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5 : 사장님이 지켜보신다(1) >
[내가 어떻게 해야 남아있겠는가.]
[...지금 연봉을 말씀드리란 얘기십니까?]
[그래. 난 돌아가는 걸 싫어하거든.]
최경준의 말에 한록은 생각에 잠겼다.
직장생활의 꽃 연봉협상. 하지만 한록은 크게 신경 써 본 적이 없는 일이었다.
CK ENM이 대기업이다보니 연봉협상은 협상이 아니라 통보형식이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한록은 성과 때문에 회사 측에서 알아서 연봉을 올려줬던 상황.
'그래도 안 해 본 건 아니지.'
하지만 어쨌든 한록 역시 회사원이다. 연봉협상의 기본 정도는 잘 알고 있었다.
회사에서 '나'의 가격을 책정하는 방법.
그건 판권을 팔 때와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최대한 높이 부르고 깎는다.
협상의 기본이라 할 수 있는 명제.
한록은 그 생각으로 입을 열었다.
[저는 <부산 영화제>를 성공시켰고, 공연사업본부의 락 페스티벌 역시 도왔습니다. 그리고 <퀸>으로 천만을 만들었으며, <부산열차>로 제로아워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제 성과를 봤을 때 1억 3천 정도는 받고 싶습니다.]
1억 3천. 지금 자신이 받는 연봉의 거의 2배를 부른 한록.
그러나 한록 역시 최경준이 이 제안을 받아들이리라 생각하진 않았다.
'여기서 줄여 나가서 1천이나 2천에 맞춰지겠지.'
우드엔터테인먼트보단 높게. 그러나 한록이 제시한 것보단 낮게.
[흠.]
역시나 최경준은 고민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최경준은-
[그래, 좋아. 그렇게 하지.]
한록의 제안을 바로 받아들였다.
[1억 3천. 지금처럼 정규 인센티브와 특별 인센티브도 별도. 그렇게 알고 있겠네.]
놀라울 정도로 흔쾌하게 한록의 제안을 수락한 최경준.
[정말입니까?]
오히려 한록이 놀라서 최경준에게 되물었다.
한록이 아무리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성과를 내고, 과장을 달았다고 해도 한록은 고작 3년차였다.
'회사 규정상 이게 가능한가?'
그런 의문이 들 정도였다.
[나한테도 무리인 건 맞네. 하지만 자네를 잃을 수는 없으니, 자네 말을 따라야지 않겠나.]
그러나 최경준은 정말 진심인 듯 했다. 게다가 최경준의 제안은 끝이 아니었다.
[올해 연말 시상식이 끝나면 자네의 팀을 새로 꾸려주지. 지금 당장 만들어줄 수도 있지만, 지금은 <부산 열차>와 <러빙 고흐>를 진행하는 것만으로도 바쁠 테니까 말이야. 원한다면 그 전에도 인력 충원을 해주겠네.]
한록에게 팀장 자리를 주겠다는 최경준의 제안.
'팀장은 책임자의 자리다.'
[이제 본격적으로 사장님께 얼굴을 보여야 할 게 아닌가.]
그건 최경준이 자신과 한록으로 이어지는 라인을 공고히 하겠다는 뜻이었다.
자신의 손목에 묶인 최경준의 실을 바라보는 한록. 어찌나 신중한지, 최경준의 실은 아직도 단단히 묶여있지 않았다.
하지만 곧 이 실이 이어질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그리고, 하정엽의 실도...'
잠시 생각하던 한록이 최경준에게 말했다.
"본부장님. 저를 노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여전히 손목에 상처를 내고 있는 문오석의 실을 바라보는 한록. 한록의 말에 최경준이 알고 있다는 듯 답했다.
[그래. 문본부장 말이지.]
"한국으로 돌아가면 그 분에 대해 얘기해야할 사안이 있습니다."
[알겠네. 너무 걱정하진 말게.]
오과장의 뒤에 서 있던 문오석. 이제는 문오석이 직접 한록을 제거하기 위해 움직일 것이다.
오과장. 문오석. 최경준.
또다시 장애물이 생겼지만, 이전처럼 막막하진 않았다.
예전과는 다르게 문오석의 속내를 이미 파악한 자신. 그리고-
[내가 자네 뒤에 있으니까.]
누구보다 든든한 조력자.
'예전과는 다르다.'
그런 생각과 함께 한록이 고개를 끄덕였다.
