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 회사원이 선넘으면 생기는일-109화 (109/263)

109. 도망쳐!

“이게 망할 것 같아?”

정부장의 말에 아무런 답을 하지 못하는 고부장.

고부장은 그저 부들부들 떨며 정부장을 노려볼 뿐이었다.

<부산 열차>가 잘 될 것이라는 것. 한록은 거만을 떤 게 아니라 정말 고부장보다 뛰어난 사람이란 것. 그 모든 게 증명 된 상황.

이 상황에서 더 이상 고부장이 할 수 있는 말은 없었다.

‘더 할 말도 없군.’

아직 제로아워가 끝나지 않았고, 판권부서의 협력이 필요한 시기였다.

고부장의 패배가 명백해진 상황. 그런 상황에서 굳이 고부장을 자극할 필요는 없다고 판단한 정부장.

정부장은 고부장을 뒤로하고 옥상문을 열었다.

하지만, 역시...

“고부장.”

“그 놈 이한록이야.”

이 정도 생색은 내주고 싶었다.

*

고부장과의 대화를 마치고 마케팅부서로 돌아온 정부장.

사람들이 정부장을 보고 모두 같은 생각을 떠올렸다.

‘기분이 좋아 보이시는데...?’

분명 9시까지 야근 중인데도 정부장의 발걸음은 가벼워보였다.

“잘했다.”

그리고 한록의 등을 툭 치고 가기까지.

정부장과 고부장의 대화 내용을 알 리 없는 사람들은 그저 어리둥절한 얼굴로 정부장을 바라볼 뿐이었다.

[이과장. 무슨 일이야?]

[저도 모르겠습니다.]

한록 역시 의아한 건 마찬가지인 상황.

하지만 지금은 정부장의 기분 같은 걸 신경쓸 상황이 아니었다. 정부장을 찾아간 한록이 말했다.

“부장님. 지금 <러빙 고흐> 이벤트 공지사항 올리려고 합니다. ‘더 서울’ SNS에 올라갈 내용입니다.”

“이걸 지금 해왔어?”

“지금 반응을 체크해놔야 나중에 마케팅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부산 열차>의 개봉만으로도 바쁜 상황. 한록은 그 와중에 <러빙 고흐>도 컨트롤 하고 있었다.

“너 잠은 자고 있냐? <러빙 고흐>는 너무 신경쓰지 말고 <부산 열차>에 집중 해라.”

은연중에 <러빙 고흐>에 큰 기대가 없음을 드러낸 정부장. 정부장이 한록이 건넨 파일을 넘겨보았다.

“‘반 고흐 전’ 1인 관람 얘기를 미리 언론에 흘린다는 거지?”

“네, 맞습니다.”

“<러빙 고흐> 얘기는 빼고?”

“네. 최대한 궁금증을 모아가다가 한꺼번에 터뜨릴 생각입니다.”

한록이 제안한 ‘반 고흐 전 1인 관람’ 이벤트.

한록은 본격적인 마케팅이 시작되기 전 그 얘기를 미리 공개해 사람들의 반응을 테스트하겠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흠...”

‘알겠다’는 말 대신 애매한 반응을 보이는 정부장.

한록은 정부장이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바로 알아차렸다.

‘하대리님하고 똑같은 반응이시군.’

방금 전 <러빙 고흐>로 하대리와 얘기를 나눈 한록.

‘과장님 이거...진짜 최슬아랑 유권호 작가가 반응할까요? 그걸 저희가 알 수 있나요?’

언제나 한록의 말을 잘 따라주던 하대리가 처음으로 제기한 의문.

그리고 보고서 마지막 장에 적힌 내용.

[예상효과.

1. ‘더 서울’의 반 고흐 전시전에 대한

관심 증대.

2. 작곡가 최슬아와 작가 유권호로부터 연락이 올 것임을 예상.]

정부장 역시 보고서 마지막장을 읽고 하대리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래. 이대로 진행해.”

그리고 정부장은 생각보다 쉽게 허가를 내렸다.

시원한 결정에 당황한 한록이 정부장에게 물었다.

“더 설명이 필요하지 않으십니까? 궁금하신 게 있을 것 같습니다.”

“많지. 솔직히 말해서, 난 이게 진짜 잘 될지 모르겠다. 아직 못 믿겠어.”

그렇게 말하며 최슬아의 이름을 손가락으로 톡톡 가리키는 정부장.

그러나 정부장의 태도는 반대하는 사람의 태도는 아니었다.

“그건 <지구 특공대>랑 <퀸> 때도 똑같았어.”

<지구 특공대>. 그리고 <퀸>.

정부장이 반대했지만 한록이 좋은 결과를 가져온 영화들이었다.

“내가 자꾸 하지 말라고 하면 니가 아이디어가 있어도 못 가져올 거 아냐. 결과는 모르겠고, 일단 해 봐.”

