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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 회사원이 선넘으면 생기는일-76화 (76/263)

< 76 : 우리는 칸으로 갑니다.(1) >

월요일 오전. 대부분의 회사가 그렇듯, 마케팅 부서도 주말동안 쌓인 일을 바쁘게 처리하는 중이었다.

"네, 마케팅부 현주훈입니다."

"잠시만요. 다시 확인하고 전화 드리겠습니다."

"이한록 과장은 오늘 휴가입니다."

쉴 틈 없이 전화를 받던 현차장. 점심시간 직전, 그가 드디어 전화기를 내려놓고 소리쳤다.

"이과장 부러워 죽겠다!"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마케팅 부서 사람들.

이토록 바쁜 월요일. 가장 집에 가고 싶은 월요일.

한록은 오늘 휴가를 즐기고 있었다.

*

일주일 전, 최경준이 한록을 본부장실로 불렀다.

"김준에게서 전화가 올 거라네. 자네가 원하는 대로 처리하게."

"알겠습니다."

"그리고...휴가를 다녀오게."

더 필름은 최경준이 곧 언급하리라 예상한 일이었다. 그러나 휴가는 생각지도 못한 것이었다.

"페스티벌이 끝난 후 며칠 쉬고 왔습니다. 게다가 아직 퀸이 끝나지 않았습니다."

"이제 자네가 직접 뛸 건 없잖아. 사람들한테 맡기고 다녀오게. 팀은 그러라고 있는 게 아닌가?"

"그래도 굳이 지금 다녀올 필요는..."

"지금이 아니면 안 되니까 하는 말이지. 곧 있으면 또 쉴 틈 없이 일해야 하는 시기가 올 테니 다녀오게."

최경준이 이렇게 말한다. 그건 앞으로 정말로 빠듯하게 일해야 하는 시기가 온단 것이었다.

마침 더 쉬고 싶던 참이기도 했고, 한록은 그날 바로 제주도행 비행기와 바다가 보이는 숙소를 예약했다.

*

그래서 모두가 월요일에 찌들어 있는 사이, 한록은 지금 제주도 바다가 보이는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는 것이다.

갑작스럽게 정해진 휴가. 한록은 바로 어머니에게 전화를 했다.

'이때 시간 안 되시죠?'

'그래, 나는 좀 어렵네. 지금 한서도 시험기간이어서 안 될 것 같은데...'

원래 휴가는 가족과 시간을 보내는 편이지만, 워낙 갑자기 정해진 일정이다 보니 혼자 보내게 된 상황.

'이번에 친구 분들이랑 방콕 가시는 데 보태드릴게요. 숙소 더 좋은데 잡으시고, 친구분들 식사 한 번 사주세요.'

'됐어. 네가 번 돈인데 왜 그런데 써.'

'아들이 돈 이렇게 잘 번다고 자랑 한 번 하셔야죠.'

'그래도 되니?'

한사코 사양하던 어머니의 목소리가 변한다. 아들 자랑할 생각에 신이 난 어머니의 모습에 한록이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그럼요.'

'그럼 잘 쓸게, 아들.'

한서에게도 시험이 끝나면 친구들과 다녀오라고 용돈을 보내준 한록.

[오빠 완전 고마워어 ㅠㅅㅠ근데 나 일등 못 할 거 같은데 가도 돼...?]

[다녀오고 다음에 잘 해.]

[웅!!! 오빠 애들이 고맙댛ㅎㅎㅎㅎ]

그 말과 함께 친구들의 편지를 찍어 보낸 한서.

포스트잇에 한록에게 보내는 글들이 적혀 있었다.

<오빠 감사합니다 여행 잘 다녀오겠습니다!!!>

<오빠 다음엔 강원도 오세요 저희가 모시겠습니다>

<형님...형님이 제 롤모델이신거 아시죠?>

[네가 시켰지?]

[당연하지 ㅎㅎㅎㅎㅎ]

가족들을 본 지 너무 오래돼서 미안한 마음이 있었는데, 다행히 친구들끼리 가는 게 더 즐거운 모양이었다.

덕분에 여유롭게 혼자 휴가를 즐기는 한록.

