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 회사원이 선넘으면 생기는일-85화 (85/263)

< 85 : 필름마켓(4) >

*

상영 부스로 들어가기 직전. 부스 앞에서 한록이 엘리스에게 티켓을 내밀었다.

[<부산 열차> 티켓입니다.]

[아, 감사합니다.]

한록에게서 티켓을 받은 엘리스. 엘리스가 한록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잘생겼다. 근데 어디서 본 것 같은데...?'

그러나 한록은 엘리스를 상영 부스로 안내한 후 사라졌고 엘리스는 부스에 혼자 남게 된 상황.

'제법 잘 꾸며놨잖아? 기차 모양이네.'

상영 부스는 보통 의자 하나와 티비 하나가 전부인데, CK의 부스는 좀 달랐다.

위를 막아서 영화관처럼 완전한 암흑을 유지한 구조. 거기에 기차좌석 같은 두 개의 의자가 나란히 놓여진 상영 부스.

한쪽이 빈 의자에 혼자 앉자니 벌써부터 으스스한 느낌이 들었다.

'정말 공을 많이 들였네.'

필름마켓에서는 처음 보는 시도에 엘리스가 작게 감탄했다.

영화를 감상하기는커녕, 시나리오나 예고편 하나만 보고 구매를 결정하는 필름마켓.

바이어들은 필름마켓에서 1분 1초가 아까워 뛰어 다니고는 했다. 그런 곳에서 진짜 '영화'를 보는 기분은 꽤나 색달랐다.

'어, 이거...'

TV에서 나오는 불빛에 무언가를 발견한 엘리스.

'메일로 받았던 기차표잖아?'

한록이 내민 티켓은 티켓이 아닌 기차표였다. 그러나 메일과 다른 점이 있다면, 그 도착지가 다르단 것.

[부산->런던]

그리고 도착지는 엘리스가 출발한 곳, 영국의 런던이었다.

'런던? 영화에 런던이 나오나? 아, 시작했다!'

엘리스가 의문을 가질 새도 없이 시작한 <부산 열차>.

계단을 내려오고, 기차의 유리문을 치는 좀비떼. 그때마다 쿵쿵거리며 흔들리는 부스의 벽.

엘리스의 손이 노트에 메모를 시작한다.

[한국 좀비 영화라. 생각보다 괜찮은데?]

[좋아, 살만 해]

'하지만 CK가 제시한 40만 달러는 너무 비싸. 절반으로 협상해야겠어.'

'..아니야, 30만 달러 정도면 되겠다.'

'...깜짝이야. 벽은 대체 어떻게 흔들리는 거지?'

'......진짜 저 기차 안에 있는 것 같네.'

'............'

...................'

점점 줄어가는 엘리스의 말수. 그리고 멈춘 엘리스의 손.

아무도 없는 작은 부스. 그 곳의 기차 좌석에 앉아서 기차에서 일어나는 좀비 영화를 본다. 그러다보면 드는 생각.

'나...'

'지금 어디에 있는 거지?'

그때 마침 끝나버린 영화와 TV에서 나오는 안내방송.

<영화가 모두 끝났습니다.>

<다음 목적지는.>

<런던, 런던입니다.>

그 순간 떠오른 상상 하나. 기차역에 나타난 좀비 한 마리가 몸을 비틀다가 사람들에게 달려든다. 그리고 그 좀비 뒤로 보이는-

영국의 워털루역.

영화. 기차역. 좀비. 그리고 런던.

엘리스의 머릿 속에 모든 계획이 저절로 세워지기 시작한다.

배우부터 마케팅, 그리고 시나리오까지 모든 게 완벽한 영화를 만났을 때. 그걸 자신의 나라로 가져가는 상상을 했을 떠올렸을 때 바이어가 하는 생각.

'이건 가져가야 한다.'

그 생각 외에는 아무것도 들지 않았다.

*

30분 후. 영화의 주요 하이라이트를 편집한 상영이 끝났고, 엘리스가 밖으로 나왔다.

'뭐라고 할까?'

'어땠을까?'

'아씨, 마케팅 부서 놈들한테 밀리면 안 되는데.'

사람들의 눈길 속에 엘리스가 처음으로 한 말은-

[윤일. 이거 지금 당장 살게요!]

고부장의 기대를 완전히 배신했다.

*

[정말 좋은 영화예요. 기차표랑, 안내 방송 아이디어도 대단해요! 윤일. 담당자가 누구죠?]

[접니다. 이쪽에서 얘기하시죠.]

