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4 : 위기는 기회로(2) >
고작 과장이 사장에게 쏟아내는 비판. 그걸 듣고 있던 하정엽이 말했다.
"이 회사에서 나가겠다는 소리군요."
아무런 감정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서늘한 하정엽의 목소리. 그러나 목소리와는 다르게 하정엽의 실이 한록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하정엽의 실이 한록의 목을 위협적으로 휘감았고, 한록은 자신이 CK에 몸 담아온 그간의 기억을 떠올렸다.
'나는 누구보다 이 일을 사랑한다. 그건 당당하게 말할 수 있다.'
한록이 너무나 사랑하는 일. 그리고 그 일을 만나게 해준 CK.
이 곳에서 온갖 꼴을 봤지만 한록이 CK에 애착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CK에서 지내온 세월들과 이 곳에서 경험한 일들이 너무 많으니까.
그래서 회귀 후에도 한록은 ck enm에 남아있었다.
-하지만 이런 일이 계속 반복된다면.
"그건 사장님 선택에 따라 달라질 겁니다."
그리고 하정엽이 변하지 않는다면.
'그렇다면 대체 왜 이곳에서 일을 해야 한단 말인가.'
한록이 자리에서 일어났고, 하정엽에게 인사를 했다.
하정엽이 이 말을 듣고 과연 무슨 생각을 했을까. 하정엽의 표정에선 아무런 감정을 읽을 수 없었다.
다만 확실한 것 하나.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한록은 정말로 결단을 내렸단 사실이었다.
*
"감사했다라."
한록의 마지막 말이 의미하는 것.
CK가 계속 똑같은 모습을 보인다면 한록이 이곳을 떠나겠다는 사실이었다.
하정엽이 생각에 잠겨있을 때 최경준이 하정엽의 사무실을 찾았다.
책상에 앉은 하정엽. 그 앞에 뒷짐을 지고 선 최경준.
최경준이 하정엽에게 물었다.
"사장님. 얘기는 잘 하셨습니까."
"상당히 건방진 사람이군요."
"원래 그런 녀석입니다."
웃으며 말하는 최경준. 최경준에게 하정엽이 물었다.
"그런데도 저와 만나게 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 역시 건방지게 들릴 수 있겠지만..."
그렇게 말하며 하정엽을 지그시 바라보는 최경준.
"사장님이 이 일로 깨닫길 바라는 게 있습니다."
자신의 상사에게 '깨달음을 얻어라'라고 말하는 최경준.
하정엽이 그 말을 듣고 곰곰이 생각하다 말했다.
"많은 걸 느끼긴 했습니다."
후계자의 자리에 눈이 먼 젊은 사장. 그는 오늘 자신이 느낀 감정들이 대체 무엇인지 헤아리고 있었다.
"회장님이 최윤일을 데리고 가라고 말씀하신 것 압니다. 저 역시 좋은 선택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굳이 이한록 과장의 프로젝트를 뺏을 필요는 없었습니다."
하정엽이 마음이 급해 챙기지 못했던 부분이다. 최경준이 그 부분을 지적했다.
"가장 큰 프로젝트를 맡겨야 합니다. 그래야지 형님이 아니라 저한테 남아있겠죠."
"왜 그리 최대리를 신경 쓰시는 겁니까. 그래봤자 대리입니다. 사장님의 직원이란 말입니다."
"최대리가 중요한 게 아니라 아버지의 지시란 게 중요합니다."
그 말에 최경준이 눈앞에 앉은 남자를 바라보았다.
냉철하고 거만한 젊은 사장. 한국에서 손꼽히게 높은 지위를 가진 젊은 청년. 그의 발 밑에 머리를 조아릴 사람이 수만명이다.
그러나 하정엽의 모든 것은 하태준이 만들어준 것이다.
휘황찬란한 사무실. 재계 13위 집안의 자식이라는 위치. 그 모든 것은 아버지의 마음에 들어야 지킬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아버지의 인정을 받기 위해 평생을 달려온 하정엽. 그리고...
