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6 : 사장님이 지켜보신다(2) >
다음날 칸 영화제.
[<부산열차>와 제로아워에 대해 얘기하고 싶습니다.]
제로아워에 참여하려는 배급사들이 CK의 미팅부스로 몰려들었다.
[참가비가 있단 걸 알고 계십니까?]
[알고 있습니다. 괜찮습니다.]
거기에 제로아워에 대한 참가비까지 지급하는 배급사들.
9시부터 4시까지 이어진 미팅을 끝낸 최대리가 한록에게 말했다.
"과장님."
"네, 대리님."
"과장님이 사기꾼이 아니라 마케터라서 다행이에요."
진심으로 말하는 최대리. 그만큼 필름마켓에서 한록의 성과는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제로아워에는 32개국이 참여하기로 확정되었습니다. <부산 열차>는 평균 60만 달러에 판매되었으며, 제로아워의 참가비를 비롯해 초과수익금은 500만달러입니다."
"..."
한록의 결과보고에 아무런 답이 없는 고부장.
절대 한록에게 잘했다고 말하고 싶지 않다. 하지만 트집을 잡기엔 너무나 완벽한 결과. 고부장이 마지못해 답했다.
"지금 당장은 매출이 높으니 좋아 보이겠지. 그렇지만 제로아워가 네 생각만큼 쉽지 않을 거다."
고부장의 마지막 희망인 '제로아워가 실패할 것이다'란 믿음.
"부장님,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로아워는 잘 끝날 겁니다."
그러나 고부장 역시 알고 있었다. 상대는 이한록이다. 그리고...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자신의 기대는 또 무너질 것이다.
고부장에게 보고를 마친 한록. 오늘의 일정은 모두 끝났고, 한록은 가까이에서 열리는 GV를 보기 위해 자리를 옮겼다.
[엠마. 레드카펫 준비는 어떻게 되고 있어요?]
[시상 후보 작품들 포스터 보내주세요.]
내일은 칸영화제의 폐막일이자, 시상식이 있는 날.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폐막식을 위해 뛰어다니고 있었다.
'부산 영화제 생각이 나네.'
그리운 추억들을 생각하며 GV장소에 도착한 한록. 메인무대와 가까운 야외무대에는 익숙한 얼굴이 한 명 있었다.
[이 얘기를 안 할 수가 없죠. 이번 황금종려상은 어느 영화가 타리라고 예상하시나요?]
기자의 질문에 답하는 남자.
칸 영화제의 심사위원 중 한 명인-
[알렉산드로.]
알렉산드로 감독이었다.
멀리서 알렉산드로를 바라보는 한록.
전 세계의 기자들이 알렉산드로 감독을 찍고 그 뒤에는 이번 칸 영화제에 진출한 영화의 포스터들이 걸려있었다.
화려한 조명 아래서 반짝이는 프랑스. 영국. 스웨덴. 일본. 그리고 CK의 라이벌인 샬롯테 엔터테인먼트 영화의 포스터들.
지금 이 순간 세계에서 가장 많은 관심을 받는 영화들이었다.
[난 <로마인>이 받을 거 같아.]
[<가족>도 좋지 않았어?]
기자의 질문에 속삭이는 사람들. 알렉산드로 감독이 기자의 질문에 답했다.
[그건 나 혼자 결정할 수 없는 문제죠. 수상에 관련된 질문은 하지마세요.]
[역시, 그럴 줄 알았어요. 그럼 다른 질문을 할게요. 올해 알렉산드로가 가장 재밌게 본 영화를 말해주세요.]
[가장 재밌게 본 영화라. 그건 '칸'에 나오지 않았습니다.]
[정말요? 무슨 영화인데요?]
그리고 알렉산드로의 답.
[한국 영화에요. <삼일의 삶>.]
알렉산드로의 말에 한록이 고개를 숙이고 미소를 지었다.
[아, 들어봤어요. 당신이 부산 영화제에서 호평을 했죠.]
알렉산드로의 말에 기자가 답했다. 그러자 객석에 앉은 사람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저거 판권 구매했나?]
[아뇨. 미리 알아봤는데, 필름마켓에 안 나왔어요.]
[젠장. 저 말이 나오기 전에 샀어야 하는데. 내년에 비싸게 사야겠군.]
[대신 <지구 특공대>를 구매했습니다.]
알렉산드로 감독의 말에 <삼일의 삶>에 대해 얘기하기 시작하는 관계자들.
모든 영화인들의 로망, 칸.
그곳에서 자신이 맡은 영화에 대한 얘기들이 나온다.
그 모습을 보니 드는 생각이 있었다.
'나는 다시 칸으로 돌아올 거다.'
