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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 회사원이 선넘으면 생기는일-83화 (83/263)

< 83 : 필름마켓(2) >

"부장님! <부산 열차>반응 대박인데요?"

"정대리!"

"헉, 죄송합니다!"

눈치없이 고부장에게 소식을 전하던 정대리가 강과장의 질타에 입을 다물었다.

정대리는 조용해졌지만, 판권 부서의 분위기는 여전히 싸늘했다.

'부장이 된 후로 이렇게 많은 요청을 본 적이 없다.'

필름 부서 역사상 가장 많은 판매요청. 거기에 부산열차는 개봉도 하기 전이었다.

무엇보다 그 결과를 만들어온 게 판권 판매에 대해서는 초보자인 한록이다.

"젠장..."

10년의 경력이 한록 앞에 무너지기 직전인 상황.

'아니, 이게 판매로 이어질지는 모른다.'

애써 상황을 부정하는 고부장. 그러나 여전히 그의 마음 속에 숨은 불안이 있었다.

'하지만....'

'반응이 좋을 것 같다.'

그건 자신이 보기에도 한록의 마케팅이 너무나 좋아 보인다는 것이었다.

*

"과장님. 메일 보낸 모든 곳에서 <부산 열차> 관람 요청 들어왔어요."

"잘 된 거죠?"

한록의 말에 최대리가 어이가 없다는 듯 웃었다.

한록이 엄청난 성과를 냈지만, 판권 판매에선 여전히 초보자란 사실을 다시금 깨달은 것이다.

"당연하죠! 미개봉 작품으로 전부 관람 요청 들어온 적은 한 번도 없었어요."

"다행이네요. 대리님, 유선씨, 다들 고생했어요."

"아직 끝은 아니에요. 필름마켓에서 진짜 판매가 이뤄져야 끝나는 거니까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최대리 역시 고부장과 비슷한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이건 대박이 날 수 있다'는 마음이었다.

"과장님. 남의 분야를 이렇게 잘하시면 안 되죠."

"잘하시라고 부른 거 아닙니까?"

"그건 맞아요. 도와달라고 하길 잘했네요."

최대리가 한록을 보며 솔직하게 말했다.

최경준에게 한록을 붙여달라 말했을 때. 한록에 대한 기대는 있었으나 이런 결과가 나올 것이라고 예상 하지는 못했다. 한록은 판권 판매에 대해 경험이 없으니까.

하지만 한록은 처음 맡아보는 분야에서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결과를 내고 있었다.

'그래, 판권 판매를 이런 식으로 진행할 수도 있겠구나.'

자기 분야에서 활약하는 라이벌을 보며 생각하는 최대리.

한록에 대한 위기감, 투쟁심. 그러나 그보다는 새로운 방법에 대한 깨달음이 가장 크게 다가왔다.

보고 있으면 즐겁고, 같이 열심히 일하고 싶게 만드는 사람.

그게 바로 이한록이란 사람의 진짜 모습이란 생각이 들기 시작한다.

"과장님. 과장님의 진짜 강점은 마케팅이 아니라 다른 곳에 있는 것 같아요."

"다른 곳이요? 어디에요?"

"그건 비밀이에요. 그것까지 알려드리면 더 이상 제 라이벌이 아닐 것 같거든요."

하지만 한록에게 알려줄 마음은 없었다.

"그럼 왜 말하신 겁니까."

한록의 불만스러운 표정에 짓궂게 웃는 최대리. 그때 정부장이 한록을 불렀다.

"이한록. 본부장님이 부르신다."

*

"이한록 과장."

본부장실로 향하던 한록을 부르는 누군가.

"...본부장님."

문오석 본부장이었다.

"어때, 생각은 좀 해봤는가."

'최경준에게서 돌아서서 내 편이 돼라'고 제안한 문오석. 한록이 답했다.

"아직 시간이 필요합니다."

"자네가 망설이는 건 알고 있어. 하지만 나도 오래 기다릴 순 없네. 칸에 다녀오면 답을 들려주길 바라네."

문오석이 웃는 얼굴로 한록을 지나쳤다. 그러나 그의 등뒤에서 나온 실은 여전히 위협적으로 한록의 목을 조르고 있었다.

