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9 : 우리는 칸으로 갑니다.(4) >
"과장님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최대리의 질문에 한록이 답했다.
"지금이랑 똑같이 갈 겁니다."
언제나 같은 한록의 답.
"마케팅으로 영화가 엄청나게 재밌을 거란 인상을 줄 거고, 기대를 가지고 보게 만들 겁니다. 그래서 영화가 재밌다고 느껴지면 판권을 사가겠죠."
이 영화가 얼마나 재밌는 영화인지 소개할거고, 그래서 사람들이 보러 오게 만들겠다.
상대가 일반 관객이든, 영화업계 관계자든 상관없다. 좋은 영화는 제대로 된 마케팅만 있다면 선택을 받기 마련이다.
그게 한록의 지론이었다.
최대리가 주의 깊게 말했다.
"그건 어려워요. 판권 판매는 일반적으로 영화를 홍보하는 거랑은 많이 다릅니다. 지금 우리가 하는 마케팅은 한국 관객만 고려하면 돼요. 하지만 판권은 전 세계를 상대로 파는 거라서 전 세계 사람들의 취향을 고려해야 해요. 전 세계 누가 봐도 재밌어 보이는 마케팅이라니. 그게 불가능해서 제가 상업성 위주로 영화를 홍보하는 겁니다."
최대리의 말에 한록이 답했다.
"상관 없습니다. 상대가 누구든 영화를 보게 만드는 게 제 일입니다."
자신의 능력에 대한 프라이드가 느껴지는 말.
회귀 전, 이미 식물로 미국을 대상으로 한 마케팅을 진행해 본 적이 있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말이었다.
잠시 생각에 잠겨있던 최대리. 최대리가 한록에게 말했다.
"솔직하게 말할게요. 제가 이 일에 과장님을 끌어들인 이유가 있습니다."
드디어 자기 속 얘기를 하는 최대리. 한록이 최대리를 바라보았다.
"저는 사실 <스캔들>보다 <부산 열차>가 잘 됐으면 좋겠어요. 제가 제작부서에 있을 때 캐스팅부터 같이 했던 작품이거든요. 그래서 과장님한테 도와달라고 한 거예요."
<부산 열차>. 부산으로 가는 열차에서 발생한 좀비사태를 다룬 영화였고, 최대리가 제작부서에 있을 때 시나리오를 선택한 영화였다.
그러나 <부산 열차>는 한국에서 성공하기 어려운 좀비영화. 대부분의 사람들이 <부산 열차>가 흥행할 수 없을 거라 판단했고, 그래서 최대리는 해외 시장에 기대를 건 것이다.
'이제야 알겠군.'
한록은 최대리의 말을 듣고 드디어 최대리가 무슨 생각으로 자신을 불렀는지 알 것 같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좋아하는 영화가 망하지 않길 바라는 마음.
한록이 삼일의 삶이 잘 되길 바라서 현차장한테 조언을 구했던 것처럼, 최대리도 똑같은 마음으로 한록에게 도움을 요청한 것이다.
"그래서 이번 일은 저도 책임감을 가지고 임하고 있어요. 그런데 갑자기 일하는 방식을 바꾸려면 부담이 좀 있네요."
최대리의 말에 한록이 답했다.
"왜 방식을 바꿔야 합니까?"
그 말에 얼굴을 찌푸리고 한록을 보는 최대리. 최대리가 당연한 걸 묻는다는 얼굴로 답했다.
"과장님이 저랑 다른 방식으로 마케팅을 진행할거라고 하시니까요."
"그렇다고 이미 효과가 나오는 방식을 버릴 이유는 없죠. 최대리님 방식도 좋습니다. 저는 저대로, 최대리님은 최대리님대로 진행하면 됩니다."
한록의 말에 최대리가 놀란 듯 한록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물었다.
"영화에 점수매기는 거, 과장님 스타일은 아니지 않나요?"
"아시면서 저를 부르셨습니까."
"저도 급했거든요. 일단 불러놓고 설득해보자 생각했죠."
"그럴 필요 없습니다. 쓸 수 있는 방법은 다 써야죠. 투트랙으로 진행합니다."
"좋죠. 그래도 과장님 말씀대로 하려면 준비가 많이 필요할 거예요. 나라마다 마케팅 전략을 새로 짜야할테니까요. 마켓은 한달도 안 남았는데 가능하겠어요?"
그렇게 말하며 다이어리를 확인하는 최대리.
