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 회사원이 선넘으면 생기는일-59화 (59/263)

< 59 : 5억입니다.(2) >

"너 제정신이냐?"

아직 한국에서 익숙하지 않은 싱어롱 상영. 거기에 5억을 쏟아붓겠다.

관리자인 정부장 입장에선 당연히 미쳤냐는 말이 나올 수 밖에 없었다.

"많이 쓰는 거라는 점은 인정합니다. 하지만 그 이상의 성과를 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록은 사람들이 얼마나 싱어롱 상영에 열광하는지 미래를 보고 왔다. 한록 역시 한치도 물러나지 않았다.

"TV에 티저 광고 안 내보낼 거야? 포탈에는? 10억이면 광고 내보내기도 모자라. 근데 5억을 싱어롱에 쓰겠다고? 그 뒤는 어쩌려고?"

"광고 예산은 오과장이 이미 잡아뒀습니다. 광고와 싱어롱 홍보 외에는 비용이 들 일이 거의 없습니다. 내한도 안 할 겁니다."

"네가 진짜 미쳤구나."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쉬는 정부장. 정부장은 이제 한록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이한록. 네 능력이 뛰어난 건 알아. 우리 부서에서, 아니 영화사업본부에서 너보다 일 잘하는 사람 없다. 그건 모두가 알 거다."

"그런데 이건 네가 지금까지 다루던 영화랑은 다르다. 넌 계속 소규모 영화만 했잖아. 이건 예전처럼 사람들 입소문만으로 성공하기엔 무리가 있어. 내한도 하고, 방송광고도 최대로 뿌려라."

회귀 전 한록은 <식물>로 천억이 넘는 금액을 다뤄봤다. 그렇기 때문에 5억이라는 금액이 작은 금액이고, 지금이 과감하게 투자해볼만한 시기라는 걸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정부장의 눈에 한록은 서른 살 회사원. 한록의 능력은 신뢰하지만, 그 경력까지는 신뢰하지 못한다.

"싱어롱이 잘 될 거라 생각하지 않으시는군요."

"그래. 다른 녀석들이 들고 왔으면 이미 취소시켰어. 네가 한다고 하니까 말리지 않는 것 뿐이다. 그러니까 너도 네 말 들어라. 싱어롱은 해. 대신 비용을 줄이고, TV광고에 집중해라. 그 부분은 오과장의 기획안을 따라가."

<지구특공대>때 그랬던 것처럼, 이미 나간 사람의 기획안을 따르라고 하는 정부장.

'변한 게 없으시군.'

한록은 정부장을 보며 생각했다.

"이건 천만을 목표로 하는 영화야. 그리고 넌 아직 대규모 영화를 다룬 경험이 없어. 내 말을 따라라."

최근 정부장은 한록을 크게 신뢰하는 듯 했으나, 본인이 더 잘안다고 생각하는 분야가 나오자 또 예전과 같은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규모가 큰 만큼, 안전한 방식을 선택하자는 정부장의 의견.

그 의견 역시 나름대로 일리는 있었다. 그러나 정부장이 잊고 있는 사실이 있었다.

"부장님. 저는 사원일 때 천만 영화를 두 개 만들었습니다. 영화 규모로는 저를 설득할 수 없습니다."

그 말에 정부장이 한록을 바라보았다. 오랜만에 보는 정부장의 무서운 표정이었다.

"천만 영화 두 개나 만들었으니 네 일에 간섭하지 말라는 거냐?"

"부장님이 절 못 믿으셔서 말씀드리는 겁니다."

"널 못 믿는다는 게 아니야. 안전한 방법을 따라가란 거지."

"언제나 제가 하는 게 가장 안전한 방법입니다. 가장 좋은 결과를 가져오니까요."

거만하다고까지 볼 수 있는 자신감.

자신의 능력에 대한 확신과, 미래에 대한 정보 덕분에 가능한 태도였다.

'...대체 왜 이렇게까지 나오는 거지?'

정부장 역시 그에 설득당할 뻔 했다. 하지만 한록의 방식은 너무 위험했고, 부하를 통제하는 것 역시 상사의 역할이었다.

정부장이 단호하게 말했다.

"네가 뭐라든 상관 없어. 나는 반대고, 본부장님한테도 그대로 말씀드릴 거다."

*

결국 정부장은 설득이 되지 않았다. 그러나 한록도, 정부장도 할 일이 산더미 같은 상황에서 계속 정부장을 붙들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과장. 오늘 더 필름이랑 전화한댔지?"

한록의 옆자리인 현차장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네, 맞습니다."

더 필름. <퀸>의 미국 배급사.

회의 전 한록은 더 필름에 담당자가 바뀌었다고 메일을 보냈다.

