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 회사원이 선넘으면 생기는일-97화 (97/263)

< 97 : 사장님이 지켜보신다(3) >

"사장님이라니. 갑자기 무슨 소리지?"

최경준의 질문에 한록이 답했다.

"곧 더 서울 미술관에서 반 고흐 전시회가 열립니다.

CK그룹의 소유인 더 서울 미술관. 곧 그 곳에서 반 고흐 전시회가 열릴 예정이었다.

그리고 그 미술관은 바로 하정엽이 이사장으로 있는 곳이었다.

"그래서?"

"영화를 본 사람에게 전시회에 입장할 수 있는 이벤트를 진행하려 합니다."

"그 정도야 어렵지 않지만, 크게 효과가 있을지 모르겠군. 전시회야 그냥 표를 사면  되는 일이잖아."

최경준은 한록의 마케팅 방안이 탐탁 않은 듯한 얼굴이었다.

"자네가 생각한 것 치곤 만족스럽지 않은 내용인데."

"네. 그냥 전시회를 관람하는 게 아닙니다."

그리고 한록은 자세한 내용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사람들과 함께 입장하는 게 아니라, 따로 시간을 비워서 이벤트에 당첨된 사람만 입장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단 한명만 입장할 수 있도록 전시회 중에 시간을 비우라고? 그건 불가능해."

"아뇨. 중간에 시간을 비울 필요는 없습니다."

전시회를 활용한 한록의 '진짜' 마케팅 방안.

"전시회가 모두 끝난 밤에 진행하면 됩니다."

전시가 모두 끝난 저녁. 이벤트에 당첨된 단 한명만이 미술관에 입장해 고흐의 그림을 보게 된다.

한록의 말에 최경준은 그 광경을 상상했다.

어둠이 깔리기 시작하는 가을밤. 희미한 불빛만이 켜진 미술관.

그리고 그 곳을 걷다보면 만나게 되는 고흐의 작품들.

단 한명만을 위해 비워진 미술관. 그곳에서 나 혼자 남아 고흐의 작품을 본다.

세상 어디에서도 경험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한국만이 아니라 세계에서 주목할 거다,'

한록의 말을 듣자마자 최경준의 머리에 스치고 지나가는 생각이었다.

단 한명을 위해 미술관을 비우는 것.

거기서 혼자서 고흐의 그림을 볼 수 있다는 것.

모두 엄청나게 매력적인 일이었다.

한국만이 아니라 가까운 일본과 중국, 아니 전 세계의 사람들이 비행기를 타고 날아 올만한 마케팅 방안.

"이건 내 수준에서 결정할 일이 아니야."

문제는 다른 본부도 아닌 다른 회사와의 연계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더 서울이 결정할 문제도 아니지. 이건 사장님을 설득해야 하는 문제야."

영화 홍보를 위해서 미술관을 빌려 달라.

더 서울측은 당연히 반대할 것이었다. 다시 말해, 이 일을 진행할 수 있는 것은 오너 일가이자 더 서울의 이사장인 하정엽 뿐이었다.

'사장이 필요하다'는 한록의 말은 바로 이것을 의미했다.

최경준이 깊은 고뇌에 담긴 얼굴로 한록을 바라보았다.

"이한록. 사장님을 입에 올리는 게 우습나 보지."

다른 본부를 설득하는 걸 넘어서 이제 사장을 설득해야 한다.

심지어 그 내용은 이전까지 그 누구도 시도해본 적 없는 프로젝트.

최경준 역시 부담을 가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한록이 최경준에게 답했다.

"제가 제롬 애더슨의 스카웃을 받음에도 CK에 남은 이유가 있습니다. CK에서만 이런 프로젝트를 진행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헐리웃. 알렉산드로 감독. 그리고 제롬 앤더슨과 일할 수 있는 기회.

제롬의 스카웃은 한록에게도 나름대로 흥미가 가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한록이 CK에 남은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것이었다.

재계 순위 12위. '재벌가' CK그룹.

영화를 마케팅하기 위해 고흐의 그림을 사용할 수 있는 세계 유일의 회사.

CK에서만 진행할 수 있는 마케팅들이 있었고, 한록은 그걸 모두 해볼 때까지 CK를 떠날 생각이 없었다.

한록이 최경준에게 말했다.

"본부장님. 저를 붙잡고 싶다 하지 않으셨습니까."

한록의 말뜻은 간단했다.

'내가 남길 바란다면.'

'내 말을 들어야 할 거다.'

"필름마켓에서 못된 걸 배워왔군."

최경준이 한록의 말에 인상을 찡그리며 말했다.

최경준의 말이 맞았다. 어떤 상품을 가지고 다른 사람과 딜을 하는 것. 그게 한록이 이번 필름마켓에서 배워온 것이었다.

"그런 걸 배우라고 보내신 것 아닙니까."

