다투는 모습까지.
자신의 회사가 연말 시상식의 모든 이슈를 가져가는 모습.
본부장인 최경준이라면 당연히 매혹 될 수 밖에 없는 장면들이었다.
‘하지만...여전히 위험하다.’
연말 시상식 대상을 두고 자기 회사의 작품이 경쟁한다. 최경준 입장에서는 구미가 당기는 일이었다.
하지만 당사자인 한록은 <수면>을 맡는 게 안전한 상황.
“왜 굳이 어려운 일을 하려 하는 거지? 그냥 ‘해보고 싶다’ 정도로 <수면>을 포기하겠다는 건가?”
‘대체 왜?’
한록에게 사람들이 항상 하는 말이었다.
왜 유명한 감독의 영화를 맡지 않는지. 왜 늘 새로운 도전을 하는지.
그에 대한 한록의 답은 간단했다.
“본부장님. 저는 마케팅에서만큼은 최고가 되고 싶습니다.”
“그래. 당연히 알고 있네.”
“그러려면 불가능한 일에 도전하고, 거기서 성공해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어려울 수도 있는 것. 남들은 안 될 거라 말하는 것. 그리고 자신도 확신할 수 없는 것.
하지만 도전해보고 싶은 것.
한록은 <도착지>를 통해 자신이 얼마나 성장했는지 알고 싶었던 것이다.
한록의 말을 듣고 생각에 잠긴 최경준.
천만 영화를 달성한 <퀸>과 <부산 열차>. 그리고 <수면> 역시 천만을 노리고 있다.
그리고 정말 한록이 말한 것처럼 <삼일의 삶>과 <지구 특공대>. 그리고 <도착지>까지 영화제에서 수상한다면.
“방송국은 내 손에 오게 되겠군.”
홈쇼핑. 음악. 그리고 영화. 세 본부의 싸움은 자신의 승리로 끝나게 될 것이었다.
“내가 말했지. 나는 방송국 인수에서 상황을 끝낼 생각은 없어. 방송국이 가지고 있는 자원을 활용해서 ENM을 성장시킬 거라네.”
마치 자기가 ENM의 주인이 되기라도 한 것처럼 말하는 최경준.
그러나 최경준의 말은 과장이 아니었다. 방송국은 그 자체로도 한 회사와 비슷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방송국에 포함된 드라마 제작사와 OTT 서비스들까지 존재하기 때문이었다.
한 마디로 방송국을 가져가는 사람이 CK가 가진 모든 컨텐츠의 주인이 되는 상황.
방송국의 국장이 된다는 건 그냥 계열사의 임원이 되는 게 아니라, 그룹 전체에서 주목받는 사람이 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지금 ENM은 CK그룹의 회사 중 소규모 회사일 뿐이지. 하지만 내가 국장이 된다면, ENM은 CK의 대표기업이 될 거네.”
그리고 한록을 바라보는 최경준.
“그렇게 되면...”
언젠가 이 사무실에서 한록에게 했던 말.
“자네는 본부장의 자리를 준비해야겠지.”
‘내 뒤를 이을 사람이 필요하다’는 그 말.
그 말이 정말 얼마 남지 않은 상황이었다.
한록을 바라보는 최경준.
한록은 <부산 열차>와 <러빙 고흐>로 이미 하정엽의 눈에 충분히 들어온 상황이었다.
만약 여기서 시상식까지 가져간다면, 한록이 최연소 임원의 자리에 올라가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올해의 주인공이라.”
한록의 말이 아주 적절한 이 시점.
“자네가 원하는 대로 해보게. 주인공이라면 그래야지.”
최경준이 바라는 주인공은 바로 한록이었다.
*
한록은 최경준과의 대화를 마치고 사무실로 향했다.
자신의 자리에 앉은 한록. 한록은 오늘 최경준과의 얘기를 떠올렸다.
‘자네는 본부장의 자리를 준비해야겠지.’
한록이 회귀 후 가졌던 첫 목표, 최경준.
그 자리가 생각보다 빨리 다가온 상황이었다.
‘본부장이란 자리는 아직 이르다. 하지만 좋은 기회인 건 맞아.’
<러빙 고흐>와 <도착지>만 예상대로 잘 끝낸다면 한록은 이제 곧 영화사업본부에서 상당한 권력자가 될 것이 분명했다.
