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 회사원이 선넘으면 생기는일-70화 (70/263)

< 70 : 누군가와 함께 한다는 건(3) >

*

오후 4시. [블라인드]의 공연 지연이 관객들에게 공지되었다.

"장난해? 10시면 집에 갈 거였다고!"

"10시 넘어서 하면 내일 공연은 피곤해서 어떻게 봐?"

한록의 예상처럼 폭주하는 불만.

특히 새벽부터 [블라인드]를 기다린 메인 스테이지 관객들의 불만은 엄청났다.

"죄송합니다. 자세한 사항은 또 공지를-"

"내려가!"

"너도 내려와서 8시간 기다려봐라!"

"이렇게 마음대로 바꿀 거면 스케쥴은 왜 공개했습니까!"

메인 스테이지 무대에 오른 주과장이 한 마디 할 때마다 쏟아지는 비난들.

그 말에 주과장이 발끈해서 답했다.

"이건 저희 측 잘못이 아니고 천재지변 때문에-"

주과장의 말에 대놓고 야유가 쏟아졌다.

"내려가!"

"내려가!"

이제 긴 말을 하지도 않고 '내려가'만 외치는 관객.

[블라인드]를 향한 화살이 이제 완전히 주과장에게로 돌아갔다.

"주과장, 뭐 하는 거야!"

그때 무대 위로 후다닥 올라오는 현차장.

"정말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계속 야유를 퍼붓는 사람들에게 현차장이 열심히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주과장에게 외쳤다.

"지금 당장 내려가!"

주과장이 마지못해 내려가자 그제야 야유소리가 멈췄다. 현차장이 관객을 바라보며 말한다.

"정말 죄송합니다. 새벽부터 기다리셨죠? 저희도 새벽부터 준비해서 얼마나 힘드신지 압니다."

'우리도 힘들다'란 말을 돌려말하기.

"저희가 스케쥴을 잘 잡았어야 했는데, 괜히 관객분들만 고생하시네요."

거기에 사람들 앞에 납작 엎드려서 사과하는 현차장.

주과장은 거친 태도로 관객들에게 욕을 먹었고, 현차장은 그런 주과장을 물리치고 사람들에게 사과를 한다.

전형적인 *굿가이배드가이 작전이었다.

*굿가이배드가이 작전: 누군가 악역을 맡고, 누군가는 선역을 맡아 상대를 설득하는 작전.

'빌런' 주과장은 처리했고 현차장이 열심히 사과를 한다. 어느새 살짝 만족해버린 관객들.

그때를 놓치지 않고 현차장이 말했다.

"당연히 기다리신 시간만큼 보상은 안 되겠지만, 그래도 음식이랑 생수를 준비했습니다. 스탠딩 존은 번호표를 배부하려고 합니다. 음식 드시고, 물 드시고 쉬고 오셔도 꼭 같은 자리로 입장하실 수 있게 저희가 책임지고 도와드리겠습니다. 정말로 죄송합니다. 그리고 혹시 기다리실 분들을 위해 <퀸> 영화를 준비했으니, 보실 분들은 여기 계시면 저희가 물을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정석 사과. '빌런' 제거. 거기에 보상까지.

'...여기서 더 화내긴 좀 그렇지?'

사람들은 어느새 현차장의 설득에 넘어갔다.

이제 화를 내는 대신 음식을 먹으러 가거나 <퀸>을 보기 위해 자리에 남은 사람들. 현차장의 활약으로 상황은 깔끔하게 정리되었다.

현차장이 무대에서 내려오면서 한숨을 쉬었다.

"와, 죽는 줄 알았네."

"차장님, 정말 대단하십니다."

현차장에게 진심으로 말하는 한록. 현차장이 한록에게 물었다.

"진짜?"

"네. 진심입니다."

"이거 큰일이네."

현차장이 뿌듯한 듯 미소를 지으며 한록의 등을 툭 쳤다.

"이과장이 이러면 더 잘하고 싶어지는데 말이야."

*

상영기기 설치. 번호표 배부. 무대 이동까지.

남은 일을 모두 처리하니 이제 시간은 7시. 메모리 테잎이 공연을 해야 할 시간이었다.

[지금부터 '메모리 테잎'의 <퀸> 개봉 축하공연이 있겠습니다.]

한록의 안내멘트와 함께 메모리 테잎의 멤버들이 무대 위로 오른다.

