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 회사원이 선넘으면 생기는일-66화 (66/263)

< 66 : 누군가의 변화(1) >

오후 2시. CK ENM 19층의 회의실.

공연사업본부의 락 페스티벌팀과 영화사업본부 GV팀이 한 자리에 모여 있었다.

페스티벌이 얼마 안 남은 지금. 오늘은 공연사업본부와 영화사업본부가 마지막으로 <퀸>의 상영 시간을 조율하는 날이었다.

'아, 씨발.'

위풍당당하게 들어오는 GV팀을 보고 공연사업본부의 주과장이 생각했다.

'이과장 마음대로 하세요.'

얼마 전의 대화로 하정엽이 한록의 편의를 봐주기로 약속한 상황.

주과장은 그 자세한 내막은 알지 못하나, 부장으로부터 '영화사업본부랑 싸우려 들지 마라' 라는 지시를 받았다.

'한 달 전에는 영화사업본부한테 밀리지 말라며. 그래서 기싸움을 한 건데 갑자기 말을 바꿔?'

주과장이 괜히 하대리에게 시비를 건 것이 아니다.

영화사업본부가 락 페스티벌에 참여하기로 결정 된 날. 부장이 자신을 호출했고 '절대 영화사업본부에게 밀리지 마라'고 지시를 했다.

그런데 부장은 갑자기 말을 바꿨고 윗사람들의 이해관계에 주과장만 놀아나게 된 상태.

그런 상황에서 한록이 회의를 소집했다.

'깨질 일만 남았구나.'

상대가 '그' 이한록이다. 잘생기고, 일 잘하고, 성격 더럽기로 유명한 이한록.

그 이한록이 윗사람들의 신뢰를 등에 업고 있었고, 자신은 이미 한록의 눈 밖에 난 상황.

이 회의가 자신의 청문회가 되리란 것은 불 보 듯 뻔한 상황이었다.

주과장만이 아니라 공연사업본부 모두가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한록이 또 얼마나 우리를 갈구려나.'

"다들 바쁜데 빨리 끝냅시다. 시작할까요?"

공연사업본부 음악공연부의 권부장이 입을 열었다. 그러자 바로 대답하는 한록.

"회의 시작 전에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한록의 말에 회의실이 쥐 죽은 듯 조용해진다.

"저번에 공연사업본부와 영화사업본부간에 트러블이 있었죠. 그래서 회의가 취소 됐었고요."

시작부터 주과장이 하대리에게 시비를 걸었던 일을 말하는 한록.

'아니...겉치레 같은 건 안 하는 건가? 이래도 되는 거야?'

'맞기 전에 그래도 준비는 시켜줘야 하는 거 아냐?'

'이래서 '그' 이한록이구나.'

바로 본론부터 나가는 한록과, 그런 한록의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란 공연사업본부.

그러나 아직 놀라기엔 일렀다.

"그때 저희 직원에게 말도 안 되는 요구를 하셨죠. 그 부분 먼저 해결하고 회의 진행했으면 합니다."

'내 부하한테 난리 친 거 사과해라.'

한록은 아예 시작부터 선전포고를 해버렸다.

"이과장. 이 얘기는 나중에 하자. 다들 바쁘잖아."

한록의 말을 자르는 권부장. 권부장이 테이블 아래로 주과장의 다리를 살짝 두드렸다.

'이 정도는 내가 커버친다.'

마침 정부장과 현차장이 출장으로 자리를 비운 상황.

한록은 부장도, 차장도 아니라 과장이다. 아무리 '그' 이한록이어도 다른 사업본부의 부장을 상대로 깽판을 칠 수는-

"아뇨. 이 일이 해결되기 전까지는 회의 진행할 생각 없습니다."

있었다.

"이과장. 적당히 넘어가자니까. 일이 먼저지, 지금 감정싸움 할 때야?"

"저희는 적당히 넘어갈 생각 없습니다."

"별 것도 아닌 일로 왜 이리 예민해? 협업하다보면 이 정도 일은 종종 있는 거야."

"먼저 시비를 거신 쪽이 예민하다고 할 상황은 아닙니다."

'진짜 환장하겠네!'

