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4 : 이게 이한록이다(2) >
[상해 엔터테인먼트. 제로아워에 참여하겠습니다.]
세계 최대 인구를 가진 중국. 그리고 그 중국에서 손꼽히는 배급사인 상해 엔터테인먼트.
그 곳에서 제로아워에 참여하겠다고 말한다.
그 순간 회의장에 모인 모두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무리해서라도 개봉 일정을 맞춰야 한다.'
'상영관을 늘려야 해. 다른 영화가 개봉이 밀려도 어쩔 수 없어.'
'돌아가자마자 회사에 보고해야겠군. 앞으로 두 달 간은 제로아워에 모든 인력을 집중시킨다.'
'과연 관객이 몇이나 나올까.'
각자의 전략을 짜는 바이어들. 그들은 모두 하나의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래, 이건...'
'반드시 성공한다.'
*
[나가실 때 미팅 부스에서 계약서를 작성해주시기 바랍니다.]
프레젠테이션이 끝났고, 바이어들은 계약서를 쓰기 위해 미팅 부스로 향했다. 그리고 몇몇 바이어들은 한록에게 제로아워에 대한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미팅 부스로 가는 게 아니라 한록을 지켜보는 제롬.
'제롬 앤더슨과 얘기할 기회다.'
그렇게 생각한 고부장이 바로 제롬에게 다가가 말했다.
[제롬. 이쪽으로 모시겠습니다.]
[한과 얘기하고 싶습니다.]
제롬이 단호하게 대답했다.
'안 돼. 계약까지 이한록이 가져가면 난 여기까지 와서 아무것도 한 게 없이 끝난다. 최소한 계약이라도 내가 진행했다고 말해야 해.'
그러나 굽히지 않는 고부장. 고부장이 다시 한 번 말했다.
[이한록 과장과의 대화는 따로 미팅을 잡아드리겠습니다. 계약 얘기는 저희와 하시면 됩니다.]
[미안하지만.]
그러나 제롬은 고부장의 말을 단 칼에 끊어버렸다. 그리고 말했다.
[한이 아니면 얘기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 말에 고부장의 얼굴이 크게 구겨졌다. 자신의 필드인 필름마켓. 그 곳에서 한록에게 모든 점에서 밀렸다는 사실.
이제 그 사실을 인정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제롬.]
그때 한록이 제롬에게 다가왔다.
[둘이서 얘기를 하고 싶군요. 자리를 비워주십시오.]
고부장에게 말하는 제롬. '너랑은 할 말도 없다'는 의사표시였다. 고부장이 이를 악물고 회의장을 떠났다.
마침내 제롬과 한록 둘만 남은 상황.
[결국 바이어들을 설득시켰군요. 하지만 앞으로 해야할 일이 더 많을 겁니다.]
제롬이 말하는 것은 제로아워에 대한 얘기였다.
[앞으로 전 세계와 협력하면서 제로아워를 진행해야 할 겁니다. 성공한다면 전 세계 영화인들이 당신의 이름을 알게 될 겁니다. 당신의 무대는 한국이 아니라 전 세계가 되겠죠. 하지만 실패한다면...]
그리고 갑자기 바뀐 제롬의 말투.
[자네는 영화계를 떠나야 할 거야.]
그건 정글 같은 헐리웃에서 입지를 다진 사람이 떠오르는 신예에게 해주는 진심 어린 충고였다.
[조심하게, 젊은 친구. 이건 자네 생각보다 더 어려운 일일 거야.]
자신이 지켜보는 젊은 인재 한록. 그런 한록에 대한 기대와 걱정이 담긴 말.
'그래. 이게 끝이 아니야. 지금부터 시작이다.'
한록 역시 회귀 전 <식물>을 전 세계에 마케팅 해 본 적이 있다. 그렇기에 제롬의 말이 무슨 뜻인지는 알고 있었다.
바이어들이 제로 아워를 받아들인 건 기쁜 일이지만,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제로아워를 성공시키기 위해선 앞으로 해결 해야 할 일이 잔뜩 남아있었다.
한록이 제롬에게 물었다.
[오늘 프레젠테이션은 어떠셨습니까.]
갑자기 다른 얘기를 하는 한록. 제롬이 의아한 듯 눈을 찌푸리다가 다시 정중하게 답했다.
