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8 : 사장님이 지켜보신다(4) >
[미국에서도 이 광고를 진행한다면 한국과 동시에 송출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좋습니다, 한. 함께 일정을 잡으세요.>
흔쾌히 한록의 제안을 수락한 제롬. 그는 이번 광고가 꽤나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광고는 미국에 맞게 변형해 송출하겠습니다. 우리 측 담당자가 곧 연락할 겁니다.>
미국과 한국의 광고는 내용이 상당히 다르다. 미국이 한국에 비해 광고 심의가 자유로운 편이기 때문이었다.
제롬은 아마 좀 더 자극적으로 광고를 내보낼 생각인 듯 했다.
그 뜻을 파악한 한록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네, 알겠습니다. CK도 미국 현지에 더 어울리는 방식이 있는지 고민해보겠습니다.]
둘은 10분 정도 더 대화를 나누었고, 한록이 다음 주까지 광고 계획을 보내주기로 하고 대화는 마무리 되었다.
전화를 끊은 제롬은 책상에 놓인 한록의 명함을 바라보았다.
한록의 이름 앞에 붙은 CK라는 글자. 그리고 오늘 한록이 한 말.
'올해 최고의 광고가 될 겁니다.'
[자신감이 대단하군.]
무뚝뚝한 얼굴로 혼잣말을 하는 제롬. 하지만 헐리웃에서 보낸 26년간의 경험이 말해주고 있었다. 한록의 말은 곧 사실이 될 것이다.
한록의 명함을 보던 제롬이 아쉬운 듯 중얼거렸다.
[몸값이 끝도 없이 오르겠군.]
*
다음날 점심시간. 마케팅 부서에 퍼지는 소리.
"이과장! 유선씨!"
현차장이 한록과 유선을 보며 말했다.
"오늘은 옥루각이다!"
현차장이 오랜 출장을 마치고 돌아온 둘을 위해 준비한 것.
바로 점심시간에는 입장도 어려운 회사 근처 최고의 냉면 맛집 <옥루각>이었다.
GV팀. 그리고 송과장의 2팀이 합류한 한록과 유선의 환영회.
옥루각의 테이블 두 개가 마케팅 부서 사람들로 꽉 차버렸다.
"저 진짜 한식이 너무 그리웠어요. 프랑스 음식은 입에 안 맞더라구요."
"암, 그렇지. 그러니까 라면 챙겨가라니까."
"해외 출장은 처음이라...그래도 이과장님이 사준 저녁은 진짜 맛있었어요."
"미슐랭 식당이었으니까요."
즐겁게 대화를 나누며 냉면을 먹는 GV팀. 한참 식사를 하던 송과장이 무언가를 보고 한록을 툭툭 건드렸다.
"이과장. 저거 봐."
송과장이 가리킨 것은 옥루각의 대형 tv. 거기서는 <퀸> 싱어롱 상영 장면이 나오고 있었다.
[2년만의 천만영화 <퀸>. 싱어롱 상영이라는 독특한 상영 방식이 관객들의 시선을 끌었습니다.]
어제 저녁, 드디어 <퀸>은 천만 관객을 달성했다. 어제부터 언론은 내내 <퀸>에 대한 얘기를 하고 있었다.
TV에서 흘러나오는 <퀸>과 싱어롱 상영에 대한 얘기. 그 얘기를 들은 옥루각의 손님들 역시 <퀸>에 대한 얘기를 시작한다.
"철민씨. <퀸> 봤어요?"
"저 싱어롱으로 봤죠. 엄청 재밌던데요."
"와, 결국 천만 찍었대."
"저건 찍을만 했지."
"<스캔들>도 700만이었잖아. 요즘 CK 잘 나가네."
영화와 관련된 회사가 모여 있는 곳이다 보니, 여기저기서 업계에 대한 얘기가 들려오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특히 눈에 띄는 얘기들이 있었다.
"에이씨. 싱어롱은 무슨 얼어 죽을 싱어롱."
