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 회사원이 선넘으면 생기는일-63화 (63/263)

< 63 : 위기는 기회로(1) >

"하실 말씀 있으시면 다른 사람 말고 지금 저한테 하시기 바랍니다."

[...]

하대리한테는 사사건건 트집을 잡던 공연사업본부. 그러나 한록이 전화를 받자 아무런 말을 하지 못한다.

한록이 다시 물었다.

"상영 시간 부분에서 문제가 있는 겁니까?"

[네, 그 부분...저녁 시간을 두 번이나 빼기가 어렵다는 결론이 나왔습니다.]

"알겠습니다. 시간대는 저희도 고려해보겠습니다."

[어...]

공연사업본부가 놀란 듯 중얼거렸다. 한록의 성격은 익히 들어 알고 있는 상황. 그런데 한록이 한발 물러나니 당황한 것이다.

'싸울 생각은 없다.'

공연사업본부와는 락 페스티벌 당일까지 함께 일을 해야한다. 한록이 차분하게 물었다.

"말씀하실 건 이것 뿐이십니까?"

[그게...]

"협의가 필요한 부분 정확히 말씀해주시면 반영하겠습니다. 지금 전부 말씀해주세요. 게시글 얘기도 하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내부 회의 후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회사에서 '내부 회의 후 연락하겠다'가 의미하는 사실.

지금은 딱히 할 말이 없단 것이다.

'당연히 할 말이 없겠지. 게시글은 이미 올리겠다고 얘기한 상황이니까.'

그런 상황에서 게시글에 대해 물고 늘어진 건 결국 하대리한테 화풀이를 한 것이다.

하대리한테 미안하고, 공연사업본부에게 화가 나기도 한 상황. 그러나 한록은 화를 누르고 말했다.

"앞으로 하실 말씀이 있으시면 제게 바로 연락 주시기 바랍니다. 빠르게 답변 드리겠습니다."

[...네. 그 편이 낫겠네요.]

한록이 정중하게 나오자, 공연사업본부도 딱히 할 말이 없어졌다.

한록과 한 판 붙겠다는 각오도 했는데 오히려 한록이 자신들의 편의를 봐준다.

그런 상황에서 누가 할 말이 있겠는가.

머쓱해진 공연사업본부가 괜히 한 마디를 덧붙였다.

[진작 이과장님한테 연락드릴 걸 그랬네요. 그럼 이렇게 얼굴 붉힐 일도 없었겠어요. 지금 전화 받으신 분은 회의해보시겠단 말만 계속하셔서...]

모든 걸 하대리의 탓으로 돌리는 공연사업본부. 그 말을 듣자 한록은 열이 확 오르는 것을 느꼈다.

'좋게 가려고 했더니 우리 팀을 욕하고 있군. 지금 뭐하는 거지?'

"주과장님."

한록이 공연사업본부의 말을 끊었다.

"저희도 공연사업본부에서 왜 제가 없을 때 하대리님한테 전화를 했는지, 왜 게시글을 지우라고 하시는지 알고 있습니다. 저랑 진짜로 대화를 하고 싶으셨으면 지금이 아니라 회의 중에 말씀을 하셨겠죠."

여태까지 넘기려고 하던 부분을 지적하는 한록.

"그래도 싸우지 않으려고 적당히 넘어가려 했는데, 자꾸 불화를 조장하시는군요."

한록의 말투가 어느새 날카로워졌다.

"하대리님은 담당자인 저한테 안건 전달한다고 하셨습니다. 원래 해야 할 일을 하신 겁니다."

이미 얘기 끝난 걸로 트집 잡지 마라.

내 부하에게 화풀이 하지 마라.

회의가 필요하면 나한테 요청해라.

당연하지만, 가끔 말도 안 될 정도로 지켜지지 않는 것들. 한록은 그 부분에 대해 얘기하는 것이었다.

[불화를 조장하다니요. 그냥 빨리 대처해달라고 말씀 드린 겁니다.]

"하..."

한록이 한숨을 쉬고 이마를 짚었다.

회사를 다니다보면 만나는 수많은 사람들.

윤감독처럼 한록의 말을 이해하는 사람도 있고, 더 필름이나 공연사업본부처럼 절대 얘기가 통하지 않는 인간들도 있다.

