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 회사원이 선넘으면 생기는일-67화 (67/263)

< 67 : 누군가의 변화(2) >

한록의 얘기를 듣고 부끄러웠다고 말하는 주과장.

생각해보면, 한록은 최대한 공연사업본부의 요구를 맞춰주려고 했다.

그런데 자신은 이미 협의가 된 상황에 어깃장을 놨고, 권부장은 일이 어그러지자 자신의 뒤에 숨으려 했다.

그리고 오늘 한록은 그 두 부분을 모두 지적했다.

부끄럽다. 그 외엔 할 말이 없었다.

한록이 주과장에게 말했다.

"과장님을 비난하려고 한 말은 아닙니다."

사실 말을 꺼내기까지 한록 역시 고민이 많았다.

이미 시작부터 영화사업본부에게 적대적이었던 공연사업본부.

그런 상황에서 자신의 말이 좋게 들리지는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을 한 이유.

'사람들이 내 말을 어떻게 여기든 상관 없다.'

애초에 회사가 한순간에 바뀌리라 기대하는 것 자체가 말도 안 되는 일이다.

다만 자신이 할 수 있는 선에서 노력하다 보면, 언젠가 하정엽처럼 바뀌는 사람이 나올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난 내 방식대로 할 거고, 그럼 언젠가 결과가 나올 거다.'

그런데 그 변화가 생각보다 빨리 다가온 모양이었다.

"그간 미안했고...앞으로 요청사항 같은 거 있으면 바로 얘기해요. 내가 처리할 테니까."

시선을 피하며 말하는 주과장. 주과장의 모습에 한록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네, 감사합니다. 같이 잘해 봐요."

*

"그럼 들어가 보겠습니다."

인사를 하고 사라진 한록과 혼자 남은 주과장.

'같이 잘해보자고?'

주과장은 복도에 서서 오늘 한록이 한 말을 떠올렸다.

한록이 올린 게시글 덕분에 락 페스티벌이 인기 검색어에 오르내렸다. 거기에 싱어롱 상영까지 공개된다면 페스티벌에 대한 관심은 더욱 뜨거워질 것이 분명했다.

한록의 말처럼 싱어롱 상영은 락 페스티벌의 인지도를 높이는 것에 도움이 된다. 그런데 권부장은, 아니 자신은 싱어롱 상영이 실패하기만을 바라고 있었다.

한록이 자신보다 더 잘할까 봐. 그럼 자신이 밀려날까봐.

그리고 오늘 한록은 '그런 건 그만하자'고 제안했다.

'이제 서로 방해하는 건 그만합시다.'

'그게 제대로 된 경쟁 아닙니까.'

한록의 말을 듣고 주과장이 처음으로 한 생각은...

'부끄럽다.'

회사의 어두운 면을 지적한 젊은 과장. 그 앞에서 느끼는 건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이었다.

그리고 두 번째로 든 생각은-

'그래, 그럴 수도 있겠다.'

'진짜 경쟁'을 하자는 한록의 말.

그에 대한 동의였다.

'나도 싱어롱 상영을 방해하지 않겠다. 아니, 최대한으로 돕겠다.'

'그래도 락 페스티벌은 우리 꺼다.'

한록이 말한 진짜 경쟁. 서로를 도우면서, 자신의 최선으로 승부하는 것.

그 경쟁을 한 번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

그날 밤. 강남의 한 카페.

최대리가 커피를 마시며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었다.

[오랜만이야, 윤일.]

통화상대는 부산영화제에 참석했던 최대리의 옛 동료, 제임스였다.

[한국은 어때?]

제임스의 말에 며칠 사이 있었던 일을 생각하는 최대리.

'네가 <퀸>을 맡을 수 있다.'

어느날 갑자기 최대리에게 말한 정부장. 아마 윗선에서 한록과 자신을 두고 저울질을 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에 대한 최대리의 감상.

<재밌어.>

윗사람들이 자신을 지켜보는 것. 한록과 라이벌 구도가 형성되는 것.

최대리에겐 모두 재밌는 일이었다.

[꽤 마음에 드는 것 같네. 돌아올 생각은 없어?]

