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4 : 필름마켓(3) >
한록과 유선, 최대리는 부스 설치를 마무리하고 자신들의 호텔로 향했다.
호텔 로비에 앉은 셋.
지금 시간은 저녁 9시였다. 거기에 한국에서 비행기를 타고 하루를 날아왔으니 모두 기진맥진한 상황.
한록이 최대리에게 말했다.
"필름마켓은 건드릴게 없겠네요."
"그렇죠. 한국에서 준비를 다 해왔으니까."
최대리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한록이 입을 열었다.
"이제 우리가 할 일은..."
"신나게 놀기인가요?!"
유선이 한록과 현차장의 명대사를 생각하며 기대하며 물었다. 그러나 한록은 냉정하게 말했다.
"아뇨. <부산 열차>의 한국 마케팅 방안 회의입니다."
"...네! 너무 좋네요!"
한록의 강행군에 고통스러워하는 유선. 그러나 자식은 강하게 키워야 하는 법이다. 한록이 단호하게 노트를 펼쳤다.
"<부산 열차>는 한국보다 외국에서 반응이 더 좋을 겁니다."
"맞아요. 한국은 좀비영화 불모지니까요. 스토리 라인도 한국 사람이 보기엔 진부하죠."
한록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최대리.
실제로 회귀 전 <부산 열차>는 한국에서 '너무 신파다'라는 지적을 받았다. 반면 해외에서는 좀비 영화에 섞인 한국 특유의 감수성이 꽤나 큰 호평을 받았다.
"그러니 <부산 열차> 마케팅에서 중요한 건 해외의 반응을 가져오는 겁니다. 그럼 한국에서만 마케팅 하는 것보다 더 좋은 성적이 나올 겁니다."
"개봉을 느리게 해야겠네요. 해외가 먼저, 한국이 나중에."
"네, 맞습니다."
한록이 어떤 말을 할 때마다 바로 의견을 가져오는 최대리. 과연 말이 잘 통하는 상대였다. 반면 유선은 입을 벌리고 둘의 대화를 지켜보았다.
"그...그래도 되나요? 그래도 한국 영화인데..."
"괜찮습니다. 안 되면 본부장님께 강력하게 요청할 생각입니다."
"문제는 해외 반응을 우리가 컨트롤 할 수 없단 거네요. 반응이 되도록 빨리 와야 한국 마케팅에 쓸 수 있을텐데 말이에요."
최대리가 턱을 괴고 말했다.
해외 반응이 필요하다. 그렇지만 CK가 해외 마케팅을 할 수는 없다.
"한국에서 만든 좀비영화를, 해외에서 빠르게 반응이 와야 한다라. 게다가 우리가 마케팅을 할 수는 없다..."
생각에 잠긴 최대리. 그리고 한록.
"과장님, 이건 어때요?"
"저희가 직접적으로 해외 마케팅을 할 순 없습니다."
"그럼 판권을 사가는 곳이랑 협조를 해야겠네요."
"네, 맞습니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회의.
"음, 저도 모르겠어요. 이건 더 고민을 해봐야겠어요."
그러나 최대리는 결국 손을 들었고, 회의는 그렇게 끝나 버렸다.
직접적으로 마케팅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한국산 좀비 영화'를 대체 어떻게 세계에 알릴 것인가.
한록이 맞닿은 질문.
이 질문을 풀어내야지 <부산 열차>의 성공이 결정될 것이 분명했다.
*
회의가 끝나니 시간은 저녁 11시.
"이제 쉽시다. 다들 내일 봐요."
노트를 정리하는 한록의 모습에 유선이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때 최대리가 말했다.
"잠깐. 아직 할 일이 남았어요."
"또요?!"
"네. 우리가 할 일은..."
얼굴이 하얗게 질린 유선에게 최대리가 무서운 얼굴로 말했다.
"바에 가서 즐기기입니다."
잔뜩 긴장했던 유선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최대리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장난스레 웃는 최대리.
"저도 이 대사 한 번 해보고 싶었어요. 현과장님이 하시는 거 봤는데 재밌어 보이더라구요."
"아..."
"이 호텔 바가 유명해요. 가서 조금만 마시는 거 어때요?"
"안 됩니다. 아직 일정이 남았으니 술은 다 끝나고 마십시다."
최대리의 말에 한록이 단호하게 답했다. 그러나 최대리는 포기하지 않았다.
"내일부터는 관광객들 와서 자리 없을 거예요. 기회는 오늘 뿐이라고요."
"...저도 한 번 가보고 싶긴 한데..."
"유선씨도 가보고 싶대요."
끈질긴 최대리와 한록의 눈치를 보는 유선. 그 모습을 보고 한록이 한숨을 쉬었다.
"대신 조건이 있습니다."
"네, 뭐든 따르겠습니다."
그렇게 한록의 조건부 허락 하에 호텔에 있는 바에 도착한 한록과 유선, 최대리. 한록이 바텐더에게 말했다.
[모히또 세잔, 무알콜로 주세요.]
한록이 내건 조건. '무알콜일 것.'
"이게...술...?"