‘우선 더 서울이 엮인 <러빙 고흐>를 잘 끝내야 한다.’
그렇게 다짐한 한록.
“과장님. <러빙 고흐> 기사 반응 나왔습니다.”
때마침 하대리가 <러빙 고흐> 때문에 한록을 찾아왔다.
한록이 미리 언론에 유포한 ‘반 고흐 전 1인 관람’에 대한 반응을 조사해온 것이었다.
“메신저로 보내셔도 됩니다.”
“직접 말씀드리고 싶은 부분이 있어서요.”
간이의자를 가져와 한록의 곁에 앉는 하대리. 하대리는 한록에게 할 말이 있는 듯 보였다.
‘무슨 일 있나?’
<러빙 고흐>에 무슨 문제라도 생긴 걸까. 한록이 하대리에게 물었다.
“하실 말씀이 뭐죠? <러빙 고흐>에 문제라도 생겼나요?”
“아뇨, 반응은 좋습니다. 과장님 말씀대로예요.”
“그런데요?”
“그게...너무 과장님 말씀대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메일 한 번 열어보시겠어요?”
하대리의 말에 한록이 사내 메일을 열어보았다. 메일에 들어있는 것은 소식을 접한 사람들의 반응.
[유권호: 반 고흐 전 1인 관람 문의합니다.]
그리고 작가 유권호의 협업 요청이었다.
“유권호만이 아니에요. 최슬아도 우리 기사를 가져가서 자기 인스타그램에 올렸습니다.”
심각한 표정으로 말하는 하대리. 하대리의 반응이 심상치 않던 이유는 바로 이것이었다.
‘작가 유권호와 작곡가 최슬아가 팬덤을 이끌 것이다.’
한록의 말이 정말 예언처럼 들어맞고 있었다.
“과장님. 저 진짜 궁금해요. 그냥 잘 됐다고 넘어가기엔 너무 과장님 말대로 진행되고 있잖아요. 이걸 대체 어떻게 아신 겁니까?
하대리가 심각한 표정으로 한록에게 물었다. 도무지 이 상황이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최슬아는 반 고흐 전 얘기가 나왔을 때부터 이미 인스타그램에서 관심을 보이고 있었어요. 그리고 유권호는 원래부터 자기 글에 고흐와 관련된 얘기를 자주 쓰기로 유명했고요.”
“아...원래부터 둘을 지켜보고 계셨군요.”
하대리에게 추측의 근거를 말해주는 한록.
한록의 말에 하대리가 이제야 이해가 간다는 듯 답했다.
“둘한테 이게 <러빙 고흐> 이벤트란 걸 알리고 협업 요청할까요?”
“아뇨, 아직은 기다려요. 조금 더 기대감을 모아놨다가, 나중에 <러빙 고흐> 광고가 공개되면 한꺼번에 알립시다. 그게 반응이 더 좋을 거예요.”
“그럼 광고 송출과 함께 협업 요청하겠다고 더 서울에 보내겠습니다.”
“네, 그렇게 해주세요.”
그리고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려던 하대리. 하대리가 다시 한 번 한록에게 물었다.
“과장님. 이건 그냥 궁금해서 묻는 건데요. 광고가 나오면 앞으로는 어떻게 될 것 같으세요?”
하대리의 말에 한록은 앞으로 벌어질 일을 생각했다.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광고니, 꽤 반응이 좋을겁니다. 아마 유권호 작가가 이 광고를 특히 좋아할 것 같네요.”
“...알겠습니다.”
또다시 이어진 한록의 예언. 그 말에 하대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자리로 돌아간 하대리는 보고서를 쓰기 시작했다. 광고 송출을 요청하는 보고서였다.
[차후 <러빙 고흐>에 대한 광고를 진행예정.]
그러다가 마지막 장에 도달하자, 하대리는 손을 멈추고 머뭇거리기 시작했다.
[예상효과: ]
이전 보고서에 예상효과를 ‘유권호와 최슬아의 반응’이라고 적었던 한록. 하대리는 한록에게 그에 대해 ‘말도 안 된다’라고 지적했었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정말 이과장님 말처럼 됐지.’
이한록이 말하는 것은 현실이 될 것이다.
망설이던 하대리가 보고서를 채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30분 후. 하대리의 보고서를 받아 본 한록.
