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8 : 우리는 칸으로 갑니다.(3) >
수요일 아침. 더 필름에게 전화를 건 한록.
"매니저님. CK 이한록 과장입니다."
[아, 과장님, 안녕하세요. 무슨 일이신가요?]
"<퀸>의 한국 관객이 곧 천 만명을 달성합니다. 주연 배우들의 축하 영상을 받았으면 하는데요. 배우들 에이전시에 연락 가능하겠습니까?"
퀸이 천만관객을 달성하기 직전인 상황.
음악 영화 최초의 한국 천만이라는 기록적인 수치였고, 한록은 그에 대비해 이벤트들을 준비하는 중이었다.
[네, 알겠습니다. 연락해두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더 필요한 건 없으신가요?]
이전 같았으면 '그게 꼭 필요하냐'고 나왔을 김준. 그러나 이제는 태도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거래처와 트러블을 만들었다고 크게 혼이 나고, 심지어 그 거래처가 엄청난 기록을 만들어 온 상황. 이제는 한록과 김준의 입장이 완전히 뒤바뀐 것이었다.
"아뇨, 없습니다."
[네. 있으면 저한테 말씀해주세요.]
"알겠습니다."
한록이 전화를 끊자 옆에서 감격한 표정을 짓는 현차장.
"김준이 이렇게 나오는 걸 다 보고...진짜 오래살고 볼 일이다."
현차장은 김준의 태도가 바뀐 게 어지간히 기쁜 모양이었다.
"앞으로 다른 부서나 거래처는 이과장이 맡는 거 어때?"
"제가 맡으면 싸울 텐데요."
"그러라고 맡는 거야. 이과장이 한바탕 하고 나면 다들 갑자기 정신 차리잖아."
대화를 나누는 한록과 현차장.
"오, 저도 찬성이에요. 마침 지금 딱 이과장님이 필요한 타이밍이에요."
그때 최대리가 둘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최대리가 한록에게 말했다.
"과장님, 판권부서에서 연락 왔어요. 얘기가 길어질 거 같은데 보면서 얘기할까요?"
한록은 최대리와 함께 최대리의 자리로 향했다. 최대리의 자리에는 모니터에 사내메신저가 켜져 있었다.
*
며칠 전 한록과 최대리가 나눈 대화의 결론.
-삼일의 삶은 몸값을 더 올릴 수 있으니 아껴두는 게 좋겠다. 대신 판권 부서에는 다른 영화에서 매출을 올릴 수 있다고 제안하자.
그렇게 의견이 정리되었고, 최대리가 이 내용을 판권 부서에 전달하기로 했다.
'아마 삼일의 삶 얘기는 안 통할 것 같아요. 판권은 본인들이 전문가라고 생각해서 다른 부서가 개입하는 걸 엄청 싫어해요.'
메세지를 보내기 전 최대리의 말. 이번에도 쉽게 일이 진행될 것 같진 않았다. 한록이 최대리에게 물었다.
'그럼 그동안 최대리님은 어떻게 하셨어요?'
'그쪽 결정은 안 건드리는 선에서 제가 맡은 영화 위주로 얘기했죠.'
'그럼 설득이 되나요?'
'되게 만들었죠. 저 그런 거 잘 하거든요.'
그러면서 자신만만하게 윙크를 하는 최대리.
'저희가 담당했던 <스캔들>이랑 <지구 특공대>에서 매출을 올릴 수 있을 것 같다고 쓸게요. 그럼 거기서도 대놓고 싫다고는 못하겠죠.'
그렇게 최대리는 판권 부서에게 메세지를 보냈고, 지금 그에 대한 답이 도착했다.
*
[최대리님 안녕하세요. 보내주신 쪽지 잘 읽었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메시지의 답장. 한록이 답장을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판매작은 부서 회의로 결정된 일이기 때문에 변경이 불가능합니다.
저희 부서에서 이미 판매 전략을 세워둔 상황이니, 마케팅 부서 분들은 칸 영화제에서 보조만 해주시면 됩니다.]
요약하자면 이거였다.
"우리는 나서지 말란 말이네요."
"그렇죠."
한록이 최대리에게 물었다.
"원래 이런 태도입니까?"
"이 정도로 나온 적은 없는데, 삼일의 삶을 빼란 말이 많이 거슬리나 보네요."
"그렇군요."
고개를 끄덕이는 한록. 한록이 최대리에게 말했다.
"일단 알았고, 그 부분은 회의 때 자세히 얘기해보자고 보내주세요."
"어라. 과장님이 여기서 끝내시나요?"
최대리가 의외라는 듯 한록을 바라보았다. 아마 아까 얘기한 것처럼 한록이 판권부서를 뒤엎는 그림을 상상한 모양이었다.
"판권 부서도 갑자기 결정을 바꿀 순 없을 테니까요. 이 부분은 천천히 얘기할 문제 같습니다."
차분하게 대답하는 한록.
판권 부서가 왜 이렇게 나오는 지 충분히 이해하기 때문이었다.
'그 사람들한테는 삼일의 삶이 성공할거리란 보장이 없으니까.'