한달 남은 시간동안, <스캔들>과 <지구 특공대>, 그리고 <부산 열차>의 마케팅 방안을 만든다. 거기에 그 방안은 전 세계에 먹힐 방법이어야 한다.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한록은 자신있게 말했다.
"충분합니다."
한록이 이렇게 자신만만한 이유.
"대리님, 나라별 분석 데이터 있으십니까?"
"당연하죠."
"어떤 식으로 만드셨습니까?"
"각 나라별 선호하는 장르랑 관객 취향, 역대 CK에서 판매한 영화들에 대한 관객수 정도 있습니다."
"그 데이터를 보내주세요. 거기에 맞게 마케팅 방안을 만들어보겠습니다."
그건 이미 충분한 준비가 완료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록의 말에 최대리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거 비싼 건데요."
최대리의 데이터는 최대리가 개인적으로 몇 년동안 만들어 온 자료들이다.
그걸 넘기라고 하는 한록. 누군가가 듣기엔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할 만한 말이었다. 그러나 한록은 확신이 있었다.
상당히 협조적으로 나오는 최대리. 거기에 오늘 한 말.
'<부산 열차>가 잘 됐으면 좋겠어요. 제가 처음부터 참여한 영화거든요.'
최대리는 자기 일에서 만큼은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었고, 그런 사람이 선택할 답은 뻔했다.
"그래서 안 주실 겁니까?"
"과장님 진짜 무서운 분이시네요. 이렇게 나오신다면 어쩔 수 없죠."
최대리가 졌다는 듯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대신 <부산 열차>는 확실하게 팔아 주셔야 합니다."
*
'제 데이터는 과장님 기준에 안 맞을 거예요. 자료 더 보충해서 보내드리겠습니다. 이게 아마 3일 정도 걸릴텐데...'
회의가 끝나고 한록에게 말한 최대리. 최대리는 무언가 생각하는 게 있는 듯 했다.
'금요일에 판권 부서랑 첫 회의인데, 과장님이 이 분야를 잘 모르신다는 티를 내면 안 좋을 거예요.'
'네, 맞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그 뒤는 제 얘기를 들으려고 하지도 않겠죠.'
'흠...'
잠시 생각하던 최대리가 말했다.
'이거 내일까지 보내드릴게요.'
그 결과, 최대리는 지금 24시 카페에서 밤을 새는 중이었다.
"죽겠네."
최대리가 눈을 감고 중얼거렸다.
시계는 새벽 2시를 가리키고 있었지만 아직도 일은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다 때려치우고 집에 가고 싶다는 생각이 슬슬 들기 시작한다.
'첫 회의가 중요하다. 거기서 밀리면 판권 부서는 과장님 얘기를 계속 무시할거야. 그걸 막으려면...내가 이걸 넘겨줘야지.'
하지만 결국 다시 노트북을 붙잡는 최대리.
잠을 깨기 위해 커피를 마시던 최대리가 피식 미소를 지었다.
'이한록씨. 사람을 열심히 일하게 만드는 특기가 있단 말이지.'
한록은 잘 모르는 것 같았지만, 최근 마케팅 부서는 한록 때문에 많이 변화하고 있었다.
끝없이 영화를 성공시키고,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일하는 한록.
한록의 모습을 보고 정부장, 현차장, 유선, 그리고 마케팅 부서의 모두가 나름의 자극을 받고 있었고 그건 최대리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열심히 일하는 건 오랜만이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의욕이 생기는 게 오랜만이었다.
회장의 총애. 임원 진급 루트.
누구나 부러워할만한 최대리의 삶. 그러나 매일 10시까지 일을 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면 최대리도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 생각을 하곤 했다.
'내가 왜 이러고 있지?'
매일 출근하고, 정신 없이 일을 하다가 퇴근 한다. 그리고 집에 돌아오면 영화 한 편을 보고 잠들고, 다음날이 되면 다시 출근을 한다.
그렇게 매일 똑같은 하루를 보내다보면 느끼는 생각.
'매일 이렇게 사는 게.'
'회사에 인생을 바치는 게...'
'앞으로도 평생 이렇게 살아가는 게...'
'그게 내가 바라는 삶인가?'
회사를 다니다보면 누구나 마주하게 되는 질문.
그 생각이 드는 순간, 모든 일이 재미가 없어졌다.
그리고 그때 눈앞에 나타난 한록.
한록은 누구보다 자기 일을 사랑하고, 그 일에 강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뭐가 저 사람을 저렇게 열심히 일하게 할까.'
그 모습에 호기심이 생긴 최대리. 그래서 최대리는 한록과 함께 일할 기회를 바로 붙잡았다.
