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2 : 회장님이 오십니다.(2) >
CK ENM의 사장실.
하정엽이 쇼파 앞에 서 있고, 남자 한명이 쇼파에 등을 기대고 있었다.
CK ENM의 사장 하정엽. 그런 그를 일으켜 세워둘 수 있는 사람.
"보고해."
CK 그룹의 오너이자 재계 순위 13위의 남자. 그리고 하정엽의 아버지. 하태준이었다.
"최근 부산영화제가 성공적으로 끝났고, 방송국 인수를 준비 중입니다."
부산영화제라는 말에 하태준의 눈이 번뜩인다.
성공적으로 끝난 부산영화제와 알렉산드로 감독의 반응. 오늘 하태준은 그 성과를 둘러보러 온 것이다.
'만족스러워 하고 계신다.'
하태준의 반응을 살핀 하정엽이 빠르게 입을 열었다.
"알렉산드로 감독이 '삼일의 삶'에 대해 극찬을 했습니다. 다음 영화제 역시 기대된다고 말했습니다."
"그 영화는 나도 좋았어."
짧게 말하는 하태준. 하태준이 하정엽을 바라보고 물었다.
"네가 ENM을 맡은 지 5년 정도 됐나."
"네, 맞습니다."
"모두가 반대했지만 핏덩이인 너한테 ENM을 쥐어줬지."
과거를 회상하는 듯한 얼굴의 하태준. 하태준이 하정엽의 지난 5년에 대한 평가를 내린다.
"ENM은 앞으로 계속 네가 맡으면 되겠군."
하태준의 말 한마디에 기업의 운명이 바뀌고, 후계자가 바뀌는 상황.
그런 상황에서 하정엽은 부산영화제를 통해 CK ENM 사장으로서의 입지를 확실히 한 것이다.
'첫 번째 관문은 통과했다.'
하정엽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하태준이 하정엽에게 다시 한 번 물었다.
"5년이나 됐으면 알겠지. ENM에서 계속 데리고 갈만한 놈이 있나?"
'앞으로도 네가 데려갈 만한 사람이 있냐.'
하정엽의, 그리고 CK ENM의 역량을 물어보는 질문.
인적자원을 중요시 여기는 하태준이 하정엽에게 제시한 두 번째 관문이었다.
그 말에 하정엽은 여러 사람을 떠올렸다.
최경준. 아버지의 사람. 정민석. 유배지에서 돌아온 명장. 오수창. 이제는 사라진 과거의 인물.
자신의 밑에서 부산영화제를 성공시킨 사람들. 그리고...
"네, 있습니다."
이한록.
"누구지?"
"최본부장님과-"
"멍청한 녀석."
하태준이 하정엽의 말을 끊었다. 자식을 향한 차가운 비난이 이어진다.
"최경준이 너 정도로 만족할 것 같아? 착각도 정도껏 해야지. 내 사람 말고 네 사람을 말해. 네가 발굴했고, 네가 감당할 수 있는 사람."
자식에게 하는 말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비난. 그러나 하정엽은 기가 죽기는커녕 발끈해서 말했다.
"이한록 과장이 있습니다."
"못 들어 본 이름인데."
한록이 아무리 뛰어나다고 해도 하태준한테까지 이름이 올라가진 않는다.
하태준은 이제 영화계에서 손을 뗀 상황. 과거에도 하태준은 한록에게 칭찬을 몇 번 했을 뿐이지, 한록과 큰 연이 없었다.
"부산영화제에 삼일의 삶을 가져온 사람입니다. 부산 영화제를 성공으로 이끈 장본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부산 영화제라."
한록의 이름에 시큰둥한 표정을 짓던 하태준. 그런 그가 부산영화제란 말에 표정을 바꾼다. 그만큼 부산영화제가 큰 성공을 거뒀단 뜻이었다.
잠시 생각하던 하태준이 하정엽을 보고 말했다.
"부산 영화제는 마음에 들었어. 네 놈이 CK ENM을 잡은 후 처음으로 마음에 들 일을 했지."
"...감사합니다."