<없어. 말했듯이 재밌는 일이 많거든. 이번엔 락 페스티벌에서 <퀸>을 상영하겠다고 하네.>

[오!]

최대리의 말에 제임스가 감탄을 내뱉는다.

[재밌는 시도네. 한 번 기사를 써보고 싶은데.]

제임스는 미국의 기자였고, 저번에도 부산영화제를 취재하기 위해 한국을 방문한 것이었다.

부산 영화제 생각 난 것인지 제임스가 그때의 일을 말하기 시작했다.

[저번에 '삼일의 삶'도 야외 상영을 했잖아. 한국은 그런 이벤트가 많은가 봐?]

<아니, 미국보다 더 드물지.>

[그래? 그런데 두 번이나 하고 있잖아?]

<'삼일의 삶'도 '퀸'도 다 같은 사람이 진행하는 거야.>

[재밌는 일을 하는군. 한국에도 너 같은 사람이 있네.]

비록 소규모 영화 위주였지만 헐리웃에서 다양한 시도를 하고 왔던 최대리.

'그 젊은 동양인'하면 다들 최대리를 떠올릴 만큼, 최대리는 헐리웃에서 나름대로 유명인사였다.

헐리웃에서 돌아올 때 역시 많은 사람이 최대리를 붙잡았다. 그러나 최대리는 '이제 한국에서 해보고 싶은 게 있다'며 망설임 없이 한국행을 택했다.

헐리웃의 신예였던 최대리와 한록을 비교한다는 것. 그건 제임스 나름의 극찬이었다.

제임스의 말에 최대리가 웃으며 답했다.

<그래. 내가 돌아가기 싫은 이유를 알겠지? 한 번 보러와.>

[취재는 하고 싶은데...저번에 '삼일의 삶'은 데스크에서 잘라버렸어. 이번에도 그럴걸?]

최근 헐리웃에서는 한국 영화에 대한 관심이 증가하는 중이었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한국 영화'에 대한 것이지, 영화 마케팅이나 이벤트에 대한 것은 아니다.

그러다보니 제임스가 한국까지 취재를 온 삼일의 삶 기사 역시 못쓰게 된 상황.

그러나 최대리는 걱정하지 말라는 듯 말했다.

<이번엔 미국에서 제작한 영화잖아. '더 필름'측에서 영상을 요청했어. 아마 미국에서도 꽤 이슈가 될 거야.>

[오, 더 필름이라.]

최대리의 말에 흥미를 보이는 제임스. 더 필름은 미국에서도 손꼽히는 영화 회사다.

그런 곳에서 한국의 영상 자료를 요청했다는 건 미국 상영에 한국의 마케팅을 활용하겠다는 것이었다.

[좋아. 참석할게. 내일 보고 올려야겠다.]

제임스가 마침내 결정을 내렸고, 최대리에게 물었다.

['삼일의 삶'이랑 '퀸' 모두 같은 사람이 진행한 거라고 했지?]

<응.>

[그럼 혹시 그 사람이랑 인터뷰 해 볼 수 있을까?]

<인터뷰 같은 걸 좋아하는 성격은 아닐 텐데. 그래도 한 번 물어 볼게.>

[고마워, 윤일. 한국엔 역시 뛰어난 사람이 많네.]

최대리에게 감사인사를 전한 제임스. 그가 장난스레 말했다.

[이러다 또 아시안 슈퍼스타 하나 나오는 거 아냐?]

<그럴 수도 있지. 대단한 사람이야.>

[너무 대단해서 사람들이 윤일을 잊으면 어떡해?]

그 말에 최대리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래?>

어쩔 수 없이 만들어진 한록과의 라이벌 구도. 앞으로 벌어질 피할 수 없는 경쟁. 그에 대한 최대리의 소감은-

<그럼 더 재밌겠네.>

한록 못지않은 자신감이었다.

[이래야 윤일이지.]

제임스가 짧게 웃으며 최대리에게 말했다.

[그럼 한국에서 보자.]

*

락 페스티벌과 싱어롱 상영의 일정이 모두 정해졌지만, 한록의 일은 끝난 것이 아니었다.

"네, 2일차에 와서 촬영해주시면 됩니다."

