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0 : 팬덤 마케팅(2) >
"제롬 앤더슨이 이한록 과장의 광고를 사가겠다고 합니다. 한국과 미국에 같은 광고가 동시에 송출 될 겁니다."
"꽤 선전하고 있군요. 필름마켓에 잘 보내셨습니다."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이는 하정엽.
한록은 CK기획에게서 방송국을 가져올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였다.
게다가 이번엔 제롬 앤더슨의 우드 엔터테인먼트와 같이 광고를 진행한다.
'제롬 앤더슨이면 회장님도 좋아하실 거다.'
하태준 역시 이 일을 흡족해하리란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서감독이 <수면>의 담당자로 이한록 과장을 원합니다."
"네. 이한록 과장에게 맡기세요."
"이한록과장이 원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지금 이미 <부산 열차>와 <러빙 고흐>를 동시에 진행하고 있습니다."
"그냥 시키세요."
하정엽의 말에 최경준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사장님. 이한록 과장에게 그렇게 나오시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이미 지켜보지 않으셨습니까."
한록의 <퀸>을 최대리에게 주려다가 아주 크게 깨달음을 얻었던 하정엽.
"..."
그때를 생각한 하정엽이 이마를 부여잡았다. 그리고 잠시 후 말했다.
"...이한록 과장의 의사를 물어보세요. 본인이 원하지 않는다면 최윤일 대리에게 맡기십시오."
"하하하. 사장님, 많이 변하셨습니다."
하정엽의 말에 솔직하게 웃는 최경준. 하정엽이 살짝 인상을 쓰더니 최경준에게 물었다.
"서감독은 왜 이한록과장을 원한다고 합니까."
"이한록 과장이 워낙 잘하고 있으니까요. 서감독 이전에도 많은 감독이 이한록 과장을 요청했습니다. 최윤일 대리 이후로 가장 많은 수치입니다."
스카웃을 받아 헐리웃에서 돌아온 최대리. 이전까지 감독들은 대부분 마케팅 담당자로 최대리를 원했다.
그런데 이제는 절반이 넘는 감독들이 마케팅 담당자로 한록을 요청하고 있었다.
"그럴만 합니다."
하정엽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최근 한록은 정말 멋진 활약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 정도는, 거의...
"최근 이한록 과장은 과거 본부장님을 보는 것 같습니다."
한국 영화계의 전설로 내려오는 최경준. 그의 젊은 모습과 닮아있었다.
그 말에 최경준이 알 듯 모를 듯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서, 왜 이한록 과장에 대한 얘기를 하시는 겁니까."
대화를 나누던 하정엽이 갑작스레 질문을 던졌다.
'최경준이 이곳에 찾아온 건 단순히 한록을 칭찬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 사실을 처음부터 파악하고 있던 하정엽.
"이한록 과장이 잘하고 있다는 건 저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용건이 뭡니까. 이런 쓸데없는 얘기를 나누고 있을 시간은 없습니다."
하정엽의 날카로운 질문에 최경준이 입을 열었다.
"아시겠지만, 이한록 과장이 지금 <러빙 고흐>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많은 감독들의 러브콜. 그걸 모두 거절하고 소규모 독립영화 <러빙 고흐>를 선택한 한록.
"알고 있습니다."
"이한록 과장이 마케팅에 필요한 게 있다고 합니다. 사장님 허락이 필요한 부분입니다."
하정엽이 '이한록이 또 뭘 하려는 거냐.' 라는 표정으로 최경준을 바라보다 말했다.
"일단 말해보세요."
"<러빙 고흐>의 마케팅을 위해 더 서울의 고흐 전시전과 협조를 원한다고 합니다."
"...더 서울 말입니까?"
"네, 맞습니다."
한록의 마케팅을 요약해서 전달하는 최경준.
그러나 얘기를 전해듣는 동안 하정엽의 얼굴은 내내 무표정했다. 한록의 마케팅 방안이 크게 와닿지 않는 듯한 얼굴이었다.
"문제가 몇 개 있군요."
최경준의 얘기를 들은 하정엽이 입을 열었다.
"이걸로 과연 충분히 관객이 모일 건지, 과연 이게 영화 마케팅에 어울리는 건지...무엇보다 '더 서울'을 사용할 만큼의 파급력이 없습니다."
'역시.'
최경준이 걱정했던 부분을 바로 지적하는 하정엽.
