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2 : 제롬 앤더슨에게. >
'<수면> 서감독이 너랑 하고 싶단다. 할 거냐?'
회의에 들어가기 전, 정부장이 한록을 불러서 했던 질문이었다.
'수면이라. 이게 아마...올해 최다 관객이었지.'
회귀 전의 일을 회상하는 한록.
<퀸>은 싱어롱을 너무 늦게 도입해서 천만 관객을 달성하지 못했고, <부산 열차>는 큰 이슈를 몰며 천 백만 관객을 달성했다.
그리고 수면은 천 이백만. 한국 영화 역대 순위권에 드는 흥행을 거둬들였다.
하지만 한록의 대답은-
'아뇨, 안 합니다.'
한록이 영화를 고르는 기준은 단순히 관객수가 아니었다.
'내가 사람들에게 소개하고 싶은 영화일 것. 그 영화로 하고 싶은 마케팅이 있을 것.'
그리고 <수면>은 대단한 영화였지만 한록의 흥미를 끌지는 못했다.
무엇보다, <부산 열차>와 <러빙 고흐> 이후 담당하고 싶은 다른 영화가 있었고, 그게 <수면>과 완전히 일정이 겹쳤다.
한록의 거절에 정부장이 못마땅한 듯 답했다.
'<수면> 괜찮은 거 너도 알잖아. 하는 게 낫다. 일이 너무 많으면 <러빙 고흐>를 현차장한테 넘기고...'
'절대 싫습니다. 제 영화를 다른 사람에게 넘기란 말은 안 하셨으면 좋겠습니다.'
'말 한번 살벌하게 하네. 말투 고쳐라.'
엄청나게 강경한 한록의 태도. 하지만 한록의 반응은 정부장 역시 예상한 것이었다.
한록이 <퀸> 사건에서 어떻게 나왔는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 알았다.'
그렇게 일이 마무리 된 줄 알았던 한록.
그런데 지금 눈앞엔 서감독이 앉아있었다.
"안녕하세요."
한록에게 인사를 건네는 젊은 남자. 서감독.
작년 미국의 잡지사에서 '미래가 기대되는신예감독' 1위로 선정된 젊은 유망주였다.
'아니, 유망주가 아니지. 이미 거장이지.'
한국에서는 감독 중 이미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천재 서감독.
'그럴만 해.'
서감독이 뛰어난 재능을 가진 사람이고, 좋은 영화를 만든다는 건 한록도 인정하는 부분이었다.
한록이 서감독에게 말했다.
"<수면> 때문에 찾아오셨다고 들었습니다."
"맞아요. 제 제안을 거절하셨다 길래 무슨 이유가 있나 해서요."
'특별한 이유가 없으면 내 제안을 거절할 리가 없다'는 태도의 서감독.
서감독의 말은 허세가 아니라 사실이었다. 다만 그 상대가 한록일 뿐.
"지금 담당하고 있는 일이 너무 많아서 그렇습니다. 이것저것 하면서 한 영화에 집중하지 못하는 건 감독님께도 실례일 테니까요."
나름대로 정중하게 이유를 밝힌 한록. 그러나 서감독 역시 보통 사람이 아니었다.
"그럼 <러빙 고흐>나 <부산 열차>가 끝나고 들어오세요."
영화계에서 거만하기로 유명한 서도원 감독. 그 서도원이 이렇게 나온다. 서감독은 어지간히도 한록을 원하는 모양이었다.
"그렇게 되면 스케쥴에 문제가 생길 것 같습니다. CK에는 저 말고도 뛰어난 분들이 많으니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글쎄요. 제일 유명한 건 당신이잖아요."
"제가 언론에 자주 나오는 것 뿐이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일하시는 분들이 훨씬 많습니다."
"그건 상관없어요. 내가 원하는 건 그쪽이라니까."
절대 물러날 생각이 없어 보이는 서감독. 서감독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한 얼굴로 한록에게 물었다.
"이한록 과장님. 저 다음 작품 헐리웃에서 찍기로 계약했어요. 이런 기회가 또 있을 거 같아요?"
서감독은 <수면> 이후로 2년 뒤 헐리웃으로 진출한다. 거만하긴 했으나, 서감독이 하는 말은 사실이긴 했다. 하지만 한록은-
"네. 저한테는 자주 있었습니다."
삼일의 삶. 식물 시리즈.
서감독의 영화 외에도 세계적인 명작이 될 영화를 많이 가지고 있었다.
"하..."
짜증이 난 듯한 표정의 서감독. 그가 한록에게 뭐라 말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더 얘기할 필요 없겠네요. 그만 가보겠습니다."
자존심이 상한 듯 자리에서 일어난 서감독.
"조심히 가십시오. 다음에 뵙겠습니다."
그러나 한록은 서감독을 붙잡기는커녕 정중하게 인사를 할 뿐이었다.
한록에게 드는 생각은 하나뿐.
'이 사람이 빨리 가야 우드 엔터테인먼트랑 연락을 하는데. 러빙 고흐 이벤트도 생각해야하고.'
빨리 서감독과의 미팅이 끝나고 <부산 열차>와 <러빙 고흐>를 마무리하는 것뿐.
