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1 : 남은 시간은 단 3일(2) >
"어떻게 할 생각이에요?"
최대리가 한록에게 물었다.
"제롬을 설득할 겁니다."
한록의 방안은 이랬다.
"일단 제롬을 설득해서 미국과 한국에서 동시개봉을 확실히 할 겁니다. 제롬이 동의한다면 다른 나라들도 분명 흔들리겠죠."
미국 전역에서의 동시개봉.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동시개봉에 관심을 가질 국가들이 있을 것이다.
"그럼 관심을 보이는 국가들한테 가격을 깎아주는 대신 동시개봉에 협조하라고 할 겁니다. 5개국 정도면 충분합니다. 그렇게 성과를 가져가서, 개봉을 준비하면서 남은 나라들과 협상을 진행하면 됩니다."
필름마켓에서 모든 나라를 설득하는 게 아니라, 어느 정도의 성과를 가져가서 차차 동시개봉을 진행하겠다는 한록의 말. 확실히 시간을 벌어올 수 있는 말이었다.
"문제는 제롬을 설득할 수 있을까 인데..."
생각에 잠긴 최대리.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 대답하는 한록.
그 말에 최대리가 한록을 바라보았다.
'자신한테 불가능은 없다'는 한록의 태도.
평범한 사람이 한다면 헛소리에 불과할 말이다. 하지만, 이한록이 말한다면...
"네, 그렇겠죠."
분명 진실이 될 것이었다.
*
"그럼 제롬을 설득할 방법을 생각해봅시다."
그렇게 시작된 회의. 최대리가 말했다.
"제일 좋은 건 역시 판권료를 낮춰주는 거겠죠."
"맞습니다. 이미 원래 금액의 두 배로 올려놨으니 5만 달러까진 가능할 것 같습니다."
"예전에도 판매에 조건을 달아서 가격을 낮춰준 적이 있어요. 그때 사례를 좀 찾아봐야겠네요. 유선씨, 자료 보내줄 테니까 찾아주세요."
"아...네!"
유선이 최대리의 말에 깜짝 놀라 고개를 끄덕였다. 유선은 무언가에 정신이 팔린 듯한 눈치였다.
"유선씨. 피곤하겠지만 집중해주세요."
"네, 죄송합니다."
한록의 말에 유선이 얼른 답했다.
"제롬 말고, 필름마켓에서 설득할 만한 국가는 어디로 원하세요?"
"국가는 상관없고, 지역이 다양했으면 좋겠습니다. 인접국가가 영향을 받을 테니까요."
"그럼 유럽이랑 아시아에서 두 곳씩 찾아볼게요."
그렇게 말하며 메일을 살펴보는 최대리. 최대리가 잠시 후 한록에게 말했다.
"일본에 재팬 프로덕션, 스웨덴에 스톡홀름 픽쳐스, 포르투갈 에그 필름, 중국 상해엔터테인먼트. 이 네 곳 정도면 필름마켓 중에 확답을 줄 수 있을 것 같아요. 문제는 규모가 큰 회사들이 아니란 거죠. 아마 경매에서 최고 가격을 제시하진 못할 거예요."
최대리의 말은 당연한 것이었다. 큰 회사일수록 결재가 느리고, 보수적이기 마련이니까.
"최고 가격을 제시하는 곳에 파느냐, 제로아워를 받아들이는 곳에 파느냐 선택해야 해요."
결국 선택의 기로에 놓인 한록.
"제로아워 쪽에 팝니다."
한록의 선택은 명쾌했다.
"회사마다 최소 1억 정도는 차이가 날 거예요. 우리 회사가 가만있지 않을 텐데요?"
"제로아워가 실행된다면 그 이상의 관객이 들어올 겁니다."
그만큼 제로아워에 대한 자신감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금액은 최대한 높이는 게 좋겠죠. 유선씨, 예전 사례들 찾아봤나요?"
"아, 아직 이에요!"
"빨리 해주세요."
대답대신 한록의 눈치를 보는 유선. 유선이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그, 과장님..."
"네."
"꼭 가격을 낮추지 않아도 제로아워를 도입시킬 방법이 있지 않을까요? 제로아워는 한국만 아니라 전세계를 대상으로 한 마케팅이잖아요. 그 나라들한테도 좋은 건데, 굳이 가격을 낮출 필요가 있나 해서요. 그냥 배급사들한테 먼저 제안해보면 안 되나요?"