"최대리님, 불평하지 마세요. 근무 중입니다."
그리하여 한록, 유선, 최대리 삼인방은 프랑스 칸까지 와서 무알콜 모히또를 앞에 두고 대화를 시작했다.
"대리님, 근데 매니저 엘리스랑 아는 사이세요?"
"엘리스? 헐리웃에서 일할 때 자주 만났죠."
유선의 질문에 최대리가 답했다.
'윤일! 오랜만이에요.'
엘리스. CK가 메일을 보낸 영국회사의 직원이자, 아까 전 한록의 마케팅에 대해 호의적으로 얘기하던 여자 바이어였다.
엘리스는 최대리를 발견하고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매니저면 꽤 높은 직급이죠?"
"그렇죠. 한국이면 과장 정도? 아마 그 회사에서 제일 어린 매니저일걸요? 이과장님 같은 사람이죠."
"영국의 이과장님이라...멋있네요."
"맞아요, 멋진 사람이에요. 얘기해보고 싶으면 저한테 말해요. 나이가 유선씨랑 동갑이라서 말이 잘 통할 거예요."
"...저랑 나이가 비슷하다구요?"
최대리의 말에 급격히 어두워지는 유선의 표정.
"저 슬슬 졸려서...먼저 들어가 볼게요."
유선이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꾸벅 인사를 했다. 그리고는 바에서 나가버렸다.
"음...기분이 안 좋나보네요."
유선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최대리가 한록에게 말했다.
"네. 그럴 수 있죠."
유선의 마음을 이해하는 한록.
세계 최고의 영화제라 할 수 있는 칸 영화제. 거기서 다른 사람들에게 당당히 인사를 하는 젊은 여성, 엘리스.
엘리스는 아마 유선의 눈에는 너무나 멋진 롤모델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 엘리스가 자신과 동갑이란 소리를 들었다. 똑같은 나이인데 최연소 과장인 엘리스와, 아직 계약직에 아무것도 모르는 신입인 자신.
아마 유선은 자기 자신이 한없이 작아지는 기분을 느끼고 있을 것이다.
"남이랑 자기를 비교해봤자 얻을 건 아무것도 없는데. 괜히 신경을 쓰네요."
"최대리님. 유선씨도 잘 알고 있을 겁니다."
한록이 최대리에게 단호하게 말했다.
한록도 회귀 전 유선과 비슷한 감정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왜 내 곁에는 아무도 없는지, 자신이 뭐가 부족한지 자책하고 고민하던 날들. 그렇기 때문에 유선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남의 일에 대해 함부로 얘기하지 마세요. 그 사람의 입장이 되어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것들도 있어요."
한록을 빤히 바라보는 최대리. 최대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네요. 직장인이라면 각자의 고민은 있는 거니까."
한록의 말을 빠르게 인정하는 최대리.
그렇게 인정할 수 있는 이유는 아마 최대리에게도 나름의 고민이 있기 때문일 게 분명했다.
"아니다. 우리 이과장님은 없으신가?"
"저도 있습니다."
한록이 솔직하게 답했다.
마케팅하면 따라올 자가 없는 능력. 거기에 최경준의 총애를 받고 있으며, 많은 사람들이 한록을 믿고 따르고 있다. 그러나 한록 역시 고민은 있었다.
'나는 사람을 믿지 못하는구나.'
이전 생에서 영도에게 느꼈던 배신감 때문인지, 언제나 한록의 마음 한구석에는 '사람들은 나를 싫어할 것이다'라는 잘못된 생각이 있었다.
그걸 깨닫게 해준 사람이 바로 최대리였다.
부산영화제부터 지금까지 꾸준히 자신을 도와줬던 최대리. 그러나 한록은 최대리가 자신에게 보이는 호의를 계속 의심했다.
'계속 최대리님을 의심했으면 <부산 열차>도 같이 할 수 없었겠지.'
하지만 사람들은 한록의 변화에 맞게 달라진 모습을 보여줬다.
현차장과 유선은 계속 한록을 믿어주었고 최대리 역시 한록에게 손을 내밀어 주었다.
'이제는 과거에 얽매이지 말자.'
몇 번이나 다짐하고 몇 번이나 실패하는 생각. 그리고 한록이 잊어갈 때쯤이면 현차장, 유선, 최대리가 또다시 일깨워주는 생각. 한록이 최대리에게 말했다.
"다른 사람들한테 마음을 열려고 생각중입니다."
그건 한록이 회귀 후 변하고자 하는 부분이며, 나름대로 내린 결심이었다.
한록의 말을 들은 최대리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장난스레 말했다.
"그래서 승진도 하시려구요?"
"네, 그것도 있죠."
마찬가지로 피식 웃으며 답하는 한록.
가볍게 말했지만 그 생각은 진심이었다.
'지금 내 위치에선 방해가 너무 많다.'
처음에는 최경준의 총애를 받으면 모든 일이 해결 될 줄 알았다. 하지만 그렇게 된 지금도 일을 할 때마다 제약이 너무 많았다.
모든 일에 정부장과 최경준의 허락을 받아야 하고, 문오석의 위협을 받아야 한다.