바다를 따라 드라이브를 하고 카페에 들어와서 영화를 한 편 보고 있자니 마음이 편안해졌다.

'혼자 오는 것도 나쁘지 않네.'

자고 싶을 만큼 자고, 하루 종일 영화를 보고, 바다를 보며 일어나는 시간들.

워커홀릭 한록마저 회사에 가기 싫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편안한 휴가였다.

그때 도착한 영도의 메시지

[형...좋아..? 좋지..? 나 버리고 혼자 여행가니까 좋지..?]

한록이 제주도로 휴가를 간다는 말에 엄청나게 부러워하던 영도. 자기도 같이 제주도에 가겠다고 미친 듯이 일을 했는데, 결국 휴가를 쓰지 못했다.

어지간히 부러운 모양인지 영도의 메시지에서 질투와 미련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동생의 귀여운 질투에 한록이 여유롭게 답장을 보냈다.

[그렇게 좋진 않아. 그냥 늦게 일어나고 드라이브하고 너 일할 때 커피마시면서 영화 보는 정도인데 뭐. 인센 많이 받아서 아직 돈이 남네.]

[형 지금 나랑 장난해???서울 돌아오기만 해 봐!]

[네가 그렇게 나오니까 더 좋다. 참고로 영화는 인센티브로 산 아이패드로 보는 중.]

[으아아아악!!!!!!!!!!!!!!]

영도가 메시지로 비명을 지르더니, 이제 전화를 걸어왔다.

"귀여운 녀석."

한록은 미소를 지으며 영도의 전화를 무시했다.

끊임없이 울리는 전화와 커피 냄새. 그리고 아름다운 바다와 함께하는 영화.

최고의 휴가가 아닐 수 없었다.

*

그렇게 주말을 붙여서 일주일간의 휴가를 마치고 출근한 한록. 회사로 돌아와 기념품을 돌리니, 모든 사람들이 부러움에 가득 찬 눈으로 한록을 바라보았다.

특히 현차장은 한록을 보자마자 말을 걸어왔다.

"이과장. 우리 빼고 휴가 가니 좋았어...?"

"저 없는 동안 많이 바쁘셨습니까?"

"이과장이 워낙 잘해놓고 가서 바쁠 건 없었어. 근데 질투하느라 마음이 아팠다."

정말 솔직하게 말하는 현차장. 그런 현차장을 보고 한록이 웃음을 터뜨렸다.

"다음에는 팀 전체 포상휴가를 달라고 요청해보겠습니다."

"그래! 바로 그거야! 큼, 아니, 이게 아니고. 김준한테서 전화왔다."

"김준한테서요? 언제 왔습니까?"

"화요일에. 이과장 휴가 중이니까 전화하지 말라고 했어. 연락했다고 전해달라 하는데, 이과장 쉬라고 그냥 무시했다."

꼴 좋다는 듯 얘기하는 현차장. 사람 좋은 현차장이 이럴 정도면 김준에게 정말 당한게 많다는 뜻이었다.

"네, 제가 연락해보겠습니다."

자리에 앉은 한록이 김준에게 전화를 걸었다. 늘 그렇듯 시큰둥하게 전화를 받는 김준.

"CK 이한록 과장입니다."

[...과장님.]

그러나 상대가 한록인 것을 알자 반응이 바뀐다. 김준의 목소리는 긴장으로 바짝 굳어있었다.

"절 찾으셨다고 들었습니다."

[그간 제가 실례를 저질러서...사과를 드리고 싶습니다.]

어떤 변명도 없이 사과를 해오는 김준.

'본부장님이 신경을 많이 써 주셨군.'

한록을 잡겠다고 한국까지 왔던 김준이 이렇게 꼬리를 내린다.

아무래도 최경준이 김준에게 크게 화를 냈고, 위에까지 얘기가 올라간 모양이었다.

[어떻게 사과를 드려야할지 모르겠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아마 한록이 사과를 받느냐 마느냐에 따라 이 일이 어떻게 마무리 되는지가 정해지는 상황.

'일을 크게 만들 생각은 없다.'

어쨌든 싱어롱 상영도 잘 진행되고 있고, 김준도 사과를 했다. 퀸 역시 이대로만 진행한다면 금방 천만을 달성할 것이었다.