어찌 보면 일을 하는 것보다 이런 사람들을 다루는 게 더 어렵다. 절대 말이 통하지 않고, 굽히려 하지 않는 인간들.

한록이 이런 사람들을 다루는 방법은 하나였다.

"주과장님. 적당히 합시다."

한록이 주과장에게 사납게 쏘아붙였다.

"우리도 생각이란 게 있습니다. 공연사업본부가 본인들 실적이 밀리는 게 싫어서 트집을 잡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말입니다."

"싸우고 싶으면 싸워봅시다. 주과장님은 영화사업본부 일처리가 답답하다고 보고하세요. 그럼 저는 공연사업본부에서 회의도 무시하고, 이미 협의 된 내용을 바꿨다고 보고하겠습니다. 락 페스티벌도, 영화 상영도 잘도 진행되겠군요."

[이과장님.]

"주과장님이 원하시는 게 이런 거 아닙니까. 저희 쪽에서도 더 이상 참지 않겠습니다. 본부장님께 바로 보고 드리겠습니다."

[이과장님. 제 말 들어보세요.]

"들을 것도 없겠습니다. 끊습니다. 오늘 회의도 취소합니다."

그렇게 말하며 전화를 끊어버린 한록.

한록은 이 일을 최경준에게 보고할 것이고, 주과장은 회의가 취소된 것에 대해 책임을 물어야 할 것이었다.

그게 한록의 팀을 건드린 대가였다.

한록이 통화를 끊자 계속 걸려오는 주과장의 전화. 하대리가 전화기를 향해 손을 뻗자 한록이 말했다.

"받지 마세요."

어쩔 줄 몰라하는 얼굴로 정부장을 바라보는 하대리. 정부장이 팔짱을 끼고 말했다.

"받지 마. 어차피 한번은 잡고 가야 하는 거다."

마케팅 부서의 분위기가 한층 무거워졌다. 모두가 한록과 정부장의 눈치를 보는 상황.

'이 상황에서 무슨 일을 한단 말인가.'

그렇게 판단한 한록이 하대리에게 말했다.

"하대리님, 잠깐 시간 좀 내주시기 바랍니다."

*

1층 카페로 내려온 한록과 하대리.

하대리가 불편한 표정으로 한록에게 말했다.

"이과장님. 미안해요. 제가 잘 해결했어야 했는데 괜히 일을 키웠네요."

걱정스러운 얼굴의 하대리. 미안함과 부담이 담긴 얼굴을 보니 한록 역시 마음이 좋지 않았다.

"하대리님. 이 일에 신경 쓰지 마세요."

"그래도 저 때문에 일어난 일이잖아요."

"아뇨, 공연사업본부 때문에 일어난 일입니다."

한록이 하대리에게 답했다.

"저희는 본부장님의 승인을 받아서 일을 진행했고, 게시글 업로드도 공연사업본부가 허가해서 한 겁니다. 거기에 협의가 필요한 부분은 다시 회의하기로 했고요. 저희는 저희가 해야 할 모든 프로세스를 진행했습니다."

차근차근 상황을 정리해주는 한록.

"그런데 상대가 트집을 잡는다. 그러면 그건 상대의 잘못입니다. 하대리님의 잘못이 아니에요. 하대리님은 할 일을 하셨고, 이 이상 생각하는 건 본인 잘못이 아닌 일에 마음을 쓰는 겁니다. 자기가 잘못하지 않은 일에 자책하지 마세요."

자기가 잘못하지 않은 일에 자책하지 않는 것.

참 어려운 일이고, 한록 역시 잘 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만큼 한록의 말은 딱딱하지만 하대리에 대한 걱정과 위로가 담겨있었다.

한록의 사려깊은 위로에 하대리가 한숨을 깊게 쉬고 말했다.

"네. 저희 잘못은 아니죠."

책임감 있는 사람일수록 모든 일에서 자신의 잘못을 찾는다. 한록이 그랬고, 하대리 역시 그랬다.

그런데 상사가 '네 잘못이 아니다'라고 말해주니 조금은 마음이 놓인 것이다.

"네, 그럼 됐습니다."

