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9 : 너 말고도 살 사람 많다.(3) >
"제롬 이 양반이..."
제롬의 이름을 말하며 어이가 없다는 듯 웃는 최대리. 최대리가 말했다.
"이렇게까지 나올 줄은 몰랐네요. 어지간히 사가고 싶은가 봐요."
40만 달러. 한록이 처음 책정했을 때 다들 말도 안 된다고 했던 금액이다. 그런데 제롬 앤더슨은 그 두배를 제시했다.
"잘못 본 거 아니에요? 정말 80만 맞아요?"
한록의 말을 믿지 못하는 정대리. 정대리는 종이를 가져가서 직접 보고나서야 한록의 말을 믿었다.
"80만 달러면...두배잖아요. 여태 팔린 영화 중 10위 안에는 든다고요."
정대리는 여전히 이 상황이 이해가 안 된다는 얼굴이었다.
'이게 말이 되나?'
5년간 판권부서에서 근무했고, 3년간 칸 영화제를 따라다녔다.
강과장과 고부장. 수출 분야에서는 잔뼈가 굵은 사람들도 항상 고전을 하며 돌아오던 칸 영화제.
그런데 한록은 자신의 전문 분야도 아닌 곳에서 정대리가 한번도 보지 못한 성과를 내고 있었다.
'마케팅을 함께 판매할시 80만.'
그 말은 한록의 마케팅이 20만의 가치를 가지고 있단 것이었다.
제롬이 한록에게 제시한 돈은 한국 돈으로 2억 6천만원.
'이런게 진짜 천재구나.'
자괴감이나 질투 같은건 들지 않는다. 이제 그냥 감탄만 나올 뿐이었다.
놀란 것은 정대리만이 아니었다. 한록 역시 눈 앞의 숫자를 믿지 못하고 있었다.
'마케팅을 함께 팔라고?'
무엇보다, '마케팅을 함께 팔라'는 말이 믿겨지지 않았다.
영화계에서 헐리웃의 파워는 절대적이다. 한록 역시 과거 <식물>을 마케팅할 때 헐리웃을 상대로한 마케팅에서 엄청나게 어려움을 겪은 적이 있었다.
'한. <식물>의 미국 마케팅은 우리가 담당합니다.'
'우리가 왜 미국인도 아닌 사람의 말을 들어야하죠?'
'당신의 마케팅이 뛰어난 건 알겠어요. 하지만 상대가 미국이라면 얘기가 달라지죠.'
한록의 말에 언제나 반기를 들던 헐리웃.
그런 헐리웃이 이번엔 한록의 마케팅을 요청하고 있었다.
'80만 달러? 이건 천만영화나 가능한 가격인데.'
'80만 달러면 대체 얼마야...?'
"최대리님. 헐리웃에서 마케팅 요청이 들어왔습니다. 이걸 국내 개봉 때 활용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80만 달러란 숫자에 놀란 정대리와 유선. 그리고 역시나 마케팅을 생각중인 한록.
"과장님. 지금 그러고 있을 때가 아니에요."
그 중 정신을 차린 것은 최대리 뿐이었다.
한록이 마케팅에 대한 생각에 빠져있는 사이, 최대리는 노트북을 켜서 무언가를 쓰기 시작했다. 최대리가 한록에게 말했다.
"회사들한테 메일 보내겠습니다."
"어떤 메일이요?"
"우드 엔터테인먼트에서 80만달러를 제안했다고 회사들한테 말해줘야죠."
"80만이면 기존 가격의 두배입니다. 오히려다른 업체들이 입찰을 포기할 것 같은데요."
"미국은 그렇겠죠. 80만 이상 쓰겠다는 회사는 없을 거예요. 하지만 과장님이 잊고 계시는 게 있어요."
최대리가 한록이 놓치고 넘어간 부분을 짚었다.
"하지만 판권은 나라별로 팔리는 거예요. 유럽이랑 아시아권은 헐리웃이 80만 달러에 사 간 영화라는 점에서 경쟁이 붙을 거예요."
한록이 말릴 새도 없이 메일을 보낸 최대리.
[우드 엔터테인먼트에서 80만 달러를 제안했습니다.]
그러자 곧장 메일이 도착하기 시작했다.
[캘리포니아 픽쳐스: 미팅 취소 요청.]
[더 에이: 관람 취소 요청.]
[스퀘어 타운: 관람 취소 요청.]
한록의 예상처럼 구매를 포기하는 미국의 배급사들. 그리고...
[퀸 필름: 구매 가격 45만 달러에서 47만 달러로 수정하겠습니다.]
[마드리드 주식회사: 48만 달러로 가격 변경 요청합니다. ]
[스톡홀름 픽쳐스: 10만달러 추가로 가격 조정하겠습니다.]
가격을 올리기 시작하는 다른 국가들.
"봤죠?"
최대리의 말처럼, 메일을 받은 회사들은 가격을 수정하는 답장을 보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도착하는 메일들은 일정의 연기를 요구했다.