한록의 말에 말문이 막힌 권부장. 한록이 저렇게 나오니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원하는 게 뭐야. 사과? 그렇게까지 해야겠어?"

"네. 해야겠습니다."

한록의 태도는 강경했다.

주과장은 하대리가 몇 번이나 '확인 후 연락 하겠다'고 했지만 끈질기게 하대리를 물고 뜯었다.

모두가 지켜보는 사무실에서 거의 한 시간이 넘게 공연사업본부에게 시달린 하대리.

'그렇게까지 사람을 몰아붙였으면서, 본인들은 사과 하나 못하겠단 건가?'

고초를 겪은 부하를 위해 사과를 받아주는 것. 한록은 그 정도는 해줄 수 있는 상사였다.

'주과장. 대충 끝내자.'

안되겠다고 느꼈는지 주과장의 다리를 다시 툭툭 치는 권부장.

'이 새끼를 진짜 죽여 말어?'

본인이 영화사업본부에게 밀리지 말라고 했으면서 이제 와서 주과장에게 모든 일을 넘기는 권부장.

그러나 어쩌겠는가. 회사에서 상사의 명령은 절대적이다. 주과장이 이를 꽉 악물고 말했다.

"그때는 제가 지나쳤습니다. 미안합니다, 이과장."

"저한테 사과하실 게 아니라 하대리한테 하셔야죠."

"...하대리. 미안합니다."

"괜찮습니다. 지난 일인걸요."

결국 주과장이 사과를 했고, 하대리가 사과를 받아들였다.

'...속 시원하네.'

속으로 생각하는 하대리.

회의에 들어오기 전 한록은 하대리에게 '주과장에게 사과를 받아주겠다'고 말했다.

'저는 괜찮습니다. 회사 다니다보면 이럴 때도 있는 거죠.'

자신의 이름이 회의 중에 나오는 것. 그리고 다른 사업본부 사람에게 사과를 받는 것.

하대리 입장에서는 둘 다 불편한 일이기 때문에 거절했으나, 한록은 단호하게 말했다.

'아뇨, 사과 받고 가야합니다. 본인 잘못도 아닌 일 때문에 참지 마세요.'

그때는 한록이 지나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막상 사과를 받고 나니 생각이 좀 달라졌다.

'그래. 내 잘못 아니지. 그리고 사과도 받았고.'

이제 와서 생각해보니 사과를 받고 싶지 않았던 게 아니다. 어느 누가 이유없이 욕을 먹었는데 화가 안 나겠는가.

다만 사과를 받을 수 없을 것이라고 미리 포기했던 것이다.

그리고 한록은 그걸 알고 대신 사과를 받아주었다.

하대리는 생각했다.

'진짜 멋진 상사다.'

부하의 뒤로 숨은 권부장과 대신 사과를 받아준 한록.

'부럽다. 나는 저런 상사 없나.'

'권부장 이 개새끼...'

회의실의 모두는 그 두 명의 차이를 생각하고 있었다.

"이제 됐죠? 그럼 회의 진행합시다."

그리고 권부장이 상황을 넘기려 할 때 한록이 말했다.

"권부장님은 하실 말씀 없으십니까?"

*

"...나?"

"네."

"내가 무슨 말을 해?"

영문을 모르겠다는 권부장. 권부장을 보고 한록이 말했다.

"미리 협의 된 내용이었던 상영시간을 바꾸자고 한 게 주과장님 독단은 아닐 텐데요."

전화를 한 것은 주과장이지만 그걸 지시하고 승인한 것은 권부장이다.

진짜 사과를 해야 하는 사람은 주과장이 아닌 권부장.

'비겁하게 부하 뒤에 숨는 거냐.'

한록은 지금 권부장에게 그 점을 지적한 것이었다.

자기 얘기가 나오자 권부장이 인상을 팍 쓰고 답한다.

"이과장. 적당히 좀 하지? 여기 뭐 싸우러 온 거야? 앞으로 같이 일 안할 거야?"

"앞으로는 이런 일 없이 일하기 위해서 하는 겁니다."

"이런 식으로 나오면 난 일 못해. 사람이 적당히 넘어갈 줄 알아야지, 어떻게 이렇게 하나하나 따지고 들어?"

"네, 그럼 회의 여기서 끝내겠습니다. 가보겠습니다."

