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 회사원이 선넘으면 생기는일-69화 (69/263)

< 69 : 누군가와 함께 한다는 건(2) >

"주과장님. 오해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메인 스테이지를 저희가 가져가겠다는 게 아닙니다. 이대로 무대를 비워둘 순 없어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한록의 말. 주과장 역시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아무도 메인 스테이지를 맡겠다고 하지 않는 상황. 그 상황에서 3시간 동안 무대를 비워둘 순 없다.

하지만 <퀸>을 메인 스테이지에서 상영하는 것 역시 큰 모험이었다.

"관객들이 <퀸>을 좋아하리란 보장이 없잖아요."

"메모리 테잎이 분위기를 띄우지 않습니까. 어느 정도의 반응은 나올 겁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무대를 비워두는 것보단 뭐라도 올리는 게 낫습니다."

"서브 스테이지랑 메인 스테이지는 환경이 달라서 상영이 제대로 될 지가..."

"원래 메인 스테이지에서 상영할 예정이었습니다. 장비도, 음향도 다 호환됩니다."

"본부장님의 허가가 필요합니다."

"제가 받아올 수 있습니다."

주과장의 모든 고민에 막힘없이 답하는 한록.

그렇다면 이제 남은 것은 하나뿐이었다.

한록이 주과장을 보며 말했다.

"주과장님. 뭐가 걱정되시는지 압니다."

바로 주과장의 진짜 고민.

"저희가 이번 락 페스티벌의 성과를 다 가져가실까 봐 걱정 되시겠죠."

이대로 페스티벌을 한록에게 뺏길지도 모른다는 걱정이었다.

"...네, 맞습니다."

주과장이 솔직하게 답했다.

"협조한다고 말해놓고 미안합니다. 그런데 알겠다고 말을 못하겠습니다."

주과장 역시 안다. 퀸을 상영하는 게 무대를 비워두는 것 보다는 좋은 선택이다.

하지만 권부장이 자신의 '좋은 선택'을 이해 해줄지는 장담할 수 없다. 페스티벌을 위한 결정이 오히려 자신을 궁지로 내몰 수도 있다.

'한심하다, 주해진.'

제대로 된 경쟁을 해보겠다고 다짐했으나 막상 이런 상황이 닥치니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자신. 지금 주과장에게 필요한 것은 용기와 확신이었다. 그리고 주과장 자신에겐 용기도, 확신도 없었다.

"주과장님. 제가 약속하겠습니다."

그러나-

"이 페스티벌 제가 반드시 살려드리겠습니다."

한록은 그런 확신을 줄 수 있는 사람이었다.

너무나 믿음직한 말. 그리고 그 말을 현실로 만들 수 있는 사람이자 자신의 생각을 바꿔준 사람. 이한록.

그런 사람이 이렇게 제안 한다면 거절할 수 없다.

망설이던 주과장이 하늘을 한번 바라보았다. 그리고 눈을 질끈 감고 말했다.

"그래요, 해봅시다."

*

"메인 스테이지로 옮길 수 있다고?"

"네. 사장님이 허락만 하시면요."

영화사업본부 부스로 돌아온 한록. 한록의 말에 열심히 티켓을 찍어내던 현차장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허락은 어떻게 받게?"

"직접 말씀을 드려야죠."

"사장님이랑 대화를 할 거야?"

"네."

"하, 이게...하...내가 말씀 드릴게."

망설이던 현차장이 말한다.

아무리 한록이 GV팀의 간판이라고 해도 상사는 자신이다.

'현주훈. 할 수 있겠냐? 할 수 있을까?'

속으로 생각하는 현차장.

사장을 만나는 게 무섭긴 하지만, 한록에게 그렇게 큰 책임을 밀어놓고 나 몰라라 할 수는 없다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한록은 담담하게 말했다.

"이미 찾아뵙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언제?"

"지금이요. 가보겠습니다."

"어?!"

현차장에게 말하고 부스를 나서려던 한록. 그런데, 누군가 부스 안으로 들어왔다.

"이과장. 할 말이 있다고 했죠."

하정엽이었다.

사장의 등장에 깜짝 놀란 현차장과 유선, 하대리.

'뭐, 뭐야?!'

'사장님이 직접 보러 오셨어?!'

깜짝 놀란 직원들을 바라보던 하정엽이 한록을 보고 말했다.