"그러니 두 번째 숙제를 내주지. 네 형을 이겨라."
하정엽의 형, 하정훈.
CK그룹의 장남이자 CK기획의 사장이었다.
"네 형보다 많은 매출을 올리고, 네 형의 사람들을 뺏어 와라. 그렇다면 후계자의 자리도 남의 일만은 아닐 거다."
하태준은 아직 CK그룹을 이을 후계자를 확정하지 않은 상황.
조금씩 희망을 주며 형제들 간의 경쟁을 부추기는 것. 그게 하태준의 스타일 이었다.
"시작은 최윤일이 좋겠군."
하태준의 입에 오른 이름, 최윤일. 마케팅부서의 최대리였다.
하정훈과 외국에서 같은 학교를 졸업한 최대리.
최대리와 우연히 헐리웃에서 마주친 후부터 하정훈은 최대리를 눈여겨보고 있었다.
"그 녀석부터 시작해서 네 형의 손발을 잘라라. 그리고 네 사람들로 만들어."
"형님의 사람이었던 자들로 형님을 공격하란 말씀이십니까."
하정엽의 말에 하태준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재밌지 않느냐."
그리고 하정엽 역시...
"네, 기대됩니다."
미소를 지었다.
"사장이 되더니 사람구실은 하게 됐군."
하정엽의 말에 하태준이 오늘 처음으로 미소를 지었다.
*
하정엽과의 대화 후, 사장실에서 무언가를 보고 있는 하태준.
하태준이 보고 있는 것은 한록의 인사파일이었다.
-이한록 과장이 있습니다.
네 사람이 누구냐고 물었을 때 하정엽의 대답.
'최소한 부장급 인사가 나올 줄 알았는데 과장이라. 게다가 나이는 거의 애송이군.'
이한록. 서른 살에 초단기 승진을 한 과장. 천만 영화와 알렉산드로 감독의 이목을 이끄는 등의 성과를 냈다.
자신이 알지 못하던 새로운 인물의 등장. 그 사실에 하태준이 흥미롭게 한록의 파일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이한록이라. 아직 애송이군."
확실히 실적은 좋지만, 아직 하태준의 마음에는 차지 않는 인물이다.
다만 눈에 띄는 건 정말 젊다는 점. 그리고 계속 혁신적인 시도를 한다는 점이었다.
지금 당장보다는 앞으로가 기대되는 인물.
하태준이 자신의 아들의 결정에 미소를 지었다.
"재밌는 녀석을 골랐어."
*
며칠 후 마케팅 부서.
"과장님! 이거 보세요!"
한록이 출근을 하자마자, 일찍 출근해 있던 유선이 모니터 화면을 가리키며 말한다.
"생각한대로 됐어요. 사람들 퀸에 대해서 얘기중이에요!"
유선이 가리킨 것은 공연사업본부에서 운영하는 락 페스티벌 페이스노트 페이지.
락 페스티벌의 라인업과 정보가 올라오는 페이스노트 페이지. 락 페스티벌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라면 모두 팔로우 하고 있는 곳이다.
'유선씨. 이 내용 좀 다듬어서 공연사업본부한테 업로드 하라고 해줄래요?'
어제 한록은 그 곳에 게시글 하나를 올렸다.
[CK 락페에서 보고 싶은 것은?]
[1. 오아시스 재결합 : 우린 예전에 끝났어. 돈 때문에 다시 뭉친 거지.]
[2. 롤드컵의 그 곡 : 페이커가 부릅니다. warrior.]
[3. 퀸의 부활 : 잔디밭에서 퀸과 함께 박수치기?!]
퀸과 영화 상영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을 체크하려고 올린 투표 게시물. 올린 지 하루 밖에 되지 않았는데, 사람들의 반응은 폭발 적이었다.
[ㅈㄴ 말도 안 되는데 보고 싶은 것만 올려놨네 보고 싶게 보고 싶다고 보고 싶어 보고 싶어요 얼마면 되냐고]
[브라더 노 파이트...ㅠㅠ]
[퀸 데려오지도 못할 거면서 이런 글은 왜 쓰냐]
[ㄴ그냥 보고 싶다고 말하세요]
[ㄴㄴ 그냥 존나 보고 싶어요]
[여기 지구촌 락페인가요?]