곧 판권판매가 아니라 마케팅으로 칸에 돌아올 것을 다짐하는 한록.
어디를 가든 영화 포스터가 바람에 나부끼고, 누구를 만나든 영화에 대한 얘기를 하는 도시, 칸.
'그리고 그때는 모두가 내 영화들에 대해 얘기하게 될 거다.'
삼일의 삶. 식물. 그리고...한록이 사랑하는 그 영화.
이 곳에 자신이 사랑하는 영화들을 소개할 날이 머지 않았다는 생각에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
알렉산드로 감독의 인터뷰가 끝났고, 한록은 다음 영화를 위해 자리를 옮겼다.
그리고 한록을 바라보던 누군가가 알렉산드로 감독에게 향했다.
[알렉산드로. 당신이 얘기한 사람을 만났습니다.]
알렉산드로 감독에게 친근한 말투로 말을 건네는 사람. 알렉산드로 감독과 절친한 사이인 제롬이었다.
[한 말인가? 어때?]
제롬의 말에 바로 한록에 대한 얘기임을 알아차린 알렉산드로 감독. 제롬이 답했다.
[당신 말대로입니다. 꽤나 유망한 청년이더군요. 스카웃을 제안했지만...]
제롬은 스카웃을 제안 받은 이후 한록의 반응을 생각했다. 보통 사람들과는 다르게 크게 기뻐하지도, 적극적으로 협상에 임하지도 않던 한록.
[한국에 남을 것 같습니다.]
아마 한록은 아직 한국에서 하고 싶은 일이 있는 게 분명했다.
[그래. 어려운 사람이야.]
알렉산드로 감독이 즐거운 듯 말했다.
[그래서 더 지켜볼만하지 않나.]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제롬.
필름마켓은 끝났지만, 아직 많은 일이 남아있었다.
알렉산드로 감독이 말한 삼일의 삶. 자신이 만들 새 회사. 그리고...한록.
[아직 시간은 많이 남았으니까요.]
제롬이 답했다.
*
그리고 대망의 칸 영화제 폐막식.
필름마켓은 종료되었고, 오전에 보고를 하는 것으로 마케팅 부서가 할 일은 모두 끝났다.
한록이 최대리와 유선을 부스에 불러놓고 말했다.
"할 일은 다 끝났습니다. 이제부터 우리가 해야할 일은..."
"과장님. 이제 그 대사입니까?"
한록의 말에 기다렸다는 표정을 짓는 최대리. 한록이 피식 웃고는 말했다.
"네. 실컷 놀기입니다."
"드디어!"
"꺄!"
기쁨의 탄성을 지르는 최대리와 유선. 한록 역시 둘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갑자기 연봉이 두 배나 올랐군. 해외에 간 김에 많이 쓰고 오게.'
그리고 한록은 최경준의 말을 철저히 수행하기 시작했다.
한록이 가장 먼저 한 일은 호텔을 옮기는 것이었다.
[체크인 완료 되셨습니다.]
회사에서 잡아준 호텔이 아니라 새로운 호텔을 잡은 한록.
필름마켓이 끝나고 이틀 동안 연차를 잡아놨기 때문에 그 시간 동안은 여기서 지낼 생각이었다.
[지갑 하나 주세요.]
그리고 한록은 명품 매장들을 둘러보며 가족들의 선물을 구매하기 시작했다.
'형. 프랑스가면 이거 꼭 사와야 해. 어머니도 드리고, 한서도 사 줘.'
'걔 고등학생인데 무슨 명품이야.'
'요즘은 고등학생들도 명품 들고 다녀. 부담스러우면 한서는 가방 말고 지갑으로 사 줘.'
영도가 강력추천 했던 제품들을 구매한 한록. 하지만 갑자기 연봉이 오른지라 아직도 한참 예산이 남은 상황이었다.
[가방 두 개 주시고...지갑도 하나 더 주세요.]
결국 원래 계획보다 두 배는 더 많이 선물을 산 한록. 그러나 아직도 돈이 남았다.
결국 한록은 자신이 쓸 구두와 가방까지 구매하고 나서야 다시 호텔로 향했다.
칸이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고급 호텔. 그 곳에서 반짝거리는 명품 구두와 통장 잔고를 바라보는 한록.
'역시...'
눈앞에서 천 만원 단위가 사라진 상황이다. 하지만 자신에겐 아직도 1억 3천의 연봉과 인센티브가 남아있었다. 그걸 보면 드는 생각은 하나였다.
'돈이 최고다.'
*
그리고 이틀 뒤, 한국.
오늘은 한록이 칸에서의 모든 일정을 마치고 첫 출근을 하는 날이었다.
