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 회사원이 선넘으면 생기는일-87화 (87/263)

< 87 : 너 말고도 살 사람 많다.(1) >

[판권을 경매 형식으로 팔겠다고요? 윤일, 이거 필름마켓이랑 합의는 된 건가요?]

[네. 형식상 문제 없다고 연락 받았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이건...]

미팅 부스에서 회의를 하는 독일 바이어와 한록, 그리고 최대리. 독일 바이어는 경매 방식에 대해 상당히 불만을 가진 듯 보였다.

[우리도 예산을 정해서 오는 거예요. 우리가 구매하는 게 <부산 열차>뿐인 줄 알아요?]

바이어가 불만을 가지는 것도, 고부장이 경매 방식을 그렇게 반대한 것도 나름의 이유가 있긴 했다.

한시가 바쁘고 정해진 예산 안에서 최고의 수확을 가져가야 하는 게 필름마켓이다.

바이어들도 영화 하나에 그렇게 많은 예산과 시간을 투자할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그건 이해해요. 그래도 제가 고른 영화에요. 시간을 투자할 이유는 충분하지 않나요?]

자신있게 말하는 최대리. 최대리가 미리 인쇄해온 데이터를 건네며 말했다.

[<부산 열차>의 기본 점수는 80점이에요. 이것만으로도 올해 최고의 흥행작 중 하나가 될 거란 건 보장해요. 거기에 독일은 작년에 좀비 사태를 다룬 소설 '세계전쟁 Z'가 베스트 셀러에 올랐죠. 최대 90점까지 줄 수 있는 작품입니다.]

최대리의 말에 흔들리기 시작하는 독일 바이어의 눈빛.

'그래, 최윤일이 보증하는 영화라면...최소한 손해는 아니야.'

독일 바이어의 마음 속에 그런 생각이 스쳐지나간다. 한록이 때를 놓치지 않고 말했다.

[죄송하지만, 이제 결정을 해주시기 바랍니다.]

[잠시만요. 아직 생각할 시간이 필요합니다.]

[저희도 시간을 드리고 싶지만 다음 미팅이 잡혀있습니다. 오늘 안에 15개 회사와 미팅을 해야 합니다.]

[....]

한록의 말이 의미하는 것은 하나였다. '너 말고도 살 사람이 많다.'

경쟁자가 잔뜩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한록의 말. 그 말에 고민하던 독일 바이어가 결국 두 손을 들었다.

[구매하겠습니다. 원하는 가격을 적고 가죠.]

그렇게 계속 이어진 미팅.

[경매라뇨. 처음 들어보는 얘기네요.]

[영화를 팔겠단 생각은 있는겁니까?]

바이어들은 처음에는 불만을 토로했고, 금액을 적지 않으려 했다.

[그럼 다른 회사에게 팔겠습니다.]

하지만 한록의 말이 들은 이상, 결국 마지막에는 신청서를 작성할 수 밖에 없었다.

'CK라고 했나? 정말 짜증나는 짓을 하고 있군.'

'...하지만 놓칠 수 없다.'

그렇게 <부산 열차>를 구매하려던 모든 회사가 입찰 신청서를 낸 상황.

'이한록. 필름마켓을 어디까지 휘젓고 다닐 거냐.'

<부산 열차>의 경매가 진행 될수록 고부장의 불만은 쌓여만 갔다.

-마케팅부 이한록이 그렇게 대단하다는데?

-그래. 차기 본부장감이라더라.

-밑에서 그렇게 치고 올라오면 마케팅 부서는 어쩌려나.

-어, 안 그래도 거기 좀 위험해 보이더라.

요 근래 회사에서 계속 나오는 이야기. 고부장 역시 그 얘기를 알고 있었다.

하지만 한록은 고작 서른살의 과장이다. 위기를 느낄 건 같은 부서의 정부장과 현차장이지, 아직은 자신이 신경 쓸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한록이 자신의 필드에까지 들어온 상황.

'이제 정말 위험할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이 고부장의 머릿속을 휩쓸기 시작했다.

*

저녁 8시. 2일차 필름마켓이 마무리되었다.

고부장이 모두를 불러 모아서 결과보고를 받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보고를 시작한 정대리.

"보고해."

"<멧돼지> 2개국에 판매 완료되었습니다."

"오늘 미팅이 7개였는데 2개 밖에 성사를 못했다고?"

"그게, 그쪽에서 가격이 너무 비싸다고 해서..."