싱어롱 영상을 광고로 내보내기 위한 사전 작업.

"이과장님. 영화관 사업부에서 첫째 주부터 하이맥스 배정도 가능하다고 하시네요."

"아니에요. 첫째 주에는 티켓팅이 어려워야 소문이 잘 나니까 작은 관 위주로 해주세요."

"알겠습니다!"

싱어롱을 위한 영화관 배정.

"공연사업본부에서 싱어롱 맛보기 영상 업로드 해줬네요."

"오늘은 별다른 일 없었죠?"

"네. 싱어롱 질문 글에 댓글도 잘 달아주고 협조적이에요."

<퀸>의 하이라이트 부분을 유튜브에 업로드하기.

싱어롱을 준비하기 위한 일들을 하나둘씩 해결해 나가다보니, 날짜는 어느새 페스티벌 하루 전 날이 되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개봉 당일. GV팀은 새벽같이 현장에 도착했다.

"와...사람이 진짜 많네요."

락 페스티벌은 처음인 유선이 입구에 줄을 선 사람들을 보고 깜짝 놀라 말했다.

하루 평균 3만명 정도가 방문하는 CK 락페스티벌.

전체 관객수는 부산 영화제가 더 크지만, 하루당 관객수는 CK 락페스티벌이 훨씬 많았다.

거기에 부산영화제는 비프랜드와 영화의 전당을 제외하면 부산 곳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펼쳐지는 행사다.

반면 CK 락페스티벌은 3만명이 모두 한 곳에 모인다.

단순히 숫자로만 보자면, 3만 명이 한꺼번에 <퀸>을 보고 싱어롱에 참여할 수 있다는 말이었다.

3만명.

한국에서 가장 큰 영화관이 600석이니 그 50배 정도는 되는 규모다.

끝도 없이 펼쳐진 드넓은 초원과 커다란 스크린. 거기에 3만명까지 입장이 가능한 메인스테이지.

그곳에서 펼쳐질 <퀸>의 싱어롱 상영.

그 모습을 상상하던 현차장이 유선에게 속삭였다.

"나는 가끔 이과장의 스케일은 어디까지인가 싶어."

"그러게요...어떻게 3만명 앞에서 상영을 할 생각을 하셨을까요? 그것도 무료로 말이에요. 정말 신기한 분이에요."

"저 옆에 있습니다."

"헉! 죄송해요!"

한록이 옆에 있는 것도 잊고 감탄을 하던 유선. 한록의 말에 유선이 깜짝 놀라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3만명이나 들어갈 수 있는 건 메인스테이지만 그렇습니다. 서브 스테이지는 만명 정도가 모이면 꽉 찰 거예요."

"하긴, 그렇지. 메인 스테이지에서 했으면 진짜 세계 최대 규모였을 텐데."

"일정이 안 맞는다니 어쩔 수 없죠. 어쨌든 이건 공연사업본부의 페스티벌인데 주객이 전도되면 안 되니까요."

한록의 말에 현차장이 한록을 바라보았다. 현차장의 얼굴에 나타난 감정은 뿌듯함이었다.

현차장이 한록의 등을 툭 치더니 말했다.

"이과장."

"네."

"보기 좋다."

그리고 다정한 칭찬.

자신의 선택을 존중해주고, 성장을 알아주는 상사의 모습. 그 모습에 한록 역시 미소를 지었다.

*

12시가 지나자 잔디밭엔 사람들이 들어차기 시작했다. GV팀 역시 한구석에 마련된 영화사업본부 부스에 자리를 잡았다.

부산영화제의 흥분이 살아난 것인지 유선이 상기된 표정으로 한록에게 물었다.

"저희는 뭘 하면 될까요?"

"저희가 할 건 없어요."

"네?"

"다들 자리 잡으러 갔거나 일행들이랑 놀고 있겠죠. 이벤트를 하는 것도 아닌데 누가 기업부스에 관심이 있겠어요."

"저희 소장용 이벤트 티켓 발급해주잖아요."

"이벤트 티켓 안 받아도 입장은 되잖아요. 받으러 오는 사람은 관객 중 10%도 안 될 거예요."

[퀸 내한 콘서트]라는 이름으로 티켓을 발급하자는 하대리의 아이디어.