하대리의 표정이 풀린 것을 보고 한록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상황이 정리됐다고 해도 하대리에게는 혼자 있을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하대리님은 충분히 쉬고 올라오세요. 저는 먼저 가보겠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그렇게 생각한 한록이 하대리에게 말했고, 하대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한록은 옥상으로 걸음을 돌렸다.

*

한록이 옥상에 도착해 담배를 꺼내 물었다.

더 필름, 공연사업본부. 계속 이어지는 반대들에 한록 역시 지친 상황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한록을 지치게 하는 것.

'계속 이렇게 싸워가면서 일을 해야 하는 건가?'

그건 바로  한록이 계속 CK에 다니고 눈에 띄는 실적을 내는 이상, 끊임없이 이런 일이 이어질 것이란 사실이었다.

한국 최고의 영화 회사이며 앞으로는 세계적인 영화 회사가 될 CK ENM. 그러나 CK ENM의 명성도 암투와 사내정치 앞에서는 빛을 잃는다.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 회사. 그 곳으로 돌아온 자신.

'과거로 돌아온 후에 많은 게 바뀌었다. 내 사람이 생겼고, 적을 제거하는 방법도 알게 됐어.'

하지만 언제까지나 싸우면서 살 수는 없는 노릇이고, 그건 결국 CK 자체가 바뀌어야 한다는 뜻이었다.

'이 회사는 바뀔 수 있나?'

한록은 옥상에서 땅을 내려다보았다.

강남 한복판 초고층의 건물. 업계 최고의 대우와 연봉, 그리고 CK에서만 만날 수 있는 영화들. 영화계의 화려한 점을 모두 모아둔 곳이 바로 CK ENM이다.

그러나 CK ENM은 그 높이만큼이나 거대한 야망과 권력을 가진 회사였다.

'나는 이 회사를 바꿀 수 있나?'

평범한 회사원이라면 절대로 답을 내릴 수 없는 질문.

한록이 그런 생각에 빠져있을 때 주머니에서 핸드폰이 울렸다. 최경준이었다.

"지금 당장 본부장실로 오도록."

최경준이 말했다.

*

"컨디션이 좋지 않나보군."

본부장실에 도착한 한록. 최경준이 한록의 굳은 표정을 보더니 말했다.

"아닙니다."

"조금 더 기운을 내는 게 좋을 거야. 오늘은 자네한테 아주 중요한 날이 될 테니까."

"무슨 일로 부르셨습니까."

단도직입적인 한록의 질문. 그 질문에 최경준이 답했다.

"사장님이 퀸의 담당자를 최윤일 대리로 교체하라고 말씀하셨네."

"...이유가 뭡니까."

"내가 전할 말은 아니야. 다만 사장님은 인재를 찾고 계시고, 이건 자네한테 기회가 될 수 있네."

"이런 기회는 원치 않습니다."

본부장실로 오면서 느꼈던 불안한 예감.

'윗사람들과 엮이면 좋게 끝나는 일이 없다.'

언제나 느끼던 생각이 현실이 되었다.

오늘 하루에 대체 몇 개의 사건이 터지는 건가. 한록은 치밀어 오르는 짜증을 겨우 눌렀다.

'또 똑같은 일이군.'

과거 오과장에게 식물을 뺏겼던 한록. 그런데 이번에는 상대가 최대리로 바뀌어서 일이 반복되고 있다.

'분명 위에서 뭔가 얘기가 오갔을 거다.'

이유는 늘 그렇듯 라인 밀어주기, 혹은 견제.

사장의 지시라니 아마 하정엽이 최대리를 눈여겨보고 있고, 좋은 기회를 주고 싶은 모양이었다.

한록의 프로젝트를 뺏어서라도.

'대체 언제까지 이러면서 회사를 다녀야하지?'

한록이 바라는 건 늘 하나였다. 아무 걱정없이 일만 하면서 회사를 다니는 것.

그러나 이 소박한 목표에는 장애물이 너무 많았다.

더 필름. 공연사업본부. 하정엽. 일을 좋아하고, 잘해보겠다고 생각하는 것은 한록 하나 뿐이고 모두가 그저 자기 잇속을 챙길 뿐이다.

'이제는...'

참다못해 짜증이 날 지경이었다.