필름마켓에서의 성과가 워낙 뛰어나다보니, 영화사업본부 전체가 한록에 대해 얘기하는 상황.
점심시간. 구내식당에서는 역시나 한록에 대한 얘기가 나오고 있었다.
"야. 이한록 얘기 들었어?"
멀지 않은 곳에서 들리는 익숙한 이름에 귀를 쫑긋하는 영도. 옆 테이블에서 회계부 사람들이 식사를 하는 중이었다.
"우드 엔터테인먼트에서 이직 제안 받았는데, 그냥 한국에 남아있는다고 하더라."
"왜? 헐리웃으로 갈 수 있는 기횐데?"
"이번에 연봉을 엄청 올렸대. 1억 넘지 않을까?"
"와씨. 3년차에 1억? 그럼 나도 여기 남는다.
뭘했길래 그렇게 많이 벌어?"
한록의 연봉 얘기에 깜짝 놀란 회계부 차대리. 그 말에 박대리가 답했다.
"필름마켓에서 벌어 온 게 거의 200억이래. 받을만 하지."
"진짜로? 근데 그 사람 마케팅부잖아. 판권부 완전 쪽팔리겠다."
"야, 조용히 해."
어딘가를 가리키는 박대리. 한 테이블 떨어진 곳에서 고부장이 굳은 표정으로 밥을 먹고 있었다.
그 말에 차대리가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작은 목소리로 말하기 시작했다.
"근데 그게 가능한 건가? 최윤일이랑 같이 갔다고 듣긴 했는데...그래도 200억은 말이 안 되지 않나? 그 정도면 판권부서 전체 매출이랑 비슷할테데."
"그치."
차대리의 말에 동의하는 박대리.
"혼자서 부서 하나 정도의 매출을 낸 거지."
-혼자서 부서 하나의 매출을 냈다.
'흐흐. 이게 우리 형이다, 이 자식들아.'
자기 얘기도 아닌데 영도의 어깨가 으쓱 올라갔다.
고부장의 얼굴을 슬쩍 바라보는 영도.
고부장은 마치 모래라도 씹는 것 같은 표정이었다.
'이한록이 판권 부서를 제압하고 왔다.'
지금 회계부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듣지 않아도 짐작이 가는 모양이었다.
'꼴 좋다, 진짜.'
한록에게 대충 고부장에 대해 전해들은 영도. 영도에겐 고부장의 불행이 고소하게 느껴질 뿐이었다.
"혼자서 부서 하나 급의 성과를 냈다라..."
차대리가 박대리의 말을 다시 한번 반복했다. 그리고 말했다.
"멋있지 않냐?"
"멋있긴 뭐가 멋있어. 내가 그 놈보다 입사도 빨랐는데..."
"그러니까 멋있는 거지. 초고속 승진인데, 낙하산도 아니고 자기 능력으로 올라가는 거잖아."
"무슨..."
툴툴거리는 박대리. 그러나 그 역시 잠시 후 작게 말했다.
"그래, 좀 괜찮아 보이긴 하네."
결국 박대리도 차대리의 의견에 동의했다.
어느새 회사에서 동경의 대상이 된 한록.
그러나 그만큼 한록에 대한 질투와 부정적 관심 역시 똑같이 증가했다.
"근데 말이야. 그 사람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어."
잠자코 얘기를 듣고 있던 회계부 권대리가 입을 열었다. 박대리가 물었다.
"왜?"
"<부산 열차> 다음에 맡는 게 <러빙 고흐>래."
"<러빙 고흐>? 그게 뭔데?"
"고흐얘긴데 독립 영화야. 관객 한 10만명 들려나."
"어...10만명?"
이미 <퀸>으로 천만영화를 눈앞에 두고 있는 한록. 거기에 <부산 열차>도 나름대로 대규모의 영화였다.
그런 한록이 갑자기 소규모 독립 영화를 맡는단 얘기.
독립 영화는 일반 상업 영화와 규모가 완전히 다르다. 독립 영화는 관객이 10만명만 들어와도 대박이라고 불리는 장르였다.
"왜 갑자기 그걸 하신대?"
"좋은 영화니까 자기가 유명하게 만들어보고 싶다던데. 나도 자세한 건 몰라."
"독립 영화를 유명하게 만든다고..."
얘기를 듣고 있던 차대리가 입을 열었다.
"근데, 아무리 이한록 과장이라해도 그건 어려울 거 같지 않냐?"
미심쩍은 듯 말하는 차대리.
"관객 몇 명이나 생각한대?"
걱정이 되기도 하고, 동시에 호기심이 생기기도 한 박대리.
"500만 만든다 했대."
"아..."