한록의 성과를 믿는다. 그리고 그 전에, 한록이 원하는 일을 하길 바란다는 정부장의 말.

“...감사합니다.”

그 말에 한록이 진심으로 답했다.

언제나 사사건건 시비가 걸리는 자신의 프로젝트. 하지만, 자신이 진행한다는 이유만으로 이렇게 믿어주는 사람도 있다.

그게 정말 기뻤고, 또 고마웠다.

“부장님.”

“왜.”

“<러빙 고흐> 정말 잘해보겠습니다.”

“그래야지. 이거 실패하면 또 하지말라고 할 지도 몰라.”

정부장의 솔직한 말에 한록이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한록 역시 솔직하게 답했다.

“약속드리겠습니다. 그럴 일 없게 하겠습니다.”

“그걸 어떻게 장담해. 니가 예언자라서?”

한록이 했던 농담을 떠올리는 정부장. 그러나 한록은 다른 얘기를 했다.

“아뇨. 부장님이 믿어주시니까요.”

“징그러워. 나가.”

그렇게 한록을 쫓아낸 정부장.

사내 메신저를 켠 정부장이 고부장의 이름을 보고 슬쩍 미소 지었다.

“이게 내 부하다, 임마.”

그리고 시간이 지나 <부산 열차> 개봉 당일.

아침부터 CK ENM에는 묘한 긴장이 흐르고 있었다.

<부산 열차>는 제작부터 배급까지 모두 CK ENM에서 맡은 영화였고, 이미 필름마켓에서 큰 관심을 받은 상황이었다.

그러다보니 CK ENM의 모든 사람들이 <부산 열차>의 흥행을 지켜보는 상황.

“<부산 열차> 서울 지역 전부 매진이래.”

“올해 우리가 만든 영화 중에 최초 아냐?”

<부산 열차>의 제작과 투자를 맡은 제작부서.

“부장님. 스웨덴에서 다른 영화도 제로아워 적용할 수 없나 물어보는데요.”

“...그거 우리 관할 아냐. 마케팅 부서로 넘겨.”

고부장의 판권 부서.

“<부산 열차>는 어떻게 되고 있어?”

“서울 지역 전석 매진이라고 합니다, 본부장님.”

“...”

그리고 다른 본부들의 견제와-

“사장님. <부산 열차>의 개봉이 오늘입니다.”

그 모든 것을 즐기고 있는 최경준.

“그렇습니까.”

최경준의 말에 서류를 보던 하정엽이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관객 반응 나오면 바로 보고하세요.”

“네, 알겠습니다.”

사람들의 관심. 본부장들의 긴장. 그리고 하정엽의 기대 속에 하루가 흘러갔다.

그리고 저녁 9시.

“이만 들어가 보겠습니다.”

오늘도 야근을 하던 한록이 9시가 되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부산 열차>의 첫 반응을 지켜보기 위해서였다.

“고생했다. 내일은 반차써라.”

“감사합니다.”

정부장에게 인사를 하고 짐을 챙기는 한록. 한록이 최대리를 보고 물었다.

“같이 갈 거죠?”

광고가 공개되던 날 한록처럼 현장에 나타났던 최대리. 한록의 말에 최대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그렇게 용산 아이맥스로 향한 한록과 최대리.

영화관은 평일 저녁 10시라고는 믿을 수 없을만큼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들의 손에 들려있는 <부산 열차>의 기차표 모양 특별 티켓.

그때 영화관 벽면의 스크린에서 <부산 열차>의 예고편이 나오기 시작했다.

“아, <부산 열차>다.”

“너 저거 광고 봤어? 엄마 부르는 거.”

“그거 안 본 사람도 있냐. 미국에도 나오던데.”

“그 광고 한국에서 만든거래.”

“진짜? 근데 미국에서도 유명해진 거야?”

“응. 이 인터뷰 봐봐. 한국 사람이었어.”

사람들 사이에서 나오는 광고에 대한 얘기. 그때 예고편이 끝나고 광고가 송출되기 시작했다.

[아빠!]

이제는 너무나 유명해진 어린아이의 목소리.

그리고...

“도망쳐!”

광고를 따라 말하는 누군가.

“아, 뭐야.”

사람들은 누군가의 목소리를 듣고 웃음을 터뜨렸고, 한록과 최대리를 서로를 바라보았다.

모두가 알고 있는, 그래서 따라하기만 해도 웃음이 나오는 광고.

그걸 본 순간 한록은 아주 강한 예감을 느꼈다.

“최대리님.”

한록이 최대리에게 말했다.

“이건 천만 갈 겁니다.”

*

같은 시간, 미국. 바쁘게 집을 나서는 사람이 있었다.

[준. 오늘 몇 시에 들어와?]

일본에서 헐리웃으로 돌아간 김준이었다.

[1시. 오늘은 반응만 체크하고 들어올 거야.]

이번 달 개봉 영화의 반응을 체크하기 위해 영화관으로 향하는 김준.