"사장님께 자네와 대화를 한번 해보시라고 말씀드렸네. 퀸을 포기하지 않으려면 사장님께 잘 말씀드려야 할 거야. 그리고 여기서 좋은 모습을 보이면 사장님께서 자네를 눈여겨보시겠지. 이건 위험하지만 좋은 기회야."

한록에게 당부하는 듯한 최경준의 말.

그러나 한록에게는 조금도 와닿지 않는 말들이었다.

사장에게 잘 보이는 것, 승진의 기회를 가지는 것.

누군가는 간절히 원하지만 한록에게는 관심 없는 얘기들이다.

"다녀오게. 잘하고 오리라 믿네."

최경준이 한록에 대한 신뢰를 담아 말했다.

그러나 한록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더 이상은 못 참겠다.'

사장 앞이라고 한록의 태도가 변하지는 않는다.

아니, 오히려 그동안 해왔던 생각을 전부 말하고 올 것이다.

그렇게 다짐한 한록이 걸음을 옮겼다.

*

사장실이 있는 28층에 도착한 한록.

층 전체가 사장실로 쓰이고 있기 때문인지,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주위가 쥐죽은 듯 조용해진게 느껴졌다.

하정엽의 비서가 한록을 사장실로 안내했고 문을 열어주었다.

창문을 등지고 책상에 앉아있는 하정엽.

최경준의 사무실보다 몇 배는 넓은 하정엽의 사무실. 대리석 하나, 소파 가죽 하나하나가 최고급이란 게 느껴지는 곳이었다.

그러나 한록은 그 모습에서 대단함이나 압박감 같은 건 느끼지 않았다. 오로지 오늘 할 말을 다해야겠다는 생각을 할 뿐이었다.

"앉으세요."

하정엽이 쇼파를 가리켰고 한록이 하정엽의 앞에 앉았다.

"얘기는 들었겠죠. 퀸의 담당자 변경이 있을 겁니다."

사무적으로 말하는 하정엽. 한록의 앞에서 한록의 프로젝트를 뺏겠다고 말하는 건데도 아무런 거리낌이 없어 보인다.

한번 화를 억누른 한록이 하정엽에게 물었다.

"이유를 듣고 싶습니다."

"내부 사정입니다."

"저도 내부인 입니다. 납득가게 설명해주시기 바랍니다."

한록의 말에 하정엽이 살짝 눈썹을 찡그렸다. 그러나 하정엽은 곧 이유를 말하기 시작했다.

"최윤일 대리가 이 프로젝트에 더 잘 맞을 거 같다는 판단을 했습니다. 지금 더 필름과 계속 의견 조율이 안 되는 상황인데, 최윤일 대리가 헐리웃 경험이 있으니 조율이 가능할 겁니다. 이한록 과장은 대신 '도둑'을 맡으세요."

한국 영화 중 최고의 히트작인 도둑. 퀸과 비슷하게 규모가 큰 영화다. 하정엽이 나름대로 한록을 달래고자 다른 프로젝트를 넘겨준 것이다.

'지금 내가 해오던 프로젝트를 뺏어놓고 이게 보상이라고 생각하는 건가?'

하지만 한록의 화를 잠재울 수는 없었다.

한록이 바로 답했다.

"사장님. 저도 말씀을 좀 드려도 되겠습니까."

"하세요."

태연하게 답하는 하정엽. 어차피 마음을 바꿀 생각은 없으나, 말하는 걸 들어는 주겠다는 태도였다.

한번 심호흡을 한 한록이 차분하게, 그러나 그 어느 때보다도 단호하게 말했다.

"저는 퀸으로 싱어롱 상영을 진행할거고, 첫 개봉을 이번 공연사업본부의 락 페스티벌에서 진행할 생각입니다. 그리고 이때 사람들의 반응을 광고로 송출해 관객의 관심을 유도할겁니다."

"이건 영화의 흥행만이 아니라 CK가 독특한 시도를 했다는 걸로 화제가 될 겁니다. 앞으로 영화 마케팅 사례로 계속 언급이 될 수도 있습니다. CK의 기업 이미지 자체에도 영향을 주는 일입니다."

하정엽은 답이 없었다. 그만큼 한록의 말을 주의 깊게 듣는 것이었다. 한록이 이어서 말했다.

"최윤일 대리가 저보다 이 일에 적합할 것 같다 생각하셨습니다."