모든 게 한록이 원하는 대로 흘러가는 상황에서 굳이 거래처와 싸움을 이어갈 이유는 없었다.

하지만 김준이 사과를 해오는 상황을 그냥 넘길 생각 역시 없었다. 한록이 김준에게 말했다.

"아닙니다. 일하다 보면 생길 수 있는 일이죠. 이해합니다."

[...! 감사합니다, 과장님.]

김준의 사과를 받아들인 한록. 김준의 목소리가 눈에 띄게 밝아졌다. 그리고 이어진 한록의 말.

"대신, 앞으로 매니저님께서 유의해주셨으면 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어떤 부분입니까?]

"그간 더 필름과 CK 사이에서 많은 다툼이 있었습니다. 다음부터는 저 외에 다른 사람들한테도 이런 일이 없었으면 합니다."

'나한테 사과하는 걸로 끝내지말고, 더 이상 우리 부서한테 갑질하는건 그만해라'는 한록의 말.

평소의 김준 같았으면 어디서 명령이냐고 오히려 짜증을 냈을법한 말이다. 그러나 김준은 얼른 대답했다.

[네, 알겠습니다. 그 부분은 앞으로 주의하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CK분들께 실례가 많았습니다.]

'어지간히 혼났나보군.'

처음과는 사뭇 달라진 김준의 반응에 한록이 피식 미소를 지었다.

"네, 알겠습니다. 매니저님과 잘 마무리했다고 본부장님께도 말씀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이과장님. 다음부터는 이런 일 없도록 하겠습니다.]

"아닙니다. 들어가세요."

깔끔하게 끝난 김준과의 통화. 한록이 전화를 끊으며 생각했다.

'앞으로 김준 때문에 고생할 일은 없겠군.'

그리고 그 생각은 한록만이 아니라 마케팅 부서의 모두가 하고 있는 생각이었다.

전화를 끊자마자 한록에게 도착하는 메시지들. 그간 김준에게 시달렸던 마케팅 부서의 사람들이 보낸 메시지였다.

[이과장. 김준이 뭐래?]

[과장님. 혹시 어떻게 끝났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이겼어???]

한록은 그들에게 똑같은 답을 보냈다.

[앞으로는 갑질 그만하겠답니다.]

[이과장 수고했다!!!]

[아 정말 고생 하셨습니다 ㅠㅠ 제가 다 감사하네요 커피 한 번 쏘겠습니다!]

[굿! 역시 이과장. 우리 부서 탱커.]

그러자 한록에게 쏟아지는 감사 인사들. 김준의 패배는 한록보다 마케팅 부서 사람들이 더 기뻐할만한 일인 듯 했다.

악성 거래처를 때려잡은 한록과, 그 덕분에 사기가 잔뜩 올라간 마케팅 부.

그 모습을 지켜보던 정부장이 한록에게 다가와 무언가를 내밀었다. 정부장이 준 것은 카드였다.

"오늘 점심 비싼 걸로 먹고 와라."

"법인 카드를 이런데 써도 됩니까?"

약간 떨떠름해 하는 한록의 모습에 카드를 가까이 가져가서 보여주는 정부장.

"법인 카드를 이딴 데 쓰겠냐? 내 카드다."

정부장의 말에 한록이 웃으며 카드를 받았다. 그리고 정부장이 미처 하지 않은 말을 대신 말했다.

"제가 잘해서 주시는 겁니까?"

"그걸 꼭 들어야 속이 시원하냐?"

한록의 말에 정부장이 짜증을 내더니 몸을 돌렸다. 그리고 자신의 자리로 향하며 말했다.

"그래, 잘했다."

*

GV팀과 함께 근처 초밥집에 다녀온 한록.

"...여기가 원래 이렇게 맛있었나?"

"그러게요..."

의아한 표정으로 열심히 초밥을 먹는 GV팀. 정부장의 카드로 먹는 밥이라 그런지, 오늘따라 유독 밥맛이 좋았다.

그러나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것도 잠시였다. 점심시간이 끝나자 최경준이 또다시 한록을 호출했다.

이제는 익숙해진 본부장실로 향하는 한록.