엘리스를 데리고 미팅 부스로 향한 한록. 부스에선 고부장과 강과장이 얼굴이 빨개져서 한록을 노려보고 있었다.

"상담을 진행해야합니다. 비켜주시죠."

"상담은 우리가 하지."

[엘리스. 상담은 누구랑 하길 원하십니까?]

[이 영화의 담당자요. 영화에 대한 설명을 들어야겠어요. 아, 안내방송 아이디어는 누구 건가요? 메일로 기차표를 보낸 건요? 그 분들하고도 할 말이 있는데요.]

[전부 접니다.]

[세상에!]

한록의 말에 깜짝 놀란 표정을 짓는 엘리스. 엘리스가 한록을 붙잡고 말했다.

[마케팅에 대해서도 할 말이 있었어요!]

[네, 미팅을 하면서 얘기해 보면 될 것 같습니다.]

엘리스와의 대화를 마친 한록이 고부장과 강과장을 바라보았다.

"저와 대화를 하길 원하시는군요."

"알았어, 알았다고!"

결국 책상에서 일어나는 고부장과 강과장.

미팅만은 자신들의 분야라고 생각했는데, 이제 그것마저 한록에게 뺏겨버린 상황이 되었다.

[저한테 하실 말씀이 있으시다구요?]

[저, 그런데...]

테이블에 앉은 엘리스가 한록을 빤히 바라보더니 말했다.

[혹시 MK TV에서 인터뷰 하지 않았나요?]

[...]

MK TV. 한록이 <퀸> 때문에 인터뷰를 했던 곳이었다.

한록이 답이 없자, 옆에 있던 최대리가 대신 답했다.

[맞아요. <퀸>이랑 <삼일의 삶> 마케팅 때문에 인터뷰 나온 그 사람.]

[역시! 그 인터뷰도 재밌게 봤어요. 알렉산드로 감독님이 <삼일의 삶>에 대해서 호평하셔서 찾아봤거든요.]

[실물이 더 잘생겼죠?]

"최대리님. 그만합시다."

먼 외국에서까지 자신을 알아보는 사람이 있다. 민망함과 놀라움에 굳어있던 한록이 겨우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

[미팅을 진행했으면 합니다.]

[아, 좋아요. 영국 국내 상영권, DVD제작권, TV상영권 전부 구매하고 싶습니다.]

손에 들고 있는 기차표를 바라보는 엘리스.

자신의 고향이 적혀있는 티켓. 그리고 영화가 끝나자 나오던 안내방송.

자신이 이 부스에서 영화를 보며 느끼던 몰입감. 마치 실제 부산행 열차 안에 앉아있는 것 같았던 감각을 사람들에게도 전달하고 싶었다.

'<부산 열차>가 세계로 뻗어나가게 하겠다.'

한록과 최대리의 생각이 벌써 조금 현실이 된 순간.

[영국의 킹덤 픽쳐스 안소니 유베르입니다. <부산 열차> 관람 때문에 방문했습니다.]

그때 부스를 방문한 누군가. 그 사람의 입에서 나온 영국과 <부산 열차>란 이름에 엘리스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 외쳤다.

[<부산 열차> 구매할게요! 가격이 얼마죠?]

[40만 달러입니다.]

한록의 말에 엘리스는 짧은 고민에 빠졌다.

'한국 좀비영화가 40만 달러? 너무 비싸.'

[미스터 이. 조율을-]

[조율할 생각 없습니다. <부산 열차>의 가치는 보셔서 아실 거고, 저희는 그만큼의 대가를 받아야 판매를 합니다.]

한록의 단호한 태도는 절대 꺾이지 않을 것 같았다. 고부장이 한록의 어깨를 잡고 말했다.

"이과장. 우리가 제시한 가격은 그냥 최대가격이고, 조율은 기본이야."

한록의 귀에 속삭이는 고부장.

"미팅은 제가 진행하고 있습니다, 부장님."

그러나 한록의 태도는 강경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최대리가 엘리스에게 말했다.

[이런. 방금 부장님께서 이렇게 말하셨어요. 영국은 좀비영화를 선호하니 45만 달러를 제안해야했다고.]

최대리가 천연덕스러운 얼굴로 거짓말을 하더니 한록에게 윙크를 했다.

고민에 빠진 엘리스.

'40만 달러. 개봉도 안 한 한국영화에 쓰기엔 너무 큰 금액이야. 당연히 협상을 해야 해.'

원래 회사가 제시한 금액에서 깎아나가는 게 협상의 기본. 그러나 엘리스는 지금 그 기본적인 방식을 지킬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엘리스. 빨리 결정하는 게 좋겠어요. 안소니가 왔거든요.]