갑작스럽게 [블라인드]의 공연이 미뤄진 상황. *스탠딩 존은 거의 절반이 비었고, 메인 스테이지는 어수선하기 그지없었다.

*무대에서 가장 가까운 입석 구역.

그런 와중에 시작 된 메모리 테잎의 공연.

메모리 테잎의 멤버들이 I was born to love you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잘 될까요?"

"네. 한국 최고의 밴드잖아요."

걱정이 담긴 유선의 말과 자부심 어린 하대리의 말.

그리고 하대리의 말은 곧 현실이 되었다.

[나는 널 사랑하기 위해 태어났어.]

관객들은 첫 소절이 나오자마자 I was born to love you를 따라하기 시작했다.

I was born to love you, we will rock you, 위아 더 챔피언, 보헤미안 랩소디, 라디오 가가로 이어진 메모리 테잎의 공연.

사람들의 반응은 1차 싱어롱 상영과는 비교도 되지 않게 뜨거웠다. 텅 비어있던 스테이지에도 사람들이 점점 모여들기 시작한다.

눈앞에서 밴드가 공연을 한다. 그 점도 물론 큰 이유 중 하나였지만, 진짜 이유는 다른 곳에 있었다.

'사람들이 가사를 몰라도 멜로디를 따라 부를 수 있도록 유도해주세요.'

한록의 요구사항이자 사람들이 1차 싱어롱 상영을 제대로 하지 못한 이유.

상진은 공연 도중 위 아 더 챔피언의 후렴 부분에서 마이크를 기타리스트에게 넘겼다.

그러자 그 부분을 *허밍으로 따라하는 기타리스트와 멤버들.

*허밍:가사 없이 노래의 음을 흥얼거리는 것.

그 모습을 보자,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허밍으로 떼창을 시작했다.

'정말 프로다.'

한록은 감탄을 하며 스테이지를 둘러보았다.

<퀸>의 노래에 흠뻑 빠진 사람들. 족히 3만명은 되는 사람들이 스테이지로 모였고 스탠딩 존도 어느새 꽉 차 있었다.

"we are the champions!"

마지막 곡을 마치고 관객들 사이로 뛰어든 상진. 상진을 헹가래 하는 사람들.

'지금이다.'

아직 무대 위에 메모리 테잎의 장비들이 남아있는 상황이었지만, 지금이 딱 상영을 시작할 때였다.

"지금부터 <퀸> 싱어롱 상영을 시작합니다."

한록의 말과 함께 스크린에 <퀸>의 오프닝 장면이 시작되었다.

*

'밴드의 보컬이 되고 싶다'는 프레디의 말. 그 말에 '너처럼 못생긴 이빨로는 안 돼.'라고 거절하는 *로저 테일러.

*퀸의 드러머.

그러자 자신의 노래실력으로 로저 테일러를 놀라게 하는 프레디 머큐리.

관객들이 그 모습을 보고 크게 박수를 쳤다.

"지금 이 장면, 광고에 넣어주세요."

한록이 광고를 위해 온 촬영팀에게 말했다.

'좋아. 분위기가 잡혀가고 있다.'

사람들은 영화에 몰입하고 있었고, 아는 노래가 나오면 가끔 노래를 흥얼거렸다.

빠르게 진행되는 영화. 프레디 머큐리의 등장과 퀸의 결성. 프레디 머큐리의 연인. 밴드의 불화. 미국으로의 영역확장.

그 모든 것을 거쳐 영화는 첫 떼창 시점이라 할 수 있는 we will rock you에 이르렀다.

*

쿵쿵, 짝!

화면 속 프레디 머큐리가 박수를 치며 발을 구르자 사람들도 똑같이 박수를 치기 시작한다. 어젯밤 싱어롱과 오늘 메모리 테잎의 공연을 본 사람들이었다.

-쿵.

사람들이 발을 구르는 소리에 오늘 처음 영화를 보는 사람들도 눈치껏 발을 구르기 시작한다.

-쿵.

그들이 발을 구르는 순간 느껴지는 땅의 진동. 온몸을 흔들 정도로 강렬한 울림. 그리고.

"따라해!"

[we will we will rock you!]

상진의 외침과 함께 시작된 후렴구.

[we will we will rock you!]

[we will we will rock you!]

3만명의 사람들이 함께 부르는 노래. 그리고 심장까지 전해지는 땅의 진동 소리.

이 자리에 모인 모두가 하나의 노래를 부른다. 단지 그 사실일 뿐인데 마음이 벅차올랐다.

