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 회사원이 선넘으면 생기는일-82화 (82/263)

< 82 : 필름마켓(1) >

월요일 아침.

한록은 필름마켓 회의를 위해 회의실로 향했다.

회의실에선 최대리가 언제나처럼 머리를 멋지게 만지고 노트북을 바라보고 있었다.

"과장님. 또 본부장님을 만나고 오셨던데요."

한록을 보자마자 묻는 최대리. 아마 <부산열차>에 대한 소식을 전해들은 것 같았다.

"그거 제가 눈독들이고 있는 영화인 거 아시죠?"

언제나처럼 수상하게 말하는 최대리.

'최윤일 대리한테는 자네가 잘 말해보게. 조율이 안 되면 나한테 얘기하고.'

자신이 계속 지켜보고 있는 프로젝트에 누군가가 끼어든다. 충분히 기분 나쁠만한 얘기였다. 한록 역시 최대리가 달가워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아뇨,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하지만 한록이 <부산 열차>에 들어간 이유.

"엄청 잘 팔아주셔야 합니다. 아셨죠?"

최대리가 <부산 열차>에 정말 진심이란 걸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네, 최대리님. 잘해봅시다."

"제가 할 말이죠."

한록의 말에 미소를 짓는 최대리.

그때 유선이 들어왔고, 회의가 시작되었다.

*

"판권 부서한테 연락 받았습니다. <스캔들>, <지구 특공대>, <부산 열차>는 우리한테 맡긴다고 하네요."

"아예 우리한테 맡긴다고요?"

"네. 맞습니다. 우리 쪽에서 기획안 주면 검토만 한다고 합니다."

"아하. 이과장님이랑 싸우기 싫은가 보다. 기선 제압 확실하게 했네요."

최대리가 즐겁다는 듯 말했다.

"잘 됐네요. 그럼 <스캔들>이랑 <지구 특공대>도 원래대로 가면 되겠어요."

한록이 제안한 방안은 최대리가 정리해둔 데이터를 바탕으로 하는 것이었다. 각 나라별 선호 요소를 부각해서 포스터와 영화 소개글을 다르게 보내는 것.

나라별로 마케팅을 하되, 현실적으로 세 명이서 감당할 수 있을만한 수준의 마케팅을 찾은 것이었다.

"<스캔들>은 최대리님이 시장분석을 해두셨으니까 포스터 고르고, 소개글만 쓰면 되겠네요. 포스터는 제가 고를테니 소개글은 유선씨가 써주세요. 최대리님은 <지구 특공대>랑 <부산 열차> 시장 분석 해주시고요."

지시를 하던 한록에게 든 생각.

'일정에 맞출 수 있으려나?'

칸 영화제가 얼마 안 남은 지금. 아무리 기한을 넉넉히 잡아도 일주일 안에는 메일을 보내야 하는 상황이었다.

최대리가 시장 분석을 해오고, 유선이 그걸 받아서 글을 써야 하다 보니 시간이 충분하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아무래도 일정을 조정하거나 몇몇 국가를 포기해야 할 것 같았다. 한록이 최대리에게 물었다.

"최대리님. <부산 열차>랑 <지구특공대> 시장 분석하려면 얼마나 걸립니까?"

"하루씩이면 됩니다."

생각보다 훨씬 빠른 일정을 내놓은 최대리. 남은 것은 유선이었다.

"유선씨. 나라별로 전부 쓰지 말고 다섯 군데씩만 써요. 어디로 쓸지는 오늘 점심까지 정리해서 보내줄게요."

'최대리님은 시장 분석을 많이 해봤다 해도, 유선씨는 일주일만에 글을 30개는 써야 하는 거잖아.'

한록의 말을 들은 유선이 오늘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저, 과장님..!"

"다섯 곳도 어려울 것 같아요? 그럼 제가 초안을 잡을 테니까 같이 써요."

"아뇨, 저 사실 미리 써왔어요!"

"네?"

한록이 깜짝 놀란 얼굴로 유선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유선이 뿌듯한 표정으로 한록에게 말했다.

"그, 과장님이랑 최대리님은 일하시는데 저만 아무것도 안 하고 있는 것 같아서...과장님이 나라별로 소개글 다르게 쓰실 거라고 말씀하신 날부터 미리 써놨어요."

자신의 노트북에서 파일을 켜서 한록에게 넘겨주는 유선.

[한국. 부산으로 가는 열차에서 좀비사태 발생.]