기다렸다는 듯 말하는 유선. 유선은 아마 계속 이 생각을 해 온 모양이었다.
"저도 그 생각을 안 한 건 아니에요. 그치만 배급사들이 제로아워를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제로아워를 제안했다가 실패하면 리스크가 너무 커요. 그 다음에 제로아워를 도입하라고 제안할 땐 우리 생각보다 가격을 더 많이 깎아줘야 할 거예요."
"어...왜 그런건가요?"
"우리가 제로아워를 정말 도입하고 싶어한다는게 드러나잖아요. 패를 들키는거죠."
"아..."
한록이 답에 유선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은 가격이 문제가 아니고, 제로아워가 더 중요합니다. 제로아워에 집중합시다."
"그래도 좀 더 회의를 해보면 안 될까요?"
"그럴 수 있으면 좋겠지만, 시간이 없어요."
여전히 미련을 가진 유선. 한록이 유선에게 단호하게 말했다.
"일단 자료부터 찾아주세요, 유선씨."
한록의 말에 유선이 아차하는 표정을 지었다.
"네, 죄송합니다."
유선이 다시 노트북을 잡고 일을 하기 시작했다.
"스톡홀름 픽쳐스 사장을 몇 번 만난 적이 있어요. 아마 거기서 제일 긍정적으로 반응할 거 같아요."
"그럼 내일 미팅은 스톡홀름 픽쳐스부터 시작합시다. 여러 나라가 동의했다는 게 중요하니까요."
다시 회의에 돌입한 한록과 최대리.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유선이 말했다.
"과장님, 자료 봤습니다. 판매에 조건을 달면 보통은 5% 정도 가격을 내리는 것 같아요."
"그럼 우리는 5%, 최대 10%까지 생각해보죠. 그리고 내일 미팅은 제롬부터 시작해서 일본의 재팬 프로덕션, 스웨덴의 스톡홀름 픽쳐스로 하겠습니다."
*
제롬을 설득하고 차차 제로아워를 도입하기로 결정한 마케팅 부서.
칸의 소식은 곧장 한국으로 전해졌다.
"제로아워라..."
한록을 떠올리며 생각에 잠긴 음악사업본부의 문오석.
'점점 위험해지고 있군.'
제로아워가 성공할지, 아닐지는 모른다.
다만 분명한 것은 한록이 또 다른 시도를 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최경준의 반응은?"
"아무래도 이한록을 밀어주려는 모양입니다."
최경준이 한록의 뒤를 밀어주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되면 최경준이 아니라 이한록까지 상대해야 한다.'
"이한록은 되도록 빨리 제거하는 게 좋겠군."
한록의 급을 키우고 있는 최경준. 그리고 그에 대비하고자 하는 문오석.
"이한록에 대해서 전부 조사해 와. 회사에서 친한 사람은 누구인지, 팀원들끼리 관계는 어떤지, 불화는 없는지, 약점이 될 만한 사람은 누군지 전부 조사해."
"네, 알겠습니다."
문오석의 비서가 고개를 숙이고 인사를 한 후 밖으로 나갔다. 문오석은 생각에 잠겨 창가로 다가갔다.
"이한록."
놀라울 정도로 성장하고 있는 한록. 그리고-
'이한록은 몇 년 후면 본부장님께 큰 걸림돌이 될 겁니다.'
자신에게 얘기하던 누군가.
그 말을 한 사람은 이미 회사에서 쫓겨났다. 그렇다면 이제 자신이 움직일 때였다.
문오석은 그 사람의 얼굴을 생각하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래, 자네가 맞았군."
이제는 돌아올 수 없는. 한록을 제거하려다가 오히려 자신이 제거당한 사람.
"오수창."
어느새 그의 말이 사실이 되어있었다.
*
같은 시각, 칸.
한록은 숨이 막혀오는 기분에 잠에서 깨어났다.
'이게 뭐지?'
자신의 목을 조르는 두꺼운 실. 이전에 본 문오석의 실이었다.
그리고 그 실에 돋친 가시.
그걸 보자 떠오르는...
'오과장.'
오과장의 실.
왜 문오석의 실이 그렇게 불길했는가.
왜 문오석이 자신에게 이렇게까지 적대적인가.
왜 문오석은 자신에게 스카웃 제의를 했는가.
왜 회귀 전 오과장의 말이 회사에 통했는가.