"헛소리지."
그리고 은근히 한록의 프로젝트가 실패하길 바라는 권대리까지.
"그 사람 자기 능력을 너무 과신하는 거 같아."
한록에 대해 안 좋은 얘기를 하는 권대리.
'지들이 뭘 안다고...'
얘기를 듣던 영도가 울컥 올라오는 감정을 느꼈을 때, 차대리가 무언가를 보고 깜짝 놀라 말했다.
"야, 진짜 조용히 해."
그리고 얼른 밥을 먹는 회계부 사람들.
'뭐지?'
영도의 의문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영도의 앞에 식판을 들고 나타난 누군가.
"밥 먹자."
구내식당에 한록이 등장한 것이었다.
영도의 앞자리에 앉은 한록. 사람들이 흘끔흘끔 한록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동경, 시기, 질투, 호기심이 담긴 시선들. 사람들의 시선을 느낀 한록이 영도에게 말했다.
"구내식당 말고 나가서 먹자니까."
"응, 앞으론 그래야겠다."
영도가 한록의 눈치를 보다 물었다.
"형. 괜찮겠어?"
"뭐가."
"<러빙 고흐> 말이야. 그거 진짜 500만 가능한 거야?"
'아무리 이한록이어도, <러빙고흐>로 500만이 가능한가?'
회계부 사람들만이 아니라, 영화사업본부 전체가 <러빙 고흐>에 대해 가지고 있는 생각이었다.
한록에 대한, 아니 정확히는 <러빙 고흐>에 대한 의심들. 그리고 한록의 실패를 바라는 수많은 사람들.
"응. 가능해."
그러나 정작 한록은 담담한 태도였다.
"진짜?"
"응."
"정말?"
"응."
"진짜로?"
"야, 임마. 그만하고 밥이나 먹어."
"아, 왜 또 뭐라 그래. 난 걱정돼서 그런 건데."
"걱정할 필요 없어."
여전히 시큰둥한 한록을 보며 영도는 생각했다.
'이거 진짜 괜찮은 건가...?'
"국 다 식는다. 밥 먹어라."
"헉."
그리고 한록의 말에 다시 밥을 먹기 시작했다.
*
점심시간이 끝나고 본부장실로 향한 한록.
본부장실에선 최경준이 한록을 기다리고 있었다.
"칸에는 잘 다녀왔나."
"네, 덕분에 잘 다녀왔습니다."
"돈은 많이 썼고?"
"원 없이 썼습니다."
최경준의 질문에 한록이 씩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잘했군."
최경준 역시 웃으며 답했다. 그러나 출장에 대한 얘기는 잠시.
출장은 끝났고, 이제 또 새로운 일을 시작할 때였다.
"<부산 열차>의 개봉일정은 어떻게 되고 있지?"
"아직 국가들과 협의 중입니다. 10월 안쪽으로는 개봉할 수 있도록 조정해보겠습니다."
"그래. 날짜가 너무 밀리면 제로아워를 추진하기가 어려워질 거야."
가장 먼저 <부산열차>에 대해 점검한 최경준. 그리고 남은 것은-
"그럼 <러빙 고흐>에 대해 얘기해볼까."
화제의 그 영화. <러빙 고흐>였다.
"회사에서 <러빙 고흐>에 대한 얘기가 나오는 건 알고 있나."
"네, 알고 있습니다."
"대부분 <러빙 고흐>의 성적이 부진할 거란 얘기지.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하지만..."
최경준이 말을 멈추고 한록을 바라보았다.
"자네가 담당한다면 얘기가 달라지지."
한록에 대한 기대가 담긴 말이었다.
"잘해보게. 자네가 또 무슨 짓을 할지 기대되니 마케팅 방안이 잡히면 되도록 빨리 보고하고.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 얘기하게."
한록에 대한 많은 기대와 의심들. 그 사이에서 또 한록의 활약을 지켜보고자 하는 최경준.
그리고 지금 한록에겐 정말로 필요한 게 있었다.
"네. 마케팅을 위해 필요한 게 있습니다."
"뭔가."
'필요한 게 있냐'는 물음에 바로 답한 한록.
최경준의 머릿속에 공연사업본부의 락 페스티벌을 가져왔던 기억이 떠오른다. 무려 본부장이 '심부름'을 한 것이다.
한록이 이렇게 나온다는 건 앞으로 최경준도 감당하기 어려운, 그러나 그만큼 획기적인 계획이 벌어진다는 걸 의미했다.
'어쩐지 불길한 느낌이 드는군.'
최경준은 한록을 보고 불안한 동시에 설레는 감정을 느꼈으며-
"사장님입니다."
최경준의 예감은 현실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