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 회사원이 선넘으면 생기는일-104화 (104/263)

< 104 : 회귀자 특전(2) >

정부장이 이렇게나 까칠하게 나오는 이유가 있었다.

10분 전, 정부장을 찾은 한록.

"부장님. 잠깐 시간 괜찮으십니까. <러빙 고흐> 상세 마케팅 방안 설명 드리려고 합니다."

"어. 앉아."

한록은 정부장 앞에서 <러빙 고흐>의 마케팅 방안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러빙 고흐>는 개봉 당시는 반응이 크지 않을 겁니다. 팬덤이 형성 된 개봉 2주차부터 흥행이 시작되리라 생각합니다."

반신반의한 표정으로 한록에게 묻는 정부장.

"의도는 좋은데 너무 막연해. 이런 독립 영화는 많잖아. 그런데 유화 애니메이션이란 이유만으로 <러빙고흐>만 팬덤이 생길 걸나 생각은 안 드는데."

"<러빙 고흐>만 팬덤이 생길 수 있는 이유가 있습니다. 다른 영화와 달리 <러빙 고흐>는 타겟 집단이 명확합니다. <러빙 고흐>의 팬덤이 될 수 있는 집단은 이 네 가지 집단입니다. 첫 번째, 예술 분야 종사자. 두 번째, 영화계 사람들. 세 번째, 예술, 특히 전시에 관심이 많은 30대 여성. 네 번째, 영상 제작과 관련된 분야의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이 본인들이 속한 집단 안에서 팬덤을 형성할 겁니다."

확신에 찬 한록의 말. 그러나 얘기를 들을수록 정부장의 얼굴은 굳어갔다. 한록의 말을 믿을 수가 없는 것이다.

'뭘 믿고 이렇게 확신하지?'

-특정 집단이 <러빙 고흐>의 팬이 될 것이고, 그래서 자발적으로 마케팅을 할 것이다.

너무나 추상적이고 불확실한 얘기다. 그러나 한록은 미래에 이런 일이 일어나리란 걸 확인하고 오기라도 한 사람처럼 말하고 있었다.

그렇게 정부장이 긴가민가하는 얼굴로 한록을 바라보고 있을 때, 정부장의 의문에 쐐기를 박는 한록의 말.

"<러빙 고흐>에 특히 좋은 반응을 보이리라 생각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작곡가 최슬아, 작가 유권호입니다. 이 사람들이 팬덤의 반응을 주도할 겁니다."

아예 예언이라도 하듯 이름을 말하는 한록.

그걸 보고 정부장이 어이가 없다는 듯 말했다.

"너 진짜 네가 미래에서 왔다고 생각하냐?"

특정 집단도 아니고, 아예 '이 사람이 <러빙 고흐>를 좋아할 것이다'라고 말하는 한록. 정부장의 입장에선 정말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그 사람들이 <러빙 고흐>를 좋아할지 아닐지 네가 어떻게 알아? 네가 신이야?"

그 말에 망설이는 한록.

한록은 실제로 사람들이 <러빙 고흐>에 큰 호평을 보내는 걸 목격했고, 최슬아와 유권호의 반응까지 지켜보았다.

그래서 이렇게 확신을 가지고 팬덤 마케팅을 추진할 수 있는 것.

그렇다고 정부장 앞에서 '네, 미래를 보고 왔습니다.' 라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대체 뭘 믿고 그런 말을 하냐?"

하지만 한록이기에 할 수 있는 말이 있었다.

"저를 믿습니다."

그 말에 한록을 바라보는 정부장.

"확신이 있는 이유는, 제가 그렇게 만들 거기 때문입니다."

엄청난 자신감과 확신. 오직 이한록만이 할 수 있는 말이었다.

"하..."

한록의 말에 정부장이 한숨을 쉬었다.

그 이한록이 '내가 그렇게 만들 것이다'라고 말한다.

없던 설득력도 갑자기 만들어버리는 사람. 한록.

"일단 알겠어. 가 봐."