"현실감이 느껴지면 좋을 것 같아서 신문기사 형식으로 적어봤어요. 일반 소개글 형식도 있어요. 그리고 인터뷰 형식도 있는데, 그건 아직 쓰는 중이에요."

유선의 말에 한록과 최대리가 놀란 눈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한록이 시키기도 전에 알아서 글을 써온 유선. 내용 역시 당연히 좋았다.

"수고했어요, 유선씨. 고마워요."

"아니에요, 제가 할 일인걸요."

한록이 여전히 놀란 얼굴로 말하자, 유선이 뿌듯한 듯 미소를 보였다.

"그럼 이대로 진행합니다. 최대리님은 이틀 후까지 시장분석 끝내주시고, 유선씨는 목요일까지 초안 보내주세요."

"알겠습니다."

"네!"

한록의 말에 유선과 최대리가 씩씩하게 대답했다.

회의를 마치고 다시 사무실로 돌아가는 한록과 유선, 그리고 최대리.

"유선씨, 글 진짜 잘 쓰네요. 다음번엔 유선씨도 같이 붙여달라고 해야겠다."

"감사합니다..!"

한록은 유선과 최대리에게서 약간 떨어져서 둘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일이 바빠서 유선을 잘 챙기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유선은 한록이 보지 못하는 부분에서 이미 제 몫을 하고 있었다.

거기에 한록의 의견을 최대한 반영하며 자신의 노하우를 모두 공개한 최대리.

둘은 이 프로젝트를 위해 누구보다 열심히 일하고 있었다.

'이건 분명 잘 될 거다.'

최대리의 분석과 유선의 글. 거기에 그간 최대리가 회사들을 상대로 쌓아온 신뢰까지.

'내 생각이상으로 완벽하다.'

<부산 열차>가 그 어느 때보다 좋은 성적을 낼 것이란 확신이 들었으며-

'이걸 좀 더 활용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여기서 끝내기엔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

그로부터 일주일 후.

"소개글 전부 메일로 보냈습니다!"

유선이 피로가 가득한 얼굴로 한록에게 말했고, 한록은 자신의 메일을 확인했다.

모든 영화의 시장분석과 소개글, 포스터 선정까지 끝난 상황. 이제 남은 건 바이어들에게 메일을 보내는 것 뿐이었다.

[과장님. 회사들한테서 메일 요청이 왔어요. 왜 이번엔 분석 자료 안 보내주냐고 하네요.]

그때 도착한 최대리의 메시지. 최대리가 보낸 메시지에는 필름마켓에 참여하는 회사들의 메일이 담겨 있었다.

[필름마켓 참여작 시나리오 요청]

[윤일최의 개인 분석 역시 함께 요청합니다.]

필름마켓에 나오는 영화의 시나리오를 요구하는 동시에, 최대리의 개인분석을 함께 보내달라는 내용이었다.

'이렇게 대놓고 정보를 요청한다라.'

회사끼리의 메일에서 공식적으로 최대리에 대한 언급이 나온다. 이건 최대리의 의견이 바이어들의 결정에 상당히 영향을 끼친다는 뜻이었다.

그 말이 의미하는 것.

'최대리님에 대한 신뢰가 대단하군.'

그건 바로 최대리라는 사람 자체가 믿을 수 있는 브랜드라는 뜻이었다.

'그럼 됐다.'

망설이던 한록에게 생긴 확신. 한록이 최대리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대리님. 이번만 제 방식대로 해봅시다.]

이번이 아니면 쓸 수 없는 방법이 있었다.

*

한록이 최대리에게 제안한 방식.

"영화 소개를 빼자구요?"

"네."

그건 <부산 열차>의 정보를 최소한으로 전달하는 것이었다.

"대리님의 분석 점수는 넣되, 다른 자료는 보내지 맙시다. 그냥 이미지 하나랑 점수, 그리고 시나리오만 보내는 걸로요."

보통 필름마켓에 참여하는 영화는 영상과 시나리오를 모두 공개한다. 그런데 영화 내용과 분석 자료를 모두 보내지 말자고 제안하는 한록.

"왜요?"

"부스에 들어와서 영화를 보고, 안내방송을 듣는게 마케팅의 핵심이니까요. 영화에 대한 정보를 최소한으로 전달해서 직접 부스에 들어오게 해야합니다."

"필름마켓은 나흘밖에 안 열려요. 시간이 촉박해서 <부산 열차>는 그냥 넘기자고 할 수도..."

한록에게 반박하던 최대리가 입을 다문다. 무언가 깨달았다는 표정의 최대리.