그리고 이번 상품은 바로 이한록 그 자체였다.

자신의 가치를 두고 최경준과 협상을 하는 한록.

"여전히 건방지군. 대체 언제쯤 그 성격을 고칠까."

최경준이 한록에게 오랜만에 날카로운 모습을 보였다.

'연봉 협상은 애들 장난이었군.'

한록과의 연봉협상이 잘 끝났다 생각했지만, 정작 한록이 원하는 건 여기에 있던 것이었다. 최경준이 한록에게 말했다.

"여전히 건방지고. 무모하고, 통제가 불가능하고, 회사가 우스운 줄 알고..."

최경준이 한록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말했다. 젠틀함 속에 감춰진 그의 날카로운 시선이 한록을 샅샅이 훑기 시작했다.

한록은 자신조차 감당하기 어려운 상대였고, 최경준은 그런 사람을 좋아하지 않았다.

하지만 한록은 그런 동시에-

"그래서 결국 성공하지 않습니까."

절대 포기할 수 없는 상대기도 했다.

"자네는 언제나 날 시험해."

혼잣말을 하듯 대답한 최경준. 최경준은 갈등에  빠져있었다.

인수전이라는 중요한 시기.

그 상황에서 다른 회사의 프로젝트에 영향을 주는 프로젝트를 진행한다. 이건 회사 간의 싸움이 될 수도 있는 문제였다.

하정엽이 어떻게 반응할지 모르는 상황. 이 제안을 듣는 모두가 무모한 시도라고 말할게 분명했다.

하지만 그 프로젝트를 제안한 사람은 이한록이다.

그렇다면 그 사실만으로도 시도해 볼 가치가 있었다.

"그래. 사장님께 말씀드려 보지."

생각을 마친 최경준이 말했다

*

"자네를 필름마켓에 보내는 게 아니었어. 너무 성장해왔군."

최경준이 한록을 보며 말했다. 최경준의 말은 진심이었다.

이전까지 한록은 단순히 고집이 세서 통제가 어려운 타입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지금의 이한록은 다른 사람과 거래를 하는 방법을 알고 있다.'

정치. 사람. 인간관계. 늘 어려워하던 부분들을 점차 배워나가고 있는 한록.

'언젠가 내 부하가 아니라 내 곁에 설 녀석이 되겠군.'

하지만 그건 아직은 걱정할 일이 아니었다. 최경준이 한록에게 말했다.

"내려가보게. 사장님과 면담 후 다시 부르지."

"감사합니다, 본부장님."

최경준에게 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온 한록.

한록이 본부장실을 빠져나와 작게 한숨을 쉬었다.

'사장을 설득해라.'

'영화를 위해 다른 회사의 허락을 받아와라.'

한록 역시 이 마케팅을 최경준에게 제안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성공하리란 자신감이 있었고, 그렇다면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필름마켓이 큰 도움이 됐군.'

최경준의 말처럼, 필름마켓에서 여러 바이어를 상대한 경험은 한록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연봉협상!'

그리고 최대리와의 작은 에피소드도 마찬가지였다.

하루종일 '어떻게 하면 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을까'에 대해 생각하던 필름마켓.

이제 그 곳을 떠나서 다시 마케팅부서로 돌아왔고, 영화 마케팅을 진행한다는 게 조금은 어색하기도 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마케팅 부서로 향하는 한록.

이틀간의 연차. 그리고 출근 후 바로 식당으로 향했기에 마케팅 부서는 거의 10일 만이었다.

"이한록 복귀했습니다."

그리고 한록이 사무실로 들어가자마자 들리는-

"이과장!"

반가운 현차장의 목소리.

그 목소리에 한록이 미소를 지었다.

한록이 등장하자 현차장을 비롯해 하대리, 송과장, 박과장 등이 주위로 몰려들었다.

"이과장. 우리가 얼마나 기다렸는지 알아? 칸 얘기 좀 해봐."

"대체 어떻게 하면 부산열차를 두 배에 팔 수 있는 거예요?"

"필름마켓에서 경매했다며. 사실이야? 필름마켓 최초래. 인터뷰 요청도 왔었어."

"이...이과장!"

몰려드는 사람들 때문에 한록의 주위에서 밀려나는 현차장. 그걸 보고 웃는 유선과 최대리.

'그래. 내가 있을 곳은 여기지.'

필름마켓과 칸도 즐거웠지만, 역시 자신이 있을 곳은 이곳이란 생각이 들기 시작한다.

"이한록."

그때 자리에서 일어난 정부장.

"헉. 다들 앉아."

정부장의 등장에 사람들이 알아서 해산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모두 자리에 앉아 일을 시작하자 정부장이 한록에게 다가와 말했다.

"고부장이랑 싸우고 왔다며."

"싸운 게 아니라 일을 하고 왔습니다."

"넌 일할 때마다 싸우잖아."