[나쁘지 않았습니다.]
[그 정도 입니까?]
[아뇨. 그 이상입니다. 좋았습니다.]
[안내방송과 티켓은 어떠셨습니까.]
[그것도 좋았습니다.]
[모두 제가 기획한 일입니다.]
자신이 해왔던 일을 말하는 한록. 한록이 제롬에게 물었다.
[그런데도 제가 실패할 것 같습니까?]
젊음과 야망. 그리고 자신감이 느껴지는 말.
그 말에 제롬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럴 리가.]
그리고 자신의 명함을 내밀며 말했다.
[우린 아직 할 얘기가 남아있지.]
명함에 쓰인 것은 회사의 번호가 아니라 제롬의 직통번호였다. 한록에게 스카웃 제의를 했던 제롬. 제롬은 지금 그 얘기를 하고 있는 것이었다.
[한국이 좁다고 생각하면 언제든 연락하게.]
한록이 제롬의 명함을 받아들었다.
*
[나 말고도 자네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어. 계약은 윤일과 진행하지.]
그렇게 말하며 자리를 떠난 제롬. 회의장 밖으로 향하니, 엘리스가 한록을 기다리고 있었다.
엘리스가 한록에게 다가와 말했다.
[한. 미리 정보를 알려줘서 고마워요.]
'참여할 국가 있냐'는 질문에 바로 손을 들었던 엘리스. 엘리스는 지금 그 얘기를 하는 것이었다.
*
'연극적 요소'가 필요하다는 최대리의 조언. 그 얘기를 듣자 한록에게 떠오른 생각.
'첫 시작이 중요하다. 제로아워를 제안했을 때 바로 참여하겠다는 국가가 있으면 다들 자극을 받을 거야.'
한록은 그런 판단 하에 엘리스에게 전화를 걸었다.
[엘리스. 오늘 제로아워에 대한 프레젠테이션을 진행할 겁니다.]
한록의 통화를 들으며 '알겠다'는 표정을 짓는 최대리. 최대리가 노트에 메모를 적어 한록에게 보여주었다.
'엘리스도 협상에는 도가 튼 사람이에요. 제로아워에 참여해달라고 부탁하지 말고, 참여할 기회를 주겠다고 제안하는 쪽으로 얘기해 보세요.'
한록이 최대리의 메모를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엘리스에게 말했다.
[제 제안에 참여하신다면 제로아워에 대한 비용은 받지 않겠습니다.]
[...일단 말씀해보세요.]
*
그렇게 진행 된 한록과 엘리스의 연극. 한록이 제로아워에 참여할 국가를 물었고, 엘리스는 바로 손을 들었다. 그리고 엘리스를 시작으로 다른 국가들이 제로아워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바이어로 활동하면서 가격을 깎지 못한 건 처음이에요. 하지만 다른 나라가 구매한 가격에 비할 바는 아니죠. 어쨌든 우리 UK 픽쳐스가 이번 필름마켓에서 승리했네요.]
가장 저가에 <부산 열차>를 구매하고, 참가비도 면제 받은 엘리스.
그건 <부산 열차>를 미리 알아본 엘리스의 안목 덕분이었다. 최대리의 말처럼 엘리스는 정말 뛰어난 바이어였다.
[사실, 한에게 당했다는 생각도 좀 들지만...그럴 만한 영화고, 그럴 만한 판매 전략이었죠. 저한테 먼저 전화를 해줘서 고마워요.]
[저야말로 협조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좋은 거래였어요.]
엘리스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하는 한록. 엘리스의 말처럼, 이번 거래는 CK와 UK 모두가 함께 이득을 볼 수 있는 거래였다.
[판권 판매가 원래 한의 분야가 아니라고 했을 땐 좀 놀랐어요. 하지만 오늘 발표를 보니 한록의 전문 분야는 다른 곳에 있다는 걸 알겠네요. 제로아워라. 아주 흥미로운 얘기예요.]
제로아워에 대해 얘기하는 엘리스. 엘리스가 기분 좋은 얼굴로 한록에게 말했다.