더 필름과의 연락은 거기서 끝날거라 생각했는데, 바로 답장이 도착했다.

[현재 일본에 머무르는 중이라 통화로 진행하고 싶습니다. 한국 시간 오후 4시쯤에 통화 요청합니다.]

해외 배급사가 마케팅 부서에 통화를 요청하는 상황.

해외 배급사와의 연락은 보통 수입부서에서 진행하기에 매우 이례적인 상황이었다.

하지만 상대가 '더 필름'이라는 말을 보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대부분의 배급사는 판권을 넘기면 그 후로는 해외 상영에 전혀 개입하지 않는다. 그러나 '더 필름'은 월권이라고 느껴질 정도로 상영에 개입하는 타입이었다.

"더 필름이면 김준이지? 또 지랄하겠네. 이과장 고생하겠구만."

혀를 차며 말하는 박과장.

김준. '더 필름'의 아시아 시장 담당자 중 한명.

'더 필름'과 담당자 김준은 마케팅 부서에서 유명한 사람이었다.

잠시 기다리자 전화가 걸려왔고, 한록이 전화를 받았다.

[더 필름 엔터테인먼트 김준입니다. 담당자 변경 때문에 전화했습니다.]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한국말.

더 필름 엔터테인먼트에서 아시아 시장을 담당하는 한국인 담당자 김준이었다.

"안녕하세요. CK ENM 마케팅부서 이한록 과장입니다."

[<퀸>은 오과장님이 담당하시는 걸텐데요. 갑자기 담당자가 교체 된 이유가 뭡니까?]

간단한 인사도 생략된, 상당히 거만한 말투.

"아, 이 인간 진짜."

전화기 너머로 작게 들리는 음성에 통화를 듣고 있던 현차장이 대놓고 짜증을 냈다.

CK ENM이 한국 영화계의 슈퍼 갑이라면, 더 필름은 세계 영화를 이끌어가는 회사 중 하나였다.

한국 영화계에선 무서워 할 상대가 없는 CK ENM. 그러나 무대가 세계로 바뀌면 상황은 달라진다.

더 필름 앞에서는 CK ENM도 그저 을이 될 수 밖에 없다.

세계 최고의 영화회사라는 프라이드. 거기에 한국 영화에 대한 무시.

김준은 수입부서에서 갑질로 유명한 사람 중 한명이었고, 마케팅 부서에서도 김준을 컨트롤 할 수 있는 건 오과장 정도뿐이었다.

"내부사정이어서 말씀드리기 어렵습니다. 다만 상영은 차질 없이 진행 될 예정이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건 예의가 아니죠. 이게 얼마나 규모가 큰 영환데요. 고작 대리가 맡을 영화는 아닙니다. 오과장님으로 담당자 재 변경 요청합니다.]

김준은 본인이 담당하는 영화를 대리가 마케팅 한다는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이었다.

아무런 이유가 없는 전형적인 갑질. 그러나 김준이 이런 식으로 나올 거란 건 이미 예상한 부분이었다.

한록이 차분하게 답했다.

"오과장님은 회사를 나가셨습니다. 저 또한 과장으로 승진했으니 염려하시는 부분은 해결됐다고 생각합니다."

[과장이요?]

한록의 말에 김준이 피식 미소를 지었다.

[대리 된지 얼마나 되셨다고 과장이에요?]

한록의 승진을 축하하기는커녕 무시하는 발언.

'곱게 끝낼 순 없겠군.'

그렇게 판단한 한록이 조금 더 강하게 말했다.

"담당자는 회사 내부 사정으로 바뀐 거고, 저한테 따져보셔야 바뀌는 건 없습니다. 시작부터 싸우기보다는 같이 일을 잘 진행했으면 합니다."

한록이 생각 외로 강하게 나오는 모습에 김준이 발끈해서 답했다.

[문제가 있는데 어떻게 같이 일을 잘합니까. 담당자 재 변경 요청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CK ENM 규정으로는 문제 없는 일입니다. 문제라고 생각하시면 직접 문제제기 하시기 바랍니다. 그럼 공식적으로 안건 접수하겠습니다."

[아니, 잠깐만요.]

조금도 굽히지 않는 한록의 태도에 당황한 김준.

'갑자기 뭐지? CK가 나한테 이렇게 굴 입장이 아닐텐데?'

CK ENM이 아무리 한국 최고의 영화 회사라 해도 '더 필름'에 비하면 동네 구멍가게다.

그만큼 '더 필름'의 영화계에서의 입지와 인지도는 최고 수준이었고, 김준은 여태까지 그걸 등에 업고 거래처에게 갑질을 해왔다.

그렇게 되면 돌아오는 일들.

'매니저님. 죄송합니다. 담당자 교체 하겠습니다.