말도 안 되지만 흥미를 끄는 후보들 덕분에 순식간에 불어난 댓글 창.
다른 게시물의 10배 정도 되는 댓글이 달린 상황이었다.
[갑자기 뜬금없이 퀸?]
[라인업에 퀸이 추가 되는 건가요?]
[퀸 형아들 한번만 더 오자 우리가 진짜 잘할게 제발 14년은 잊어줘]
그리고 내한 가능성이 있는 퀸에게 집중되는 관심.
퀸에 대한 락덕후들의 반응은 한록이 생각한 것 이상이었다.
"반응이 너무 좋네요."
한록이 놀란 듯 말했다.
꾸준히 내한 얘기가 나오지만, 2014년의 내한 이후로 한 번도 한국을 방문한 적 없는 퀸.
그만큼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리란 것은 예상했다. 다만 이렇게 뜨거운 반응이 있을 거라고는 알지 못한 것이다.
[ㅇㅇ이번에 퀸 오는 걸로 접수함 안 오면 CK 고소함 ㅅㄱ]
예를 들면 이런 반응.
"저 고소당하겠어요."
사람들의 적극적인 반응에 한록이 웃으며 말했다.
사람들의 댓글은 격렬한 흥분과 집착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이번에 퀸 영화 개봉 하잖아요~기념으로 내한 한번 추진합시당]
[ㄴ어 근데 이거 야외에서 특별 개봉 한다던데 흠...이 타이밍에 이런 글이라]
[ㄴㄴ무언가 있다 뭔가 있어!]
[ㄴㄴㄴ있긴 뭐가 있어 아무것도 없어]
싱어롱 상영으로 결정이 나자마자 기사들에게 보도자료를 돌린 한록.
'<퀸> 세계 최초 야외 상영. 장소는 대체 어디?'
'<퀸>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 개봉!'
눈치 빠른 사람 몇이 락 페스티벌과 <퀸> 사이에 연관이 있음을 알아차린 것이다.
'역시. 덕후들은 다르다.'
락덕후들의 한이 서린 반응. 그리고 광기에 어린 집착.
그 모습을 지켜보던 한록이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무언가에 열정적인 사람들을 지켜 보는 건 언제나 기분 좋은 일이었고, 그건 한록이 이 일을 하는 이유 중 하나이기도 했다.
유선이 페이스노트의 반응을 확인한 후 한록에게 물었다.
"과장님. 이제 반응은 모았으니 개봉 공개할까요? 벌써 CK ENM 인스타에 락페에서 개봉하는 거냐고 물어보는 사람도 있어요."
"아뇨, 아직이에요."
"사람들 너무 궁금해 하는데요?"
"처음부터 밝히지 말고, 2주 전까지 꾸준하게 정보를 흘려요. 그 편이 더 화제성을 모을 수 있을 거예요."
"네!"
'팬들한텐 미안하지만...화제를 위해선 기다려야 하는 법이니까.'
언제나 기다린 결과가 더 달콤한 법이고, 기대하는 그 시점이 가장 재밌는 법이다.
한록의 예상대로 CK가 뚜렷한 입장을 밝히지 않자 사람들의 소문은 더욱 커지기 시작했다.
[이번에 퀸 내한한대요. CK 락페.]
[락페 아니고 단독 콘서트라던데]
[아니에요~락페 계정에 올라왔어요.]
[2일차 헤드라이너ㅇㅇ]
[ㄴ그건 블런데요?]
[어 이번에 영화 개봉하네요?]
[락페랑 개봉이 겹치네요...보러 갈 수 있을지...]
퀸의 내한을 확정하고, 일정까지 잡아버린 사람들.
어느새 퀸은 검색어에 오르내리고 있었고, 자연스럽게 영화에 대한 인지도도 높아졌다.
"아직 영화개봉도 안했는데 퀸이 인기검색어라니...이게 되네요."