[UK는 제로아워에 적극 협조하겠습니다. 논의할 일이 있으면 다른 사람을 거치지 말고 이 번호로 연락주세요. 저도 제로아워의 성공을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엘리스가 한록에게 명함을 내밀었다. 한록도 엘리스에게 번호를 주었고, 둘은 명함을 교환했다. 한록이 엘리스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럼 다음에 뵙겠습니다.]
[네, 그래요.]
한록과 악수를 하고 등을 돌린 엘리스. 부스를 나가던 엘리스가 한록을 보고 말했다.
[한. 저는 이 영화가 개봉할 날이 정말 기대돼요.]
여태까지의 프로페셔널한 모습과는 달리 아주 솔직한 말투. 그 말투는 필름마켓의 첫날을 떠올리게 했다.
'한국이 좀비영화를 가져왔다고?'
'망할 게 뻔하지.'
모두가 <부산 열차>의 실패를 점칠 때.
'글쎄요. 전 재밌어 보여요.'
그때 유일하게 <부산 열차>에 흥미를 보이던 엘리스.
[사실 저 좀비 영화 매니아거든요.]
그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이건 잘 될 거예요. 제가 장담해요.]
이어진 엘리스의 말. 한록은 엘리스의 말에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네, 저 역시 그렇게 생각합니다.]
*
오늘의 일정을 모두 마치고 호텔로 돌아온 마케팅 부서.
"오늘도 수고 많았습니다. 큰일은 끝났고, 내일부터는 자잘한 미팅들만 남아있네요."
"그럼 이제 그 대사 해주나요? '신나게 놀 일만 남았습니다.' 이거요."
한록의 말에 기대하는 얼굴로 묻는 최대리.
"아뇨, <부산 열차> 국내 마케팅 방법에 대해 얘기해야죠!"
최대리의 말을 자른 것은 유선이었다.
"지금 전 세계 모두가 <부산 열차>를 기다리고 있다구요. 쉴 시간이 없어요!"
"이과장님, 유선씨한테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예요. 이과장님이랑 똑같은 얘기를 하잖아요."
어느새 한록2가 된 유선과 그런 유선에게 질렸다는 표정의 최대리. 한록이 그 모습을 보고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결국 마케팅 부서는 또 다시 호텔의 회의실로 향했다. 최대리가 한록에게 지금까지의 상황을 보고했다.
"프레젠테이션에 참여한 모든 국가가 제로아워에 참여하겠다고 말했습니다. 20개국이에요. 그리고 이 얘기를 들은 다른 국가들이 내일 미팅을 요청해왔습니다."
<부산 열차>의 판권을 사가고, 제로아워에 참여할 국가들이 아직도 많이 남아있다는 뜻이다. 한록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내일 미팅을 하면 모레까지 결정을 내릴 수 있겠군요."
"네. 필름마켓이 끝나기 전에 제로아워에 참여할 국가들이 대충 정해질 것 같습니다. 나중에 의사표시를 밝힌 나라가 12개국이에요. 이대로 가면..."
최대리가 그렇게 말하며 자신이 인쇄해 온 자료를 뒤적이다가 말했다.
"아마 제로아워로는 역대 최고 규모일 겁니다."
역대 최대 규모로 진행되는 제로아워.
'성공한다면 전 세계 영화인들이 자네 이름을 알게 되겠지.'
'하지만 실패하면 자네는 영화계를 떠나야 할 거야.'
제롬이 했던 그 말은 사실이 될 게 분명했다.
한록이 최대리와 유선에게 말했다.
"필름마켓은 곧 끝나지만, 진짜 시작은 지금부터입니다. <부산 열차>의 성공에 많은 게 달려 있습니다."
모두가 한록과 제로아워의 성공 여부를 지켜보는 지금. 어깨가 무거운 상황이다.
그러나 정작 한록은 긴장보다는 설렘을 느끼고 있었다.
'이제 슬슬 <식물> 1편이 제작 될 거야. 그리고 알렉산드로 감독이 회사를 차리면 <삼일의 삶>을 넘겨야지. 그리고...그 영화.'
-꼭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은 영화가 있어요.
한국 뿐만이 아니라 세계로 알려질 <식물>, <삼일의 삶>, 그리고 유선에게 얘기했던 영화. 한록이 회귀를 해서라도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던 영화들.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그 영화들을 세상에 선보일 날이 다가오고 있었다.
'거기에 마침 인수전이 진행되고 있지.'