"언제까지 아버지 얘기를 하실 겁니까."
"선생님."
"사장님, 다시 생각하셔야 합니다."
"이 곳은 사장님의 회사입니다."
ck enm의 사장 하정엽.
최경준의 말에 하정엽이 고개를 들었다.
'최경준은 내 사람이지.'
아버지가 그렇게 말했던 남자가 자신의 눈앞에 서 있었다.
아버지의 사람이었던 최경준. 아버지가 만들어준 사장 자리. 아버지가 물려준 사장실. 아버지가 만들어준 모든 것.
그러나, 이제는 자신이 책임져야 할 것들.
"그리고 저희는 사장님의 사람들입니다."
최경준이 말했다.
*
'이 곳은 사장님의 회사입니다.'
최경준의 말.
'나는...'
그 말에 하정엽이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생각했다.
'나는 이 곳의 주인이 아니었다.'
CK ENM의 모든 것을 맡았고 누구보다 솔선수범해서 CK ENM을 이끌었다.
하지만 자신이 진짜로 이곳의 사장이란 생각은 해본 적이 없다. 여긴 아버지의 회사니까.
그래서 하태준의 인정에 급급했고, 하태준의 말 한마디에 흔들렸다. 그 결과.
'이런 회사에서 누가 일하고 싶겠습니까.'
오늘 한록이 말한 아픈 사실이자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던 솔직한 진심.
자신의 리더십이 실패했단 사실이었다.
'나는 실패했다. 난 사장답게 굴지 못했고, 회사를 이렇게 만들었다.'
한록의 지적은 정확했다. 이제는 인정할 수 밖에 없다.
'감히 내 앞에서 내가 실패했다고 얘기 하다니.'
자신의 면전에서 치부를 지적한 한록.
하정엽은 한록에게 화를 낼 수도 있었고, 지금 당장 한록을 자를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러고 싶지 않았다.
여태 아무도 자신에게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 언제나 하정엽의 말은 정답이었고 하정엽에게 반대할 수 있는 건 아버지와 최경준 뿐이었다.
그래서 직원들은 그저 하정엽의 말을 듣는 기계일 뿐이었다. 최윤일 역시 마찬가지. 아버지의 인정을 위해서 몇 번 쓰고 나서 갈아치울 존재였다.
그런데 오늘 한록은 자신의 행동에 따라 회사를 그만둘지 말지 결정하겠다고 말했다.
'이런 회사는 발전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아무도 하지 못한 말을 했다.
그런 사람을 자신은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나는 어떻게 해야하는가.'
실패한 리더십을 가진 사장으로서, 그리고-
'하태준의 아들이 아닌 CK ENM의 사장으로서.'
하정엽의 고민은 쉽게 끝나지 않았다. 하정엽이 충격을 받은 얼굴로 앉아있는 것을 본 최경준은 조용히 몸을 돌렸다. 그리고 생각했다.
'이한록. 네가 성공했다.'
최경준이 사장실을 벗어났다.
*
하정엽은 아주 오래 생각에 잠겨있었다.
'아버지가 아닌 내 회사. 내가 이끌어야 할 회사. 내가 만들고 싶은 회사.'
'내가 가지고 싶은 사람들.'
마침내 결정을 내린 하정엽이 비서에게 말했다.
"이한록 과장을 불러오세요."
*
사장실에서 다시 마주한 한록과 하정엽. 할 말을 모두 한 한록은 후련한 동시에 착잡한 표정이었다.
'최대리와 함께 일을 맡으라고 하겠군.'
하정엽의 표정이 변한 걸로 봐서, 아마 하정엽은 생각을 바꾼 것 같았다.
과거 오과장에게 식물을 뺏겼던 것에 비하면 장족의 발전이다. 하지만 앞으로도 계속 이런 일을 겪으리라 생각을 하니 마냥 기쁘지만은 않았다.