*
전화를 끊고 회의실로 돌아간 한록. 최대리가 한록을 보고 말했다.
"잘 끝났죠? 밥 진짜 비싼 걸로 사주세요."
최대리를 보면서 드는 생각은 하나였다.
"진짜 어이가 없군요."
남의 일에 끼어드는 것. 그리고 이렇게 친근하게 구는 것.
예전부터 느꼈지만, 정말 한록의 입장에선 이해할 수 없는 행동들이었다. 한록이 진심으로 물었다.
"왜 그러셨습니까?"
"과장님이랑 좀 더 일하고 싶다니까요."
부산영화제부터 지금까지 언제나 한결같은 최대리의 대답.
"하..."
졌다. 그렇게 생각한 한록이 결국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최대리에게 물었다.
"그래서 대체 뭐가 드시고 싶습니까."
*
CK그룹 본사 건물에서는 회의가 열렸다.
평소처럼 CK그룹의 회장 하태준이 계열사를 둘러보는 형식의 회의가 아니다.
CK그룹의 임원들과 오너 일가가 모두 모이는 말 그대로 '오너 회의'.
하정엽 역시 오늘은 보고를 받는 입장이 아니었다. CK ENM에서는 언제나 책상의 맨 끝에 앉아 결정을 내리던 하정엽.
그가 오늘은 회의실 책상 중간에 앉아 자신이 말할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다음. 하정엽."
하정엽의 형이자 CK 기획의 공동대표인 하정진의 보고가 끝났고 이제 하정엽의 차례.
하정엽이 하태준에게 이번 분기 실적을 보고하기 시작했다.
"CK ENM은 전년도부터 준비한 프로젝트들을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이번 달 공연사업본부의 락 페스티벌이 끝났고, 전 년에 비해 언론 반응이 두배 증가하였습니다. 또한 CK ENM의 전체매출은 지난 분기에 비해 매출이 10% 상승했습니다."
이전의 모습들에 비해 큰 성장을 보여주고 있는 ENM. 하태준이 하정엽에게 물었다.
"매출이 가장 많이 늘어난 건 어디지?"
"전체 매출 중 홈쇼핑 사업본부의 매출이 50%입니다. 이번 분기 역시 가을 의류판매가 매출을 증대시켰습니다."
"홈쇼핑이라."
CK ENM의 캐시카우라 할 수 있는 홈쇼핑사업본부. 그러나 하태준은 만족스러운 얼굴이 아니었다.
'홈쇼핑의 미래가 없다고 생각하시는 거다.'
ENM의 주 수입원이지만, 모바일의 발달과 TV의 쇠퇴로 점점 성장이 감소하는 홈쇼핑본부.
'성장만이 회사를 유지하는 방법이다.' 라고 말하는 하태준에게는 홈쇼핑 사업이 만족스럽지 않을 게 분명했다.
"마침 모두가 모였으니, 오늘은 방송국에 대한 얘기를 해야겠군."
보고를 모두 들은 하태준이 입을 열었다.
이전 분기에 비해 매출이 크게 증가한 CK 기획. 그리고 매출이 성장하긴 했으나, 하태준의 기준에는 만족스럽지 못한 CK ENM.
이제 정말 그 둘 사이의 승자가 가려질 순간이었다.
하정엽에게 묻는 하태준.
"하정엽. 네 놈이 기회를 달라고 했지."
"네, 맞습니다."
"그러기엔 매출이 실망스러워."
하태준의 따끔한 질책. 하정엽의 예상처럼, 하태준은 ENM의 성과가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회장님."
"그래."
"제가 한 마디 드려도 되겠습니까."
그러나 하정엽은 하태준의 언짢은 표정에도 물러나지 않았다.
"...해봐."
하태준이 하정엽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마이크를 잡고 얘기를 시작하는 하정엽.
"매출이 아니어서 말씀드리지 않은 부분이 있습니다. 공연사업본부의 락 페스티벌이 2022년 공연예술 분야에서 최고 관객을 기록했습니다. 그리고 <퀸>은 이번 주 내로 천만 관객을 달성할 듯 합니다."
ENM의 활약을 말하기 시작하는 하정엽. 하정엽의 목소리에는 자부심이 담겨 있었다.
'내 회사에서, 내 부하들이 만들어 낸 결과다.'
그런 마음이 담긴 말.