더 서울은 CK의 유명 미술관이었고, 하정엽은 더 서울에 나름의 애정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브랜드 가치를 훼손할만한 일은 절대 하지 않고 있는 상황.
"고작 영화 하나를 위해서 더 서울을 쓰겠다고 말하다니. 더 서울의 가치가 거기까지 떨어진 겁니까, 아니면 이한록 과장이 건방진 겁니까."
권위적으로 말하는 하정엽. 최경준이 하정엽의 얼굴을 찬찬히 살피며 생각했다.
'더 서울은 우리 마음대로 쓸 수 있는 게 아니야. 사장님의 마음을 강하게 끌어 올만한 매력적인 방법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럴만한 방법이라면...
"그냥 더 서울을 활용하는 것에서 끝나지는 않을 겁니다. 이한록 과장이 생각중인 프로젝트가 있습니다."
"그게 뭡니까."
"그건 저보다는 이한록 과장에게 들으시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바로 한록이 있었다.
"..."
조용히 시계를 바라보는 하정엽. 최경준과의 미팅만으로도 시간이 많이 지나가있었다. 하지만-
"이한록 과장이라면 분명 생각이 있을 겁니다."
최경준의 말은 분명 사실일 것이었다.
망설이는 하정엽을 보며 승리의 미소를 짓는 최경준.
지금은 인수전이 진행중인 시기였다. 최경준은 한록이라는 아주 좋은 카드를 가지고 있었고, 그걸 아낄 마음은 없었다.
'이한록. 이럴 땐 사장님을 설득해 달라고 하는 게 아니라, 널 만나게 해달라고 해야하는 거다.'
한록이 자신에게 유선을 보여줬던 것처럼, 끊임없이 하정엽에게 한록이라는 사람을 소개할 예정인 최경준.
"좋습니다. 이한록 과장을 부르세요."
그의 전략이 아주 훌륭하게 성공했다.
*
문오석과 얘기가 끝나고 부서로 돌아가려던 한록. 그런 한록에게 유비서의 연락이 왔다.
"이한록 과장님. 사장님이 부르십니다."
그렇게 곧장 사장실로 가게 된 한록. 사장실 앞에서 한록을 기다리고 있던 최경준이 짧게 상황을 설명해주었다.
"더 서울과의 협업에 대해 사장님께 말씀드렸어. 자네의 방안이 부족하다고 하시는군."
"협업이 불가능하다고 하신 겁니까?"
"아니, 일단 자네 얘기를 들어봐야 알겠다고 하셨어. 자네가 사장님께 직접 말씀 드려보게."
그리고 최경준이 허리를 살짝 숙여 한록에게 귓속말을 했다.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을 만큼 작은 소리였다.
"자네가 사장님을 많이 변화시켰군."
그 말과 함께 사라진 최경준.
최경준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한록이 사장실 안으로 향했다.
"안녕하십니까, 사장님."
"네."
한록이 인사를 건넸고 하정엽이 답했다. 의자에 앉으라는 말은 없었고, 한록은 하정엽의 책상 앞에 섰다.
"'더 서울'에 대해 요청사항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네."
'이렇게 나온다면 회사를 나가겠다'고 하정엽에게 선전포고 했던 자리. 그 장소에서 하정엽과 다시 나누는 대화.
그러나 이번엔 예전처럼 지저분한 정치 때문이 아니라 일 때문이다.
예전처럼 자기 판단만으로 모든 결정을 하는 게 아니라, 일단 얘기를 들어보겠다며 한록을 부른 하정엽.
'그래. 본부장님 말씀이 맞다. 사장님이 많이 변했어.'
갑작스런 사장의 호출이었지만 한록은 오히려 기분이 좋았다.
하정엽이 바로 용건을 꺼냈다.
"시간이 없으니 바로 얘기하겠습니다. 이한록과장의 제안은 문제가 있습니다."
그리고 한록의 제안을 하나하나 지적하기 시적하는 하정엽.
"첫째. 타겟층이 너무 좁습니다. 고흐의 그림을 혼자서 볼 수 있는 기회라니, 전 세계적으로 이슈가 될 것은 맞습니다. 하지만 그게 실제 영화관람으로 이어질지는 장담할 수 없습니다. 관람 회차를 아무리 늘린다고 해도 50명이 한계입니다. 사람들도 큰 기대를 가지지 않을 겁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그리고 하정엽은 아주 중요한 얘기를 꺼냈다.