'최대리와 같이 프로젝트를 맡으라고 한다면...'
'아쉽지만 더 이상 여길 다닐 생각은 없다.'
한록의 답은 이미 정해진 상황.
한록이 사회생활 전부를 바친 곳. 회귀를 해서까지라도 돌아왔던 곳.
이곳을 떠난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좋지 않았다.
'대체 내가 뭐 때문에 이 회사에서 악을 쓰고 버텨왔을까.'
지나간 과거들이 무의미하게 느껴지고 두고 떠나야할 팀원들이 걱정된다.
지금 한록의 기분을 한마디로 설명하자면-
'내가 과거로 돌아오면서까지 보고 싶었던 게 이런 회사인가.'
마음이 아팠다.
대체 내가 회사에 뭘 바란걸까. 스스로에 대한 후회에 잠긴 한록.
그리고 하정엽은...
"내가 잘못 판단했습니다."
한록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말을 했다.
*
'최대리와 같이 일을 해라.'
그 정도의 말을 예상했던 한록. 한록이 놀라서 하정엽을 바라보았다.
한록과 시선이 마주쳤지만 하정엽은 아주 오래 침묵했다. 그리고 긴 침묵 끝에 입을 열었다.
"내가 미숙했습니다. 이한록 과장의 말이 맞습니다. 납득할 수 없는 이유로 이한록 과장의 프로젝트를 뺏으려 했습니다."
"...마음이 바뀌신 겁니까?"
놀란 얼굴로 묻는 한록.
'이런 회사에서 누가 일하고 싶겠냐.'
그간의 모든 울분을 담아서 한 말이다. 그러나 한록 역시 하정엽이 결정을 바꿀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네. 내 실수입니다."
그리고 하정엽은...놀랍게도 정말 진심인 것 같았다.
한록은 눈앞의 남자를 바라보았다.
후회를 담은 눈으로 한록을 바라보는 남자. 한록은 오늘 처음으로 하정엽이 자신과 비슷한 나이대의 청년이란 것을 느꼈다.
아직 젊은 사장. 그렇기에 아버지의 인정을 받기 위해 발버둥치고, 실수를 한다.
그리고 그렇기에 변화한다.
"이 일은 계속 이한록 과장이 담당하도록 지시하겠습니다."
하정엽의 말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일을 진행하는데 여러모로 어려움을 겪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당신 말이 맞습니다. 내 책임입니다. 모든 편의를 봐줄 테니, 걱정 말고 일하길 바랍니다."
퀸에 대한 전폭적인 지지를 약속하는 하정엽.
한록이 얼떨떨한 기분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믿기지 않는 말들을 한 하정엽. 그러나 그의 표정은 침착했다. 이 말이 그저 기분에 따라 충동적으로 한 말은 아니란 뜻이었다.
하정엽이 한록에게 말했다.
"할 말은 끝났습니다. 가보세요."
"네, 알겠습니다."
하정엽에게 인사를 하고 일어난 한록.
분명 좋은 일인데 아직 실감이 나기보다는 당황스러웠다.
그런 와중에도 역시 일에 대한 집념만은 변하지 않는 것인지, 멍한 한록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는 생각이 있었다.
한록이 문을 열다가 하정엽을 바라보고 말했다.
"공연사업본부와 무대 시간 때문에 의견차가 있었습니다. 페스티벌에 피해가 가지 않는 선에서 영화사업본부 측에서 상영 시간을 지정해도 되겠습니까."
"네. 원하는 대로 하세요."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일을 하나 해결한 한록.
'이 사람이야말로 제대로 일을 해보려는 사람이다.'
그리고 그런 한록을 바라보는 하정엽.
하정엽이 문을 나서는 한록에게 말했다.
"이한록 과장."
"네, 사장님."
"이 일은..."
"내가 미안합니다."
과장에게 전하는 사장의 사과.
그 사과에 한록은 놀란 듯 눈을 크게 떴고, 잠시 당황하다가...