"저거 박차장네랑 개봉 겹쳤지?"
"어. 쟤네 때문에 우리는 망했어."
슬쩍 쳐다보니 CK ENM의 라이벌 회사 샬롯테 엔터테인먼트의 사람들이었다.
"기운 내. 대진 운이 안 좋았던 걸 누가 뭐라 하겠어?"
"야, 저거 만든 놈이 고작 서른 살 애송이야. 내가 서른 살한테 진 거라고."
"그냥 애송이 아니고 그놈이잖아. 그...그...이름 특이한 놈. CK 천재."
"어. 이한록."
이제는 샬롯테에도 퍼진 한록에 대한 얘기. 한록의 이름이 나오자, GV팀과 2팀 사람들이 킥킥 웃기 시작한다.
'이겼다, 이 놈들아.'
'우린 이한록 있다. 너흰 없지?'
뭐 이런 반응.
"<지구 특공대>도 그렇고, <스캔들>도 그렇고, <퀸>도 그렇고. 올해는 CK가 먹었네."
"그것뿐이냐. 이제 <수면> 나오잖아."
"하..."
<수면>이란 말에 한숨을 쉬는 샬롯테 엔터테인먼트의 직원. <수면>은 CK ENM의 2022년 최대 기대작이었다.
"시상식도 CK가 가져가겠구만."
"작년까지만 해도 CK 따라잡기 직전이었는데. 우리 왜 이렇게 됐냐."
우울한 얼굴로 대화를 주고받는 샬롯테 사람들.
그 사람들을 보던 현차장이 한록의 팔을 툭툭치며 말했다.
"이과장, <퀸> 얘기 아무거나 해봐."
"무슨 말이요?"
"그냥 아무거나 해봐. 내가 이한록이다, 내가 저거 만들었다, 한번 해줘야지."
"그런 걸 왜 합니까, 현차장님..."
그저 묵묵히 밥을 먹으려는 한록. 그러나 현차장은 조용히 넘어갈 마음이 없는 모양이었다.
추가주문을 하며 사장에게 말을 건네는 현차장.
"사장님. 지금 나오는 저거요. 저희가 만든 겁니다."
"어머? 현차장님이?"
사장과 잘 아는 사이인지, 사장 역시 넉살 좋게 현차장의 말을 받아준다.
"네. 저희랑 이 친구요. 여기 이한록 과장이 담당했습니다."
"아, 여기 잘생긴 분이? 나도 저거 봤어. CK에 이렇게 잘생긴 사람이 있는 줄 알려줬으면 두 번 봤지."
그 말에 꺄르륵 웃음을 터뜨리는 회사 사람들과 옥루각의 사장.
"저 놈이냐?"
"어."
그리고 한록을 노려보는 샬롯테 사람들.
이제는 영화업계 모두가, 아니, 옥루각의 사장까지 아는 자신의 존재. 그 모습을 보며 한록은 생각했다.
'...이제 옥루각도 못 오겠네.'
점점 점심을 먹을 곳이 줄어들고 있었다.
*
같은 시각, CK ENM의 건물.
로비는 밥을 먹으러 가는 사람들로 붐비는 중이었다.
그리고 그들 대부분이 얘기하는 화제 하나.
"<퀸>이 오늘 천만 찍었대."
바로 <퀸>의 천만 달성에 대한 것이었다.
"그중 다섯 명은 나야. 나 싱어롱만 세 번 다녀왔다."
"난 일곱 번 다녀왔는데."
"뭐?! 티켓팅 어떻게 했어?!"
간만에 등장한 천만 영화에 활기가 도는 CK ENM. 그리고 사람들 사이에선 자연스럽게 한록의 이름이 나오기 시작했다.
"언제 내린대? 싱어롱 한 번 더 가야하는데."
"<부산 열차> 개봉하기 전까지는 걸려있지 않을까?"
"그 전에 가야겠다. 이거 끝나면 언제 또 싱어롱을 해보겠어."