하대리가 감탄을 하며 모니터를 바라본다. 락덕후의 입장에서 꽤나 감동적인 상황인 모양이었다.
"이과장님은 진짜 뭐든 마케팅 하실 수 있겠어요."
부러움과 동경이 섞인 눈으로 한록을 바라보는 하대리.
'...잘 되고 있긴 하군.'
여전히 미심적은 얼굴로 한록을 지켜보는 정부장.
'락덕후들은 확실히 반응이 다르구나. 생각보다 더 잘 풀리겠어.'
그리고 기대로 들뜬 한록.
그렇게 마케팅은 잘 풀려나갔으나,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다.
*
"그 부분은 협의 후에 업로드 한 건데요."
[아니, 그래도요.]
점심시간이 지난 오후. 전화를 붙잡고 당황해서 얼굴을 찡그린 하대리.
하대리의 심각한 표정에 미팅을 다녀오던 한록이 걸음을 멈췄다.
"계속 말씀드리지만, 페이스노트 관리하시는 분이랑 협의 후에 업로드 한 게시글입니다. 갑자기 지우면 더 이상해 보일 거예요."
[그래도 저희 입장을 좀 생각해주셔야죠. 지금 나오지도 않는 밴드가 인기검색어에 올라가잖아요.]
하대리의 말을 들으니 대충 무슨 상황인지 짐작이 간다.
퀸과 밴드들에 대한 글을 페이스노트에 업로드한 한록.
그 게시글은 공연사업본부가 올린 다른 게시글의 10배 이상의 반응을 얻었고, 퀸의 이름을 인기검색어에 올렸다.
유선은 그 소식을 곧장 공연사업부에 전했고, 예상 외의 반응에 당황해하며 한록에게 말했다.
'어...공연사업본부 쪽에서는 별로 안 좋아하시는 것 같아요...'
공연사업본부의 불만 내용. 바로 락 페스티벌에 대한 관심이 본인들의 기획이 아닌 영화사업본부로 쏠린 것이었다.
'제가 얘기해볼게요.'
자신들의 프로젝트가 갑자기 참여한 사람들에 의해서 빛을 잃는다.
'그래, 기분 나쁠 수 있지.'
한록 역시 이해가 가는 일이기 때문에 얘기를 들은 즉시 공연사업본부와 미팅 약속을 잡았다.
'차분하게 설득하고 도움을 요청하자. 우리가 양보할 수 있는 부분도 전부 양보하고.'
한록은 그 곳에서 교통정리를 할 예정이었다.
영화사업본부가 독식을 할 생각은 없었다. 그저 무대를 빌리는 것 뿐이고, 공연사업본부가 요구하는게 있으면 전부 들어줄 예정이었던 한록.
그런데 지금 공연사업본부는 미팅을 앞두고 괜히 하대리를 괴롭히고 있는 것이다.
'나랑 현차장님이 없는 틈을 타서 게시글을 지우려고 하는군.'
분명 나중에 얘기를 하기로 했으면서 한록이 없는 사이에 글을 지우라고 강요하는 공연사업본부.
공연사업본부의 요청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그리고 무대 말인데요. 말씀하신 것처럼 저녁에 두 번 비우긴 어렵고, 오전이랑 오후에 한 번씩 비울 수 있습니다.]
"오전에는 햇빛 때문에 상영이 어렵습니다. 저녁 시간으로 배정해주신다고 하시지 않았나요?"
[무대 세팅 시간이 필요해서요.]
락페의 가장 하이라이트 시간인 저녁. 그 시간에 무대를 내어주지 않겠다는 속셈이다.
"이것도 본부끼리 회의가 필요한 문제 같습니다. 제가 팀장님께 말씀 드리겠습니다."
난처한 표정으로 안절부절 못하는 하대리.
'내가 끼어들면 분명 싸움으로 번질텐데.'
그래서 하대리를 지켜보려 했지만, 그 모습을 보자니 더 이상 참고 있을 수가 없었다.
자신이 낸 기획으로 인해 부하가 난처해하고 있다. 어느 상사가 그걸 그냥 넘어가겠는가.
