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1 : 이한록을 불러와(2) >
옥상에서 담배를 피우던 한록에게 갑자기 내려온 호출. 그러나 그 상대는 최경준이나 하정엽이 아니라 음악사업본부의 문오석이었다.
'문오석이 날 부른다고? 왜?'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의아함. 그리고-
'뭔가 있다.'
이 호출에 꿍꿍이가 있으리라는 예감이었다.
이제 회사생활 10년차에 달하는 한록.
인수전이 막 시작된 상황이다. 그런데 영화사업본부의 라이벌이나 마찬가지인 음악사업본부 본부장이 자신을 부른다. 분명 보통 일은 아니었다.
'그럼 확인을 해봐야지.'
대비를 위해선 상대의 패를 확인해야 하는 법. 한록은 음악사업본부로 향했다.
*
본부장실에 도착한 한록.
문오석이 소파 앞에 선 한록을 바라보았다.
"오랜만이야. 그렇지?"
이전에 하정엽의 앞에서 GV프레젠테이션을 할 때 만난 있는 문오석. 문오석은 지금 그 얘기를 하는 것이었다.
"자네를 지켜본다고 했지. 역시나 뛰어난 활약을 보이고 있더군."
문오석은 한록에게 '널 지켜보겠다'고 말했고, 지금 그 말은 사실이 되었다.
"감사합니다."
"나한테 감사할 건 없지. 본인과 최본부장이 한 일이잖아."
쉽게 본론을 꺼내지 않는 문오석. 먼저 질문한 것은 한록이었다.
"오늘 부른 이유가 어떻게 되십니까."
"절대 돌아가는 법이 없다고 들었는데, 맞는 말이군."
문오석이 웃으며 한록을 바라보았다.
"인수전에 대한 얘기를 하려고 불렀어. 자네가 아주 대단한 활약을 하고 있던데."
한록은 답변이 없었고, 문오석이 계속 말을 이었다.
"영화사업본부가 방송국을 가져간다면 최본부장은 자네에게 큰 상을 내리겠지."
회사의 모두가 아는 사실. 그리고 한록 역시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아마 팀장이 되겠군. 자네 정도면 충분히 리더가 될 만하니까."
그리고 한록에게 말하는 문오석.
"하지만 난 더 높은 자리를 줄 수 있네."
'이게 본론이구나.'
한록은 문오석의 등에서 뻗어 나오는 실을 보며 생각했다.
부드럽게 한록의 손목을 휘감는 실. 그 실이 의미하는 것.
"내 편이 되게."
그건 문오석이 한록에게 눈독을 들이고 있단 뜻이었다.
"이번 락 페스티벌을 보고 확신했지. 자네는 본인이 영화를 선택했을 뿐, 어딜 가든 대단한 성과를 보일 거야. 그리고 마침 우리 본부에는 차장 자리가 하나 비어있어."
"저는 영화 말고 다른 일을 할 생각이 없습니다."
"평생 이곳에 있으란 얘기가 아니야. 우리 본부에서 차장으로 4년 정도만 지내면 부장을 달 자격은 충분하지. 부장이 된 후 다시 영화사업본부로 돌아가면 되는 거야."
미소를 짓는 문오석.
"그때는 최본부장님도 없을 테니 뒷일은 걱정하지 않아도 되네."
문오석은 한록에게 줄을 갈아타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
라이벌 회사에서의 이직 제안. 사회 생활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일이다. 그게 본부 간 이동으로 바뀐 상황이었다.
"자네 덕분에 영화사업본부가 인수전에서 좋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건 사실이지. 하지만 가능성이 더 높은 건 우리 아닌가."
인수전에서 승리할 가능성이 가장 높은 음악사업본부.
한록이 문오석에게로 돌아선다면 영화사업본부는 절대로 음악사업본부를 이길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음악사업본부가 방송국을 가져간다면, 문오석은 단순히 본부장이 아니라 CK ENM 전체를 지배하게 될 것이다.
그런 문오석이 한록에게 제안한 자리. 서른 넷에 부장 자리에 오르게 해주겠다.
게다가 다시 영화사업본부로 돌려보내준다는 얘기까지.
분명 많은 사람이 흔들릴 법한 제안이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러나 한록에게는 생각할 가치조차 없는 일이다.