그런 상황에서 내부 회의를 통해 판권을 팔자고 결정이 난 상황. 그런데 그 결정을 다른 부서의 말 한마디에 바꾸기는 어려울 것이다.
'꼭 싸우는 게 답은 아니야. 이번에는 적당히 잘 풀어보자.'
공연사업본부 주과장과의 일을 생각하는 한록.
그러나 한록의 다짐은 오래가지 않았다.
답장을 보낸지 1시간 후, 최대리가 한록에게 메시지를 보내왔다.
판권부서의 답장이었다.
[판권부 윤지후: 회의해도 크게 바뀌는 건 없을 것 같습니다.]
[판권부 윤지후: 또한 <지구특공대>는 저희 부서의 주력작품이 아니니 마케팅 부서 분들은 <스캔들>에만 신경써주시면 됩니다.]
[판권부 윤지후: 그 외의 부분은 저희가 진행하겠습니다.]
[판권부 윤지후: 앞으로 업무 협조에 참고 부탁드립니다.]
'우리가 알아서 할 테니 너희는 시키는대로만 해라' 라는 태도가 다섯배는 강해진 답장.
"이렇게까지 나오면 회의해도 입장 절대 안 바뀔 거예요. 여기는 계획 바뀌는 거 엄청 싫어하거든요."
한록의 곁에서 말하는 최대리. 최대리의 말에 한록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록이 보기에도 판권 부서의 입장은 상당히 강경해보였다.
'어떻게 할까.'
생각에 잠긴 한록.
사실 최경준에게 보고를 한다면 상황은 바로 끝난다. 최경준은 분명 한록의 말대로 하라고 판권 부서에게 지시할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최경준이 '다른 업체를 다룰 수 있을 것 같다'며 한록을 칸에 보내는 상황.
그런 상황에서 다른 부서와 의견을 조율해달라고 최경준에게 문제를 들고 가고 싶진 않았다.
'삼일의 삶도, 지구 특공대도 건드리지 말아라. 너희는 그저 우리가 시키는대로만 해라.' 그렇게 나오는 판권 부서.
"이러면 이제 답이 없네요."
최대리가 생각에 잠긴 한록을 지켜보다가 말했다. 무언가를 기대하는 듯한 최대리의 눈빛. 한록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금요일이 회의죠?"
"네."
대화를 할 의지가 없는 상대방. 그리고 회사 최고의 능력자 둘.
"그때 잡읍시다."
그렇다면 상대가 납득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면 그만이었다.
"오랜만에 좋은 구경 하겠네요."
한록의 말에 최대리가 씩 미소를 지었다.
*
"자, 저희의 과제가 몇 개 있습니다."
회의실. 최대리가 유선과 한록을 앞에 두고 말하기 시작했다.
"첫 번째. <스캔들>의 판매 전략을 짜야 합니다. 이건 판권 부서에서도 우리 측 의견을 듣겠다고 했으니까 수월할 거예요. 문제는 여기부터."
유선이 다이어리에 최대리의 말을 열심히 적기 시작했다.
"과장님 담당 영화인 <지구 특공대>의 판매 전략을 짜야해요. 이건 그쪽에서 개입하지 말라고 했으니까, 끝내주는 걸로 하나 만들어 가야 받아들여주겠죠."
"네."
"그리고 마지막으로 삼일의 삶을 판매작에서 빼는 것. 이건 앞에 두 개를 잘 해가면 그 쪽에서도 받아들일 것 같네요."
그렇게 말하며 한록과 유선을 돌아보는 최대리. 최대리가 둘에게 물었다.
"자, 아이디어 있으신 분?"
그러나 조용한 회의실.
한록도, 유선도 판권 판매는 처음이다. 시스템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아이디어란 게 있을 리가 만무했다.
"좋아요. 이래야지 강의할 맛이 나지."
그러나 조금도 좌절하지 않는 최대리.
"지금부터 최대리표 판권 강의 시즌2 시작합니다."
최대리가 다시 강의를 시작했다.
*
유선과 한록에게 필름마켓에 대해 설명하는 최대리.
"칸 필름마켓은 칸 영화제랑 같이 열린다고 보면 돼요. 칸 영화제가 진행 될 때 어느 건물 하나를 빌려서 마켓이 진행되는 거죠.보통 필름마켓은 영화제랑 같이 열리거든요."
"아! 부산영화제 때 영화의 전당에서 부스 여러 개 세워진 거 봤어요. 그런 식으로 진행되는 건가요?"
"맞아요. 배급사마다 부스를 만들어두면 관계자들이 방문해서 판권을 사가는 거죠. 보통 영화를 미리 보고 오는데, 모르는 영화의 경우에는 따로 마련된 상영 부스에서 영화를 보고 살지 말지 결정할 수도 있어요."
"판권 판매는 어떤 식으로 진행됩니까?"
한록이 최대리에게 물었다.
"보통 나라별로 묶어서 팔아요. 영국에서 영화를 상영할 권리는 영국 배급사한테, 일본에서 영화를 상영하고 DVD를 발매할 권리는 일본 배급사한테 파는 식으로요."
