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 회사원이 선넘으면 생기는일-99화 (99/263)

< 99 : 팬덤 마케팅(1) >

최경준과의 면담을 마치고 사무실로 돌아가는 한록. 그를 불러세우는 사람이 있었다.

"이한록 과장님."

문오석의 비서, 한비서였다.

"본부장님이 찾으십니다."

한록에게 음악사업본부로 올 것을 제안한 문오석. 문오석은 이제 답을 들을 예정인 듯 했다.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이건 한록 역시 기다리던 일이었다.

최경준의 오랜 라이벌 문오석.

인수전에서 홈쇼핑 본부 다음으로 2위의 위치를 차지한 음악사업본부의 본부장.

최경준을 제치기 위해 자신에게 스카웃을 제안한 사람.

문오석에겐 많은 모습이 있었지만, 한록이 신경 쓰는 것은 단 하나였다.

'문오석과 오과장은 어떤 관계인가.'

과거 자신에게 누명을 씌운 오과장. 문오석이 어떤 방식으로 이 일에 엮였는지 알아내야 했다.

'미리 대비는 했다.'

칸에서 문오석의 입을 열게 할 방법을 생각해 온 한록.

한록이 본부장실로 문을 열고 들어가자 문오석이 인사를 건넸다.

"잘 왔군."

문오석이 한록을 의자로 안내했다. 문오석의 가시 돋힌 실이 한록의 발목을 타고 오른다.

"회사에 그쪽에 대한 소문이 자자해. 또 잘하고 왔나보지."

웃는 얼굴과 다르게 목까지 올라온 문오석의 실. 이제 실은 한록의 온몸을 감싸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웃는 얼굴로 예의를 차린 인사. 그 아래로 오가는 팽팽한 긴장감.

"그래. 이제 답을 줄 때가 됐지?"

문오석이 말했고...

'이제 시작하자.'

한록은 생각했다.

'제안에 흔들린 척 한다.'

그런 생각 하에 조용히 입을 여는 한록.

"본부장님의 제안은..."

문오석이 한록의 말에 귀를 귀울였다.

"정말 감사했습니다. 하지만 영화사업본부를 두고 떠나기는 어렵습니다."

"그래. 영화를 아주 좋아한다고 들었어."

"네. 제가 이 회사에 들어온 이유입니다."

"여기에 계속 붙잡아두겠다는 건 아니야. 인수전이 끝나면 곧 되돌려 보낸다니까."

"정말이십니까?"

"당연하지."

문오석의 얼굴은 태연했으나, 한록은 실을 통해 그 속내를 파악할 수 있었다. 문오석의 말은 완벽한 거짓말이었다.

"...저 역시 정말 승진을 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하는 한록.

진실이 하나도 없는 대화가 아슬아슬한 긴장속에 이루어진다.

"승진은 모든 회사원이 바라는 거지. 그것 때문에 흔들리는 게 나쁜가? 난 아니라고 생각해."

"하지만..."

머뭇거리는 말투의 한록. 꽤나 수준급의 연기였다. 한록을 바라보던 문오석이 아주 친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자네가 왜 망설이는지 알아. 내가 자네를 쓰고 버릴까 봐 두려운 거지?"

문오석이 이번엔 정면으로 치고 들어왔다.

"그건 걱정 하지 마. 난 사람 버리는 스타일은 아니거든."

한록의 얼굴을 찬찬히 살피는 문오석. 한록이 대답이 없자 문오석이 말을 이었다.

"아니, 솔직히 말할게. 나도 영화사업본부를 컨트롤 할 사람이 필요해. 나는 그 역할을 자네에게 맡기겠단 거야. 그러니 인수전이 끝나고 자넬 내칠 순 없지."

졌다는 듯 말하는 문오석.

"여기까지 말해야할지는 몰랐네. 정말 몸값이 높군."

문오석이 자신의 말을 후회하는 것처럼 중얼거렸다.

'영화사업본부에 스파이를 심을거다. 그게 너다.' 라는 문오석의 말.

정면으로 치고 들어와서, 약간의 허술함을 보여준다.

'그래. 이 사람한테는 내가 꼭 필요한 거다.'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이렇게 생각했을 법한 문오석의 행동. 그리고 이는-

'그래. 이걸 원했다.'

모두 한록이 의도한 것이었다.

"...저를 첩자로 쓰겠다는 말씀이십니까."

"그건 말이 너무 심하지. 그냥 영화사업본부를 관리할 사람이 필요하단 거야."

"하지만..."

"왜 망설이는 거지? 회사에서 자기 이득을 따라서 움직이는 건 당연한 거야."

