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1 : 팬덤마케팅(3) >
"당신은 회사 사장이라면 좋아할 수 밖에 없는 사람이야."
무심코 말해버린 하정엽. 놀라서 하정엽을 바라보던 한록이 뒷말을 예상하고 미소를 지었다. 한록이 하정엽에게 물었다.
"사장님. 그러면..."
"네. 한 번 해보세요."
러빙 고흐를 위해 '더 서울'을 이용해도 좋다는 허락. 한록이 하정엽에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사장님. 기회를 만들어주신 만큼 열심히 하겠습니다."
대화는 모두 끝난 상황. 그러나 하정엽은 아직 한록을 보낼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이번 아이디어는…"
하정엽이 다리를 꼬고 앉아 한록을 바라본다. 한록의 어깨에 살짝 와 닿은 하정엽의 실과-
"특히 좋았습니다."
아주 드물게 나오는 칭찬.
아무래도 한록의 아이디어가 하정엽의 마음을 가져가 버린 모양이었다.
한록이 새삼스럽게 하정엽을 다시 바라보았다.
'본부장님 말씀이 맞아. 사장님이 정말 많이 변했다.'
최경준의 말처럼, 이 사람도 많이 변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가도 좋습니다."
하정엽이 드디어 한록에게 인사를 건넸다.
한록은 다시 한번 고개를 숙이고 문으로 향했다. 그런데 밖으로 나가려던 한록에게 문득 떠오른 생각이 있었다.
'이한록 과장의 방안에는 문제가 있습니다.'
자신의 의견에 하나하나 반박하던 하정엽. 그건 그만큼 한록의 의견을 주의 깊게 살펴봤단 뜻이었다.
게다가 그 의견이 마음에 들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한록을 불러 얘기를 나누기까지 했다. 한록은 그 점이 참 고마웠다.
"사장님."
"네."
여전히 어깨 주위에 맴도는 하정엽의 실.
'이 정돈 말해도 되겠지.'
그 실을 보니 확신이 들었다. 한록이 하정엽에게 말했다.
"저도 사장님의 지적이 특히 좋았습니다."
"하."
고작 과장이 한국 굴지의 대기업 사장에게 '좋았다'고 말한다.
이 상황이 어이가 없다는 듯한 하정엽의 표정.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 건방집니까."
그러나 말과 달리 하정엽의 실은 부드럽게 한록의 어깨를 스치고 있었다.
"그런 소리 많이 듣습니다."
"칭찬 아닙니다."
"그것도 알고 있습니다."
마지막까지 말대꾸를 한 한록은 미소를 한번 짓더니 밖으로 향했다.
'...정말 어이가 없군.'
혼자 남아 한록이 사라진 문을 바라보는 하정엽. 오늘 한록의 모습은 그간 자신이 봤던 직원들 중 가장 건방진 모습이었다.
'이한록답네.'
하지만 그런 모습이 싫지만은 않았다.
*
다음날 마케팅 부서.
"잠깐 회의 좀 할까요."
한록이 유선과 최대리를 소집했다.
"미국에서 연락이 왔어요. '도망쳐' 광고를 미국식으로 바꿔서 송출하겠다고 하네요. 개봉 2주전부터 한국과 동시에 진행하기로 했습니다."
"좋아요. 과장님 또 미국에서 인터뷰 하나 들어오겠네요."
한록의 말에 최대리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저번에도 말했지만. 이 광고 진짜 잘 될 거예요."
한국 최고의 광고회사인 CK기획 출신의 최대리. 최대리는 원래 광고와 촬영을 전공한 사람이었다.
한록이 광고가 전문분야가 아님에도 '도망쳐' 광고에 자신이 있었던 이유. 그 이유도 바로 최대리가 이 광고를 듣자마자 좋다고 말했기 때문이었다.
*
칸의 마지막 날. 쇼핑을 마친 한록은 식당으로 향했다. 식당에선 최대리와 유선이 한록을 기다리고 있었다.
'대체 뭐가 드시고 싶습니까.'
'보답하라'는 최대리의 말에 답한 한록. 그 말에 최대리가 꺼낸 것은 프랑스의 미슐랭 식당이었다.
'그래요. 갑시다.'
'어? 진짜요? 그냥 해 본 말인데.'
'저도 보답을 해야죠.'
어쨌든 최대리 덕분에 연봉이 많이 오른 상황. 한록 역시 안 그래도 보답을 하고 싶었고, 다행히 식당의 자리 하나가 비어서 예약 없이 식사를 할 수 있었다.
"과장님, 선글라스 못 보던 거네요. 잘 어울려요."
"오늘 샀습니다."
선글라스를 벗으며 말하는 한록. 영도가 해외에 나가면 사오겠다고 노래를 부르던 제품이었다.
유선이 한록의 선글라스를 바라보다가 물었다.
"근데 원래 선글라스도 쓰세요? 어제까진 못 본 거 같은데..."
"안 쓰는데 그냥 샀습니다. 영도한테 자랑하려고요."