'네, 말씀하신대로 수정하겠습니다.'

'이 부분은 변경이 어렵습니다. 한 번만 넘어가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모든 게 김준이, 그리고 더 필름이 원하는대로 진행되었다.

그러나 지금 한록은 조금도 김준에게 기죽지 않았고, 오히려 아주 당당한 모습을 유지했다.

"할 말 다 하셨으면 끊겠습니다. 담당자 변경 원하시면 정식으로 요청하십시오."

[잠깐..!]

김준이 뭐라 대답하려 했지만 정말 전화를 끊어버린 한록.

"어..."

은근히 한록의 통화를 지켜보고 있던 마케팅 부서의 모두가 당황스러운 얼굴로 한록을 바라보았다.

'속 시원하다. 역시 이한록이네.'

'그 검은머리 외국인 새끼...언제 당하나 기다리고 있었지.'

갑질에 맞받아치는 한록의 속시원한 대응. 그에 대해 기뻐하는 사람들. 그러나 마냥 기뻐할 수 만은 없었다.

'...근데 저래도 되나?'

'더 필름이랑 싸워서 어쩌자는 거지...?'

다들 김준의 갑질과 간섭에 화가 났지만 그걸 참아왔던 이유. 바로 영화계의 슈퍼 갑인 더 필름에 대한 공포 때문이었다.

현차장이 심각한 얼굴로 정부장의 눈치를 보더니 한록에게 말했다.

"이과장. 잠깐 얘기 좀 하자."

얼른 한록을 복도로 데리고 간 현차장. 현차장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한록에게 물었다.

"이과장. 이래도 되는 거야? 더 필름이랑 계속 일 해야 하잖아. 감당 가능하겠어?"

"업무적인 것도 아니고, 그냥 짜증을 내고 있는 겁니다. 받아줄 생각 없습니다."

"그거야 맞는 말이지. 근데 사회 생활이란 게 그렇게 돌아가는 게 아니잖아. 저 쪽에서 진짜 컴플레인 걸면 뒷감당 힘들어질 텐데."

"상관 없습니다."

한록이 당당하게 답했다.

"저한텐 본부장님이 계시니까요."

*

그날 저녁, 정부장과 최경준의 대화.

정부장이 전한 한록의 소식에 최경준이 미소를 지었다. 가소롭다는 듯한 미소였다.

"더 필름이랑 싸웠단 말인가. 더 필름 측에서 뭐라 하든 상관 없으니, 본인 편한 대로 진행하라고 하게."

할리우드의 최고 영화사 중 하나인 더 필름. 그곳의 직원 김준.

그러나 김준도 결국 일개 회사원 중 한명일 뿐이다.

김준이 갑질을 할 수 있는 것도 같은 사원 급에서나 가능한 거지, CK ENM에서 상당한 파워를 가진 최경준에게는 그저 애들 장난인 것이었다.

'...이한록에 대한 신뢰가 대단하시군.'

오늘 한록이 왜 그리 당당했는지 드디어 이해한 정부장.

'만약 김준이 정식으로 문제를 제기한다면 곤란해지는 건 김준 쪽이 되겠지. 오히려 보고 싶군.'

최경준이 한록의 뒤에서 전폭적인 지지를 하고 있다. 그렇다면 김준 정도는 신경 쓸 만한 문제가 아니었다.

그렇게 판단한 정부장이 본론을 꺼냈다.

"본부장님. 저는 싱어롱이 위험하다 생각합니다."

"그래. 위험할 수 있지. 그만큼 돌아오는 건 클 거고."

김준에 대해 얘기하던 때와 달리, 최경준의 태도가 진지하게 바뀐다.

"본부장님. 방송국 인수를 코 앞에 두고 있는 상황입니다. 지금은 모험을 할 때가 아니지 않습니까."

정부장이 한록에게 했던 것과 같은 말을 했다.

"이한록이 또 재밌는 기획을 가져왔습니다. 저도 인정합니다. 다만 일정 부분은 오과장의 기획안을 따를 필요가 있습니다. 안전한 방식을 같이 가져가자는 겁니다."

최경준이 정부장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말했다.

"정부장. 자네가 왜 수원으로 내려갔는지, 왜 내가 이한록처럼 자네를 신뢰하지 않는지 아는가."

회사에 이렇다할 끈이 없는 정부장. 그런 정부장의 치부를 찌르는 말이다.

최경준이 좀처럼 꺼내지 않는 화제에 정부장이 바짝 긴장해 답했다.

"모릅니다."

정부장이 솔직하게 답했다.

'내 능력은 누구보다 뛰어나다.'

'그런데 왜 나는 여기서 더 성장할 수 없는가.'

그에 대한 최경준의 답

"자네는 부하를 믿지 못해."