한록이 하대리에게 말했다.
"하대리님. 제가 받겠습니다."
하대리가 놀란 얼굴로 한록을 바라보았고, 잠시 후 수화기를 내밀었다.
"영화사업본부 이한록 과장입니다."
[어...!]
한록이 전화를 받자 당황하는 상대방.
[잠시만요. 나중에 팀장님하고 회의 후 다시 연락 드리겠습니다.]
"아뇨. 하실 말씀이 있어서 미팅이 잡혀있는데 먼저 전화 하신 것 아닙니까?"
상대가 일을 무마하려 했으나, 한록이 말을 이었다.
'이번엔 싸우지 말고 적당히 끝내자.'
더 필름과 달리 공연사업본부는 계속 협업을 해야하는 동료다. 한록이 침착한 말투로 말했다.
"제가 담당자입니다. 하실 말씀 있으시면 다른 사람 말고 지금 저한테 하시기 바랍니다."
*
같은 시간 본부장실.
최경준은 어제 하정엽과의 대화를 떠올리고 있었다.
아버지의 호출을 받은 젊은 사장. 그가 돌아왔을 때 느껴지던 무거운 공기와 야망어린 눈빛.
그걸 보고 최경준은 직감했다.
'후계에 대한 얘기가 오갔다.'
그리고 이어지던 하정엽의 말.
"지금 영화사업본부에서 제일 집중하는 프로젝트가 뭡니까?"
"<퀸>입니다."
"누가 담당하고 있습니까?"
"이한록 과장입니다."
담당자가 한록이란 말에 망설이는 하정엽.하정엽이 잠시 후 입을 열었다.
"담당자 최윤일로 교체하세요."
'아버지가 최대리를 지켜보고 있다.' 그런 판단 하에서 나온 하정엽의 말. 그리고...
"좋지 않은 선택입니다, 사장님,"
최경준의 반대.
최경준의 대답에 하정엽의 눈에서 불꽃이 튄다.
"지금 내 말에 반대합니까?"
"네, 맞습니다."
"사장 지시입니다."
"따를 수 없습니다."
사장실에서 팽팽히 오가는 긴장. 숨막히는 긴장감 속에서 최경준이 입을 열었다.
"어제 회장님과 이에 대한 대화를 나누신 것 같습니다."
"말씀 조심하시는 게 좋을 겁니다, 선생님."
하정엽의 경고에도 최경준은 계속 말을 이었다.
"제가 말씀드릴 수 있는 건, 이한록은 제가 데리고 있는 사람 중 가장 뛰어난 사람이라는 점입니다."
"..."
하정엽은 최경준의 말에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한록이 얼마나 대단한 성과를 내는지, 한록의 마케팅이 얼마나 사람을 홀리는지 눈앞에서 경험해봤기 때문이었다.
"어떤 생각으로 담당자를 교체하길 원하시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프로젝트에는 이한록이 필요합니다."
하정엽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하정엽의 머릿속을 스쳐지나가는 부산 영화제의 기억들. 외면하기에는 너무나 매력적인 장면들...
그러나 아버지의 눈에 들기 위해선 버려야 하는 기억들.
"제 의견은 변함 없습니다. 담당자 교체하세요."
하정엽이 단호하게 말했다.
*
회상을 마친 최경준이 생각했다.
'이한록이 하정엽 앞에서 좋은 모습만 보일 수 있다면, 이건 오히려 기회가 될 거다.'
하정엽은 아직 한록에 대한 신뢰가 없다. 그렇기에 하태준의 말 한마디에 한록이 진행하던 프로젝트를 넘기라 명령하는 것.
그런 하정엽을 한록이 설득할 수만 있다면, 오히려 이건 하정엽이 한록을 다시 보는 기회가 될 것이다.
자리에서 일어난 최경준이 비서에게 말했다.
"이한록한테 내가 부른다고 전하게."
"네, 용건은 뭐라고 말할까요?"
그리고 이어진 최경준의 답.
"사장님을 뵈러 가야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