"여기서 말하긴 어렵겠군요. 밖으로 나가죠."

하정엽의 말에 따라 장소를 이동한 한록.

하정엽이 바로 한록에게 물었다.

"할 말이 뭡니까?"

"오늘 헤드라이너인 밴드가 비행기 연착 때문에 제 시간에 도착하지 못할 것 같다고 합니다."

"그걸 왜 이한록 과장이 전하죠."

"그래서 무대가 비는 시간동안 <퀸>을 상영하려고 합니다. 사장님의 허락을 받고자 말씀드립니다."

"네, 그렇게 진행하세요."

하정엽은 설득할 필요도 없이 흔쾌히 답을 주었다.

'전폭적으로 지원한다'는 말이 거짓은 아닌 모양이었다.

"공연사업본부에는 징계가 필요하겠군요."

차갑게 말하는 하정엽.

하정엽의 말에 그의 등에서 꿈틀거리던 수많은 실 중 하나가 맥없이 바닥으로 추락했다.

아마 공연사업본부장을 향한 실임이 분명했다.

하정엽은 공연사업본부에게 크게 실망한 듯한 모습이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한록이 입을 열었다.

"공연사업본부가 스케쥴을 빠듯하게 잡은 것은 사실입니다. 다만 밴드 측에서도 가능하다고 했고, 비행기 지연이 없었으면 일정에 아무런 문제가 없었을 겁니다."

그를 통해 한록이 하고 싶은 말.

"사장님.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너무 노여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지신을 믿고 마음을 바꿔준 주과장. 그를 조금이라도 돕고 싶었다.

하정엽이 한록에게 한걸음 다가왔고, 한록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내 결정에 왈가왈부 하지마세요."

권위가 느껴지는 하정엽의 말. 그러나 한록은 하정엽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말했다.

"사장님. 공연사업본부는 싱어롱 상영을 받아줬고, 메인 스테이지를 넘기겠다는 제안 역시 수락했습니다. 제가 말씀드린 진짜 경쟁을 하는 곳입니다."

하정엽이 여전히 한록을 내려다보았다. 그러나 그의 실은 한록의 목을 조르지도, 몸을 칭칭 감지도 않았다.

하정엽이 한록의 말을 주의 깊게 듣고 있단 뜻이었다.

그 모습에 한록이 신중하지만 단호하게 말했다.

"이런 상황에서 공연사업본부를 징계하시면, 아무도 다른 본부와 협업을 하려 하지 않을 겁니다."

과장이 사장에게 징계에 대해 부탁을 한다. 명백히 선을 넘은 말이다.

"이한록 과장. 당신의 단점은 너무 건방지다는 겁니다."

그리고 하정엽은...

"이번에 한 말은 귀담아 듣겠습니다. 대신 다음은 없습니다."

한록의 말을 수용했다.

'귀담아 듣겠다.' 한록의 조언을 허투루 듣지 않겠단 의사표시.

아마 하정엽은 다음에도, 그 다음에도 한록에게 기회를 만들어줄 것이고, 한록의 조언을 주의 깊게 들어줄 것이다.

"알겠습니다. 용건이 끝났으면 가보세요."

하정엽이 말했지만 한록이 고개를 저었다. 의아한 얼굴의 하정엽에게 한록이 바로 답했다.

"사장님. 아직 용건이 남아있습니다."

"뭡니까."

"이대로 관객을 기다리게 하면 CK 페스티벌의 이미지가 실추 될 겁니다. 예산이 조금 초과 되더라도 관객들에게 보상이 필요합니다."

"어떤 식으로 말입니까."

"<퀸>의 예매권과 음식 구매권, 그리고 오늘 당장 마실 물이 필요합니다."

"예산은요."

"예매권은 예산에 포함되지 않으니 구매권과 물로 1억 정도 필요할 것 같습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1억을 달라는 한록의 요구. 그 말도 안 되는 요구에 하정엽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3억까지 써도 됩니다. 대신 불만을 확실하게 잠재우세요."

능력있는 부하가 합당한 이유로 예산을 요구한다. 몇 억 정도야 충분히 지원해줄 수 있었다.

"네, 알겠습니다."

그 말에 한록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하정엽에게 확인이라도 하듯 덧붙였다.

"공연사업본부와 함께 노력하겠습니다."

*

"사장님께서 허락하셨습니다."

"어?!"