본부장실에 도착하자 최경준이 한록을 위해 문을 열어주었다.

"휴가는 어땠나?"

"덕분에 충분히 쉬고 왔습니다."

"그래야지. 이제부턴 또 열심히 일해야 하거든."

한록의 앞에 앉은 최경준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번에는 도전을 해 봐야 하네."

"무슨 말씀이십니까?"

"최대리와 함께 칸에 다녀오게. 배울게 많을 거야."

칸 영화제. 세계 3대 영화제 중 하나로, 한국 영화가 유독 좋은 퍼포먼스를 보이는 영화제였다.

"이번에 사고가 있어서 10월로 개최가 밀렸지. 자네한테는 좋은 기회가 됐군."

칸 영화제. 그리고 최대리. 그 두 조합이면 생각이 나는게 있었다.

"*필름마켓에서 판권을 팔고 오라는 말씀이십니까?"

*필름마켓-영화 관계자들이 영화를 관람하고 판권을 사고 파는 행사. 보통 영화제와 함께 열림.

"눈치가 좀 늘었군."

칸 필름마켓. 칸 영화제와 함께 열리는 세계 최대 규모의 필름마켓이었다.

세계에서 가장 큰 영화들은 모두 여기서 판권이 팔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행사.

한록은 CK에서 9년을 근무했지만 여태 마케팅 위주로 활동했기에 판권 판매에 대해선 잘 알지 못했다.

최경준의 말처럼, 한록 입장에서 이건 정말 많은 걸 배울 수 있는 기회였다. 다만 그건 한록의 입장이었다.

'나야 재밌어 보이지만...본부장님은 무조건 마케팅에 날 투입할거라고 생각했는데.'

한록의 생각을 눈치 채기라도 한 듯 최경준이 바로 답했다.

"자네의 라이벌은 온갖 부서를 돌고 있는데, 자네는 한 곳에 머물러 있어서 되겠는가. 높이 올라가고 싶다면 여러 분야를 배워놔야 하는 법이지."

최대리가 지금 부서들을 돌면서 임원 준비를 하는 것처럼, 한록에게는 영화라는 분야에서 배울 수 있는 모든 부분을 알려주겠다는 최경준의 의도.

"자네가 언젠가 본부장이 된다면 판권도, 제작도 알아놔야 할 거야. 미리 준비를 해두게."

한록은 그 뜻을 알아차리고 감사의 의미로 고개를 숙였다.

"필름마켓은 전 세계의 관계자들이 모이는 곳이네. 자네가 김준을 컨트롤 하는 걸 보니, 그 곳에서도 잘 할 거란 생각이 들었어."

"감사합니다."

'큰 물에서 놀아봐라'라는 최경준의 의도.

그렇다면, 한록에게 역시 생각나는 사람이 있었다.

"본부장님. 부탁드릴게 있습니다."

"뭔가."

"칸에 유선씨를 같이 보내주셨으면 합니다."

한록의 말에 최경준이 미소를 지었다.

"사원급, 그것도 계약직이 전 세계 관계자들이 모이는 칸에 출장이라. 말도 안 되는 부탁이란 건 알고 있겠지."

"하지만 이 정도는 부탁 드릴 수 있단 것도 알고 있습니다."

"하하!"

한록의 당당한 말에 최경준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말했다.

"그래, 함께 다녀오게."

흔쾌히 한록의 부탁을 수락한 최경준.

한록은 마케팅 부서로 돌아왔고, 곧장 유선을 불렀다.

"헉, 과장님, 잠시만요!"

유선이 쏟아지는 전화와 메신저를 얼른 처리하고 복도로 따라 나왔다.

언제나 생각 이상의 활약을 보여주고, 잠깐 한눈을 팔면 놀랍도록 성장해오는 부하.

그런 부하에게 아주 좋은 기회가 생겼다.

한록은 유선이 이 기회로 또 얼마나 성장할지 벌써부터 기대가 되기 시작했다.

유선이 한록에게 물었다.

"과장님. 무슨 일이신가요?"

"유선씨 여권 있죠?"

"네! 있어요."

"그러면..."

유선의 씩씩한 대답에 한록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우리는 칸으로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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