[광고 예상효과: 유권호 작가가 광고에 큰 관심을 보일 것으로 예상됨.]
자신의 말을 그대로 옮겨적은 보고서에 한록이 피식 미소를 지었다.
[하대리님. 제 말 너무 그대로 가져가신 거 아닙니까? 만약 틀리면 어떡하시려고요.]
장난스럽게 보낸 메시지. 그리고 그에 대한 하대리의 답.
[틀릴 리가 없잖아요.]
동료의 무한한 신뢰에 한록이 어깨를 으쓱였다.
회사에 자신을 이렇게까지 신뢰하는 사람이 있다. 솔직히 말해서...
[네, 틀리면 제가 책임질테니 하대리님은 걱정마세요.]
아주 뿌듯한 기분이었다.
*
그날 밤. CK ENM에서는 예정에 없던 본부장 회의가 소집되었다.
아직도 회사 어디를 가든 하루 종일 <부산 열차>에 대한 얘기가 나오는 상황이다. 이런 상황에서 갑작스럽게 본부장 회의가 소집되었다.
‘인수전에 대한 얘기가 나오겠군.’
본부장들은 자신의 운명을 예감하며 회의실로 향했다.
회의가 시작되자, 모두가 예상한 것처럼 하정엽이 인수전에 대한 얘기를 꺼냈다.
“방송국 인수 절차가 거의 끝났습니다. 방송국은 올해 안에 우리 ENM으로 편입될 겁니다.”
이제 완전히 ENM의 소유가 된 방송국. 남은 것은, 본부장 중 누가 국장의 지위를 가져가느냐에 대한 것이었다.
거의 한 회사의 사장 정도의 위치라 말할 수 있는 방송국의 국장자리.
모든 본부장이 그 자리를 위해 자신의 회사생활을 걸었다.
“홈쇼핑 본부, 이번 F/W시즌 컬렉션은 어떻게 됐습니까.”
“...예상보다 매출이 저조한 상황입니다. 하지만, 후속 기획으로 만회를...”
“실패했단 거군요.”
하지만 그 자리를 가져갈 수 있는 건 단 한명 뿐이다.
“홈쇼핑 본부는 인수전에서 제외합니다.”
하정엽의 단호한 목소리에 홈쇼핑 본부장이 고개를 떨궜다.
‘경쟁자가 한 명 줄었군.’
음악사업본부 문오석이 초조한 얼굴로 하정엽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CK ENM의 캐쉬카우이자 인수전의 가장 유력한 후보였던 홈쇼핑 본부가 후보에서 제외됐다. 하지만 이건 기뻐할 상황이 아니었다.
“영화사업본부.”
홈쇼핑 본부의 빈자리를 노리는 영화사업본부가 있기 때문이었다.
하정엽의 부름에 최경준이 자신있게 고개를 들었다.
“<퀸>이 1100만을 달성했습니다. 또한, <부산 열차>에 대해 계속 해외에서 협업요청이 들어오는 상황입니다.”
자신만만한 얼굴로 답하는 최경준.
“특히 <부산 열차>는...”
그리고 최경준이 <부산 열차>의 성과에 대해 얘기하려 할 때, 누군가 다급히 회의실 안으로 들어왔다. 하정엽의 비서였다.
“사장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하정엽에게 귓속말을 하는 비서. 그 말을 들은 하정엽이 고개를 끄덕인 후 본부장들을 바라보았다.
하정엽의 비서가 최경준의 말을 끊을 정도로 다급한 상황. 그것은-
“회장님이 오셨다고 합니다.”
하태준의 방문이었다.
<퀸>의 천만 달성. 그리고 <부산 열차>가 세계에서 주목을 받는 이 시점에서 하태준의 방문.
‘하필이면 지금이라니.’
문오석이 얼굴을 찌푸렸고, 최경준은 승리의 미소를 지었다.
마침 영화사업본부의 성과가 좋을 때 회장이 회사에 방문했다. 이건 <부산 열차>의 성과를 전하기에 아주 좋은 기회였다.
그리고 그보다 더 기분 좋은 일은.
‘지금 같은 시기에 찾아오셨다면 분명 이유가 있을 거다.’
하태준의 방문이 결코 우연이 아닐 거란 생각이 들었다는 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