아시아의 천재감독이든, 천만 감독이든, 지금 한록에겐 그저 귀찮은 상대일 뿐이었다.
"그럴 일 없습니다."
한록의 마음을 눈치챈 서감독이 차갑게 말하고는 회의실을 나섰다.
"감독님. 잠깐 얘기 좀 하시죠."
그때 회의실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현차장이 서감독을 붙잡았고, 둘은 빈 회의실로 향했다.
"감독님. 지금 이과장이 맡고 있는 일이 너무 많아서 그럽니다. 이해하세요."
"사람이 너무 건방지네요."
서감독의 말에 '너는?'이란 말이 목 끝까지 올라온 현차장.
하지만 상대는 CK가 인정하는 몇 안 되는 귀한 '감독님'이었다.
'이한록은 어차피 싫다고 할 거고. 서감독 기분 상하지 않게 최대한 달래고 와.'
어쨌든 지금은 정부장이 내린 지시를 완료해야 하는 상황. 현차장이 사람 좋게 웃으며 말했다.
"감독님도 저희 일이 얼마나 바쁜지 아시잖아요. 이과장도 <수면>이 잘 되길 바래서 그런 거예요. 더 좋은 사람 붙여드릴게요. 제가 약속합니다."
현차장은 최대한 서감독을 달래보려 했다. 그러나 서감독은 다리를 꼬고 앉아 현차장의 말을 한 귀로 흘려듣고 있었다.
'어떻게 내 제안을 거절하지?'
서감독 오로지 한록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확실히, 잘하긴 하는데...'
<지구특공대>부터 <퀸>까지 한록의 활약을 계속 지켜보고 있던 서감독.
'<지구 특공대>도, <삼일의 삶>도, <퀸>도, 다 좋았지.'
CK가 배급한 영화들의 연이은 성공. 거기에 부산영화제의 큰 흥행까지.
'요즘 CK 왜 저러냐?'
'뭐 대단한 놈이 하나 있다는데.'
'누구?'
'그, 미국에서 인터뷰한 마케팅 직원.'
'아, 감독 GV 만든 인간.'
영화계에서 소문이 자자한 한록. 특히 감독들 사이에서 한록은 유명인사가 된 지 오래였다.
'내 것도 그 사람이 해주면 좋겠네.'
내 작품을 누군가 널리 알려주길 바라는 당연한 마음. 거기에...
'나는 GV요청 안 오나?'
약간의 흑심까지.
서감독은 GV에는 관심이 없었으나, 어쨌든 오랜만의 복귀작인 <수면>이 최대한 성공하길 바랬다. 그래서 당연히 한록이 자신의 영화를 맡으리라 생각했다.
'고민도 안 하고 거절을 해?'
그런데 당연하다고 생각하던 일을 한록에게 거절당했다. 거기에 한록은 아무런 미련이 없어 보인다.
'건방진 인간.'
첫 번째로 드는 것은 한록에 대한 짜증.
그리고...
'대체 어떻게 해야 넘어오려나?'
이대로 한록을 포기할 수 없다는 생각이었다.
*
다음날. 현차장이 출근을 한 한록에게 말했다.
"이과장. 제로아워 일정 잡혔다."
드디어 <부산 열차>의 개봉시기가 잡힌 상황.
"생각보다 빨리 잡혔네요."
"나...야근하느라 죽는 줄 알았다...와이프가 이럴 거면 그냥 집에 들어오지 말라더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응. 나 이러다 이과장 때문에 단명할 것 같아."
"그럼 차장님보다 제가 더 위험하지 않을까요?"
"그건 그래. 이과장 이러다가 요절한다. 그러다가 죽기 직전에 후회하면서 과거로 돌아가고...영화 클리셰 알지? 조심해."
"이미 한 번 죽었다가 돌아온 걸 수도 있죠."
"사람이 농담은."
농담 절반과 진실 절반이 섞인 대화를 마친 한록. 한록은 자리에 앉아서 현차장이 보낸 내용을 확인했다.
'진짜 고생 많으셨네.'
제로아워는 전 세계가 함께 협의해야하는 사안이다보니 꽤 시간이 걸리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현차장을 비롯한 GV팀이 열심히 노력해 준 덕분에 생각보다 빨리 일정이 나온 상황.
'개봉은 지금부터 6주 후.'
한국시간 10월 23일, 전 세계 시차 없이 동시개봉. 이건 한록도 알고 있는 일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우드 엔터테인먼트>:광고 일정 협의 요청.]
[10월 23일 개봉에 따라, 앞으로 3주 안에 광고 제작이 완료되길 요청합니다.]
우드 엔터테인먼트에서 3주안에 광고를 끝내 달라는 메일이 온 것이다.
"과장님. 이거 보셨어요?"
마침 메일을 확인한 것인지, 최대리가 바로 한록에게 와서 묻는다.
"이러면 미국 광고는 불가능해요."
영화 마케팅은 보통 개봉 한 달 전부터 시작되고, 본격적인 마케팅이 진행되는 건 개봉 2주 전부터였다.