자신의 승진을 위해 최경준을 대놓고 배신하라는 말.
그게 최경준이든 누구든 상관 없다. 정치질에 놀아나지 않는 회사를 만들겠다고 결심한 한록에게는 통하지 않는 말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난 자네한테 기회를 주는 거라네."
손목을 간지럽히다가 목으로 올라오는 실.
문오석의 실은 오과장 때와 마찬가지로 가시가 돋혀 있었다.
'어지간해선 이런 실이 나타나지 않는다.'
오과장한테서나 보였던 악의가 가득한 실.
문오석이 한록을 데려가려는 게 사실이든, 함정이든, 문오석은 신뢰할 수 없는 사람인 것 만은 분명했다.
'여기서 바로 거절할 필요는 없다.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파악해야해.'
"제안 감사합니다. 다만 지금 대답을 드리긴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래. 당연한 얘기지."
신중하게 대답한 한록의 말에 문오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문오석 역시 한록이 한 번에 넘어오리라 생각하진 않은 모양이었다.
대화를 마치고 본부장실을 나오는 한록. 한록에게 문오석이 말했다.
"결정이 되면 언제든 나를 찾아오게."
"네, 감사합니다."
한록은 문오석에게 인사를 했고 문밖으로 향했다.
그리고-
"장비서님. 본부장님과 면담을 요청합니다."
곧장 최경준에게로 향했다.
*
"문오석이 자네를 눈여겨 보고 있군."
문오석의 제안을 최경준에게 전달한 한록.
최경준이 한록을 보며 말했다.
'내가 공연사업본부를 데려온 것에 대한 맞불 작전이군.'
얼마 전 공연사업본부를 포섭한 최경준. 문오석은 그에 대응해 자신들은 영화사업본부의 핵심인 한록을 데려가겠다는 작전이었다.
"자네를 어지간히도 모르는군. 그렇지 않나?"
그러나 한록은 그런 제안에 넘어갈 사람이 아니었다.
"네. 다른 사업본부로 옮길 생각은 없습니다."
담담하게 얘기하는 한록. 최경준 역시 크게 당황한 기색은 아니었다.
"자네에겐 축하할만한 일이군. 이제 본부장들의 무대에 올라왔단 뜻이니까 말이야."
공연사업본부를 데려온 최경준. 그리고 한록을 데려가려는 문오석.
그건 문오석이 한록이란 사람을 공연사업본부 전체만큼이나 중요하게 여기고 있다는 걸 의미했다.
"이번 인수전을 잘 활용해보게. 자네에게 좋은 기회가 될 거야."
최경준의 말은 한록 역시 계속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이었다. 사장이 눈여겨보는 인수전. 거기서 좋은 활약을 보인다는 것은-
"인수전에서 승리한다면 자네도 이 회사의 실세 중 하나가 되겠지."
그건 한록이 그냥 일 잘하는 직원을 넘어서, 회사에서 권력을 가진다는 것을 의미했다.
"일단 칸을 잘 마무리 하는 게 최우선이겠군. 사장님이 큰 관심을 가지고 계시네."
"네, 알고 있습니다."
최경준의 말에 한록이 신중하게 답했다.
'더 높은 곳에 올라가겠다'는 다짐. 그 다짐이 빛을 볼 순간이 도착했다.
"본부장님. 부탁드릴 게 있습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선 필요한 게 있었다.
"뭔가?"
최경준이 물었고, 한록이 답했다.
"<부산 열차>의 국내 마케팅을 담당하고 싶습니다."
*
한록은 최경준의 말을 들으며 생각했다.
인수전이란 기회. 사람들의 이목. 하정엽의 관심.
-본부장들의 무대에 올라왔군.
최경준의 말처럼 모든 흐름이 자신에게 몰려오고 있었다.
'기회를 놓칠 순 없다. 나도 준비를 해야해.'
어렴풋이 생각해오던 계획을 정비하는 한록.
-칸을 잘 마무리 하는 게 최우선이겠군. 사장님이 큰 관심을 가지고 계시네.
최경준의 말처럼 가장 시급한 건 칸 영화제의 판권 판매였다. 그러나 한록은 그 후의 미래 역시 생각하고 있었다.