"칸 필름마켓에서는 <부산 열차>가 최고 흥행작이 되었습니다. 경매 방식으로 기존 가격의 2배를 받아 판매하였으며, 이 영화로 <제로 아워>를 도입할 예정입니다. 참여하는 나라는 32개국으로 역대 최다국가입니다."
"32개국? 컨트롤이 가능한 거냐?"
CK에서 한 번도 진행해 본 적 없는 제로아워. 거기에 32개국이면 전례 없는 수치였다.
그걸 아는 하태준이 질문을 던졌다. 그리고 하정엽의 답.
"우리 회사 최고의 직원이 진행하는 프로젝트입니다. 실패할 리 없습니다."
"늘 입만 앞서는군."
그러나 말과는 달리 하태준의 얼굴에는 작은 미소가 걸려있었다.
"뭐, 성공한다면 꽤 괜찮은 결과겠지만."
하태준의 입에 걸린 아주 작은 미소. 하정엽이 그걸 놓치지 않고 다시 말을 이었다.
"공연사업본부의 락 페스티벌이 이미 해외에서 화제가 되었습니다. 거기에 이번 제로아워 역시 성공한다면 외신에 기사들이 나올 겁니다. 매출이 충분하지 않은 건 인정합니다. 하지만 ENM은 CK라는 이름을 세계에 알리고 있습니다. 여기 있는 누구도 하지 못하는 일입니다."
그 말에 하정엽을 노려보는 하정진. 도발적인 말에 회의실의 모두가 하정엽을 바라보았다.
"그래서, 제로아워가 성공하길 기다려 달라는 거냐? 대체 언제까지-"
"아뇨. 제로아워는 성공할 거고, 이어질 프로젝트들 역시 성공할 겁니다. 올해 말이면 ENM이 CK그룹 중 가장 성장한 회사가 될 겁니다."
그리고 하정엽이 하태준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그러니 지금 당장 방송국을 제게 주십시오."
하태준이 하정엽에게 물었다.
"CK그룹 중 최고의 성장을 보이겠다라. 만약 실패한다면?"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당연하지. 사장이 판단을 잘못 한 거니까. 만약 네 말을 지키지 못한다면 ENM도 네 형한테 넘겨야 할 거다."
강수를 둔 하정엽. 그리고 그에 맞는 책임을 지라는 하태준.
'제로아워가, 그리고 이어질 프로젝트들이 성공할거라고 확신하냐'는 질문이었다.
"네. 그렇게 하십시오."
그리고 하정엽에게는 확신이 있었다.
잠시의 침묵. 그리고-
"회의 끝. 방송국은 ENM으로 넘긴다."
하태준의 결정.
"그리고 하정엽은 남아."
아쉬운 듯, 혹은 긴장한 채 자리에서 일어나는 임원들.
결국 방송국은 ENM으로 넘어갔다. 게다가'ENM이 올해 말까지 CK그룹 중 최고의 성장을 보이겠다.'는 하정엽의 선언.
그건 곧 하정엽이 CK 그룹의 후계 전쟁에 뛰어든다는 말을 의미했고, 동시에 ENM 역시 CK 그룹의 주요 계열사로 성장시키겠다는 말이기도 했다.
'앞으로 CK는 어떻게 변할지 모른다.'
한록이 만든 제로아워. 그리고 그로 인해 변한 CK의 후계구도.
CK의 임원들, 그리고 후계자들이 앞으로 다가올 변화를 준비를 해야 할 시간이었다.
*
"회장님. 부르셨습니까."
임원들과 오너일가가 모두 나가고 하태준에게 다가온 하정엽. 하태준이 하정엽에게 물었다.
"제로아워는 누가 진행하는거지?"
"저번에 말씀드린 이한록 과장이 진행하는 일입니다."
"그래, 알겠다."
별 다른 말 없이 대화를 끝낸 하태준. 그러나 하정엽은 하태준의 생각을 파악했다.
'이한록 과장을 마음에 들어하신다.'
영화계에 큰 관심을 가지고, 한때는 직접 영화계에서 움직이기도 했던 하태준.
그런데 한록이 CK에서 한번도 진행한 적 없는, 아니 세계적으로도 드문 이벤트인 제로아워를 가져왔다.
'제로아워가 회장님의 마음을 바꾼 거야.'
회귀 전 CK기획으로 넘어갔던 방송국. 그러나 이번에 하태준은 하정엽의 손을 들어줬다.