그 말과 함께 정말 자리에서 일어난 한록. 하대리와 유선 역시 한록을 보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 뭐하는 거야?"

"저도 이런 식으로 나오시면 일 못 합니다. 회의 끝냅시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서류를 챙기는 한록.

'그냥 협박을 하는 게 아니다.'

한록은 저번에도 회의를 취소했고, 공연사업본부의 추태를 바로 최경준에게 보고했다.

그리고 권부장은 과장 하나 컨트롤 하지 못하냐며 공연사업본부장에게 크게 혼이 났다. 그런 상황을 또 반복할 수는 없었다.

"이과장. 잠깐만. 나한테 뭘 바라는 거야?"

결국 권부장이 항복을 선언한다. 한록이 권부장을 보고 말했다.

"페스티벌이 끝날 때까지 협조하시는 겁니다. 다시는 이런 일이 없었으면 합니다."

한록의 요구사항은 간단했다. '일 하는데 방해하지 마라.'

이 정도면 감사하다고 넙죽 엎드려야 한다. 그걸 안 권부장이 얼른 답했다.

"알았어, 알았어. 그럴게. 내가 미안해."

"네, 알겠습니다."

결국 권부장의 사과까지 받아낸 한록. 한록이 다시 자리에 앉았다.

"SNS 업로드는 이미 협의된 부분이니 다시 얘기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상영시간은 다시 조율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회의를 진행하는 한록. 드디어 오늘의 안건인 상영시간에 대한 얘기가 나왔다.

공연사업본부는 진 빠진 얼굴로 한록을 바라보았다.

'이한록이 우리 프로젝트를 대체 어디까지 가져가려나.'

"다시 말씀드리지만, 야외 상영이기 때문에 해가 진 저녁시간대가 필요합니다. 그게 아니면 천장을 설치해야하는데 이 부분은 공연에 방해가 될 겁니다."

한록은 첫째 날 저녁에 두 차례 상영을 원했고, 공연사업본부는 저녁 시간을 두 번이나 비울 수는 없다고 말을 바꾼 상황.

그러나 하정엽이 한록의 편으로 돌아선 지금 상황으로 봤을 때, 공연의 피크타임인 저녁을 뺏기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1일차 저녁 8시, 2일차 저녁 8시 두 번에 나눠서 상영을 하겠습니다."

"이틀이나 하겠다고?"

"최소 두 번은 해야지 싱어롱의 의미가 있습니다."

"그래도 이틀이나 뺄 순 없어. 차라리 1일차 저녁시간에 두 번을-"

"그건 안 된다고 말하지 않으셨습니까?"

"...."

한록의 지적에 할 말을 잃은 권부장.

사실 1일차에도 얼마든지 공연 사이에 상영을 끼워 넣는 건 가능했다.

괜히 한록의 말에 반대했다가 이틀을 통째로 뺏기게 생긴 권부장.

'아예 페스티벌을 먹어버리려 하는구나.'

'우리도 뼈 빠지게 만든 건데, 상사 하나 잘못 만나서...'

그렇게 공연사업본부 모두가 침울해졌을 때 한록이 의외의 제안을 했다.

"대신 상영은 모두 *서브 스테이지에서 진행하겠습니다."

*페스티벌의 주 무대보다 규모가 작은 무대.

한록의 말에 권부장이 깜짝 놀라 물었다.

"원래는 메인무대를 달라고 했잖아?"

메인무대와 서브무대는 관객을 수용할 수 있는 정도가 다르다. 그런데 한록이 메인 무대를 양보하겠다는 상황.

'이한록이 무슨 일이지?'

모두가 놀라는 와중에 한록이 말했다.

"공연사업본부의 일정에 안 맞는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페스티벌을 방해할 생각은 없습니다."

한록은 어제 현차장과의 대화를 떠올렸다.

*

"메인 무대를 포기하겠다고? 정말?"

한록의 말에 놀라서 묻는 현차장.

"서브 무대만 해도 우리가 원했던 인원수는 채울 수 있긴 한데...그래도 메인무대를 가져오는 게 낫지 않아?"

"그럼 공연사업본부가 걱정하는 것처럼 저희에게 너무 많은 이목이 집중될 겁니다. 서브 무대로도 충분합니다."