"아하. 이제 알겠다. 그럴 일은 없겠네요."

최대리가 한록을 보며 씩 미소를 지었다. 한록 또한 웃으며 말했다.

"네, 그렇죠. 최대리님의 점수가 있으니까요."

회사들이 앞다투어 공유해달라고 요청하는 최대리의 판매점수. 거기서 높은 점수를 기록한 <부산 열차>.

회사들이 최대리를 신뢰하는 한, 절대로 <부산 열차>를 그냥 넘기지는 못할 것이다.

본인이 반대하는 최대리의 점수 시스템. 그걸 역이용해서 사람들이 영화를 관람하러 오게 만드는 한록. 그런 한록을 보고 최대리가 졌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과장님. 진짜 하고 싶은 건 다 하시네요."

"칭찬인줄 알겠습니다."

그리고 한록 역시 미소를 지었다.

*

잠시 후 한록의 메신저를 받은 판권부서의 정대리.

[필름마켓 마케팅 방안 보내드립니다.]

'아! 이과장님이다.'

정대리는 기대를 가지고 메일을 클릭했다.

[지구특공대, 스캔들의 포스터와 소개글입니다.]

'이걸 진짜 나라별로 만들었네. 이게 가능한 건가?'

'이건 딱 영국 스타일이고, 이건 인도 스타일...그냥 이대로 포스터 가져가서 개봉해도 되겠다.'

주요 10개국에 맞게 포스터와 소개글을 모두 새로 만들어 온 마케팅 부서. 한록과 최대리, 그리고 유선이 얼마나 노력했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거기에 나라별 셀링포인트를 정확하게 잡아온 한록.

'이래서 다들 이한록 이한록 하는 거구나.'

현실적으로 불가능할 것 같은 일을 완성해오고, 그 결과물마저 감탄할 정도로 좋다.

정대리는 한록이 회사에서 일 잘하기로 소문이 난 이유를 아주 깊이 깨달았다.

'응?'

그러나 정대리의 생각은 <부산 열차>의 마케팅 방안에서 잠시 멈춰버렸다.

'이거 내가 제대로 본 거 맞아?'

정대리의 의문. 그리고...

"부장님!"

강과장의 절규소리.

한록의 메일을 보던 강과장이 바로 고부장에게 달려갔다.

"부장님. 이과장이 보낸 메일 보셨습니까?"

"...봤어."

이마를 짚고 말하는 고부장. 고부장 역시 같은 부분에서 마우스를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부산 열차> 자료를 아예 안 보낸답니다. 이게 말이 됩니까? 다시 회의 해야하는 거 아닙니까?"

"그 녀석 회의하는 거 못 봤어? 절대 못 이겨."

"..."

고부장의 말에 강과장은 아무런 답이 없었다. 강과장은 한록과의 첫 회의를 떠올리고 있었다.

'저는 삼일의 삶이 연말 시상식에서 수상하게 만들 겁니다. 그래도 상관없으시면 판매하시면 됩니다.'

회의 분위기를 완전히 휘어잡았던 한록. 한록의 말에 아무도 반박조차 하지 못했다.

고집 쎄기로 유명한 고부장마저 그 자리에서 한록의 편을 들 정도.

그때 판권 부서 모두는 같은 생각을 했다.

'이 녀석은 못 이긴다.'

고부장 역시 그때의 회의를 떠올리고 있는 것이었다.

고부장은 한록의 메일을, 정확히는 한록의 메일 끝에 달린 말을 노려보았다.

[의견이 있으시면 제게 연락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한록의 회의를 지켜본 사람 중 누가 감히 한록의 말에 반대할 수 있을까.

"...이건 본부장님한테 말씀드린다."

결국 고부장은 최경준의 힘을 빌리기로 결정했다.

"나보고 이한록을 말려달라고?"

그러나 최경준은 고부장의 보고를 받고 그저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이한록. 역시 꽤 성장했군.'

언제나 인간관계 때문에 문제를 겪는 한록.

최경준이 한록을 필름마켓에 투입한 건 한록이 다른 회사나 부서를 얼마나 컨트롤 할 수 있을지 궁금해서기도 했다.

그런데 이제는 판권 부서 쪽에서 한록과의 중재를 요청하는 상황.

최대리처럼 능글맞게 상황을 조율하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한록이 이 프로젝트의 주권을 잡았다는 뜻이었다.

"본부장님. 이한록 과장의 마케팅 방안이 훌륭하다는 건 압니다. 다만 이미 좋은 방법이 있는 상황에서 너무 모험적인 시도를 한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고부장의 말에 최경준이 여유로운 미소를 지었다.