[재팬 프로덕션: 윤일. 가격을 올리려면 승인절차가 필요해요. 조금만 기다려줄 수 있나요?]
[마이크: 내부 회의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미팅을 연기하고 싶습니다.]
[상해 엔터테인먼트: 3시 미팅 내일로 연기 요청합니다.]
"1,2만 달러 올려서는 못 살거란 걸 알고 있네요. 돈을 더 쓸테니 기다려 달라는 거예요."
최대리의 말에 생각에 잠긴 한록. 한록이 최대리에게 말했다.
"어떻게 하는게 좋겠습니까?"
"과장님 말처럼 가격을 너무 올리면 포기하는 회사들이 생길 거예요. 사겠다고 했다가 취소하는 회사들도 있을 거고요."
"그게 가능합니까?"
"계약서를 아직 안 썼잖아요. 뭐든 가능하죠. 경매를 너무 오래 끌지 말고, 내일이나 모레 안에는 끝내는 게 좋아 보이네요. 기간이 너무 길어지면 분위기가 가라 앉을 수 있어요."
여러 회사와 일한 경험이 드러나는 최대리의 말. 최대리의 말에 한록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오늘은 회사끼리 회의할 시간을 주고, 내일 본격적으로 미팅을 진행하는게 좋겠네요."
"네, 좋아요. 그렇게 메일 보내겠습니다."
최대리가 다시 회사들에게 메일을 보냈고, 회사들은 다음날 미팅을 요청하기 시작했다.
이 상황을 고부장에게 보고한 한록.
"80만 달러라고?"
"마케팅을 포함했을 때의 얘기입니다."
고부장 역시 처음에는 한록의 말을 믿지 못했다. 하지만 구매 요청서에는 정말로 80만 달러가 적혀있었다.
"부장님이 경매 때문에 걱정이 많으셨던 것 압니다. 앞으로 경매 진행에는 큰 문제가 없을 거라고 예상합니다."
'네 눈으로 봤으니, 더 이상 방해하지 말라'는 한록의 말.
말뜻을 알아들은 고부장의 얼굴이 순식간에 구겨졌다.
"바이어들이 미팅 연기를 요청했습니다. 오늘 할 일은 없으니, 저희 마케팅 부서는 호텔로 돌아가 <부산 열차>에 대해 논의하려 합니다."
"아예 돌아가겠단 거야? 아직 마켓이 진행중이야."
"내일 경매를 위한 회의가 필요합니다. 또한 본부장님이 보고를 원하십니다."
이제는 아예 통보를 하는 한록.
하지만 고부장은 아무런 반박을 할 수 없었다.
80만 달러.
한록은 이 자리에 있는 그 누구도 만들지 못한 결과를 만들어냈다. 그런 한록이 회의가 필요하다는데, 차마 반대할 명분이 없었던 것이다.
"...알았어. 돌아가."
결국 고부장이 한록의 말에 수긍했다.
*
호텔로 돌아온 한록과 유선, 최대리.
"본부장님이 회의에 참여하실 예정입니다."
한록의 말처럼 잠시 후 최경준에게서 인터넷 전화가 걸려왔다.
노트북 너머로 보이는 최경준의 얼굴. 최경준은 즐거운 듯 미소를 짓고 있었다.
[자네들 때문에 회사가 난리가 났어. 귀국한다면 금의환향이 기다리고 있겠군.]
최경준의 반응을 보아하니, 아무래도 80만 달러라는 가격이 벌써 소문이 난 모양이었다.
[경매는 어떻게 진행되고 있나?]
"오늘은 회사끼리 회의를 할 시간을 주고, 경매는 내일부터 진행하려고 합니다."
[그것도 잘했네. 큰 금액을 쓰게 하려면 시간을 줘야하지.]
"최대리님이 제안하셨습니다. 저는 생각하지 못한 부분입니다."
"어라. 이렇게 챙겨주시네요."
최대리의 활약을 꼭 짚어서 얘기해주는 한록. 최대리가 한록에게 미소를 짓는 것을 보고 최경준이 답했다.
[둘이 합이 잘 맞는 모양이야.]
어쩐지 씁쓸함이 담겨있는 최경준의 목소리. 최경준은 최대리가 자신의 사람이 아니라는 것에 대해 아직도 아쉬움을 느끼고 있는 모양이었다. 최경준이 말했다.
[남은 일정도 잘 마무리하고 돌아오게. 나도 <부산 열차>를 기다리고 있다네.]
"네. 실망시켜 드리지 않겠습니다."
[자네는 한 번도 날 실망시킨 적이 없지. 필름마켓에서 이 정도 인기를 끌었으니, 국내개봉은 얼마나 성적이 나올지 기대되는군.]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최경준의 말에 한록이 크게 동의했다. 필름마켓은 인수전을 위한 출장일 뿐, 한록이 정말로 기다리고 있는 것은 <부산 열차>의 개봉이었다.