"풉!"
한록의 대답에 최대리가 사례가 걸려 몇 번이나 기침을 했다. 겨우 진정한 최대리가 한록을 보며 말했다.
"과장님. 진짜 은근 웃긴 구석이 있으시네요."
그렇게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대화를 하는 셋.
식사가 끝나자 유선은 먼저 자리를 비웠고, 한록과 최대리는 술을 더 시켰다. 술을 마시던 한록이 최대리에게 물었다.
"<부산 열차> 국내 마케팅으로 서울역에 광고를 송출할 예정입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식사 자리에서까지 일 얘기 하신다고 생각합니다."
"share a coke 캠페인을 광고로 도입할 예정입니다."
"어라."
share a coke란 말에 시큰둥한 태도이던 최대리의 표정이 갑자기 바뀐다.
"사람들 이름을 광고에 활용하겠단 거죠?"
"네, 맞습니다."
"좋아요. 광고 효과도 있을 거고, 영화랑도 잘 어울리네요. 현실을 배경으로 한 영화니까요. 아주 좋아요."
최대리는 한록의 말을 듣자마자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러더니 의자를 바짝 당기고 자리에 앉는 최대리. 아주 흥미가 생긴다는 태도였다.
최대리는 이제 한록에게 적극적으로 질문을 시작했다.
"이름을 부르고, 그리고 어떻게 하게요? 예고편이 나오나요?"
"아뇨. 영화장면은 되도록 줄이고, 음성 위주로 진행하려 합니다. 뒤에 이어질 내용을 생각중입니다."
"저도 그게 좋아 보여요. 긴장감을 주는 내용이 좋겠네요. 좀비가 딱 한 장면만 나오거나, 아님 비명소리가 들리거나..."
그 자리에서 바로 아이디어를 내는 최대리. 최대리의 얘기를 들은 한록이 말했다.
"좀비 얘기가 직접적으로 나오는 건 안 좋아 보입니다."
"맞아요. 한국 사람들은 좀비 영화에 큰 관심이 없으니까요. 역시 긴장감을 줄 수 있는 말이 나오는 게 좋겠네요."
어느새 회의장소가 되어버린 레스토랑. 둘은 계속 광고에 대한 얘기를 나눴다.
최대리가 말했다.
"내용을 많이 담을 수 없으니까, 대신 <부산 열차>의 분위기라도 잘 담을 수 있는 광고여야 해요. 긴장감 있고, 속도감이 있는 광고요."
달리는 좀비. 그리고 달리는 기차. 속도감은 <부산 열차>의 가장 큰 특징이라고 할 수 있었다.
최대리의 말에 한록이 생각에 잠긴 한록.
-긴장감을 살리고.
-그리고 속도감을 줄 수 있는 말.
하지만 마땅히 떠오르는 게 없었다.
얼마간 시간이 흐르자 최대리는 깔끔하게 패배를 인정하며 손을 들었다.
"우리가 천재 *카피라이터도 아니고...이걸 지금 여기서 만들 순 없죠. 이건 나중에 광고사에 맡깁시다."
*카피라이터: 광고 멘트를 작성하는 사람.
'아니, 분명 괜찮은 말이 있을 거다.'
그러나 한록은 아직 포기하지 않았다. 조금만 더 생각해본다면 좋은 아이디어가 나올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한록이 최대리에게 물었다.
"'위험해'는 어떠십니까."
"무난해요."
"'좀비다.'"
"저라면 웃을 거 같네요."
"'뒤 돌아 보지마'."
"좀비 영화가 아니라 귀신 영화로 생각할 것 같아요."
"'뛰어'."
"너무 추상적이에요. 과장님. 마지막날인데 좀 쉽시다."
한록의 입을 막으려는 듯 술잔에 와인을 따르는 최대리.
"자꾸 이러시면 저도 유선씨처럼 도망갈 거예요."
그리고 그 말에 한록이 번쩍 고개를 들고 말했다.
"그거요."
"네?"
"그 말이 좋겠어요."
"뭐가요?"
"'도망쳐'."
"뭘..."
한록의 말에 최대리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잠시 후 드디어 알았단 표정으로 한록을 바라보았다.
"와, 이거..."
드디어 한록의 말을 이해한 최대리가 머릿속으로 광고를 상상하기 시작했다.
대낮의 서울역. 누군가의 이름. 그리고 이어진 도망치라는 말.
"과장님. 이런말 하기 좀 민망한데..."
한참동안 말이 없던 최대리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과장님 진짜 천재 맞네요."
*
그렇게 만들어진 '도망쳐' 광고.
그 광고는 이제 한국을 넘어서 미국까지 송출 될 예정이었다.
"광고도 이렇게 잘하시다니. 저 광고회사 출신이 영화회사 사람한테 졌다고 CK기획으로 못 돌아가면 어떡하죠?"
장난기가 섞인 최대리의 말. 하지만 약간의 라이벌 의식이 느껴지는 말이었다.