과장이라는 자리는 한록이 바라는 일만 할 수 있는 자리, 그리고 회사를 바꿀 수 있는 자리와는 한참 먼 자리였다.
심지어 자신이 아끼는 부하 하나 정규직으로 만들어 줄 수 없었다.
'더 높이 올라가야해.'
"과장님이 승진 얘기 하시는 건 처음 보네요."
"저도 회사원입니다."
최대리의 말처럼 한록은 그 어느 때보다도 승진에 대한 갈망을 느끼고 있었다.
"저도 이거 끝나면 아마 승진할 것 같아요."
"축하드립니다."
최대리의 말에 한록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최대리는 부산 영화제에서의 활약만으로도 승진을 할 만한 상황이었다.
"그러면 이제 최과장이 되는 거죠. 다시 과장님 라이벌 자격 합격인가요? 지금까진 제가 좀 부진했잖아요."
"저는 최대리님이 라이벌이라고 생각한 적 한 번도 없습니다."
"과장님 말고는 다 그렇게 생각해요."
"최대리님도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저요?"
한록의 말에 최대리가 미소를 지었다.
"당연하죠."
그 미소에서 느껴지는 감정들. 한록에 대한 경쟁심리와 승부욕. 한록이 사람들로부터 늘상 받아오던 것.
하지만 거기서 질투와 악의는 느껴지지 않았다.
"전 이런 거 좋아해요. 과장님은요?"
"어떤 거 말입니까."
"뛰어난 상대랑 경쟁하고, 멋지게 이기는 거요."
그건 최대리의 목적이 한록을 찍어 누르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한록이 최대리의 말에 웃으며 답했다.
"저도 좋아합니다. 대신 제가 이겨야 좋습니다."
"그건 저도 마찬가지에요."
최대리가 모히또를 한 잔 마시고 말했다.
"안타깝게도 지금은 제가 꼬셔서 한 팀이 됐지만, 언제 한 번 제대로 붙어보자구요."
최대리의 말에 한록은 앞으로 일어날 일을 생각했다. 칸 필름마켓. <부산 열차>의 국내 마케팅. 그리고...남은 영화들.
올해의 마지막에 시상식을 두고 자신과 경쟁할 사람. 그 사람이 누구인지 이제 감이 잡히기 시작했다. 한록이 최대리에게 말했다.
"아마 곧 그 시기가 올 겁니다."
확신이 담긴 한록의 말에 최대리가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 웃으며 말했다.
"그래요, 그때도 잘해 봐요."
*
다음날 아침. 로비에서 만난 셋.
"안녕하세요!"
다행히 유선은 씩씩한 얼굴이었고, 한록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한록과 유선, 최대리는 필름마켓이 열리는 호텔로 이동했다. 부스는 이미 설치가 끝난 상황.
잠시 후 판권부서가 도착했다.
"안녕하십니까."
"그래."
한록의 인사에 고부장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이후로 부스에는 다시 정적이 찾아왔다.
'여긴 내 무대다. 너 같은 초짜가 설치면 어떻게 되는지 오늘 보여주마.'
팔짱을 끼고 한록을 노려보는 고부장. 그러나 한록은 고부장은 신경도 쓰지 않고 최대리와 회의를 했다.
'그래, 그렇게 나와 봐라. 잠시 후 어떻게 되는지 보자.'
고부장의 저주 속에 시간이 흘렀다. 10시가 되었고, 바이어들이 필름마켓에 입장하기 시작했다.
[윤일.]
그리고 마켓이 시작되자마자 CK 부서에 들린 소리. 고부장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부스 입구를 바라보았다.
부스를 찾아온 사람은 엘리스였다. 최대리가 엘리스에게 다가가 물었다.
[안녕하세요, 엘리스. 상영 일정은 10시 30분이었을 텐데요?]
[어제 반응을 보니 늦장을 부리면 <부산 열차>를 뺏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제가 제일 먼저 맞죠?]
[네. 부스가 열리자마자 왔어요.]
최대리와 엘리스의 대화에 끼어드는 고부장.
'이제 내 무대다.'
그런 생각으로 고부장이 엘리스에게 말했다.
[급하시면 미팅부터 하시겠습니까?]
[아뇨. 일단 관람부터 하고요.]
고부장의 말을 딱 잘라 거절한 엘리스. 고부장이 당황해서 말했다.
[그렇게 되면 다른 영화가 먼저 계약이 될 수도...]
[그건 <부산 열차> 얘기였어요. <부산 열차>와 <지구 특공대> 외에는 관심 없습니다. <지구 특공대>는 이미 사전 예약을 했습니다.]
엘리스의 입에서 나온 것은 모두 한록이 다룬 영화들이었다.
서서히 구겨지기 시작하는 고부장의 자존심, 엘리스는 최대리와 함께 상영부스로 향했다.
"에이씨, 얼마나 잘 되는지 보자..."
그리고 고부장과 같은 생각을 한 것인지, 뒤에서 강과장이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다.
그렇게 모두의 관심 속에 시작된 <부산 열차>의 첫 상영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