한록은 목과 손목에 남은 문오석의 실자국을 보며 생각했다.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지?'

오과장처럼 가시가 돋힌 문오석의 실. 그 실은 분명히 한록에 대한 적의를 보여주고 있었다.

'나한테 이렇게까지 나올 이유가 없을 텐데.'

문오석의 라이벌은 최경준이었고, 문오석이 한록을 포섭하려는 이유 역시 최경준을 물리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문오석은 필요이상으로 한록에게 적의감을 보이는 상황.

'본부장님뿐만 아니라 나 역시 적으로 보는 거다.'

한록이 '본부장의 무대에 올라왔다'던 최경준의 말. 아무래도 그 말이 사실인 것 같았다.

'대비를 해야겠군.'

한록이 문오석의 실이 훑고 지나간 목을 만지며 생각했다.

본부장실에 도착한 한록. 노크를 하자 최경준이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문을 열어주었다.

"필름마켓 반응이 아주 좋더군."

가장 먼저 한록의 성과를 칭찬하는 최경준. 한록이 감사의 의미로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최경준의 용건은 다른 곳에 있는 것 같았다.

"자네에게 말해줘야 할 게 있어서 불렀네."

그러면서 문오석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는 최경준.

"자네가 거래처들에게 기차표를 보냈지. 사장님이 계신 본부장 회의에서 그 이야기가 나왔어. 문오석이 그에 대해 크게 반대하더군. 거래처 상대로 모험을 하는 건 좋지 않다고 말이야."

역시 한록의 예상대로였다. 문오석은 분명 최경준 뿐만이 아니라 한록 역시 노리고 있었다.

"물론 그 정도는 내 권한으로 통과시킬 수 있네. 다만, 사장님도 자네의 시도에 의아해하시긴 하셨어. 다행히 이번 일은 결과가 좋았지."

하정엽 앞에서 한록에 대해 좋지 않은 인식을 남기려는 문오석. 그러면서 동시에 한록을 포섭하려는 문오석.

한록은 손목에 남은 문오석의 실자국을 바라보았다. 문오석의 꿍꿍이가 뭔지 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사업본부 전체를 무력화시키려는 생각이군.'

CK ENM은 각 사업본부끼리 끊임없이 경쟁하는 형태로 성장해왔다.

그런 상황에서 문오석은 최경준을 잘라낼 뿐만 아니라, 영화사업본부 전체의 힘을 약화시키려는 속셈인 듯 했다.

'나를 음악사업본부로 빼가거나, 그렇지 못한다면 죽이거나.'

문오석의 계획. 최경준 역시 그 계획을 어렴풋이 알고 있는 모양인지 한록에게 말했다.

"앞으로 계속 자네의 일에 대해 방해가 들어올 거네. 최대한 내 선에서 막으려 하겠지만, 자네 역시 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 모험은 꼭 필요한 순간을 위해 아껴두고 당분간은 다소 안정적인 시도를 하는 게 좋겠군."

"그런 일에 신경쓰느라 마케팅에 영향을 받을 순 없습니다."

최경준의 말에 반박하는 한록. 최경준이 한록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더 말해보라는 뜻이었다.

"말씀하신 것처럼 문오석 본부장님은 제가 무슨 일을 하든 우리 사업본부를 방해하려 하실 겁니다. 그렇다면 필요한 건 안정적인 시도가 아니라, 문오석 본부장님의 반대가 우스워질 정도의 성공이라 생각합니다."

"하."

한록의 말에 최경준이 기가 차다는 듯 탄식을 뱉었다.

"문오석의 반대가 우스워질 정도의 성공이라..."

상당히 공격적으로 회사를 이끌어간다는 평가를 받는 최경준. 그러나 한록은 언제나 자신 역시 몸을 사리고 있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사람이었다.

"나도 자네 같던 시기가 있었지. 자네를 보면 옛 생각이 나."

10을 내주는 한이 있더라도 11을 얻기 위해 달려가던 젊은 날의 삶. 한록을 보며 자신의 젊은 시절을 추억하던 최경준이 입을 열었다.

이제 자신은 그런 무모함을 가질 수 없는 위치가 되었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그런 부하를 돕는 역할이다.