엘리스에게 은근히 압박을 가하는 최대리.

[다시 말씀드리지만, 제값을 받지 못한다면 영화는 팔지 않습니다.]

그리고 완고한 한록.

두 남자의 압박. 그리고-

[엘리스. 런던에서 <부산 열차>가 상영되는 모습이 상상되지 않으십니까.]

엘리스에게 쐐기를 박는 한록의 말.

한록의 말에 엘리스의 눈이 흔들렸다. 기차표와 안내방송. 그리고 열차 속의 좀비. 부스 안에서의 숨막히는 30분-

'그래, 이건 된다.'

그것들을 떠올린 엘리스가 잠시 후 말했다.

[40만 달러에 구매하겠습니다.]

*

*

'말도 안돼.'

오후 1시. 고부장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CK의 부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CK의 상영부스 세 곳. 그 곳을 모두 채우다 못해 줄을 서 있는 바이어들.

미리 예약을 하지 못한 바이어들이 현장에서 상영부스에 이름을 올리고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떻게 이게 가능하지?'

단 며칠안에 전 세계의 영화를 구입해야 하는 바이어들. 그들은 언제나 바빴고, 고부장과의 대화 시간마저 아까워 했다.

그러나 바이어들은 오직 <부산 열차>를 보기 위해 CK의 부스 앞에서 진을 치고 있었다.

'부스 하나로는 부족하다.'

한록의 말이 예언이 된 상황.

'이게 뭐지?'

부스의 줄을 보고 당황한 건 피터 역시 마찬가지였다.

엘리스에게 '한국 좀비영화가 팔리겠느냐'고 비아냥 거리던 바이어 피터. 피터가 줄에 선 누군가를 붙잡고 물었다. 미국에서 인턴을 할 시절의 동기 벤자민이었다.

[벤자민. 여기서 뭐하는 거야?]

[<부산 열차> 때문에. 최가 보낸 거잖아. 한 번 확인은 해봐야지.]

[그 녀석이 그렇게 대단해?]

[헐리웃에 있을 때 그 사람이 고른 시나리오는 전부 성공했어.]

[젠장...]

최대리의 활약을 잘 몰랐던 피터. 피터가 뒤늦게 불안한 예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 사람 때문에 줄을 선다고? 이 바쁜 시간에?]

[그 사람 때문이 아니야.]

[그럼?]

[직접 봐.]

그렇게 말하며 상영 부스 한 곳을 가리키는 벤자민. 그곳에서는 누군가 흥분한 얼굴로 나오고 있었다.

[담당자가 누구죠? 당장 계약하겠습니다!]

벤자민이 피터에게 말했다.

[반응이 너무 좋아. 그래서 다들 줄 서 있는 거야.]

1억에 산 영화가 100억의 수익을 내고, 100억에 산 영화가 1억의 수익도 내지 못하는 이곳. 영화관계자들의 도박판이라고 할 수 있는 필름 마켓.

바이어들은 필름마켓에서 최소한의 예산으로 최고의 영화를 사기 위해 뛰어다녔다. 그리고 지금, 그 곳에서 재밌다는 게 확실시 된 영화 <부산 열차>.

모두가 <부산 열차>를 사기 위해 모인 것은 당연했다.

[피터. 아마 이게 이번 필름마켓의 복권일 걸?]

<부산 열차>는 모두가 원하는 영화가 되었고 '한국 좀비 영화를 누가 사냐'던 피터의 말은 완전히 반박 당했다.

'말도 안돼. 다들 속고 있는 거라고.'

여전히 <부산 열차>에 대해 믿음이 없는 피터. 그런 피터에게 벤자민이 말했다.

[엘리스는 여기에 관심있어 보이더라. 너희 경쟁사 아냐? 빨리 사는 게 좋을 걸.]

벤자민의 말에 피터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다행히 사람들 사이에 엘리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피터에게 남은 선택은 하나.

[아이 픽쳐스 피터 휴스먼입니다. <부산 열차> 현장 예약 가능합니까?]

그토록 무시하던 한국 좀비영화를 보기 위해 줄을 서는 것이었다.

*

'그래, 얼마나 재밌는지 한 번 봐주마.'

한시간 반을 기다려서 겨우 상영 부스에 입장한 피터.

'어? 런던?'

그의 손에 들린 기차표. 그걸 눈치챈 순간-

<상영 시작합니다.>

영화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30분 후. 부스에서 달려나온 피터가 외쳤다.

[<부산 열차> 영국 판권 아직 안 팔렸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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