정부장은 더 이상 반대하는 대신 한록을 자리로 돌려보냈다.

혼자 남은 정부장은 한록이 두고간 보고서를 다시 읽기 시작했다.

'...이걸 믿어야 하나?'

한록이 대단한 사람이란 것. 그리고 한록이 가져오는 방법은 아무리 허황된 것처럼 보여도 결국엔 성공한다는 것.

정부장이 모두 겪어봐서 알고 있는 일이었다.

'그래도 이번 건 너무 심해.'

하지만 이번 팬덤 마케팅은 이전과는 달랐다. 무당이라도 된 것처럼 특정인물을 집어서 얘기하는 한록.

아무리 한록이라도 이런 게 가능하냐는 의문은 당연한 것이었다.

'사장님이 지켜보시는 일이야. 그런데 '이한록이 장담했다'는 말만으로 일을 진행할 순 없어.'

한록의 예언을 지킬 것이냐. 아니면 안전하게 다른 방법을 생각해오라고 할 것이냐.

고민에 빠진 정부장은 옥상으로 향했다.

옥상에서 담배를 무는 정부장. 시원한 바람을 맞으니 생각이 좀 정리가 되는 기분이었다.

담배 두 대를 연달아 태우고나니 적당한 절충안이 떠오른다.

'그래. 이한록이 원하는 것도 하고, 안전한 방법도 따로 준비하라고 해야겠어.'

그렇게 생각한 정부장이 사무실로 돌아가려 할 때, 익숙한 얘기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고부장. 제로아워인가 뭔가. 그거 어떻게 되고 있어?"

투자부 신부장과 판권부 고부장이었다,

신부장의 말에 잔뜩 인상을 쓰는 고부장.

"날짜 잡혔어."

"잘 되고 있나봐?"

"신부장. 내 앞에서 이 얘기 하지마."

"이한록 그 놈이 엄청 싫은가 보네."

한록. 그리고 <부산 열차>에 대한 얘기를 하는 고부장과 신부장.

"초짜 새끼가 어지간히 설쳤어야지. 지가 뭐라도 되는 줄 아는 놈이야."

"뭐, 그런 생각 할만 하지 않나? 최연소 과장이잖아."

"그것도 한 때야. 직장인 중에 전성기 없는 사람이 어딨어? <러빙 고흐> 망하고 나면 정신 차리겠지."

"아, <러빙고흐>. 그건 위험하지. '더 서울'까지 끌어들였던데. 그건 좀 지나치지 않나?"

"내가 말했잖아. 본인이 뭐라도 되는 줄 안다고."

<러빙 고흐>가 실패하리라 점치는 고부장. 고부장의 말에는 악의가 느껴지고 있었다.

그 말에 정부장은 속에서 무언가 끓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정부장이 고부장과 신부장 앞으로 나섰다.

"고부장."

"...정부장."

"지금 우리 회사 영화들이 망하길 바라는 거 같은데. 맞아?"

"우리 얘기 들었어?"

"어. 다 들리니까 입조심하고 다녀."

정부장의 살벌한 말에 신부장이 뜨끔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정부장의 말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그리고 이한록한테 불만 있으면 나한테 얘기해. 쪽팔리게 뒤에 숨어서 이러지 말고."

고부장 앞에서 발로 담뱃불을 끄는 정부장. 정부장이 고부장에게 말했다.

"자네는 보는 눈이 너무 없어. <부산 열차>는 잘 될 거야. <러빙 고흐>도 마찬가지고. 이한록 그 녀석이 하는 거니까."

그리고 정부장은 고부장을 노려보며 옥상에서 빠져나왔다.

'...짜증이 나는군.'

엘리베이터를 타고 사무실로 돌아오던 정부장은 생각했다.

-<러빙 고흐>는 망하겠지.

-지가 뭐라도 된 줄 알아.

-그것도 한 때야.

누구도 보여주지 못한 활약을 보여주는 한록. 그리고 그럴수록 한록에 대한 의심과 질투를 거두지 못하는 사람들.