'일단 칸을 마무리한다. 하지만 그것보다 중요한건 연말 시상식이야.'
연말 시상식에서 <지구 특공대>와 <삼일의 삶>이 수상을 하리란 건 분명한 상황. 그런 상황에서 한록이 담당한 영화가 몇 편 더 수상을 한다면, 이는 CK ENM에 다시 없을 기록이 될 게 분명했다.
'앞으로 남은 영화 중 수상 가능성이 있는 영화들.'
한록은 칸에서 돌아오면 마케팅을 시작해야할 영화들. <복수자들>, <암살자> 그리고...
<부산 열차>.
'부산 열차는 한국만이 아니라 세계적으로 인기를 끌었어.'
한국 좀비영화 흥행의 시초이자, 역대 좀비영화의 역사에 남은 <부산 열차>.
'부산 열차는 반드시 가져와야 한다.'
*
그런 생각으로 최경준에게 제안을 한 한록.
"<부산 열차>가 개봉하면 마케팅을 담당하고 싶습니다."
"안 돼. 그건 최윤일 대리가 오래 전부터 맡고 싶어 했어."
한록의 말에 최경준이 아주 드물게 반대했다.
"자네 역시 <퀸>을 뺏겼을 때 크게 화를 냈지. 최윤일 대리도 <부산 열차>를 뺏어가겠다고 하면 가만있지 않을 거네. 그럼 필름마켓부터 문제가 생길 거야."
이번엔 한록과 최대리의 입장이 완전히 바뀌었다.
자신이 맡은 영화를 뺏긴다는 게 어떤 기분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한록. 그러나 한록은 씩 미소를 지으며 말할 뿐이었다.
"걱정 마십시오, 본부장님, 최대리의 영화를 뺏을 생각은 없습니다."
실제로 최대리에게서 <부산 열차>를 뺏을 생각이 없기 때문이었다.
한록은 어제 최대리가 보내온 파일을 떠올렸다.
[과장님. <부산 열차> 나라별 선호도 예상파일 입니다.]
[이건 예상 바이어 목록이요.]
[역대 좀비영화 성적 추이 자료입니다.]
[<부산 열차>와 유사한 셀링 포인트를 가진 작품들입니다.]
전 세계 시장을 대상으로 부산 열차를 분석해온 최대리. 그 파일을 보는 순간 한록은 직감했다.
'이 사람이랑 함께라면 더 큰 일을 해볼 수 있겠다.'
한록이 확신에 찬 표정으로 최경준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제게 최대리를 붙여주시기 바랍니다."
최대리가 했던 말과 똑같은 말을 했다.
한 영화를 원하는 두 명의 직원. 그 둘은 회사에서 손에 꼽게 유능한 사람들이고, 동시에 서로의 라이벌로 여겨지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한록과 최대리는 싸우기보다는 서로에게 협력하기로 결정했다. 왜냐하면.
"그래야지 <부산 열차>가 성공할 수 있습니다."
그게 가장 좋은 결과를 낼 수 있기 때문에.
경쟁과 실적. 그것들보단 최고의 결과를 선택한 두사람.
"...자네 둘은 정말 닮았어."
한록의 말에 최경준이 어쩔 수 없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
그날 저녁, 사장실.
하정엽은 책상 앞에 뒷짐을 지고 서 있었고, 책상에는 하태준이 앉아있었다.
오랜만에 CK ENM에 방문한 하태준.
그러나 하정엽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하태준이 가져온 소식 때문이었다.
"방송국은 CK기획으로 넘기도록 하지."
"제게 주신다고 약속하지 않으셨습니까."
"사장이 약속 타령이라. 아직도 덜 컸군."
하정엽에게 냉정하게 말하는 하태준. 상황은 한록이 회귀 하기 전과 똑같이 흘러가고 있었다.
"기획의 매출이 ENM의 7배가 넘어가고 있어. 이 상황에서 너한테 방송국을 넘기는 건 멍청한 짓이야."
문제가 되는 것은 결국 ENM의 매출이었다.
"ENM은 문화를 다루는 기업입니다. 단순히 매출만으로 ENM의 가치를 판단할 순 없습니다."