'앗...'
최대리의 말에 유선이 슬쩍 한록의 눈치를 본다. 그러나 다행히 한록의 표정은 평화로웠다.
'다행이다. 기분 나쁘진 않으신가 봐.'
유선의 생각처럼 한록은 최대리의 말에 전혀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아니, 한록은 오히려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최대리는 확실히 나랑 잘 맞는 사람이다.'
칸에서 있었던 최대리와의 저녁 식사를 떠올리는 한록.
둘이 같이 얘기를 하다보니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랐고, '도망쳐' 광고를 완성할 수 있었다.
'그래. 이 광고는 틀림없이 성공할 거다.'
한록 역시 최대리와 같은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다만 아쉬운 건 통화 중 들었던 '미국식으로 바꿔서 광고를 송출 하겠다'는 제롬의 말.
우드 엔터테인먼트와 미국의 광고사까지 거치면 광고 내용은 '이름을 부른다'는 기본만 남기고 크게 바뀔 것이 분명했다.
미국에 맞게 광고가 각색되리란 건 미리 예상한 일이었다.
하지만 '한국과 미국에서 동시에 송출되는 똑같은 광고'를 포기해야한다는 점에서 아쉬운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아쉽군.'
그렇지만 한록은 미국의 문화나 광고에 대해 전문가가 아니다. 그렇게 생각하고 마음을 접으려던 상황.
그런데 지금.
"이거 큰일이네요. 과장님보다 잘해야 돌아갈 수 있을텐데."
자신의 앞에 앉은 이 사람은 헐리웃 출신의 광고회사 엘리트였다.
그 사람을 보니...
'해볼만한데?'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한록이 최대리에게 물었다.
"최대리님. CK기획으로 돌아가고 싶으십니까?"
"쫓아내시게요?"
최대리의 말에 고개를 젓는 한록.
"아뇨. 그럴 거면 돌아가실 때 엄청난 성과를 가져가시는 게 좋지 않나 해서요."
"우리 과장님이 또 무슨 일을 꾸미시나."
최대리가 흥미로운 얼굴로 한록을 바라보았다.
"제롬이 광고를 미국식으로 바꿔서 송출한다고 했습니다."
"그렇죠. 인종별로 이름이랑 언어가 다른게 제일 큰 문제일 거예요. 이 광고를 미국에 맞게 만들려면 버전이 200개는 필요할 걸요."
"하지만 저는 한국과 미국에 똑같은 광고가 나오길 원합니다."
"저도 당연히 그걸 원하죠. 그치만 미국 광고는 그 쪽이 만드는 거잖아요. 우리가 개입할 순 없죠."
최대리의 합당한 지적. 그리고 이어진 한록의 대답.
"아뇨, 그것도 우리가 한 번 만들어 봅시다."
그 말에 최대리가 미소를 지으며 한록을 바라보았다.
'또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란 생각이 담긴.
"어떻게요?"
그러나 동시에 흥미가 담긴 얼굴.
최대리의 말에 한록이 답했다.
"제롬에게 미국에 적용할만한 아이디어가 있으면 넘기겠다고 말했습니다. '도망쳐'를 미국에서도 적용할 수 있는 버전으로 만들어서 보내는 겁니다. 제롬은 한국 마케팅에 관심이 많으니, 그게 마음에 들면 문제 없이 수락할 겁니다."
"나라를 가리지 않는 광고라. 생각보다 어려울 텐데요."
"대리님."
그리고 한록은 최대리의 말에 웃으며 답했다.
"이미 한번 해보지 않으셨습니까."
필름마켓에서 각국의 마케터들을 감동시켰던 안내방송과 기차표 마케팅.
그걸 떠올린 최대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인정할 수밖에 없다는 듯 말했다.
"네, 과장님이라면 가능하시겠네요."
*
"그럼 지금부터 '도망쳐'를 미국에 적용할만한 방법을 찾아봅시다. "
"네, 알겠습니다."
한록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유선. 유선의 얼굴에는 비장함이 담겨있었다.
미국에서 이슈가 된 광고는 전 세계로 이슈가 된다. 그 사실을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었다.
"이제 전 세계가 지켜볼 광고를 만드는 거네요."
최대리의 말에 유선의 얼굴에 스쳐지나가는 의문. '이게 가능한가?'
그러나 한록의 곁에는 미국 출신의 광고 전문가가 있었고, 또 자신에게 관심을 보이는 제롬이 있었다.
"네, 맞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이름을 걸고요."
이건 세계에 이름을 알릴 기회였다.
*
그렇게 마무리 된 회의. 책상을 정리하는 사이 누군가 노크를 하더니 문을 열었다. 정부장이었다.
"회의 끝났냐."
"네, 끝났습니다. 무슨 일이십니까?"
한록의 말에 정부장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누가 널 찾아왔다."
"누가요?"
한록을 찾아온 사람. 그는 바로-
"서감독. 널 설득하러 왔어. 자기 영화를 맡아달래."
서감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