"뭐, 나야 그게 좋지. 서브 무대여도 저녁시간이면 관객은 충분할거고. 근데 이과장이 이렇게 얘기할 줄은 몰랐네."

되도록 적을 만들지 말자는 주의인 현차장. 반대로 일을 위해선 뭐든 할 수 있다는 태도인 한록.

현차장은 한록의 태도가 바뀌었다는 점에서 놀란 것 같았다.

"사장님 허락도 받았겠다, 아예 남는 시간마다 상영을 하자고 할 줄 알았어."

"그 생각도 안 한 건 아닙니다."

현차장의 말이 맞았다. 한록 역시 처음에는 락 페스티벌의 모든 시간대를 가져오려 했다.

하지만 하정엽과의 대화 이후, 한록에게 드는 생각이 하나 있었다.

'내가 이러는 게 공연사업본부랑 뭐가 다르지?'

한록이 CK ENM에서 계속 당해왔던 일이자 하정엽에게 지적했던 부분.

'CK ENM의 직원들은 경쟁이 아니라 서로 방해를 하고 있다.'

락 페스티벌은 공연사업본부가 1년 내내 준비해온 행사다. 거기에 갑자기 끼어 든 영화사업본부.

공연사업본부의 사람들이 영화사업본부에게 화가 난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반응이었다.

그건 한록 또한 처음부터 알고 있는 사실이었고, 그래서 최대한 공연사업본부의 의견을 수용하려고 했다.

한록이 화가 난 것은 공연사업본부가 상영 자체를 망치려고 한 부분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자신이 싱어롱 상영을 위해 공연사업본부의 일정에 피해를 끼친다면.

그건 CK의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 짓을 하는 것이었다.

'무료 상영이니 관객이 많이 올수록 매출이 늘어나는 것도 아니고, 영상 촬영도 한 번이면 충분하다.'

이미 영화사업본부가 유리한 위치를 점한 상황.

그렇다면 한록은 방해가 아니라 건전한 경쟁을 하고 싶었다.

*

"진짜 서브 스테이지에서 하겠다는 거야?"

여전히 한록의 말이 믿기지 않는 듯한 권부장.

정글처럼 서로의 실적을 뺏으려는 CK ENM에서 한록 같이 나오는 사람을 처음 본 것이다.

"처음부터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저희는 락 페스티벌을 뺏으려는 게 아니라 락 페스티벌을 통해 도움을 받으려는 겁니다. 그리고 저희도 싱어롱 상영으로 페스티벌에 도움을 줄 수 있을 겁니다."

권부장에게 말하던 한록이 주과장을 바라본다. 그리고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

"공연사업본부 측에서 왜 저희에게 적대적이신지 충분히 이해합니다. 다만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건, 경쟁을 하더라도 서로가 이득을 볼 수 있다는 점입니다."

'치사한 수는 쓰지 않겠다.'

'누군가를 밟으면서 위로 올라가진 않겠다,'

하정엽과의 대화 후 한록이 다짐했던 것들.

그걸 막상 입으로 내려니, 한록 역시 조금 쑥스러웠다.

'그래도 말해야한다.'

하지만 회사가 바뀌길 원한다면 자신부터 변해야 한다.

"앞으로도 영화사업본부는 공연사업본부에게 최대한 협조할 생각입니다. 그러니까 이제 서로 방해하는 건 그만합시다."

그렇게 생각한 한록이 모두를 보고 말했다.

"그게 제대로 된 경쟁 아닙니까."

*

회의가 끝났고, 모두 회의실 밖으로 향했다.

"먼저 가세요. 저는 본부장님께 보고 드리고 가겠습니다."

하대리와 유선을 보낸 한록. 그때 누군가 한록을 불렀다.

"이과장."

주과장이었다.

굳은 표정의 주과장. 그가 한록에게 말했다.

"이번 일은 미안합니다."

"괜찮습니다. 이제 더 이상 사과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깔끔하게 답한 한록. 사과를 받았으니 더 이상 이전 일을 물고 늘어지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아니. 내가 잘못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주과장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이과장 얘기 듣고, 좀..."

그리고 한참동안 망설이다가 말했다.

"부끄러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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