친절한 태도로 한록을 회유하는 문오석. 한록이 망설이는 태도를 보이다가 문오석에게 물었다.

"...궁금한 게 한 가지 있습니다."

"뭐든 물어봐."

"그건..."

머뭇거리는 듯한 말투로 한록이 던진 질문.

"오과장에게도 같은 제안을 하셨습니까?"

한록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지금까지 한록이 연기를 해 온 목적. 바로 이 대답을 이끌어내기 위해서.

문오석이 속을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왜 그런 생각을 하지?"

"오과장은 저랑 사이가 안 좋았습니다. 회사에서 유명한 얘기였으니 알고 계실 거라 생각합니다."

"들어는 봤지."

"저랑 언쟁이 있었을 때...오과장이 저는 자기 뒤에 누가 있는지 모를 거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본부장님 얘기를 들으니, 오과장이 얘기한 게 본부장님이란 생각이 듭니다."

한록이 오과장에 대한 얘기를 하자 문오석의 실이 방어라도 하듯 한록의 앞에 방패처럼 모이기 시작한다.

칭칭 엮인 실 너머로 문오석이 말했다.

"순전히 추측이군."

"여기서 솔직히 대답해주지 않으신다면 본부장님을 믿을 수 없습니다."

한록의 말.

"..."

문오석의 침묵.

그리고-

"그래. 오과장 뒤에는 내가 있었지."

인정.

그 말에 한록이 번쩍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그쪽은 비리가 너무 많았어. 그래서 내가 지켜줄 수 없었던 거야. 자네는 그런 타입이 아니니-"

"그만 하십시오."

한록이 문오석의 말을 잘랐다. 그리고 말했다.

"이런 거짓말이 저한테 통할 거라 생각하십니까?"

순식간에 변한 한록의 말투. 문오석이 무표정한 얼굴로 한록을 바라보았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데."

"이 시기에 영화사업본부의 인력을 빼내기 위해 저에게 스카웃을 제안했단 것. 그리고 인수전이 끝나면 오과장처럼 버리려는 속셈이라는 걸 누가 모를 것 같습니까."

"애초에 넘어올 마음이 없었군. 날 가지고 장난을 친 건가?"

"장난은 제가 아니라 본부장님이 치셨습니다."

한록이 사나운 말투로 답했다.

"저와 회사를 얼마나 우습게 보면 이런 제안을 하십니까."

다른 사업본부의 임원에게 하는 말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날이 선 말투.

그러나 문오석은 오히려 냉정한 얼굴로 한록을 바라볼 뿐이었다.

오과장과 달리 조금도 흥분하지 않은 듯한 얼굴. 다만 아까의 친절한 웃음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있었다.

"알면 더 잘됐군. 그래. 난 최경준을 없앨 생각이고, 그러려면 영화사업본부에 내 장기말이 필요해. 너한테 그 기회를 줬으니 감사하게 받아가."

문오석은 이제 아예 속마음을 감출 생각도 없는 모양이었다. 한록이 코웃음을 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 할말 없습니다. 나가보겠습니다."

허락도 없이 자리에서 일어난 한록.

성큼성큼 걸어가는 한록에게 문오석이 말했다.

"영화사업본부에 내가 심어놓은 사람이 몇이나 될 것 같아? 너 말고도 내 장기말은 많아."

"제 알 바 아닙니다."

"아니, 알아야지. 이런 상황에서 최경준이 언제까지 살아남을 수 있을까. 그리고..."

이어진 문오석의 말은-

"넌 언제까지 살아남을 수 있을까."

한록에 대한 선전포고였다.

그러나 한록은 문오석의 말은 신경도 쓰지 않고 손잡이를 잡았다. 그리고 문을 나서며 말했다.

"적어도 본부장님보단 오래겠죠."

한록이 문을 닫고 밖으로 향했다.

"..."

말없이 한록이 사라진 본부장실을 바라보던 문오석. 잠시 후 문오석이 한비서를 호출했다.

"뮤직 어워드는 어떻게 진행되고 있지?"

"섭외가 모두 종료되었습니다. 고려중이던 아티스트가 전부 섭외 되었습니다."

"그래."

방금 전 한록과의 난리에도 불구하고 냉정하게 일을 살피는 문오석. 그가 비서를 앞에 세워두고 생각에 잠겼다.

'일은 잘 되고 있다. 문제는 이한록이다.'

애초에 한록을 스카웃한 건 진심이 아니었다. '걸리면 좋고, 아니면 말고.' 딱 그 정도의 마음.

무엇보다 문오석이 이번 일을 통해 알고 싶은 것은 따로 있었다.