"그게 할 말이야? 그렇게 나올 줄 예상 못했어?"

고부장의 질책에 정대리가 입을 꾹 다물었다. 다음은 한록의 차례였다.

"다음."

"<부산 열차> 평균 제시가는 45만 달러입니다. 독일은 50만 달러를 제시했습니다."

오늘의 성과를 말하는 한록.

'와, 이게 되네? 바이어들 다 욕하고 때려칠 줄 알았는데.'

판권 부서의 정대리가 놀란 눈으로 한록을 바라보았다. 고부장이 엄청나게 반대하고, 자신 역시 반신반의하던 한록의 제안이 필름마켓이란 전 세계 시장에서 먹혀들고 있었다.

"기존 40만 달러에서 5만 달러가 올랐고, 10개국과 논의 중이니 현재만으로도 초과 수익은 55만 달러입니다."

55만 달러. 대충 환산해도 7억 정도다.

단 하루만에 7억의 수익을 올린 한록. 더 중요한 것은 아직 경매가 끝나지 않았단 사실이었다.

심지어 판권 부서는 <부산 열차>를 30만 달러에 팔려고 했으니, 실제로 한록이 벌어들인 금액은 판권 부서 전체의 실적과 비슷할 정도였다.

"내일은 북미 바이어들과의 미팅이 있습니다. 좀비 영화가 가장 인기를 끄는 곳이니 50만 달러 이상의 가격을 제안하리라 예상합니다."

거기에 아직 좀비영화의 진짜 무대인 북미쪽이 남은 상황.

"...그래."

이쯤되면 아무리 고부장이라고 해도 한록의 말에 반박을 할 수가 없었다.

정대리를 쥐잡듯이 잡던 것과 달리, 한록에게는 아무런 말도 없이 넘어가는 고부장.

'부장님이 아무 말도 못 하시네. 이런 게 실력으로 누르는 거구나.'

정대리는 통쾌함과 씁쓸함 사이에서 한록을 바라보았다.

'멋있네...나는 절대 저렇게는 못하겠다.'

자신에게 반대하는 상사를 압도하는 실력. 한록이 괜히 본부장의 사랑을 받는 게 아니란 생각이 드는 동시에, 자신은 절대 한록처럼 될 수 없단 생각에 처량한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보고가 모두 끝났고, 마케팅 부서는 다시 호텔로 돌아갔다.

"오늘은 늦었으니 회의 없습니다. 대신, 내일 8시에 회의실에서 봅시다."

오늘의 일정이 끝난 마케팅 부서. 그러나 한록에게는 아직 할 일이 남아있었다.

'본부장님이 전화를 한다고 하셨지.'

어제 최경준이 경매의 진행상황을 바로 전달하라고 한 상황. 한록은 보고를 위해 호텔 방으로 향했다.

최경준의 연락을 기다리며 오늘의 수확을 정리하는 한록.

'<스캔들>과 <지구 특공대>는 거의 판매가 끝났군.'

과거 10만 달러라는 가격에 팔린 <스캔들>. 그리고 딱 한 곳, 일본에 팔린 게 전부였던 <지구 특공대>.

두 영화는 한록에 의해 13개국에 수출되었고, 과거보다 두배 높은 가격에 판매되었다.

'<부산 열차>는 북미 판권 판매가 남아있고.'

무엇보다 가장 큰 수확은 <부산 열차>였다. 회귀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큰 수익을 내고 있는 <부산 열차>.

'드디어 <부산 열차>가 제 값을 받는구나.'

한국에서 제작된 수작 좀비영화. 한록은 회귀 전부터 <부산 열차>에 대해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한서의 병과 회계부로의 발령 때문에 1년간 영화는 구경도 할 수 없던 상황.

한록은 그저 오과장과 구과장이 자신이 원하던 영화를 가져가는 것을 지켜봐야 할 뿐이었다.

주말마다 영화관에 찾아가서 영화를 보고, '이게 내가 맡은 영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라고 상상하던 나날들.

그 날들이 이제 현실이 되고 있었다.

'이제 <부산 열차>는 내 영화다.'

그 시기에 놓친 영화를 다시 만나서 마케팅 할 수 있다는 것. 그건 요즘 한록에게 큰 즐거움이 되어주고 있었다.

'내가 놓쳤던 영화들을 전부 찾아와주마.'

<삼일의 삶>, <퀸>, <부산열차>. 그리고 앞으로 남은 영화들. 그 영화들과 함께 할 수 있다는 사실에 또 다시 가슴이 뛰기 시작한다.