김준은 지하철을 타며 어제의 일을 떠올렸다.

-[준. 여기야.]

어제는 더 필름 직원들간의 술자리가 있는 날이었다.

-[준. 내가 어제 누굴 만난 줄 알아? 브래드 피트야.]

-[여기 브래드 피트 못 만나 본 사람도 있나?]

-[그냥 만난 게 아니야! 같이 저녁도 먹었다고. 다음 영화 투자 얘기를 했어.]

-[오, 그건 좀 괜찮네.]

영화계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헐리웃. 그리고 헐리웃의 거물 ‘더 필름’.

‘더 필름’의 직원들이 모인 곳이다 보니, 유명 영화와 연예인에 대한 얘기가 마치 옆집 사람 얘기하듯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그리고 때마침 가게의 TV에서 나오는 <부산 열차>의 광고.

-[다들 저 광고 봤지? 나 내일 <부산 열차> 보러 가.]

-[아, 부산열차. 필름마켓 때부터 지켜봤지. 제롬이 선수를 쳐서 못 샀어.]

-[광고 반응 좋더라. 제롬이 또 한 건 했군.]

<부산 열차>에 대한 연이은 호평. 동료들의 칭찬에 김준이 얼굴을 구기며 술을 들이켰다.

한록이 <부산 열차>를 담당했고, TV광고까지 만들었다는 사실을 이미 전해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래봤자 아시아 영화야. 우리가 신경 쓸 영화는 아니지.]

김준의 가시 돋힌 말. 그 말에 자리에 있던 모두가 김준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건 당연한 얘기지.]

김준의 말에 당연하다는 듯 답했다.

-[한국 영화 치고 잘했단 거지.]

-[난 저거 20만 달러에 사려고 했어. 제롬은 사기당한 거야.]

-[광고는 좋았어. 그런데 한국 좀비 영화라...흥행은 모르겠네.]

거만한 태도로 <부산 열차>를 평가하는 더 필름의 직원들.

그들은 세계적인 탑배우와 저녁 식사를 같이 하는 사람이었고, 몇 천억짜리 영화를 담당하는 사람들이었다.

아무리 광고가 이슈가 되더라도 그들에게 <부산 열차>는 그저 한국의 저예산 영화일뿐이었다.

-[준은 <부산 열차>를 싫어하는 것 같네? 한국 영화인데. 관심 없어?]

-[관심 없어. 내가 담당하는 ‘레터’랑 같은 날 개봉하잖아.]

-[아, 그래. 그래도 뭐 그런 걸 신경써.]

-[어차피 상대도 안 될텐데.]

라이벌 조차 되지 못하는. 그래서 신경도 쓰이지 않는 영화.

그게 헐리웃에서 <부산 열차>와 한국 영화의 위치였다.

*

김준은 어제의 대화를 떠올리며 미소를 지었다.

동료들의 <부산 열차>에 대한 반응을 떠올리니 <퀸>에서의 굴욕은 모두 씻겨 내려가는 것 같았다.

‘그래, 이한록. 여긴 미국이야. 헐리웃이라고.’

그런 생각을 하다보니 어느새 영화관이 있는 역에 도착했다. 지하철 역에서 내린 김준은 곧장 영화관으로 향했다.

[...사람이 뭐 이리 많아?]

그리고 영화관에 모여있는 인파를 보고 눈을 찌푸렸다.

[<레터> 때문인가?]

잠깐동안 자신이 담당한 영화 때문에 사람들이 모인 것이라 착각한 김준. 그러나 김준의 착각은 오래 가지 못했다.

사람들의 손에 들린 기차표 모양의 티켓.

‘...설마.’

그리고 불안을 부채질하는 상사의 메시지까지.

[준. <부산 열차> 보고 와.]

경쟁사의 작품을 관람하고 분석하는 것. 그건 영화업계에서 흔한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 당장.]

이렇게 급한 지시는 전례 없는 일이었다.

[<부산 열차> 한 장이요.]

일단 김준은 표를 들고 상영관으로 향했다. 상영관은 빈자리가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로 꽉 차 있었다.

‘거의 매진이잖아.’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상영관으로 들어오는 사람들.

10분 정도가 지나자 상영관의 불이 꺼졌다.

[엄마!]

그리고 스크린에선 <부산 열차>의 광고가 나오기 시작했다.

[와우. 그 광고네.]

[리사. 너 부른다.]

광고를 보며 얘기를 나누는 사람들. 그들이 어느 순간 약속이라도 된 듯 말을 멈췄다. 그리고-

[RUN!]

“RUN!”

목소리가 나오는 순간 모두 함께 같은 단어를 외쳤다.

*

그 순간 김준은 생각했다.

<부산 열차>. 그리고 <부산 열차>와 동시에 개봉한 자신의 레터.

‘망했다.’

승자가 누군지 벌써부터 알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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