"그래, 자네가 원하는대로 해보게. 뒤는 내가 맡지."

최경준의 허락에 한록이 미소를 지었다.

한록의 미소를 본 최경준은 한록에게 또 무언가 계획이 있음을 알아차렸다.

"이런. 자네의 함정이었군."

"그저 제안드릴 게 있을 뿐입니다."

"보통 그걸 함정이라고 하지. 그래, 할 말이 뭔가."

"필름마켓의 부스를 네 개로 늘려주셨으면 합니다."

"이미 부스 신청은 끝났어."

"중간에 참가를 철회한 회사들이 있습니다. 그곳들로부터 부스를 넘겨받을 수 있지 않습니까."

"그래, 이론적으로는 맞지. 하지만 그건 회사끼리 얘기를 해야 하는 부분인데."

"저는 마케팅을 하고, 본부장님은 뒤를 봐주신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최경준의 말을 그대로 돌려주는 한록. 한록의 말에 최경준이 못 당하겠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자네 앞에선 정말 말조심을 해야겠군. 부스 네 개를 대체 어디에 쓰려고 그러는 건가?"

"<부산 열차>를 상영할 예정입니다."

"상영부스는 하나면 충분하잖아."

"아뇨, 부족합니다."

최경준의 연이은 질문들. 그러나 한록은 당당했다. 최경준이 한록에게 물었다.

"이건 사장님한테 말씀드려야 하는 일이야. 무리한 부탁이란 건 알고 있겠지?"

"네, 알고 있습니다."

'공연사업본부를 설득하라'고 자신에게 지시했던 한록. 이제 다른 본부를 넘어, 다른 회사의 허락을 받아오라고 한다.

"하지만 이미 15개국에서 <부산 열차>의 상영요청 메일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필름마켓 당일이 되면 더 많은 상영요청이 들어올 겁니다."

"그걸 어떻게 확신하나. 다른 회사에서까지 부스를 빌려와놓고 성과가 좋지 않으면 우리 체면이 말이 아닐텐데."

하지만 그럼에도 한록이 이렇게 당당한 이유는...

"본부장님. 제가 하는 일입니다."

"..."

"실패할 리가 없습니다."

스스로에 대한 확신 때문이었다.

'그 녀석이 하는 일에 실패는 없어.'

자신이 고부장에게 했던 말을 떠올리는 최경준.

"알았네. 사장님께 말씀드리지."

최경준이 결국 한록의 손을 들어주었다.

*

시간은 흘러, 칸 영화제 하루 전.

한록과 유선, 최대리는 칸으로 향하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도착까지 얼마나 남았습니까?]

[7시간 정도 예상됩니다.]

[알겠습니다.]

승무원에게 몰라보게 유창해진 영어로 답하는 한록. 유선이 깜짝 놀라 한록에게 물었다.

"과장님, 영어 엄청 잘하시네요?"

"그러게요. 저번 인터뷰에는 통역이 필요하셨잖아요. 이젠 필요 없으시겠어요."

"비결이 뭐예요?"

직장인의 영원한 숙제, 영어.

고작 한달만에 영어를 마스터해 온 한록.

과연 이 천재는 어떤 방법으로 영어를 습득했을까. 유선의 반짝이는 눈빛에 한록이 진지하게 답했다.

"학원 다녔습니다."

"...네?"

"강남 해커스 직장인반 다녔습니다. 되도록 숙제가 많은 반이 좋습니다. 주말에도 다녔습니다."

칸을 위해 갈고 닦은 한록의 비장의 무기는  강남 해커스였다.

"여행 어휘와 비즈니스 대화 위주로 배웠습니다. 토익 900 정도 나오면 한 달 열심히 배운다면 대화는 할 수 있어요."

"얼마나 열심히..?"

"미국인으로 다시 태어나고 싶을 만큼요."

"그거 말고 쉬운 방법은 없을까요...?"

"유선씨. 인생에 쉬운 길은 없어요."

"네..."

한록과 유선의 대화에 최대리가 웃음을 참지 못하고 외쳤다.

"아, 과장님 진짜 웃긴 사람이네요!"

그렇게 비행기를 갈아타고, 기차를 타고 칸에 도착한 마케팅 부서.