"아, 이거 뭐라고 해야하지..."

관객들을 지켜보던 현차장이 입을 열었다.

심장이 묵직하게 뛰는 이 기분. 온 몸에 털이 바짝 솟는 이 기분을 대체 뭐라 말해야할까.

"소름은 아니고. 감동도 좀..."

"부족하죠."

유선의 답에 고개를 끄덕이는 현차장. 그리고 아무런 말이 없는 한록.

'어떤 말로도 지금 이 감정을 표현하기엔 부족하다.'

그렇게 모두가 자신의 마음 속에 떠오른 감정을 생각하고 있을 때, 내내 말이 없던 하대리가 조용히 속삭였다.

"아름답네요."

그 말에 한록이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서로 다른 목소리로 하나의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그래, 아름다웠다.

*

'그냥 많은 사람들이 노래를 부르는 것 뿐인데, 왜 이런 생각이 드는 거지?'

한록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유선이 곁에서 소리쳤다.

"지금! 저기 슬로건 흔드는 사람 지금 찍어주세요!"

자신의 옆에 있는 카메라맨에게 어딘가를 가리키는 유선.

유선의 옆에선 하대리가 메모리 테잎과 무전을 하고 있었고, 그 옆에는 현차장이 마이크의 음량을 조절하고 있었다.

'아.'

자신의 주위에서 열심히 일하고 있는 팀. 자신의 팀원들. 그 사람들을 보니 한록은 이제야 무언가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만약 유선이 어제 마이크 앞에서 박수를 쳐주지 않았다면. 만약 하대리가 '메모리 테잎'을 섭외하자 말하지 않았다면, 만약 주과장이 메인 스테이지로 옮기는 것에 반대했다면. 만약 현차장이 지친 관객들을 달래주지 않았다면. 그랬다면 지금 이 순간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모두가 같은 목표를 가지고 노력했고 지금은 3만명이 함께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모두가 지금 이 순간이 아름답다고 느끼는 이유는 단 하나.

'그래.'

'누군가와 함께 일한다는 건 이런 거구나.'

수많은 사람이 하나의 마음으로 만들어낸 결과물이기 때문이었다.

*

영화는 막바지에 도달했다. 사람들은 제각각의 목소리로, 제각각의 가사를 가지고, 하나의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이제 스피커에서 들리는 건 we are the champions였다.

[우리는 모두 챔피언이야. 이 세상의 챔피언.]

어느새 사람들로 가득찬 메인 스테이지. 모두가 함께 부르는 we are the champions.

"은성아, 너는 뒤쪽으로 가!"

"알겠습니다!"

무대 이곳 저곳을 뛰어다니며 촬영을 하는 광고팀.

"감독님! 하이 앵글로 찍어주세요! 하대리님!"

"의자 여기 있습니다."

"이과장! 메모리 테잎 마이크 소리 내리자!"

"상진씨, 이제 곧 엔딩입니다. 반주 없이 we are the champions을 불러주세요."

완벽한 순간을 만들기 위해 쉴 틈 없이 움직이는 GV팀.

모두를 보며 주과장은 생각했다.

'이런 사람들도 있구나.'

견제도, 열등감도, 질투도 없다. 오로지 목표를 위해 열정적으로 일한다. 그런 사람들이 바로 자신의 곁에 있었다.

'이게 이한록이 말한 거구나.'

그리고 그 모든 건 한록이 만들어낸 것들이었다.

'이 사람은 대체 어떤 사람일까?'

주과장이 감탄과 동경이 담긴 눈으로 한록을 바라보았고, 시선을 느낀 한록이 주과장에게 다가와 말했다.

"주과장님. 영화가 끝나고 사람들이 나가기 직전에 [블라인드]가 곧 나온다고 말씀하세요. 그래야 관객들이 덜 빠집니다."

한록의 완벽한 계획과 팀워크에 감탄하던 주과장. 그리고 거기에 경쟁 상대를 배려하는 마음까지 보여준 한록.

오늘 한록은 본인이 말하던 '진짜 경쟁'을 보여주었다. 그러니 주과장은 결국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서로 시기하지도 않았고, 망하길 바라지도 않았다. 그저 열심히 했다. 하지만 상대가 더 잘했다.

그럴 때 느끼는 감정은-

'그래.'

'당신한테라면 패배해도 괜찮겠다.'

상대에 대한 존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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