'이번엔 또 어떤 방법을 가져오려나.'
한록이 또 어떤 마케팅 방법을 가져올지, 그래서 얼마나 사람들을 놀라게 할지.
그런 생각을 하다보면 회사가 조금은 재밌게 느껴지는 것 같기도 하다.
한참 생각에 잠겨있던 최대리가 문득 시계를 바라보았다. 시계는 이제 2시 반을 가리키고 있었다.
'이한록씨. 잘해봅시다.'
최대리가 다시 타자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
목요일 아침. 출근을 한 한록은 최대리의 자리가 비어있는 걸 보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잠시 후 최대리가 도착했다.
언제나 멋지게 머리를 넘기고 출근 시간보다 일찍 회사에 도착하는 최대리. 그러나 오늘 최대리는 피곤한 얼굴로 간신히 지각을 면한 상황이었다.
한록이 최대리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대리님. 밤 새셨습니까?]
[과장님 저한테 밥 사셔야 합니다. 비싼 걸로...한우가 좋겠네요.]
장난기가 담긴 최대리의 대답. 최대리는 한록에게 자료를 넘겨주기 위해 꼬박 밤을 새고 출근을 한 것이었다.
'이렇게 열심히 하는 사람은 오랜만이네.'
최대리는 그간 매몰차게 군 게 미안해질 정도로 한록을 돕고 있었다.
최대리를 그렇게 만든 영화, <부산열차.>
<부산 열차>는 한국 좀비물의 시대를 연 작품이자 한록 역시 마케팅에 욕심을 내고 있는 작품이었다.
'한국 마케팅은 미리 생각해놨지.'
곧 <부산열차>가 개봉하리란 생각에 미리 마케팅 방안을 생각해 둔 한록. 남은 건 그걸 해외에서도 먹힐 만한 방식으로 연결시키는 것 뿐이었다.
'좋아. 한 번 해보자.'
한록이 최대리가 보내준 파일을 열었다.
*
"최대리님. 잠깐 시간 되십니까?"
퇴근시간. 최대리를 부른 한록.
"이 시간에요? 너무하신 거 아니에요?"
"<부산 열차>에 대한 얘기입니다."
"당연히 되죠."
한록의 말에 짐을 챙기던 최대리가 한록의 곁에 앉았다.
"무슨 일이시길래 퇴근 하려는 사람을 붙잡으셨대요?"
최대리의 질문에 한록이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부산 열차>의 마케팅 방안을 생각했습니다."
"벌써요? 말도 안 돼. 저 밥 안 사주려고 그러는거죠?"
장난을 치던 최대리. 그러나 최대리는 한록의 표정이 진지한 것을 보고 한록의 말이 농담이 아니란 것을 깨달았다.
"나라별로 만들려면 시간이 꽤나 걸릴 줄 알았는데요."
"나라별로 만드는 게 아닙니다."
그리고 한록은 최대리가 '그건 불가능하다'고 말한 방법을 얘기했다.
"전 세계 사람들에게 다 통할만한 마케팅이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계획을 설명하는 한록.
"-이렇게 진행할 생각입니다. 대리님은 어떠십니까."
살짝 인상을 쓰고 주의 깊게 한록의 말을 듣던 최대리. 한록의 말이 모두 끝나자 최대리가 고개를 들었다.
'이 사람을 보면 늘 드는 생각이 있다.'
'이 사람과 함께 일하고 싶다.'
'이 사람이 그리는 그림을 같이 완성해 보고 싶다.'
그리고 그 생각이 현실이 된 지금. 최대리가 느끼는 감정.
'아...'
'재밌겠다.'
아주 오랜만에, 일이 재밌다는 생각이 든다.
"밥은 제가 사야겠네요, 과장님."
최대리가 말했다.
*
그리고 금요일. 판권 부서와의 회의 당일.
회의 시간 10분 전 최대리가 한록에게 다가와 말했다.
"갈까요?"
"네."
함께 사무실을 나서는 한록과 최대리. 둘을 보며 정부장이 말했다.
"적당히 하고 와라. 싸우지 말고."
"당연하죠, 부장님."
능글맞게 대답한 최대리. 그러나 한록은 사무실을 빠져나오자마자 최대리에게 말했다.
"적당히 할 생각 없습니다. 판권 부서가 반대하면 될 때까지 설득할 겁니다."
그 말에 최대리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좋아요. 한바탕 뒤집으러 갑시다."
CK 최고의 직원 둘이 같은 목표를 가지고 걷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