"괜찮습니다, 사장님."
오늘 처음으로 미소를 지었다.
*
사장실에서 나온 한록은 본부장실로 향하며 생각에 잠겼다.
'많은 게 변했다.'
과거 식물을 눈뜨고 뺏겼던 한록. 그러나 이번에는 자신의 프로젝트를 지켜냈다. 그리고 하정엽의 사과를 받아냈다.
'이렇게 나올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는데...'
한록 역시 하정엽이 바뀌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을 뿐이고, ck enm이 발전할 수 없단 점에 안타까움을 느꼈을 뿐이다. 그러나 하정엽은 정말로 변화했다.
'앞으로는 이런 일이 생기지 않을 것이다.'
한록의 마음에 든 확신. 그리고 또 다른 생각.
'CK ENM이 변하고 있다. 나 때문에.'
자신의 의견이 받아들여지는 회사. 자신의 말에 귀를 기울여주는 사장.
그것들로 인한...
'이 곳이 조금 더 변화했으면 좋겠다.'
처음으로 그려보는 회사의 미래.
"생각보다 빨리 왔군."
한록이 본부장실에 도착했다. 한록을 기다리고 있던 것인지 문 앞에 서 있던 최경준이 한록을 반겼다.
최경준이 문을 열어주었고, 한록은 안으로 향했다.
"일이 잘 끝났어. 사장님이 자네를 전폭적으로 지원하라고 하시더군. 잘했네."
최경준은 상당히 기분이 좋아보였다. 최경준이 한록을 보고 물었다.
"사장님의 결정을 자네 손으로 바꾼 기분은 어떤가."
최경준의 질문은 한록 역시 생각해오던 것이었다.
'왜 이렇게 마음이 들뜨는 걸까.'
왜 자꾸 내일을 생각하게 되고, 하정엽을 생각하게 될까.
과연 오늘 일은 자신에게 어떤 기억을 남겼을까.
잠시 생각해보던 한록이 입을 열었다.
"영화가 성공했을 때만큼 기분 좋습니다."
그 말에 최경준이 가볍게 웃었다.
"다행이군. 당분간 자네를 괴롭힐 일은 없을 거라네. 자네가 원하는 것처럼 일만 할 수 있겠군."
'일만 할 수 있다.'
한록이 늘 바라던 일이면서 동시에 회귀 후 한록이 가진 목표이기도 했다.
'일만 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고 싶다.'
'아무도 나를 방해할 수 없도록 하겠다.'
그게 한록이 최경준의 사람이 되겠다고 생각한 이유고, 지금까지 여러 일들을 처리해온 이유였다.
그러나 이 모든 게 이뤄진 지금. 그리고 하정엽의 변화를 지켜본 오늘.
한록에게는 또 다른 목표가 생겼다.
한록이 최경준을 보고 말했다.
"본부장님. 새로운 목표가 생겼습니다."
"뭔가."
"앞으로도 회사에 이런 변화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자신의 손으로 바꿔나가는 회사. 누군가 자신의 말을 들어주는 회사. 남의 회사가 아닌 내 회사.
내가 만들어가는 회사.
한록은 더 높은 곳에 올라가서, 더 많은 사람을 만나며, 그런 회사를 만들어가고 싶었다.
'일개 사원으로 이런 생각을 하는 게 맞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으나 고민은 짧았다.
오늘 한록은 실제로 회사를 바꿨으니까.
생각을 정리한 한록이 고개를 들었다.
"그때 저한테 높은 곳으로 올라갈 준비가 됐냐고 물어보셨습니다."
"그래. 자네는 명확히 답을 하지 않았지."
"그때는 준비가 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답을 드릴 수 있겠습니다."
한록과 최경준의 시선이 마주쳤고, 한록이 자신있게 말했다.
"이제 준비 됐습니다."
이 회사를 바꿔나가겠다.
긴 세월을 거쳐, 한록이 처음으로 가지게 된 목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