"그럼 나라별로 선호하는 영화가 다르겠네요."
"맞아요."
한록의 말에 최대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판권 판매에 마케팅 부서가 투입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나라별로도 다르고, 회사별로도 선호하는 영화가 다 달라요. 그 포인트를 공략해서 '이 영화를 사가라'고 어필해주는 게 저희 마케팅 부서의 역할이죠."
소비자의 욕구를 파악하고, 구매를 유도하는 것. 바로 마케팅이 해야 하는 일이었다.
한록이 말했다.
"결국 영화 마케팅이네요."
판매 대상이 평범한 관객에서 영화 관계자로 바뀌었을 뿐, 결국 내용은 사람들에게 '이 영화가 재밌을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한록의 말에 최대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죠. 제가 괜히 과장님을 붙여달라고 했겠어요. 대상이 좀 특별한 영화 마케팅이라고 생각하시면 돼요."
"대리님은 어떤 방식으로 접근하시는 편입니까?"
부산영화제에서 자신이 담당했던 모든 영화의 판권을 팔았던 최대리. 대체 어떤 방법을 썼는지 궁금했는데, 드디어 그 궁금증이 해결 될 차례였다.
"과장님, 영업 비밀을 물어보시네요."
"..."
"너무 무섭게 보시는 거 아니에요? 그렇게 보지마세요. 같은 팀이니까 특별히 공개해 드리겠습니다."
한록의 말에 최대리가 자신의 노트북을 켰다. 그리고 유선과 한록을 향해 화면을 돌려주었다.
최대리의 노트북에 떠 있는 것은 데이터가 잔뜩 채워진 엑셀파일이었다.
"이게...뭐예요?"
엑셀파일을 보고 놀라서 묻는 유선. 최대리가 유선에게 답했다.
"데이터들이요."
그렇게 말하며 하나하나 내용을 설명해주는 최대리.
"저는 미리 주요 회사들한테 메일을 돌려요. 이 영화의 가격은 얼마부터고, 제작비는 얼마가 들었고, 지금 당신들 나라에서 흥행중인 영화들이랑 얼마나 유사한지 점수를 매겨서 데이터를 보내주죠. 그럼 대부분 미리 사려고 준비를 해 와요. 보통 현장에서는 가격 협상하고, 계약만 하고 끝이에요."
최대리의 엑셀파일에는 각 나라별 인기 영화와 박스오피스의 순위가 적혀 있었다. 그 영화들을 제작비, 장르와 감독, 주연배우, 배경, 관객층 등으로 구분해둔 최대리.
흥행에 영향을 미치는 모든 요소로 영화를 낱낱이 분해해서 점수를 매긴다. 그리고 그 밑에는 최대리가 직접 만든 기준으로 계산한 예상 관객수와 코멘트가 적혀있었다.
[<지구 특공대> 예상 관객수 400만.]
[상업성: 40점.]
[판매 가능성; 높지 않음.]
지구 특공대에 냉정한 평가를 내린 최대리.
최대리의 파일을 본 유선이 감탄해서 입을 벌렸다.
"와, 이거...이러면 안 살수가 없을 것 같아요."
"그렇죠. 그리고 애초에 살 만한 회사들한테 메일을 보내거든요."
타겟 소비층을 정확히 노리는 마케팅. 최대리가 부산영화제라는 짧은 기간 동안 모든 판권을 팔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이걸 대리님이 혼자 만드신 거예요?"
"네. 영업비밀 공개했으니까 다음에 맛있는 거 사 주세요."
최대리가 가볍게 말했지만, 한록 역시 최대리를 보며 속으로 감탄을 하는 중이었다.
'회장님이 왜 그렇게 최대리를 눈여겨보시는지 알겠다.'
엑셀파일을 보자마자 든 생각이었다.
'내가 왜 이 영화를 사야하는가?'
판권을 사러올 모든 사람이 할 고민. 최대리의 데이터는 그 고민에 대해서 아주 깔끔한 답을 내려주었다.
'왜냐고? 이 영화는 돈이 될 거니까.'
"저는 보통 이런 방식으로 판권을 팔아요. 제가 점수가 높다고 하면 영화를 보지도 않고 사가는 사람도 있죠. 내용이 뭐가 중요해요. 일단 돈이 될 거라는 게 보이는데."
영화를 낱낱이 분해해서 상업성을 따지고, 거기에 점수를 매긴다.
한록이라면 절대 사용하지 않을 방식이지만 그 효과가 엄청나다는 건 최대리가 이미 증명해 보이는 중이었다.
'마케팅을 잘하는 건 알겠다. 하지만 나랑은 스타일이 전혀 다르군.'
최대리의 마케팅이 나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어쨌든 이 일의 목표는 비싼 값에 판권을 파는 거니까. 다만 한록 자신이라면 다른 방식을 선택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 뿐이었다.
한록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마치 대답이라도 하듯 최대리가 말했다.
"전 이번에도 이렇게 진행할 생각입니다."
노트북을 덮고 한록을 바라보는 최대리. 최대리가 한록에게 물었다.
"과장님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