"그건 맞습니다."

맞는 말이고, 딱히 반박할 생각도 없었다. 판권판매를 위해선 꼭 필요한 일들이었으니까.

'혼나면 뭐...혼나고 말지.'

출장을 가서 다른 부서 부장과 사사건건 싸우고 돌아온 한록. 어쩌면 부하 관리를 못했다고 정부장이 곤란해질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에 대한 정부장의 반응은-

"이기고 왔으면 됐다."

어쩐지 뿌듯한 얼굴이었다.

금세 표정을 지운 정부장이 무표정한 얼굴로 한록에게 말했다.

"고부장이 또 문제 삼으면 나한테 말해."

"네, 알겠습니다."

정부장의 말에 한록이 기분좋게 웃으며 답했다.

출장을 가서 다른 부서 부장과 한 판하고 온 부하.

그런 부하에게 할 말이 '이기고 왔으니 됐다'라니.

'어디 가서 이런 상사를 만나겠어.'

CK, 그리고 마케팅 부서에서만 만날 수 있는 상사 정부장. 그런 상사가 뒤에 있으니 여간 든든한 게 아니었다.

*

정부장과의 대화를 마친 한록은 자리에 앉았다.

오랜만에 앉는 자신의 자리가 어색했지만, 어쨌든 오늘부턴 다시 한국에서 일을 해야 하는 상황.

한록은 곧장 제롬에게 메일을 보내기 시작했다. 스카웃에 대한 메일이었다.

스카웃에 대한 한록의 생각은 하나.

'아직은 이르다.'

제롬의 제안은 물론 한록에게 좋은 기회였다.

하지만 한록을 위해 고흐의 컬렉션을 열어줄 수 있는 회사는 CK 한 곳 뿐이었다. 게다가 아직 남아있는 영화들이 많이 있었다.

'다음에 봅시다, 제롬.'

제롬에게 정중하게 거절메일을 보낸 한록.

그리고 10분 정도가 지나자 전화가 울리기 시작했다. 전화를 건 상대는-

<제롬 앤더슨입니다.>

제롬이었다.

<메일 확인했습니다, 한.>

로스 앤젤러스는 밤인데도 불구하고 바로 메일을 확인하고, 직접 연락까지 한 제롬. 제롬은 그만큼 한록의 답장을 기다린 모양이었다.

<아쉽게 됐군요. 하지만 부산열차에 집중해봅시다.>

다행히 제롬은 사사로운 감정으로 일을 망치는 타입은 아닌 모양이었다.

아니, 어쩌면 한록의 답을  예상한 것일 수도 있었다. 한록이 제롬에게 답했다.

[네, 협조 감사합니다. 지금 국내에 도입하고자 하는 마케팅이 있습니다. 곧 정리해서  우드엔터테인먼트 쪽으로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아니. 지금 말해보십시오.>

마케팅은 실무자끼리 소통할 문제다. 하지만 제롬은 어지간히 한록의 방안이 궁금한 모양이었다.

'제롬이 바로 승인해주면...나야 좋지.'

제롬이 바로 승인을 한다면 우드 엔터테인먼트쪽 실무자와 복잡한 조율 과정을 거칠 필요가 없어진다.

그렇게 생각한 한록이 제롬에게 설명을 시작했다.

[*share a coke 캠페인을 마케팅에 적용해보려 합니다.]

*share a coke:호주의 코카콜라 캠페인.

<그게 무슨...아뇨, 알겠습니다.>

그리고 제롬은 한록의 말을 바로 알아들었다.

'share a coke.'

호주의 콜라 회사 진행했던 마케팅이며, 세계에서 가장 성공한 마케팅 전략 중 하나였다.

세계적인 콜라 회사가 판매량이 점점 떨어지자 도입한 희대의 캠페인.

그건 바로 콜라 페트병에 호주에서 가장 흔한 이름 150개를 부착하는 것이었다.

루크. 안나. 제이슨. 마리아. 비앙카. 크리스. 엠마.

사람들은 친구, 가족, 그리고 자기 자신의 이름이 적힌 콜라를 발견했고, 그걸 구매해서 마시거나 남에게 선물하기 시작했다.

[서울역을 비롯해 각 도시의 기차역 전광판에 광고를 할 예정입니다.]

세계에서 가장 성공한 마케팅 전략. 거기서 힌트를 얻은 한록의 마케팅 방안.

[광고 내용은 이렇습니다.]

서울역. 사람들이 출근을 위해, 여행을 위해, 고향에 돌아가기 위해 방문하는 곳.

하루 평균 9만명이 방문하는 한국의 중심.

그 곳에서 불려질 이름들.

-민수야.

-지혜야.

-정훈아.

-동현아.

-유진아.

그리고-

'도망쳐.'

이어질 말.

[이건 아마 올해 최고의 광고가 될 겁니다.]

한록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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