"만약 관객을 채우더라도, 사람들이 이 방법으로 영화를 보러 오는 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겁니다."
한록이 하정엽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었다.
"고흐의 그림을 보기 위해 영화를 봐야한다. 이걸 위해 영화관에 오는 사람들은 <러빙 고흐>의 관객이 아닙니다. 실제 관람을 하지도 않고 표만 챙겨가는 사람이 대부분일 겁니다. 아무도 관심이 없고, 아무 파급력도 없는데 관객수만 채운 영화. 그건 내가 원하는 영화가 아닙니다."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이한록 과장이 제안한 방법은 이벤트에 당첨된 사람에겐 아주 환상적인 경험이 될 겁니다. 하지만 당첨자 수가 너무 적고, 영화랑 관련도 없습니다."
자신이 분석한 내용을 말하는 하정엽. 하정엽의 분석은 아주 날카롭고 정확했다.
"영화와 관계없이, 더 서울측이 진행하는 마케팅이라면 오히려 좋겠지만...이한록 과장이 원치 않을테니 이건 넘어가겠습니다."
사장이 자신의 프로젝트를 난도질하는 상황. 심지어 그게 어거지가 아니라 모두 맞는 말이다.
누군가는 당황하거나 크게 자존심이 상할 상황.
그러나 한록은...
"네, 사장님. 말씀하시는 부분 모두 맞습니다."
오히려 기쁜 표정이었다.
'말이 통하는 구나'
'대화를 할 만한 사람이 있다.' 한록이 자신과 비슷한 수준의 사람을 볼 때면 늘 하는 생각이었다.
그 생각은 상대가 부장이든, 사장이든, 자신의 말에 동의하든, 반대하든 아무 상관이 없었다. 그저 함께 대화를 하고 아이디어를 발전 시킬 사람이 있다는 것이 기쁠 뿐이었다.
'이한록 과장이 원치 않을테니 넘어가겠습니다.'
거기에 하정엽의 변화한 태도까지. 기분이 안 좋을 수가 없었다.
"<러빙 고흐>로 500만 관객을 만들겠다고 했다고 들었습니다. 절대 불가능한 일입니다."
"네, 맞습니다. 저 혼자라면 불가능합니다."
"그러면서 나한테 시간 낭비를-"
무슨 소리냐는 듯 한록을 바라보는 하정엽.
한록에게 짜증을 내려던 하정엽이 뒤늦게 한록의 입가에 걸린 미소를 발견했다.
'...이 상황에서 웃다니?'
사장에게 제안이 거절당하는 상황. 그럼에도 기분이 좋아보이는 한록.
"아직 보고를 올리지 않은 게 있습니다."
한록이 밝은 목소리로 하정엽에게 말했다.
"이건 <러빙 고흐>의 마케팅 방안 중 기초단계일 뿐입니다. 제가 <러빙 고흐>로 진행하려는 마케팅은 따로 있습니다."
"'더 서울'을 쓰는 게 기초단계라."
하정엽이 어이가 없다는 듯 말했다.
사장이 아끼는 또다른 회사를 끌어들이는 마케팅. 그런데 그게 고작 기초단계라고 말한다.
얼마나 대단한 일을 하려고 저런 태도로 나오는 건지 이제 정말 궁금할 지경이었다.
"뭘 하려는 겁니까?"
하정엽의 단도직입적인 질문에 한록이 답했다.
"'팬덤 마케팅'을 진행하려 합니다."
팬덤. 어떤 대상에 대한 강한 애정을 가진 팬들을 지칭하는 용어다.
그리고 팬덤 마케팅은 그런 팬들을 활용한 마케팅을 의미했다.
"사장님이 말씀하신 '환상적인' 경험을 한 50명. 그 50명은 고흐라는 화가에게 완전히 빠지게 될 거고, 그 화가를 다룬 <러빙 고흐>도 사랑하게 될 겁니다."
"그건 인정합니다. 하지만 그 숫자가 너무 작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영화가 개봉하기 전에는, 영화의 정보를 최대한 숨기고 대중들이 정보를 찾아나가는 신비주의 마케팅을 진행할 겁니다."
"...얘기해보세요."
새롭게 등장한 화제에 고개를 끄덕이는 하정엽.