문득 한록의 회사생활이 참 쉽지 않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때 떠오른 최경준의 말.

'자네는 부하를 믿지 못해.'

그리고...

'그래. 내가 아니면 누가 내 부하를 믿어주겠어?'

아끼는 부하에게 힘을 실어주고 싶다는 생각.

엘리베이터가 15층에 도착했고, 정부장은 마케팅 부서로 향했다. 그리고 눈앞의 한록에게 말했다.

"이한록."

"네, 부장님."

"<러빙 고흐>, 네 생각대로 진행해라."

갑자기 바뀐 정부장의 태도. 한록이 놀란 표정으로 정부장을 바라보았다.

"잘해라. 믿고 있다."

정부장이 한록을 지나치며 말했다.

*

점심시간. 본부장실로 향한 한록.

"할 말이 있다고."

최경준이 한록에게 물었다.

"문오석 본부장님에 대한 얘기입니다."

"그래. 한 번 얘기 해봐야 하는 문제지."

한록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최경준.

"문오석 본부장님이 저를 정보원으로 쓰려고 하셨습니다. 아마 저 외에도 영화사업본부에 문오석 본부장님과 연관된 사람이 있을 겁니다."

'영화사업본부에 심어둔 사람이 있다'고 인정한 문오석. 한록의 얘기에 최경준은 어제 임원회의를 떠올렸다.

'문오석은 이미 '더 서울'과의 협업에 대해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모든 본부장들이 '더 서울'과의 협업이 무모한 짓이라고 최경준을 공격했다. 하지만 그 와중에 한마디도 하지 않던 문오석.

"그래. 그런 뉘앙스가 느껴지긴 했지."

아마 하정엽이 협업을 허락했다는 정보를 미리 알고 있었던 게 분명했다.

심증만 있고, 확증은 없던 부분을 명확히 알아온 한록. 최경준이 한록에게 감사 인사를 건넸다.

"좋은 정보를 알아왔군. 고맙네."

"그 중 한명이 오과장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어진 한록의 말에 최경준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잠시 후 고개를 끄덕이는 최경준.

"날 물리치고 본부장이 되고 싶었군. 문오석이 그걸 자극했고."

최경준 본인이 스카웃해 왔고, 한록이 나타나기 전까지 최경준의 라인이었던 오과장.

그런 오과장이 최경준의 라이벌인 문오석에게 연줄을 댄 이유. 그 이유는 뻔했다.

최경준이 버티고 있는 이상 자신이 올라갈 수 있는 한계가 명확하기 때문이었다.

"난 오과장을 버렸고, 오과장은 그 전에 이미 날 버렸군."

그러나 최경준 역시 오랜 인연이었던 오과장을 버리고 한록을 선택한 상황이고, 배신감을 느낄 이유는 없었다. 최경준이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회사란 게 이런 거네. 무조건 믿을 수 있는 내 편이란 건 존재하지 않아. 자네는 사람을 너무 믿는 편 같으니 조심하게."

한록에게 충고를 하는 최경준.

그 말에 한록은 자신의 손목에 묶인 실들을 바라보았다.

단단히 묶인 현차장과 유선의 실. 그리고 점점 굵어지고 있는 정부장과 최경준, 최대리의 실.

'회사에서 믿어도 되는 사람은 없다'. 최경준의 말은 분명 사실이었다.

하지만 이 능력을 가지고 있는 한, 한록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말이었다.

"저한테는 믿어도 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언제까지 순진하게 굴 건가."

"순진한 게 아니라 사람 보는 눈이 좋은 겁니다."

"본부장인 나도 누가 진짜 내 편인지, 누가 날 배신할지는 알 수 없어. 그런데 자네가 나보다 사람 보는 눈이 좋다는 건가?"

최경준의 말투는 한록의 치기가 귀엽다는 듯한, 혹은 어이가 없다는 듯한 말투였다.  그러나 한록의 입장은 단호했다.