레드카펫과 세계적인 배우들. 그리고 감독들과 전세계에서 몰려온 기자들.

"와, 기네스 펠트로예요...!"

"유선씨. 저희는 다른 곳으로 가야해요."

"아, 네, 네!"

유선이 생전 처음 보는 헐리웃 배우의 등장에 놀라서 말했지만, 마케팅 부서의 목적지는 영화제와는 조금 떨어진 곳이었다.

*

필름마켓이 열리는 호텔에 도착한 마케팅 부서. 호텔에는 이미 판권 부서가 도착해 부스를 정리하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고부장님."

"그래."

최대리의 인사에 짧게 대답하는 고부장.

마케팅 부서와 판권 부서 사이에 긴장이 흐르기 시작한다.

[미스터 고. 여기 네 개 부스가 전부 CK ENM의 부스가 맞나요?]

[네, 맞습니다.]

[그렇군요. 부스를 네 개나 쓰는 건 CK 뿐이라 확인차 물어봤습니다.]

고부장에게 묻는 필름마켓 관계자.

관계자의 말처럼, 필름마켓에서 부스를 4개나 쓰는 건 CK가 유일했다.

보통 2,3개의 부스를 차리는데 비해 이번에 4개의 부스를 마련한 CK ENM.

[저긴 어디길래 부스가 네 개나 돼?]

CK 직원들이 부스에서 잠시 떨어져 있는 사이, 옆 부스의 바이어들이 대화를 시작했다.

정체를 숨기고 조용히 그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는 CK직원들.

[한국. 어디더라...CK일 걸. 다른 회사의 부스를 빌려왔대.]

[아, 알아. 최가 있는 곳이지?]

[최가 누군데?]

[그, 우드 엔터테인먼트에서 근무한 동양인.]

[아.]

'저 이런 사람이에요.'

사람들의 입에서 나오는 자신의 이름에 최대리가 어깨를 으쓱했다.

[뭐하러 부스를 네 개나 차렸대?]

[상영에 중점을 둘 거래요. 상영부스가 세 개고, 판매부스가 하나. 저도 메일 받았어요.]

[음...유난이네.]

날카로운 평가를 하는 한 바이어.

그 말에 고부장이 한록을 노려보았다.

[나도 별로야. 필름마켓까지 와서 영화 볼 시간이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된다고.]

[그렇지? 부스를 네 개나 쓸 필요는 없었어. 중요한 건 미팅이잖아.]

한록의 마케팅에 대해 비판적인 모습을 취하는 바이어들. 그 말에 고부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중요한 건 판권이 팔리느냐, 아니냐다.'

한록이 <부산 열차>로 바이어들 사이에서 이슈를 모은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게 판권 판매까지 연결되리란 건 미지수였다.

'여기서 <부산 열차>나 <지구 특공대>가 아니라 우리가 맡은 영화가 더 잘 팔린다면...그때는 이한록의 콧대를 꺾을 수 있을 거야.'

고부장이 걸고 있는 마지막 기대.

[CK에서 밀고 있는 영화가 있더라구요. 저는 보려고 예약 잡아놨어요.]

[무슨 영환데?]

[좀비 영화요.]

[한국이 좀비영화? 누구 한국 좀비영화 본 적 있는 사람?]

그리고 <부산 열차>에 대한 여러 반응들.

[망할게 뻔하군. 괜히 시간 낭비 하지마.]

'한국산 좀비 영화'에 대한 무시.

[그래. 왜 그런 영화에 부스를 네 개나 쓴거지?]

한록의 마케팅 방안에 대한 비판.

[글쎄요. 전 재밌을 것 같아요. 피터도 기차표를 받았으면 생각이 달라졌을 거예요.]

기대.

[어찌됐든, 부스를 네 개나 쓴 건 신기하네. 새로운 시도를 하고 있어.]

[그렇죠.]

그 다양한 반응들 속에서 그들이 공통적으로 가진 생각은 하나였다.

[이게 과연 잘 되려나?]

[음...]

어느새 바이어들 사이에서 최고의 이슈가 된 <부산 열차>. 그리고 한록의 마케팅 방안.

[그건 내일이 되면 알겠지.]

그 결과가 밝혀지기까지 남은 시간은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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