회귀 전의 일을 모르는 하정엽이라도 기획으로 넘어갈 뻔한 방송국을 한록이 가져왔다는 것 정도는 눈치 채고 있었다.
그렇게 판단한 하정엽이 말했다.
"제로아워뿐만이 아닙니다. 연말에는 천만관객을 노리는 영화가 개봉할 예정입니다. 퀸, 부산열차, 그리고 연말의 영화까지 합치면 한국 영화계 최초로 일년에 3편의 천만영화가 탄생할겁니다. 저희 ENM이 만들 결과입니다."
하정엽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하태준. 꽤나 만족스러운 표정이었다.
"그래. 나가 봐."
그리고 하정엽이 문을 나서기 직전, 하태준이 말했다.
"이한록. 그 녀석이 네 사람이라 했었지."
"네, 맞습니다."
"잘 골랐다."
하태준의 말에 하정엽이 자신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알고 있습니다."
*
오너회의 후 ENM으로 복귀한 하정엽. 하정엽은 바로 최경준과의 만남을 가졌다.
"이한록 과장이 우드 엔터테인먼트로 스카웃을 받았습니다."
그 말에 하정엽이 눈을 찡그렸다. 하태준이 '잘 골랐다'고 말한 직후에 스카웃이라니.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한록 과장은 제로아워, 아니 올해 말까지는 무조건 이 곳에 남아있어야 합니다. 얼마를 제안하든 상관없으니 조건을 최대한 맞추세요."
최경준에 이어 하정엽까지 통과된 한록의 연봉협상.
'CK ENM 최연소 억대연봉이겠군.'
오늘 회의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몰라도, 하정엽은 한록에게 꽤나 호감을 가지고 있는 모양이었다.
"방송국을 받아왔습니다. 앞으로 3개월 정도가 ENM에게는 큰 기회가 될 겁니다."
한록의 활약으로 크게 입지가 상승한 ENM. 그게 바로 하정엽이 한록에게 관심을 보이는 이유였다.
"영화사업본부는 앞으로 어떤 프로젝트를 진행할 겁니까."
"우선 제로아워에 인력을 집중시키겠습니다. 그리고 11월의 천만 영화까지 합쳐 연말 시상식들에서 최소 2개의 영화를 수상시킬 예정입니다."
전 세계가 참여하는 제로아워. 세 편의 천만 영화. 그리고 두 번의 수상.
몇 년에 한번씩 나올 성과들을 약속하는 최경준. 그러나 하정엽은 최경준과 한록이 이를 가능하게 만들 사람이란 걸 알고 있었다.
"전부 성공시켜야 합니다."
"네, 알겠습니다."
최경준 역시 담담하게 답했고, 하정엽은 별다른 말이 없었다.
사장의 기대와 믿음.
그러나 최경준은 이 정도로 만족할 사람이 아니었다.
"사장님. 이 뒤로도 미팅이 있으십니까."
"네. 홈쇼핑본부, 그리고 음악사업본부와 미팅이 있습니다."
한록이 뛰어난 활약을 보이고 있지만, 그만큼 다른 본부도 종횡무진 노력하고 있는 상황.
"사장님. 큰 규모는 아니지만, 고흐에 대한 영화도 개봉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러빙 고흐에 대해 얘기하는 최경준.
고흐는 하정엽이 전시회를 개최할 정도로 좋아하는 화가였다.
"그 영화 역시 제로아워를 추진한 이한록 과장이 담당합니다."
그리고 한록.
"그렇군요."
그 두 조합에 최경준은 조금 흥미가 생긴 것 같았다. 고개를 끄덕인 하정엽이 물었다.
"개봉이 언제입니까."
"10월입니다."
무언가 생각하는 듯 말이 없던 하정엽. 하정엽이 잠시간의 침묵 후 입을 열었다.
"이번엔 어떤 마케팅을 한다고 합니까."
"아직 전해들은 건 없습니다. 다만, 관객수를 500만으로 약속했습니다."
"예술 영화로 500만이라."
그게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수치인지 알고 있는 하정엽이 코웃음을 지었다.
최경준이 그런 하정엽을 지켜보다가 말했다.
"사장님."
"네."
"<러빙 고흐>가 개봉하면...한 번 보러 오시기 바랍니다."
그 말에 하정엽이 생각에 잠겼다.
고흐. 500만.
그리고...이한록.
인수전을 앞둔 젊은 사장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한 요소들.
"네. 알겠습니다."
드디어 원하는 것을 얻은 최경준이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