이 실을 보자 갑자기 모든 퍼즐이 맞춰지는 기분이 든다.
'오과장.'
자신의 적. 그리고-
'오과장의 뒤에 문오석이 있었다.'
그를 조종한 사람.
이제 상황은 명백해졌다. 고작 부장이었던 오과장이 한록을 내쫓을 수 있었던 이유.
문오석이 오과장의 뒤를 봐줬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진짜 적이 누군지, 그 사람의 수법이 뭔지 명확해진 상황. 그렇다면...
'이 일에 엮인 사람은 전부...'
'내 손으로 끝낸다.'
다시 복수가 시작될 차례였다.
*
방에서 나와 엘리베이터를 탄 한록. 한록은 로비로 향하며 생각했다.
'문오석을 쫓아내려면 무조건 인수전에서 승리해야해.'
문오석이 오과장과 엮여있다면, 문오석 역시 많은 비리를 가지고 있을 게 분명했다.
하지만 오과장이 잘려나간 결정적인 이유는 그의 비리 때문이 아니라, 최경준이 한록의 손을 들어줬기 때문이었다.
'인수전에서 패배해서 음악사업본부의 파워가 약해졌을 때. 그때 문오석을 친다.'
결국 중요한 것은 CK에게 한록이 문오석보다 쓸모 있는 존재란 것을 증명하는 것.
'부산영화제에서 그랬던 것처럼 최대의 능력을 보여줘야 한다. 그래서 하정엽의 마음을 가져와야 해.'
그리고 한록은...
'<부산 열차>. 제로아워. 제롬...'
'내가 이긴다.'
이 싸움에서 자신이 승리할 거란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그때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고, 한록은 밖으로 향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 호텔의 화려한 로비가 보였다. 로비의 소파에서 생각을 정리하려던 한록. 그러나 눈에 띄는 사람이 있었다.
"유선씨?"
유선이었다.
그리고 유선은...
"유선씨. 괜찮아요?"
울고 있었다.
*
두 시간 전. 회의가 끝나고 자신의 방으로 향한 유선.
유선은 잠자리에 드는 대신 노트북을 켜는 걸 택했다.
'내일 스톡홀름 픽쳐스랑 미팅을 할 거라고 하셨으니까, 미팅에 도움이 될 만한 방법이 있나 생각해보자.'
그렇게 생각하며 노트북을 바라보는 유선.
하지만 머릿속에서는 계속 오늘 한록이 했던 말이 떠오르고 있었다.
'지금은 시간이 없어요.'
용기내 꺼낸 말이었지만 자신의 제안이 또 거절당했다.
그 생각을 하니 연이어 떠오르는 기억들.
'엘리스, 유선씨랑 동갑이에요.'
최대리의 말.
'죄송해요. 이분도 CK직원이신가요?'
자신을 알아보지도 못하던 엘리스.
'열심히 보단 잘하면 좋겠군.'
그리고 최경준의 말까지.
'...나 여기서 뭐하고 있는 거지?'
필름마켓. 자신에게 더없이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고, 좋은 모습을 보여줄 거라고 다짐했다.
하지만 정작 필름마켓에 와보니 느껴지는 것은 초조함과 자괴감뿐이었다.
'엘리스는 나랑 동갑인데 바이어로 활동하고 있잖아. 그런데 나는 왜 이 정도밖에 못하지?'
'왜 나는 매일 혼만 나지?'
'내가 그렇게 부족한가?'
끊임없이 드는 부정적인 생각들. 그 생각을 지우기 위해 머리를 흔든 유선이 노트북을 보며 다짐했다.
'아냐. 이럴 때가 아니야. 더 열심히 해야 해.'
그리고 다시 자료를 넘기는 유선. 하지만 마우스 스크롤을 내리는 유선의 손이 점점 느려진다.
'더 열심히 하자.'
늘 생각한 말.
'더 잘해보자.'
늘 다짐하는 말.
그리고...
'나 이미 열심히 하고 있는데.'
'이 이상은 불가능할 정도로 열심히 하고 있는데.'
'대체 얼마나 더 열심히 해야 하는 거지?'
그 생각이 드는 순간, 눈앞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이제 더 못하겠어."
그저 아무것도 못하겠다는 마음이 들 뿐이었다.
*
유선의 얘기를 들은 한록이 말했다.
"그래요. 많이 힘들었을 텐데 신경 못써서 미안해요. 얘기를 좀 더 해볼 수도 있었는데."