"그러게 말이야. 싱어롱은 대체 누구 아이디어래?"
"누구겠어. 이한록이지."
"아...그 사람."
한록의 이름에 싱어롱에 대한 얘기를 꺼낸 직원이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 사람 웬만한 임원보다 유명한 거 같지 않아? 얼굴 한 번 보고 싶다."
"잘생겼어. 연예인 같아."
"아씨. 최연소 과장에, 얼굴도 잘생겼고...세상 불공평 하네."
늘 그렇듯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한록.
그리고 로비를 지나며 한록에 대해 생각하는 누군가.
'이한록이라.'
CK ENM의 와이셔츠 부대 사이에서 면바지를 입고 누군가를 기다리는 젊은 남자. 서도원 감독이었다.
"서감독님."
사람들이 어느 정도 빠져나간 후, 누군가 엘리베이터에서 내려와 서도원의 이름을 불렀다. 정부장이었다.
"오랜만입니다, 부장님."
"네, 오랜만입니다. <수면> 크랭크인 이후로 처음 뵙네요."
서도원.
천만 영화를 두 개나 배출한 감독이자, CK ENM의 하반기 최고 기대작 <수면>의 감독.
서도원은 오늘 <수면>의 미팅을 위해 CK를 찾아왔다.
"올라가시죠."
정부장이 서도원을 엘리베이터로 안내했고, 둘은 회의실로 향했다.
"잘 지내셨습니까, 서감독님."
회의실에서 서도원을 기다리고 있던 최경준이 반갑게 다가와 악수를 건넸다.
"네, 본부장님. 오랜만입니다."
영화사업본부의 최고 권력자이자, 한국 영화계의 아버지인 최경준. 그런 최경준에게 편하게 대답하는 서도원.
이 젊은 감독을 마중하기 위해 최경준이 직접 행차했다.
'이 사람도 대단한 인간이지.'
불과 서른 셋의 나이에 '아시아의 천재감독'이라고 불리는 서도원. 정부장이 그를 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저는 나가보겠습니다. 편하게 얘기 나누시기 바랍니다."
최경준이 정부장과 서도원에게 인사를 하고 회의실을 나갔다.
이제 회의실에 둘만 남게 된 서도원과 정부장. 둘은 <수면>에 대한 얘기를 시작했다.
"<수면>은 가제라고 하셨죠. 제목은 정하셨습니까?"
"아뇨, 아직입니다."
"이번 주 내로는 제목이 나와야 마케팅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CK가 2022년 가장 많은 제작비를 들여서 만든 영화, 가제 <수면>.
<수면>의 제작이 3개월 전 끝났고, 이제 마케팅에 들어가야 할 시기였다.
"부장님. 안 그래도 마케팅과 관련해서 드릴 말씀이 있었습니다. 원하는 담당자가 있습니다."
"네, 말씀하십시오."
천재감독으로 불리는 만큼 완벽주의자로 유명한 서도원.
그는 영화의 시나리오부터 마케팅, 유통까지 모든 과정에 하나하나 손을 대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직접 지목하려는 사람.
'누군지 알겠군.'
"<지구특공대>와 <퀸>을 맡았던 사람을 원합니다."
바로 한록이었다.
서도원의 말에 정부장이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지구 특공대>를 거쳐, 부산 영화제와 <퀸>까지.
이미 영화계에서 한록에 대한 소문이 자자해진 상황. 감독들이 한록을 원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수면>은 이한록의 취향이 아닐 거야.'
문제가 있다면 한록이 <수면>을 담당하고 싶어하지 않을 거란 사실이었다.
어마어마한 제작비가 들어간 대규모 영화.게다가 천재감독으로 소문이 자자한 감독.
모두 여태까지 한록이 담당한 영화들과는 거리가 먼 요소들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한록은 지금 <러빙 고흐>를 맡고 있는 상황.
영화 세 개를 동시에 담당하는 건 아무리 한록이라도 불가능한 것이었다.