"네, 맞습니다."

"싱어롱 상영을 생각한 게 최윤일 대리입니까?"

한록의 날카로운 질문.

"아닙니다."

"락 페스티벌에서 상영하기로 한 것. 그걸 광고로 송출하겠다고 한 것. 이 방법들도 최대리가 생각한 겁니까."

앞으로 한록이 할 말이 예상이 가는 건지, 한록의 말을 듣던 하정엽이 약간 얼굴을 찌푸렸다.

그러나 하정엽은 순순히 답했다.

"그것 역시 이한록 과장 본인이 생각한 거죠."

"그럼 제가 아니라 최윤일 대리가 이 일을 더 잘할 거란 근거가 무엇입니까."

한록을 지켜보는 하정엽.

한록은 사장인 자신의 말에 하나하나 반박을 하고 있었다.

그런 한록의 모습은 상당히 흥미로웠고, 무엇보다 자신의 일에 대한 자신감과 프라이드가 느껴졌다.

이한록. 언제나 매력적인 마케팅을 하는 사람이다. 그 점은 아무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생각보다 더 강단있군.'

사장인 자신이 직접 독대를 한다. 거기에 이유를 설명해주고 다른 프로젝트까지 배정해준다.

하정엽의 입장에서는 나름대로 한록을 신경 쓴 것인데도, 한록은 자신의 입장을 분명하게 밝혔다.

'나는 이 일을 하고 싶다. 아니 해야만 한다.'

한록의 태도는 그냥 외면하기엔 너무나 단호했다.

"일단 알겠습니다. 돌아가세요. 최윤일 대리와 함께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형식으로 고려해보겠습니다."

CK ENM 전체를 책임지는 하정엽. 대기업의 사장이자, 재벌가의 아들인 하정엽이 한록에게 한 발 양보를 했다.

자신의 직원을 위해 결정을 바꾸는 것. 하정엽이 처음으로 선택 해 본 일이었다.

그러나 한록은 오히려 하정엽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내 용건은 이제부터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견제와 줄타기. 거기에 자신의 일이 방해받는 상황.

이런 일을 언제까지나 참고 있을 수는 없다.

회사원이라면 누구나 마주치는 순간이 있다. '더 이상 이곳에 남을 수 없겠다.'라는 확신이 들 때.

그때는 대부분 이 회사에서 자신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 때다.

그리고 한록에게는 그게 바로 지금이었다.

'이런 회사라면 더 이상 다니고 싶지 않다.'

결국 결정을 내린 한록이 입을 열었다.

"솔직하게 말씀드릴게 있습니다."

"네, 해보세요."

상당히 관대해진 하정엽의 표정.

"이 프로젝트는 제 일입니다. 최윤일 대리와 같이 일할 마음은 없습니다."

그러나 하정엽의 표정은 한록의 말에 시시각각 굳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멈추지 않는 한록.

"제가 책임감과 자부심을 가지고 시작한 일입니다. 그런데 그걸 갑자기 다른 사람에게 넘기라고 말하셨습니다. 그 이유가 납득이 가지도 않습니다."

차분하게, 하지만 칼을 갈아왔던 말을 하는 한록.

'이 다음은 없다. 여기서 다 끝낸다.'

"저는 CK의 직원들이 실적 때문에 다투는 모습을 너무 많이 봐왔습니다. 이건 경쟁이라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경쟁은 각자 최대한의 성과를 내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경쟁이라고 부르는 겁니다. CK의 직원들은 그냥 서로의 일을 방해하고 있습니다."

하정엽의 표정이 굳든 말든 상관없다. 오늘은 꼭 이 말을 해야 했다.

지금 한록의 머리 속에는 오로지 그 생각뿐이었다.

"그런데 사장님마저 누가 열심히 일을 하고 있는지, 어떤 사람이 가장 이 프로젝트에 적합한지 고려조차 하시지 않는다면.

그럼 누가 이 회사에서 책임감을 가지고 일하고 싶겠습니까. 누가 자기 일에 애정을 가지겠습니까."

"사장님, 이런 회사는 발전할 수 없습니다."

한록의 아주 솔직한 말. 그리고...

"사장님은 지금 그런 분위기를 부추기고 계십니다."

하정엽에 대한 통렬한 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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