회귀 전 자신은 바라보기만 했던 영화. 이제 영화를 사람들에게 알릴 일만 남았다.
그 생각을 하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책상앞에 앉을 정도로 기분이 좋았다.
[이한록, 최윤일. 국내 개봉에선 또 어떤 모습을 보여줄지 기대하겠네.]
그렇게 회의를 마무리하려던 최경준. 최경준이 무언가 떠올린 것인지 누군가에게 말했다.
[그리고 자네도.]
최경준이 말을 건 것은 유선이었다.
"네, 네! 저도 열심히 하겠습니다!"
최경준의 호출에 깜짝 놀란 유선. 잠시 굳어있던 유선이 얼른 답하자 최경준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열심히 보다는 잘하면 좋겠군.]
뒷맛이 찝찝한 최경준의 말. 그 말에 유선이 표정이 굳어갔다.
*
같은 시간, 한국.
"현차장. <부산 열차> 대박 났다며? 좋겠다?"
현차장에게 말하는 송과장.
최경준의 말처럼 한국에는 이미 한록의 활약에 대한 소문이 나 있었다. 현차장이 송과장에게 말했다.
"내가 좋을 게 뭐가 있어?"
"<부산 열차> 어차피 현차장네가 맡을 거 아냐. 이미 천만은 예약해둔 것 같은데."
"그치? 이과장이 국내 마케팅도 엄청 준비중이거든. 요즘 밤에도 이거해 달라 저거해 달라 연락 와."
"어우...거기도 진짜 독하다."
"독한 게 아니라 대단한 거지."
흐뭇한 미소를 짓는 현차장. 현차장은 최근 회사에서 도는 소문을 떠올렸다.
'이한록이 <부산 열차>를 40만 달러에 팔겠다더라.'
'개봉도 안한 영화를 어떻게 40만 달러에 팔아?'
한록이 필름마켓에 나갈 때 사람들이 수군거리던 얘기. 그 얘기는 대부분 한록의 실패를 점치는 것이었다.
'저러다 큰 코 다치겠네.'
그러나 사람들의 반응은 하루, 이틀이 지나자 점점 바뀌기 시작했다.
'<부산열차> 부스 열자마자 팔렸대.'
'얼마에?'
'40만 달러.'
모두가 불가능하리라 예상했지만 정확히 본인이 예상했던 가격에 판권을 판 한록.
거기에 경매얘기까지 나온 오늘. 영화사업본부의 모든 사람들이 한록에 대한 얘기를 하기 시작했다.
'우드 엔터테인먼트가 부산열차 사갔대. 마케팅을 같이 팔라고 했다던데?'
'얼마에 사갔는데?'
'80만 달러. 원래의 두 배야.'
'80만 달러? 진짜로?'
'이한록이랑 최윤일이 붙었잖아.'
'와, 그 둘이? 영화가 엄청 좋나보네.'
'응. 나 봤는데 인기 많을 것 같더라.'
한록에 대한 시기와 질투에서 <부산 열차>에 대한 관심으로 바뀐 사람들의 반응.
'그래도 80만 달러는 너무 비싸지 않아? 10억이잖아.'
'그만큼 수익이 날 것 같았나보지.'
'그렇게 재밌나? 한국에서 천만은 넘어야 저 정도 받을 텐데.'
'이한록이 하는 거잖아. 넘겠지.'
헐리웃에 10억원에 팔린 <부산 열차>. 그리고 그 영화를 맡은 회사 최고의 천재 이한록.
'와...'
<부산열차>에 대한 얘기를 하던 모두가 도달하는 결론은 하나였다.
'이거 대체 얼마나 잘 될까?'
*
그날 밤.
[48만이요? 이걸로는 절대 못 사요! 50만까지는 예산을 잡아주세요.]
[개봉도 안한 영화에 50만을 어떻게 쓰란 말입니까?]
[우드 엔터테인먼트에서 80만에 사갔다면 이유가 있을 거예요. 53만까지 잡읍시다.]
[과연 그 정도로 살 수 있을까요?]
[이미 영화 두 개 예산이에요.]
[55만 달러까지 가능하다고 얘기하십니다.]
[젠장. 이렇게 비싼 영화는 처음이네.]
<부산 열차>에 대해 회의를 하느라 바쁜 전세계의 배급사들.
'...본부장님 말...무슨 뜻이셨을까?'
'......내가 그렇게 부족해 보이나?'
하루종일 최경준의 말을 생각하고 있는 유선.
"판권부서가 <부산 열차> 80만 달러에 팔았대."
"뭐? 그거 개봉도 안했잖아?"
"아냐, 그거 판권 부서 아니야. 마케팅 부서 사람이 갔다는데?"
"누구? 최대리?"
"아니, 그..."
"아, 알겠다.
"이한록 과장."
회사 전체에 돌기 시작하는 한록에 대한 소문.
그리고....
[여기 칸 영화제인데, 지금 한국영화 하나 대박났네요 ㅋㅋㅋ]
인터넷에 올라온 글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