게다가 지금은 인수전 때문에 사장 하정엽이 한록을 지켜보는 상황.
이런 상황에서 <부산 열차>가 성공을 거둔다면...
'제롬의 말처럼 내 미래가 바뀔 거다.'
그런 기대. 아니 확신.
이제야말로 시작이란 생각에 마음이 들뜨기 시작했다.
*
유선이 잠깐 자리를 비운 틈을 타 최대리가 한록에게 질문을 던졌다.
"과장님. 우드 엔터테인먼트로 옮기실 생각이에요?"
최대리는 어제 한록에게 '회사를 옮기지 말라'고 말했다. 아직도 그 부분이 신경 쓰이는 모양이었다.
"아뇨, 옮길 생각은 없습니다."
"당연히 가실 줄 알았어요. 제롬의 제안이 워낙 파격적이었잖아요."
"아직 여기서 담당하고 싶은 영화가 있습니다."
"어떤 거요?"
식물. 삼일의 삶. 그리고 한록이 가장 사랑하는 영화.
모두 얘기하기에는 아직 이른 영화들이었다. 하지만 아주 가까이에 한록이 원하는 영화가 있었다.
"여러 개가 있지만...러빙 고흐요. 본부장님께 이미 러빙 고흐를 달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러빙 고흐? 그건 과장님이 담당하기엔 규모가 너무 작잖아요."
배우가 한 명도 나오지 않는 유화 애니메이션 러빙 고흐. 최대리의 말처럼 회귀 전 러빙고흐의 관객수는 50만에 불과했다.
"예술 영화니까 많아봤자 40만일 것 같은데. 아니다, 내용이 워낙 좋으니까...50만도 될 것 같긴 하네요."
정확하게 미래를 예상한 최대리. 하지만 그건-
"그건 제가 담당하지 않았을 때 얘기죠."
한록이 없을 때의 얘기였다.
한록을 빤히 바라보던 최대리가 어쩔 수 없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그래요. 과장님이라면 그 몇 배를 만들겠죠. 그래도 <부산 열차>나 <퀸>에 비할 바는 아닐 거예요."
"알고 있습니다. 제가 원하는 영화니 관객이 적은 것 정도는 감수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놓칠 수 있는 영화를 발굴해서 소개하는 게 마케팅의 역할 아닙니까."
"낭만이 있네요."
최대리가 한록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한록에게 물었다.
"그럼 몇 명 정도 예상하세요?"
러빙 고흐는 회귀 전 50만명이 관람했고, 그것도 예술 영화치고는 대박이 난 수치였다.
그리고 한록이 예상하는 러빙 고흐의 관객수는-
"500만명입니다."
그 10배였다.
500만. 대한민국 사람 중 10명 중 1명이 그 영화를 봤단 뜻이다. 애니메이션 영화로는 디즈니스의 <팬더> 단 한 편만 달성한 관객수.
500만은 상업 영화로도 이미 준수한 성적이었다.
"아니, 이 사람이. 지금 500만명이 적다고 말하신 거예요? <러빙 고흐>로 500만 찍으면 그거야말로 전 세계에 알려지겠는데요."
"<퀸>과 <부산 열차> 모두 천만이 넘을 테니까요. 이 둘에 비하면 적은 관객이죠."
최대리가 한록의 태연한 말에 헛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진심으로 물었다.
"과장님. 그게 정말 가능할 것 같아요?"
<지구 특공대>. <삼일의 삶>, <퀸>, <부산 열차>. 회귀 후 한록이 몇 번이나 들었던 말이었다.
그리고 한록은 그때마다 사람들이 놀랄만한 성과를 가지고 돌아왔다. 다른 사람들은, 아니 회귀 전 자신도 믿지 못할 정도의 성과들이었다.
한록이 그럴 수 있었던 이유.
"혼자면 어렵겠죠."
'저는 과장님의 마케팅을 믿고, 제 판단을 믿습니다.'
유선의 그 말을 듣고 '제로아워를 판매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던 어제.
'이대리는 좋은 사람이야.'
현과장의 조언 덕분에 윤감독을 설득할 수 있었던 몇 달 전.
그리고 자신의 위치에서 한록을 도와줬던 사람들. 최경준. 주과장. 하정엽.