"그래. 자네 말도 맞아. 이한록은 너무 완벽을 추구하지."

"네. 부스에서 안내방송을 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좋은 결과가 나올 겁니다. 그러니-"

"그런데 어쩌나."

고부장의 말을 자른 최경준이 말을 이었다.

"난 그 녀석 말에 반대할 생각이 없어."

최경준의 말에 고부장의 표정이 굳어갔다. 그러나 최경준은 고부장의 표정은 신경도 쓰지 않고 말을 이었다.

"이한록이 재밌는 일을 만들어왔지. 결과도 좋을 게 뻔해. 그런데 자네들 기를 살려주겠다고 그걸 거절할 순 없는 거 아닌가."

"본부장님. 제가 수출만 10년을 담당했습니다. 판권 판매에는 이런 방식이 안 통합니다."

"자네는 아직 이한록을 모르는군. 그 녀석이 하는 일에 실패는 없어."

최경준이 고부장의 말을 잘랐다. 그리고 고부장에게 말했다.

"돌아가게. 그리고 자네 눈으로 어떤 결과가 나올지 확인해보게."

*

그리고 그날 저녁 바이어들에게 도착한 메일.

[윤일한테서 드디어 메일이 왔네요.]

영국 배급사 UK 픽쳐스. 그곳의 수입 담당 엘리스가 최대리의 메일을 보고 말했다.

[윤일이 보낸 게 <스캔들>, 그리고 <지구 특공대>랑 <부산 열차>네요. <스캔들>과 <지구 특공대>는 한국에서 평이 좋았죠.]

[점수는?]

엘리스의 상사 마크가 물었다. 최대리의 점수는 배급사들 사이에서 언제나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로 평가받고는 했다.

[<스캔들>은 60점. <지구 특공대>는 평균적으론 40점이지만 영국은 70점이라고 하네요. 오. 포스터를 보니 확실히 우리 스타일이에요.]

[그렇다면 가볼 만하지. 이번 일정에 CK를 넣어.]

[알겠습니다.]

[그리고 남은 건?]

[남은 건 <부산 열차>요. 점수는 90점이고...]

스크롤을 내리던 엘리스의 손이 멈춘다.

최대리의 보고서 중 <부산 열차>의 파트. 거기엔 <지구 특공대>나 <스캔들>처럼 포스터도, 소개글도 없었다. 대신 이미지 한 장이 들어있을 뿐이었다.

엘리스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열차 티켓이 들어있어요.]

*

<부산->칸>

<2022.09.17.>

전 세계 바이어들에게 도착한 열차 티켓 하나.

거기엔 이번 필름마켓이 열리는 칸의 주소와 날짜가 적혀있었다.

[이게 뭐야?]

프랑스 배급사 살롱 파리의 반응.

[오, 역시 윤일. 재밌는 걸 하잖아?]

미국 슈퍼소닉 엔터테인먼트의 반응.

[좀비 영화라고? 살 생각 없었는데.]

영국 UK 픽쳐스의 반응.

한록의 메일에 대한 반응은 다양했다. 누군가는 흥미를 보였고, 누군가는 익숙지 않은 방식에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나 그들 모두에게서 공통적으로 나오는 반응은 바로-

[최가 보낸 거잖아. 무시할 순 없어.]

[무슨 영화인지 확인은 해 보자.]

<부산 열차>에 대한 호기심이었다.

*

다음날.

'이한록. 이번엔 네가 실수 했단 걸 곧 알게 될 거다.'

최경준과의 대화 후 한록에게 이를 갈며 출근을 한 고부장.

고부장이 메일을 켜자 밤사이 온 메일이 화면 한 페이지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이게 뭐야?"

갑작스럽게 쏟아진 메일에 당황한 고부장. 고부장은 메일을 하나하나 읽어가기 시작했다.

[UK 픽쳐스-필름마켓 방문요청]

[살롱 파리-<부산 열차> 관람 요청]

[슈퍼소닉 엔터테인먼트-<부산 열차> 예약 구매 요청]

.

.

.

메일함을 전부 채운 <부산 열차>에 대한 요청 메일들. 그리고 정대리의 외침.

"부장님! <부산 열차> 반응 대박인데요?"

그 말을 듣고 고부장은 깨달았다.

'자네는 아직 이한록을 모르는군. 그 녀석이 하는 일에 실패는 없어.'

최경준의 말이 맞았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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