영화사업본부의 부스로 돌아온 한록이 말했고, 모두가 깜짝 놀라 한록을 바라보았다.

"진짜? 방금 사장님이랑 말하고 온 거야? 괜찮아? 와, 어떻게 사장님이랑 독대를..."

한록이 하정엽과 대화를 하고 허락까지 받아왔다는 것에 깜짝 놀란 현차장. 그러나 한록이 단호하게 말했다.

"현차장님. 죄송하지만 시간이 없습니다."

"아, 그래. 빨리 회의 해야지."

현차장이 공연사업본부를 불렀고, 영화사업본부와 공연사업본부는 영화사업본부의 부스에 모였다.

긴장감이 감도는 분위기에 만난 두 본부.

두 본부는 페스티벌을 두고 싸우는 라이벌이지만 동시에 이 난관을 함께 해결해야하는 동료이기도 했다.

두 본부가 처음으로 머리를 맞대고 회의를 하기 시작했다.

"메모리 테잎의 축하 공연에 <퀸> 상영까지 하면 세 시간을 딱 채울 수 있을 겁니다."

회의를 주도하는 것은 역시 한록이었다.

"남은 건 <퀸>과 [블라인드]를 보기 위해 계속 스테이지에서 대기하던 관객입니다. <퀸>은 괜찮습니다. 스크린을 봐야하는 영화상영이다보니 지금부터 앞자리를 잡고 있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있어봤자 중간쯤을 잡았겠죠. 이쪽의 불만은 크지 않을 겁니다. <퀸> 상영권을 증정하는 것 정도로 마무리가 가능할 겁니다.

문제는 [블라인드]쪽입니다. 오늘 헤드라이너이다 보니 펜스 맨 앞줄에서 대기한 사람이 많을 겁니다."

한록의 말에 모두가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해외 밴드의 몇 십년만의 내한. 페스티벌의 큰 화제가 됐던 만큼 공연이 미뤄졌을 때 사람들의 분노는 더욱 커질게 분명했다.

"어쩔 수 없어. 최대한 싹싹 빌어야..."

"아뇨. 제대로 보상을 해줘야 합니다."

주과장의 말에 한록이 단호하게 말했다.

한록이 자신이 준비해 온 방안을 거침 없이 말하기 시작했다.

"우선 [블라인드]의 스탠딩 존에 구역별로 좌석표를 배부해야 합니다. <퀸>을 보지 않고 자리를 이탈해도 나중에 블라인드가 왔을 때 앞줄로 입장이 가능하게요. 아침 7시부터 줄을 선 사람들입니다. 이 방법이 아니면 사람들은 절대 화를 풀지 않을 겁니다."

거침 없이 말을 이어가는 한록.

"그리고 [블라인드]의 공연을 보면서 마실 물과,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음식 구매권을 증정할 겁니다. 화를 가라앉힐 순 없어도 우리가 미안해하고 있단 마음 정도는 전달 될 겁니다. <퀸>의 관객에게는 <퀸> 무료 예매권을 증정하려 합니다."

관객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 그리고 관객들의 불만사항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방법을 가져온 한록.

"잠깐. 그럼 예산이 한참 넘어가는데?"

"사장님께 3억까지 초과 사용해도 된다고 허가 받았습니다."

거기에 깔끔한 일처리까지.

그 모습에 주과장이 저도 모르게 감탄했다.

그리고 그건 주과장만의 생각이 아니었다. 한록과 일을 처음 해보는 공연사업본부 모두는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어떻게 이렇게 완벽하지?'

무대가 3시간이 비게 된 상황에서 대안을 가져온 한록. 거기에 관객들의 불만까지 염두에 두고 있다.

모든 상황을 빠르게 파악하고 완벽한 대처방법을 가져온다.

'대단하다. 그리고 이한록을 돕길 잘했다.'

그런 생각이 저절로 들만큼 한록과의 협업은 매력적이었다.

'이 페스티벌은 반드시 살려주겠다'던 약속. 한록은 이미 그 약속을 지키고 있었다.

"보상은 이 정도면 충분합니다. 다만, 그래도 기분이 상한 사람은 있을 겁니다. 그건 어쩔 수 없어요."

한록의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곰곰히 생각에 잠겨있던 현차장. 그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아니야, 어쩔 수 없지 않아."

그리고 새로운 방법을 얘기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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