"TV에 영화 예고편 대신 해바라기 그림만 5초동안 송출하겠습니다. 그리고 CK 영화관 곳곳에 <러빙 고흐>에 대한 정보를 숨겨둘 겁니다. 이런 식으로 수수께끼를 내고, 호기심을 가진 대중들이 직접 단서를 찾아 <러빙 고흐>라는 영화가 개봉한다는 걸 알아낼 수 있도록 유도하겠습니다."
"...이것도 확실히 이슈는 되겠군요."
어느날 서울 곳곳에 등장하는 커다란 해바라기 그림들. 그리고 그 정체가 과연 뭘지 추측하는 네티즌들.
과연 인터넷에서 이슈가 될 만한 내용이었다.
"이것도 500만명의 사람들을 동원하진 못할 겁니다. 고작해야 20명, 30명 정도가 수수께끼에 동참하고, 영화를 보겠죠. 다만 그 사람들은 자신이 직접 알아낸 영화를 봤단 점에서 큰 만족을 느낄 겁니다."
고흐 전시회. 수수께끼. 사람들의 참여를 유도하는 한록의 마케팅과, 그로 인해 사람들이 느끼게 될 감정.
"이 사람들이 바로 <러빙 고흐>의 팬이 될 겁니다."
한록의 말에 하정엽이 알겠다는 듯 말했다.
"전시회도, 수수께끼도, 그냥 관객을 만드는게 아니라 영화를 아주 좋아하는 '팬'을 만드는 전략이군요."
"맞습니다. 이런 팬이 100명만 모이면 됩니다."
"그걸로 중복 관람을 유도하겠다는 겁니까?"
N차 관람, 혹은 회전문 관객이라고 불리는 중복관람. 한 영화를 몇 번이고 다시 보는 관객을 뜻한다.
이 '회전문 관객'은 동성애 사극영화인 '남자와 왕'을 천만 관객 영화로 만든 중요한 집단이기도 했다.
이후로도 매니악한 영화들의 흥행을 이끌었던 회전문 관객. 이후로 영화 관계자들도 이런 관객을 의식하기 시작했다.
"아닙니다. 이 100명은 관객이 아닙니다."
그러나 한록은 거기서 끝낼 생각이 없었다.
무언가를 너무나 사랑하는 팬. 그리고 그를 활용한 팬덤 마케팅.
그 팬덤 마케팅의 핵심은 N차 관람처럼 '한 사람이 많이 소비한다'는 사실이 아니다. 그 핵심은 바로.
"이 사람들이 바로 <러빙 고흐>의 마케팅을 진행할 사람들입니다."
'팬'들은 스스로 좋아하는 대상을 위해 움직인다는 점이다.
영화의 리뷰. 핸드폰 개봉기. 소설사이트의 추천글.
'재밌는 소설 하나 추천합니다.'
무언가가 잘 되길 바라는 마음에 스스로 움직이는 사람들.
"사장님 말이 맞습니다. 저 혼자서 독립 영화로 500만 관객을 만든다는 건 불가능합니다. 저 혼자 얼마나 많은 일을 할 수 있고, 저 혼자 얼마나 많은 사람을 파악할 수 있겠습니까."
한록이 아무리 천재라도 가질 수밖에 없는 한계. 시간도 부족하고, 인력도 부족하다.
하지만 그런 사람이 100명이 넘어가면 얘기가 달라진다.
"하지만 이 컨텐츠를 사랑하는 100명이, 각자의 분야에서 홍보를 한다면 얘기는 달라집니다."
한 명이 아니라 백 명이, 그것도 아주 열정적인 백 명이 함께 하는 마케팅.
그리고...
"소비자가 홍보하는 제품을 만들겠다라."
판매자가 아니라 소비자가 하는 마케팅.
모든 회사의 오너가 궁극적으로 바라는 결과였다.
한록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긴 하정엽. 하정엽은 과거 한록의 프레젠테이션을 떠올리고 있었다.
'GV와 비슷하군.'
언제나 소비자의 참여와, 브랜드 로열티를 강조하는 한록. '소비자 스스로 홍보하는 제품'이라는 모든 회사가 꿈꾸는 이상을 제시하는 한록.
"당신은 정말..."
한록을 바라보던 하정엽이 입을 열었다.
"한 회사의 사장이라면 좋아할 수 밖에 없는 사람이야."
그리고 무심코 진심을 얘기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