"아니에요. 제가 회의에 집중하지 못한게 맞는걸요."
유선은 이제 진정이 된 건지 차분한 얼굴이었다. 아니, 차분하다기 보단 무언가 포기한 것 같은 느낌이었다.
유선이 한록에게 물었다.
"대체 얼마나 열심히 해야지, 얼마나 잘해야 인정받을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유선씨. 그런 걸 목표로 삼으면 안 돼요. 회사와 다른 사람의 인정이 유선씨 인생의 목표가 될 순 없어요."
한록의 대답에 유선이 의아한 듯 한록을 바라보았다. 누구보다 일에 열정적인 한록이 이런 말을 한다는 게 의아하단 얼굴이었다.
"그럼 과장님은...왜 그렇게 열심히 하시는 거예요? 저보다도 더 열심히 일하시잖아요."
"여기서 이루고 싶은 목표가 있거든요. 그래서 이렇게까지 하는 거죠."
처음 들어보는 한록의 솔직한 말. 유선이 머뭇거리며 한록에게 물었다.
"그게 뭔데요?"
"제가 정말 좋아하는 영화가 있는데..."
잠시 말을 멈춘 한록.
한록은 자신이 영화를 사랑하도록 만들어준 영화를 떠올렸다.
그 영화를 만났을 때 느낀 자신의 감정. 그때 한 결심.
"그 영화가 사람들한테 사랑받았으면 좋겠어요. 역사에 남을 정도로 오래 말이에요."
그게 한록이 영화 마케팅을 시작하게 된 이유였다.
한록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유선.
'회사가 인생의 목표면 안 된다' 라는 한록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선씨는 하고 싶은 게 뭐예요?"
그러나 이 말에는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내가 뭘 하고 싶지?'
뭘 위해서 이렇게 열심히 일을 하고 있는지. 왜 매일 출근을 해야 하는지. 왜 자신을 인정해주지 않는 사람들 앞에서 계속 노력해야하는지.
도저히 그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냥...
"저는 그냥 그만두고 싶어요."
모든 걸 그만두고 싶었다.
"그냥 영화는 포기하고 다른 회사에 가고 싶어요. 그럼 정규직이 될 수 있을 거고, 이렇게까지 노력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아요."
"그래요."
한록은 유선의 말에 주의 깊게 고개를 끄덕였다.
회귀 후 한록이 알게 된 가장 큰 깨달음이 있었다.
그건 바로 사람은 누구나 자신만의 싸움을 하며 산다는 것이었다.
'영도도, 현과장님도, 유선씨도, 다들 자기만의 고민이 있지.'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너무나 평범한 사람들.
그 사람들 모두가 열심히 살아가고 있고, 그래서 괴로움에 빠진다.
유선은 지금 그 순간에 맞닿아 있는 것이었다.
'내가 해줄 말이 뭐가 있을까.'
자신이 아끼는 후배. 그 후배에게 해줄 말이 뭐가 있을까.
고민하던 한록이 입을 열었다.
"저번에도 얘기했지만, 저는 그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요. 회사는 많고, 유선씨는 어딜 가든 잘 할 거니까요."
유선이나 영도, 그리고 힘들어하는 신입들을 보면 늘 하고 싶은 말이었다.
회사에 인생을 걸 필요는 없다. 아니, 그래선 안 된다. 삶의 의미는 누군가의 인정이 아닌 다른 곳에 있어야 한다.
한록이 늘 생각해오는 말.
"할 수 있는 만큼만 하고, 안 되면 그만둬요. 그럼 또 다른 기회가 생길 거예요."
"...네."
"그런데 유선씨. 그게 정말 유선씨가 원하는 건지 잘 생각해봐요."
그 말에 한록을 바라보는 유선. 한록은 유선의 표정이 정말 자신과 닮아있다고 생각했다.
"만약 그만두는 게 유선씨가 원하는 게 아니라면, 그냥 지금 너무 힘들어서 포기하고 싶은 거면..."
자신을 닮은 후배. 그런 후배를 바라보면 느껴지는 감정은...
"유선씨. 다른 때는 괜찮아요. 하지만 유선씨가 정말 원하는 게 있을 땐 물러서면 안 돼요. 그럴 때 물러선다면..."
"그럼 평생 후회할 거예요."
자신과 같은 실수를 저지르지 않길 바라는 마음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