천재라고 불리는 한록. 그런 한록에게도 부족한 점은 있었고, 그래서 과거의 한록은 언제나 실수 투성이였다. 어제 유선의 일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이제는 그걸 채워주는 사람들이 있다.
"혼자 하는 게 아니니까요. 가능합니다."
그 말에 최대리가 한록을 빤히 바라보았다. 어쩐지...
"그래요. 이과장님은 좋은 팀이 있으니까 가능할 거예요."
다정한 시선이었다.
그 말에 한록 역시 최대리를 바라보았다.
언제나 사람들과 거리를 두고, 의심스러운 행동을 하는 최대리.
하지만 최대리는 처음 판권 판매를 시작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누구보다 열심히 한록을 돕고 있었다.
자신과 함께 일하는 사람. 그리고 자신만큼이나 <부산 열차>의 성공을 바라는 사람. 그 사람에게 한록이 말했다.
"네. 거기엔 최대리님도 있습니다."
한록의 말에 놀란 표정을 짓는 최대리. 잠시 후 최대리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자기 편을 만들 줄 아시네요, 과장님. 이렇게 말씀하시는데 어떻게 과장님을 싫어하겠어요."
'자기 편을 만들 줄 안다.'
한록이 언제나 자신의 약점이라고 생각한 부분. 그리고 회귀 전에는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말이었다. 최대리가 웃으며 말했다.
"이럴 줄 알고 저도 보답 좀 했습니다. 전 과장님이 회사 옮기는 거 싫거든요."
"무슨 보답을..."
그리고 한록이 질문을 마치기도 전, 누군가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발신인은 최경준.
"나갔다 오겠습니다."
최대리와의 대화를 잠시 미루고, 한록은 회의실 밖으로 나가 전화를 받았다.
한록이 전화를 받자 최경준이 인사도 없이 얘기를 시작했다.
[바이어들이 제로아워를 구매하겠다고 했다지. 또 엄청난 모험을 하고 있군.]
오늘 아침 유선의 얘기를 듣자마자 최경준에게 전화를 걸었던 한록.
-제로아워를 판매하겠다고?
언제나 한록의 선택을 지지하는 최경준이었지만 이번만큼은 고민의 시간이 길었다.
-돈을 받고 팔았다가 제로아워가 실패하면? 우리 회사에 큰 타격이 올 거야. 앞으로 판권 판매에도 영향이 있을 거고.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본부장님.
그리고 한록은 최경준에게 이렇게 답했다.
-저는 실패할 마케팅을 제안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
'이한록'이라는 사람 그 자체에 대한 신뢰.
그리고 전 세계 바이어들을 상대로 게임을 진행해야 한다는 부담감.
-그래, 한번 해보게.
최경준은 그 사이에서 결국 한록의 편을 들어주었다.
그리고 지금.
[일이 아주 커졌어. 사장님도 바로 보고를 받으셨다네. 이번 일에 자네와 나의 미래가 걸려있다고 볼 수 있지. 제로아워는 꼭 성공시켜야 하네.]
담담하게 말하는 최경준. 그러나 최경준의 목소리에선 엄숙함이 느껴졌다.
"네, 꼭 성공시키겠습니다."
그리고 당당하게 말하는 한록.
[그래. 자네라면 약속을 지키겠지.]
한록의 든든한 대답에 최경준이 조금 안심한 듯 답했다. 그리고 드디어 본론을 꺼냈다.
[그래서, 제롬 앤더슨한테 스카웃을 제안 받았다지? 연봉이 최소 1억부터 시작한다던데.]
'본부장님이 이걸 어떻게 아셨지?'
의문은 짧았다. 한록이 제롬에게 스카웃을 받았단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 그리고 한록에게 '보답을 했다'고 말하던 사람. 그 사람은 단 한명이었다.
한록이 회의실 문에 난 작은 창으로 안을 들여다보자, 최대리가 모든 걸 알고 있다는 듯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리고 노트에 무언가를 써서 한록에게 보여주는 최대리.
노트에 쓰여있는 건 단 다섯 글자였다.
-연봉협상!
"하."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을 터뜨린 한록. 한록이 웃는 사이, 핸드폰 너머로는 최경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남에게 이런 말을 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말이야.]
[내가 어떻게 해야 이 곳에 남아있을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