-이한록이 이 일에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문오석은 한록을 두고 일종의 테스트를 해보았고, 오늘 그 결과를 얻었다.

'오수창. 멍청하긴. 사람 볼 줄을 모르는군.'

오과장의 말에 의하면 한록은 '강직하지만 멍청한' 타입이었다. 그래서 무심코 한록의 질문들에 대답을 해버렸다.

하지만 한록은 생각보다 훨씬 영리한 타입이었다.

자신에게서 영화사업본부에 첩자가 있고, 그 중 한명이 오과장이란 사실을 밝혀낸 한록

'큰 비밀은 아니지만...어쨌든 손실이군.'

급격한 성장을 보여주고 있는 영화사업본부. 문오석의 계획은 영화사업본부가 더 자라기 전에 한록을 빼와서 싹을 잘라버리는 것이었다.

하지만 문오석의 예상보다 최경준과 한록의 관계가 너무 깊었고, 또 한록이 너무 영리했다.

'이한록은 내 손을 벗어났어.'

한록을 쓰고 버리려던 계획은 실패한 상황.

이제는 다른 방법을 찾아야했다.

'...좋지 않은 상황이다.'

인상을 찌푸리며 생각하는 문오석.

생각보다 일이 훨씬 어려워질 것 같았다.

*

유비서가 하정엽에게 말했다.

"사장님. 최경준 본부장님이 만나 뵙고 싶다고 하십니다."

서류를 보던 하정엽이 최경준이란 말에 고개를 들고 유비서를 바라보았다.

"언제?"

"되도록 오늘이길 원한다고 하십니다. 다만 오늘 일정 때문에 확답은 어렵다고 전달 드렸습니다."

지금은 3분기. 모든 회사가 그렇지만, 문화기업인 CK는 특히 바쁠 시기였다.

무엇보다 곧 아시아 최대규모 음악 시상식인 CK 뮤직 어워드가 기다리고 있었다.

CK 뮤직 어워드. 음악사업본부와 공연사업본부가 함께하는 시상식으로, 부산영화제만큼이나 하정엽이 신경쓰는 시상식이었다.

오늘도 계속 음악사업본부와의 미팅이 잡혀있는 상황. 하정엽이 유비서에게 말했다.

"일단 오늘은 어렵다고 전해요. 용건은 어떻게 됩니까."

"그게..."

하정엽이 묻자 유비서가 당황스러운 얼굴로 잠시 대답을 망설였다.

"용건이 이한록과장이라고 합니다."

"이한록? 그게 무슨 말입니까."

"저도 모르겠습니다. 다시 여쭤 봐도 이한록과장에 대한 거라고만 말씀하셨습니다."

유비서의 말에 하정엽이 인상을 쓰며 말했다,

"다음에는 제대로 말하라고 전달하세요."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다시 서류를 보는 하정엽.

'...용건이 이한록이라고.'

하지만 일을 하는 내내 최경준의 말이 계속 떠올랐다.

'무슨 일이지?'

서류를 넘기며 최경준의 말을 떠올리는 하정엽.

잠시 후, 하정엽이 다시 비서를 물러서 말했다.

"최경준 본부장에게 지금 올라오라고 하세요."

10분 정도 후, 최경준이 사장실에 도착했다. 최경준이 하정엽을 보며 생각했다.

'이한록이라고 하니 바로 되는군.'

하정엽이 오늘 매우 바쁘단 것 정도는 최경준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약간 수를 썼는데, 그게 잘 먹힌 모양이었다.

'이한록 없이 미팅을 요청했다면...어려웠겠지.'

하정엽은 최경준을 신뢰한다. 그리고 그 신뢰는 한록에 대한 관심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였다.

한록을 100명 준다고 해도 하정엽은 최경준 한 명을 택할 것이며, 그 누구도 이 사실을 부정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하정엽이 '이한록에 대한 일이다'란 말에 미팅에 응한 이유.

'그 녀석이 나한테는 없는 걸 가지고 있군.'

든든하고 무슨 일이든 맡길 수 있는 본부장 최경준에겐 없지만, 사장에게 사표를 던질 수 있는 다크호스 한록에게는 있는 것.

'기대가 되셨나. 아니면 또 어디로 튈지 불안하셨나.'

하정엽이 한록에게 관심을 가지는 이유. 그건 아마...

'둘 다겠지.'

불안과 기대. 양쪽 모두인 것이 분명했다.

"이한록 과장에 대해서 드릴말씀이 있어서 왔습니다."

"네. 말씀해보세요."

최경준의 말에 하정엽이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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