그래서 개봉 2주전부터 광고를 송출하려 했던 한록. 그러나 우드 엔터테인먼트는 한록의 예상보다 훨씬 빠른 일정을 요구했다.
"개봉 3주전부터 광고를 진행하고 싶다고, 빨리 끝내달라고 하는군요."
"네. 보통 미국도 광고는 2주전에 푸는 편인데...3주 전부터면 예산도 거의 30%가 뛰는건데 말이에요. 제롬이 <부산 열차>에 기대가 큰 모양이네요."
"이러면 미국 광고 아이디어를 전달할 시간이 없습니다. 아니, 우리 광고 만들기에도 시간이 촉박해요. 기간을 미룰 수 있나 조율을 해봐야겠어요."
"쉽지 않을 텐데요."
"그래도 해봐야죠."
한록은 곧장 정부장에게 다가갔다. 한록의 얘기를 들은 정부장은 떨떠름한 반응이었다.
"일정을 미뤄달라고 하겠다고? 안 될텐데."
싫다기 보단, 어차피 안 될 건데 시간 낭비 하지 말라는 반응.
"얘기는 해 봐야 합니다. 이러면 저희 광고 일정도 너무 빠듯합니다."
"흠...그래. 얘기는 해 봐. 미국 광고에는 너무 신경쓰지 말고."
"알겠습니다."
"너 그거 거짓말이지?"
"네. 거짓말입니다. 미국 광고도 같이 진행할 겁니다."
"이 녀석이 진짜...괜히 힘 빼지 말라니까."
정부장이 한록의 뻔뻔한 태도에 한숨을 쉬었다. 애초에 정부장은 우드 엔터테인먼트가 한록의 광고 아이디어를 받아들일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상황이었다.
"알았다. 일단 말은 해 봐라."
하지만 한록의 제안이다. 어떻게 안 되겠다고 반대를 하겠는가.
결국 정부장이 허가를 내렸고, 한록은 바로 우드 엔터테인먼트에 전화를 걸었다.
잠시 후 우드 엔터테인먼트의 마케팅 담당자 스티브가 전화를 받았다.
[CK 이한록 과장입니다. 메일 때문에 연락 드렸습니다. 광고 송출 일정에 조율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무슨 조율 말씀이십니까.]
[시간이 너무 촉박합니다. 어제 미국 측에 광고 아이디어를 제공하겠다는 메일을 보냈습니다. 그러려면 시간이 좀 더 필요합니다. 한국 광고 역시 3주 안에 만들기는 어렵고요.]
[아, 그 메일이요.]
그리고 스티브의 반응은...
[하하. 우리 측에 제안이라.]
명백한 비웃음이었다.
[상황은 알겠습니다. 다만 이미 일정이 완료된 상황이라 조율은 어렵겠네요.]
[광고를 동시에 송출하려면 한국과 일정이 맞아야 할 텐데요.]
[일단 내부적으로 논의하고 내일 다시 연락하겠습니다.]
한록의 말을 건성으로 받아들이는 스티브.
딱 봐도 시큰둥한 태도였고, 과연 스티브가 한록의 말을 제대로 전달 할지부터 의문이 드는 상황이었다.
[어쨌든 지금은 3주 안에 끝낸다고 생각하세요.]
스티브는 그 말과 함께 전화를 끊었고, 한록은 생각에 잠겼다.
'예상치 못한 변수가 생겼다.'
시간이 매우 촉박한 상황. 그런데 시간은 둘째 치고, 담당자인 스티브의 태도가 영 마음에 걸렸다.
최대리가 한록에게 다가와 물었다.
"우드 쪽에서 뭐래요?"
"회의 후 내일 다시 연락하겠다고는 하는데..."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스티브가 제대로 상황을 전달할거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제롬한테 연락을 해야겠네요."
"흠...스티브가 좋아하지 않을 거예요. 그 인간 성격 더럽거든요. 앞으로 같이 일하기 힘들어질텐데."
최대리의 말에 한록은 잠시 고민에 잠겼다. 거래처가 비협조적으로 나오면 업무가 얼마나 힘들어지는지는 한록 역시 익히 알고 있다.
"어쩔 수 없죠. 일단 광고가 먼저니까."
그러나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역시 제롬이 일정을 조절해주는 것이었다.
결국 제롬에게 메일을 쓴 한록.
"최대리님. 잠깐 읽어보시겠습니까."
한록의 말에 최대리가 모니터로 다가왔다. 그리고 메일을 읽어내려 가다가...
"아, 좋아요. 딱 이대로 보내세요. 절대 수정하지 말고!"
갑자기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네, 알겠습니다."
한록 역시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저 녀석들 뭐야?'
그 모습에 문득 불길함을 느낀 정부장.
"야, 잠깐만-"
그리고 정부장이 뒷말을 잇기 전에 잽싸게 한록의 마우스를 채간 최대리.
"그거 나한테 허락 맡고 보내!"
그러나 돌아온 대답은 허망했다.
"죄송합니다. 최대리님이 이미 보냈습니다."
"이 녀석들아!"
정부장의 고함에 최대리와 한록이 서로 눈빛을 교환하며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