"난 회사의 회장이야. 매출이 아니면 뭘로 회사를 판단하란 말이지?"
하태준의 말에는 틀린 점이 없었다. 그래서 과거 하정엽은 CK기획에게 방송국을 빼앗겼다.
"ENM은 CK기획이 가지지 못한 걸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 하정엽은 ENM의 성과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홈쇼핑은 다소 부진했습니다. 인정합니다. 하지만 음악사업본부는 역대 최고 매출을 올렸고, 락 페스티벌은 해외에서도 계속 자료오청이 들어올 정도로 성공했습니다."
자신과 자신의 사람들이 만든 성과. 하정엽의 목소리는 자신감에 차 있었다.
"그리고 영화사업본부는 CK그룹 그 어디서도 보여준 적 없는 성장을 보이고 있습니다."
영화사업본부에 대한 얘기가 나오자 하태준의 태도가 조금 누그러졌다. 하태준 역시 맨바닥에서 한국 영화를 일으켜온 장본인 중 하나이기 때문이었다.
하태준의 태도가 변한 것을 눈치 챈 하정엽. 하정엽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말했다.
"곧 음악사업본부의 아시아 뮤직축제가 개최되며, 영화사업본부가 칸 필름마켓에 다녀옵니다. 아직도 ENM의 활약이 남아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지금 기획에게 방송국을 넘기시면 안 됩니다. 만약 그러신다면..."
그리고 이어진 말.
"ENM의 진가를 알아보지 못한 걸 후회하실 겁니다."
하태준의 말 한마디에 한록의 프로젝트를 최대리에게 넘겨버리려던 하정엽.
그러나 하정엽은 이제 완전히 사장이 되어 ENM을 대표하고 있었다.
그 모습에 하태준의 입가에 아주 잠시 미소가 떠올랐고, 순식간에 사라졌다.
사장실에 흐르는 정적. 그 속에서 하태준의 답을 기다리는 하정엽.
하태준은 한참동안 아무런 말도 없다가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래. 당분간 지켜보도록 하지."
그리고 문을 나서며 말했다.
*
하정엽은 하태준과의 대화가 끝나자 차례로 본부장들을 부르기 시작했다. 시간이 흘러 최경준의 차례가 되었고, 최경준은 곧장 사장실로 향했다.
"칸 필름마켓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습니까."
"이한록 과장이 마케팅을 진행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한록 과장이 <부산 열차>의 국내 마케팅을 최윤일 대리와 함께 진행하게 되었습니다."
"그 둘을 한 영화에 넣겠다는 겁니까?"
인상을 찌푸리며 말하는 하정엽. 영화사업본부에서 가장 좋은 실적을 내는 둘이 한 영화에 투입된다는 게 아까운 모양이었다.
"그렇게까지 수고를 들일 영화입니까?"
"모르겠습니다. 저도 반대했으나 이한록 과장이 강경하게 나와 선택을 존중했을 뿐입니다."
하정엽의 질문에 최경준이 솔직하게 답했다.
"이한록이라."
한록의 이름에 생각에 잠긴 하정엽.
'이한록이 원하는 영화라면 분명 뭔가 있을 것이다.'
하정엽의 생각인 동시에, 최경준이 한록의 의견을 받아들여준 이유이기도 했다. 하정엽이 최경준에게 다시 물었다.
"이한록이 <부산 열차>에 대해 뭐라고 말했습니까."
*
최경준에게 최대리를 달라고 요구한 한록. 그때 한록이 했던 말.
"천만 영화를 만들더라도 안 돼. 자네 둘이 한 프로젝트에 들어가는 건 너무 아까워."
최경준의 말에 한록은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
"본부장님. 제가 고작 천만 영화로 최대리를 붙여달라고 말하겠습니까."
"저는 <부산 열차>를 세계적인 영화로 만들 생각입니다."
*
"세계적인 영화로 만든다라."
한록의 말을 전해들은 하정엽이 실소를 흘렸다. 언제나 지나칠 정도로 자신만만하고 거침 없는 한록.
그러나 한록은 자신이 말한 것은 무조건 현실로 만들어 오는 사람이기도 했다.
"이한록..."
이번엔 한록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까.
"이번에도 약속을 지킬지 궁금하군요."
그 생각에 하정엽의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