"네."

자신에게는 사람들의 인연과 마음이 보이니까.

"하하!"

한록의 말에 최경준이 크게 소리를 내서 웃었다. 고개를 젖혀가며 웃던 최경준이 잠시 후 웃음을 멈췄다.

"그럼 그렇다고 하지. 자네가 배신당하지 않도록 내가 잘 도와줘야겠군."

한록의 말을 헛소리로 일축하는 최경준. 최경준이 한록에게 말했다.

"이런 식으로 자꾸 내부 얘기가 새어나가는 건 용납할 수 없는 일이야. 나는 지금부터 누가 문본부장의 사람인지 찾아낼 거네. 자네도 주위에서 들려오는 얘기가 있다면 내게 전해주게."

"네, 알겠습니다."

"그래. 자네가 그렇게 사람 보는 눈이 좋다면 그게 누군지 알아낼 수 있겠지."

반쯤은 장난이 담긴 최경준의 말.

"노력해보겠습니다."

그러나 한록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의 손목에 묶인 실. 오로지 한록의 눈에만 보이는 사람들 간의 관계.

'이 실을 활용할 또 다른 방법이 있을 수 있다.'

그런 생각이 머릿속에 떠오른 것이다.

'...뭔가 생각이 있군.'

최경준은 생각에 잠긴 한록을 주의 깊게 바라보았다.

최경준은 한록의 능력을 인정했지만, 정치적 감각이나 사람을 다루는 방식까지 인정하는 건 아니었다.

최경준의 눈에 한록은 어디까지나 애송이. 다만 그 성장 가능성이 무궁무진한 애송이였다.

그런데 오늘 한록의 모습을 보니 조금 생각이 바뀌기 시작한다.

단 한번의 대화로 문오석의 속내를 알아온 한록. 그리고 인간관계에 강한 자신감을 보이는 모습까지.

그런 한록을 보면 드는 생각은...

'그래. 이한록이 저렇게까지 나온다면 이유가 있는 거다.'

한록에게 정말 아무도 모르는 무기가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

그날 밤, 퇴근 직전. 우드엔터테인먼트의 스티브에게서 도착한 메일 하나.

[요청대로 광고 일정을 일주일 연기합니다.]

결국 한록의 부탁을 들어준 제롬. 제롬이 준 시간은 일주일이었다.

"다행이네. 우리 광고는 문제 없겠다."

현차장이 스티브의 메일을 보고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한록에게 걱정스러운 듯 물었다.

"근데 이과장은 괜찮겠어?"

한국의 광고 일정은 잘 해결되었다. 그러나 문제는 한록과 최대리가 만들어서 전달하기로 한 미국 광고 아이디어.

[3일 후까지 광고 아이디어 전달 바랍니다.]

컨펌 과정을 빼면 실제로 남은 시간은 3일.

한록과 최대리는 3일 안에 아이디어를 만들어야 하는 상황이었다.

3일 안에, 영화의 고향이라고 할 수 있는 헐리웃이 만족할만한 아이디어를 만들어 와라.

"안 될 것 같으면 그냥 <러빙 고흐>에 집중해라. 그것도 일주일 후면 마케팅 시작해야해."

정부장의 말에 한록과 최대리가 대화를 주고받기 시작했다.

"3일이라..."

"대리님. 할 수 있으시겠습니까?"

"과장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3일이면..."

한록이 잠시 일정을 생각하고 답했다.

"충분합니다."

"저도요."

그리고 최대리의 동의까지.

걱정이 앞서는 정부장과 현차장과 달리, CK의 젊은 두 천재는 자신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정말 가능할까?'

그런 둘을 보고 걱정스러운 얼굴로 생각하는 현차장. 현차장에게 정부장이 말했다.

"일단 지켜보자."

"부장님. 괜찮을까요?"

"내가 어떻게 알아."

정부장 역시 시간이 촉박하다 생각하는 건 사실이었다. 다만...

"이한록이잖아."

믿어볼 이유는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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