한록은 그 아이디어를 채택해 무료 상영이지만 참관객의 이름을 넣은 이벤트 티켓을 발급하기로 했다.

하지만 이런 이벤트에 참여하는 사람은 원래 많지 않은 편이다.

"내일 준비한 게 많으니까, 오늘은 그냥 쉰다고 생각해요."

살짝 시무룩해진 유선을 달래는 한록.

그러나 한록은 10분 만에 자신의 말을 취소했다.

"오늘 <퀸> 상영하는 거 맞죠? 진짜 노래 따라 불러도 돼요?"

"3일차는 안 하는 거예요?"

"이벤트 티켓 두 장 주세요."

싱어롱 상영에 대한 질문과 이벤트 티켓을 받기 위해 영화사업본부의 부스로 찾아오는 사람들.

자리에 앉으려면 누군가 찾아오고, 그 사람을 보내고 나면 또 다른 사람이 찾아와서 질문을 한다.

생각보다 훨씬 뜨거운 퀸에 대한 관심. 그 와중에 현차장은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한록과 하대리가 끊임없이 사람들을 맞이하고, 유선은 햄스터 쳇바퀴 돌리듯 열심히 티켓을 찍어내다 보니 드디어 현차장이 돌아왔다. 그리고 현차장과 함께 도착한 사람.

"안녕하세요, 매니저님."

영상 촬영을 위해 카메라맨과 함께 도착한 김준이었다.

페스티벌을 바라보는 김준의 표정은 떨떠름 그 자체였다.

소장용 티켓을 받기 위해 부스에 모여든 사람들. 그 사람들을 보자마자 김준 역시 느낀 것이다.

'뭐야. 사람 엄청 많은데?'

이벤트 티켓을 찾으러 오는 사람들이 이 정도면 실제 관람객은 그 10배는 될 것이다.

'진짜 잘 되면 어떡하지?'

그리고 그 생각에 쐐기를 받는 카메라맨의 말.

[준. 준이 말했던 것보다 훨씬 괜찮아 보이는데요?]

김준이 그 말을 듣고 이를 악물었다.

*

시간은 흘러 저녁 7시. GV팀은 이벤트 티켓을 위해 몰려드는 사람들을 돌려보내고 부스를 끝냈다.

해가 지고 페스티벌의 분위기는 이미 달아올랐다.

이제는 본격적으로 상영을 준비해야 할 시간이었다.

서브 스테이지는 이미 비어있는 상황. 장비를 설치하고 영상 테스트를 하고 있자니 사람들이 하나 둘 서브 스테이지로 모이기 시작했다.

잔디밭 여기저기에 맥주잔을 들고 자리 잡은 사람들.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는데 꽤 많은 사람들이 퀸을 보기 위해 잔디밭에 모여들었다.

그 모습을 본 한록이 현차장에게 말했다.

"차장님. 지금 we will rock you 한 번 틀어보겠습니다."

we will rock you. 퀸의 세계적인 명곡이자, 관객이 치는 박수가 반주가 되는 노래였다.

한록이 엔지니어에게 더 필름에서 보내준 영상을 틀어달라고 말하자, 잠시 후 커다란 스크린에서 <퀸>의 한 장면이 나오기 시작했다.

<퀸>이 we will rock you를 처음 만드는 순간이자 모두가 박수를 치는 장면.

"이거 we will rock you 아냐?"

"그게 뭔데?"

그 장면이 나오자 웅성거리기 시작하는 사람들. 그리고...

"이거. 쿵쿵짝."

영상에 맞게 박수를 치는 사람들.

누군가에게서 시작된 박수소리가 점점 번져가기 시작한다.

친구에게 설명 해주기 위해 박수를 치는 사람.

그 친구를 따라 박수를 치는 사람.

멀리서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박수를 치는 사람.

한 명, 두 명, 세 명, 네 명. 박수를 치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고, 어느새 이 자리에 모인 백 명 모두가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한치의 오차도 없이, 여기 모인 모두가 동시에 치는 박수.

그 박수를 들으며 한록은 생각했다.

'성공이다.'

싱어롱 상영까진 불과 30분밖에 남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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