정부장이 서도원에게 말했다.
"이한록 과장은 지금 다른 영화를 두 개나 담당하고 있습니다. 스케쥴 조율은 해보겠지만, 아마 <수면>을 담당하긴 어려울 겁니다."
"어떤 영화를 담당하고 있나요?"
"<부산열차>와 <러빙 고흐>입니다."
"<부산열차>는 대작이니 어쩔 수 없겠고. <러빙 고흐>를 빼면 되겠네요."
"갑자기 프로젝트를 바꿀 순 없습니다. 본인의 의사도 물어봐야 하고요."
"본인의 의사라."
정부장의 말에 서도원이 코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제가 만든 영화입니다. 당연히 맡고 싶어 하겠죠."
'내 영화를 거절할 사람은 없다'라는 거만한 태도. 그러나 그 말은 허세가 아니었다.
'그래, 서도원의 영화라면 다들 맡고 싶어하겠지.'
정부장 역시 인정하는 영화계에서 서도원의 위치.
'하지만 상대는 이한록이다.'
그렇게 생각한 정부장이 서도원에게 말했다.
"얘기는 해보겠습니다. 다만, 다른 사람이 맡게 될 수도 있다는 것 정도는 생각해 두시기 바랍니다."
"그럴 일 없습니다."
정부장의 말에 서도원이 자신만만하게 답했다.
'과연 그럴까.'
그리고 정부장은 한록을 떠올리며 어깨를 으쓱였다.
*
1시간 후. 서도원은 회의를 마치고 돌아갔고, 정부장은 최경준에게로 향했다.
간단히 보고를 마친 정부장이 최경준에게 말했다.
"그리고...서도원 감독이 <수면>의 담당자로 이한록 과장을 원합니다."
"이한록이라. 본인이 원하지 않을 것 같은데."
정부장과 똑같은 말을 하는 최경준. 정부장이 최경준에게 답했다.
"혹시 모르니 의사는 물어보겠습니다."
"그래. 대답을 들으면 나한테도 알려주길 바라네."
"네, 알겠습니다."
보고를 마친 정부장이 물러났고, 혼자 남은 최경준은 생각에 잠겼다.
'서도원이 이한록을 원한다.'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감독 중 한 명인 서도원. 그리고 CK의 유명인사 한록.
최경준 역시 두 천재의 만남을 기대했지만...
'이한록이 좋아할 타입은 아니지.'
실력만큼이나 거만한 성격의 서도원과 상대가 누구든 할 말은 하는 한록.
그 둘의 조합이 좋은 시너지가 날 거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이건 안 될 거야.'
짧게 판단을 마친 최경준.
어차피 <수면>을 한록에게 맡길 수 없다면, 지금은 한록이 부탁한 내용을 들어줘야 할 때였다.
'사장님의 허락이 필요합니다.'
한록은 <러빙고흐>를 위해 더 서울 미술관과의 협업을 원했다.
하지만 한록의 마케팅을 위해선 하정엽의 허락이 필요한 상황.
이건 최경준 조차 흔쾌히 '알겠다'고 대답할 수 없는 사안이었고, 최경준은 좀 더 상황을 살핀 후 하정엽에게 얘기를 꺼낼 예정이었다.
하지만 <퀸>이 막 천만을 달성하고, 미국과 동시에 <부산 열차>를 광고하기로 결정한 지금.
'얘기하려면 지금이 기회다.'
지금이야말로 하정엽을 설득할 수 있는 기회란 생각이 든다.
생각을 마친 최경준이 비서에게 말했다.
"사장님께 연락해. 되도록 오늘 만나 뵙고 싶다고."
"네. 용건은 뭐라고 말씀드릴까요?"
"용건은..."
<퀸>, <러빙 고흐>, <부산 열차>, 그리고 더 서울. 그 중 가장 하정엽의 마음을 흔들 수 있을 얘기.
잠시 고민하던 최경준이 입을 열었다.
"이한록이라고 말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