그때 걸려온 최경준의 전화.

"본부장님. 이한록입니다."

[소식 들었어. <부산 열차>로 7억을 벌었다지.]

전화를 받자마자 <부산 열차>에 대한 얘기를 꺼내는 최경준.

[나뿐만 아니라 사장님께서도 그 얘길 들으셨지. 꽤나 좋아하셨어. 필름마켓에 보낸 보람이 있군.]

최경준은 상당히 기분이 좋아보였다.

자신의 분야도 아닌 곳에서 누구보다 활약하고 있는 한록. 한록은 하정엽에게 영화사업본부의 성장을 보여주겠다던 최경준의 계획을 누구보다 잘 수행하고 있었다.

최경준이 한록에게 말했다.

[고부장과는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궁금하군. 내 도움이 필요한가?]

한록은 최경준의 말에 오늘 고부장과의 대치를 떠올렸다.

'너, 점점 선을 넘고 있다.'

한록을 상대하는 사람들이 늘 그렇듯 한록이 자신의 영역을 침범하는 걸 두려워하는 고부장.

그러나 그 정도는 늘 겪는 일이었고 신경을 쓸 가치도 없었다.

무엇보다, 고부장의 실은 그다지 위협적이지 않았다. 한록이 답했다.

"아닙니다. 잘 지내고 있습니다."

[그럴 리가 없지. 자네가 컨트롤 할 수 있다고 알아 듣겠네. 또 필요한 건 없나.]

그 말에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하는 한록.

"한국으로 돌아가면 맡고 싶은 영화가 있습니다."

[<부산 열차>말인가?]

"아뇨, <부산 열차> 이전에 개봉하는 영화입니다. <러빙 고흐>를 맡고 싶습니다."

러빙 고흐. 고흐의 일생을 그린 영화. 영화의 모든 장면은 유화로 그린 애니메이션 이었고, 그래서 제작기간이 10년이나 걸린 영화였다.

[러빙고흐라.]

"제작이 발표됐을 때부터 지켜보던 영화입니다. 꼭 제가 담당하고 싶습니다."

한록이 10년을 기다려왔던 영화. 그러나 당시 한록은 회계부로 좌천을 당한 상태였고, <러빙 고흐>를 담당한 건 오과장이었다.

자신을 구렁텅이에 떨어뜨린 사람이 맡았던 영화. 이제는 그 영화를 가져올 차례다.

[안돼. <부산 열차>와 개봉시기가 멀지 않아. <부산 열차>는 지금 사장님이 지켜보시는 영화고, 나는 자네가 <부산 열차>에만 집중하길 바라네. 한꺼번에 두 개의 영화를 다루긴 어려워.]

최경준이 단호하게 한록의 말을 거절했다.

"본부장님."

최경준의 거절. 그러나 한록은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저 이한록입니다."

최경준이 자신을 신뢰할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었다.

[하하.]

한록의 자신감 넘치는 말에 전화기 너머의 최경준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잠시 후 말했다.

[그래. <부산 열차>도 <러빙 고흐>도 한 번 해보게. 대신 어설픈 결과가 나오면 각오해야 할 거야.]

"네, 알겠습니다."

결국 최경준의 허락이 떨어졌다. 최경준이 전화를 끊기 전 한록에게 말했다.

[<부산 열차>말이네.]

"네, 본부장님."

[한국에서 개봉한다면 나도 보고 올 생각이네.]

그 말과 함께 끊긴 최경준의 전화.

한록은 잠시 핸드폰을 바라보다 미소를 지었다.

문오석. 고부장. 회사의 암투와 권력다툼. 그 모든 것에 지칠 때도 있지만-

'나는 역시 이 일이 좋다.'

그래도 이런 말을 들을때면 그간의 고생이 모두 보상받는 듯한 느낌이 든다.

한록은 책상을 정리하고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았다. 시간은 벌써 12시. 내일 8시에 회의를 하려면 슬슬 잠들어야 할 시간이었다.

'<부산 열차>. 그리고 <러빙 고흐>가 내 손에 들어왔다.'

'이걸 또 어떤 사람들에게 보여줄까. 예전에 생각했던 그대로 마케팅 할까. 아니면 다른 방법을 시도해볼까.'

'어떤 사람들이 영화를 보러올까.'

한록의 입가에 조용히 걸리는 미소.

아무래도 오늘은 쉽게 잠이 들 수 없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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