그 말에 정부장이 눈을 크게 떴다. 생각지도 못한 말이다. 그러나...

'틀린 말은 아니다.'

외면하기에는 너무나 맞는 말이었다.

"이한록 같은 뛰어난 부하가 있는데, 그 부하를 밀어주진 못할망정 능력을 발휘할 기회를 막고 있지 않은가."

현차장의 승진에 반대했던 정부장. 한록의 마케팅 방안에 계속 제약을 걸었던 정부장.

그 모든 걸 파악하고 있는 최경준.

"뛰어난 장수에게 부하가 없다면 그저 장수에서 그칠 뿐이지. 자네가 장수가 아니라 군주가 되고 싶다면 아랫사람을 다루는 법을 알아야 할 거라네."

회사에서 부하의 실적은 결국 상사의 실적이 된다.

그러나 정부장은 여태 한록의 성과를 봐 왔음에도, 한록을 믿고 일을 맡기지 못했다.

"이한록 말이 맞아. 실적에 대한 평가는 자네가 하는 게 아니라 관객이 하는 거라네, 그리고 그 녀석은 지금 가장 관객을 많이 모으고 있어. 그런데 그 녀석의 말에 반대할 이유가 뭔가?"

"자네가 그 녀석에게 반대할 자격이 있는가?"

최경준의 말은 정확했고, 그만큼 아팠다.

한참 말이 없던 정부장.

정부장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본부장님."

"그래."

"본부장님 말씀이 모두 맞습니다. 이 일은 이한록에게 전권을 주고, 지켜보겠습니다."

정부장의 깔끔한 인정. 그에 최경준이 만족스러운 듯 미소를 지었다.

"자네도 점차 성장하는군. 예전이었으면 이런 말이 안 나왔을 텐데 말이야."

실무를 다루던 시절 한록만큼이나 뛰어난 능력을 발휘했던 정부장.

그런만큼 부하를 믿지 못하고, 모든 일에서 자신이 정답인 것처럼 행동했다.

그런 정부장이 처음으로 '부하를 믿고 맡겨보겠다'는 말을 한 것이다.

"...상대가 이한록이지 않습니까. 일을 망치지는 않을 겁니다."

그리고 정부장의 믿음은 그 대상이 한록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하하. 아직 완전히 정신을 차린 건 아니군."

정부장의 말에 최경준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이한록은 믿을만한 놈이지. 다행히 자네는 부하를 잘 뒀어. 자네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

"..."

아주 오랜 침묵 후, 정부장의 대답.

"네, 맞습니다."

남에게 절대로 칭찬을 해주지 않는 정부장. 그런 정부장의 '부하를 잘뒀다'는 말.

그 말이 얼마나 큰 의미인지 알기에, 최경준은 그저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

정부장이 나간 후 혼자 남은 최경준.

최경준은 다리를 꼬고 앉아 생각에 잠겨있었다.

'정부장도 변화하고 있군.'

오늘 정부장에게 지적을 하긴 했지만, 정부장이 자신의 지적을 받아들일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정부장은 자신의 말을 인정했고 한록을 믿겠다고 말했다.

'가능성이 보이는군.'

능력은 뛰어나지만 한계를 보이던 정부장. 그래서 최경준의 사람이 될 수 없던 정부장.

그런데 그런 정부장이 한록 덕분에 성장하고 있다.

'쓸 만한 사람이 한 명 더 생길 수 있는 건가.'

이 녀석은 믿어도 된다. 이 녀석에게는 내 뒤를 맡길 수 있다. 그런 생각을 들게 만드는 부하.

만약 한록이 정부장에게 그런 부하가 될 수 있다면, 정부장 역시 크게 변화할 것이다.

'이번 싱어롱 상영이 중요할 거다.'

그리고 정부장의 변화는 아마 이번 싱어롱 상영의 흥행으로 결정될 게 분명했다.

-내가 틀릴 수 있다.

-나보다 부하의 말이 더 맞을 수 있다.

이번 싱어롱 상영이 성공한다면 정부장에게 그런 패배, 아니 기회가 주어지게 될 것이다.

"본부장님."

그때 밖에서 자신을 부르는 들렸고, 생각을 마친 최경준이 몸을 일으켜 문을 열어주었다.

"본부장님, 안녕하십니까."

문을 두드린 상대는 한록이었다.

"그래, 앉게."

최경준이 한록을 쇼파로 안내했다.

"할 말이 뭐지?"

오늘은 한록이 드물게 먼저 면담을 요청한 날.

한록이 이런 식으로 면담을 요청할 때는 폭탄 선언을 하거나, 엄청나게 매력적인 제안을 하거나 둘 중 하나였다.

'오늘은 또 무슨 말을 할지 기대되는군.'

흥미와 기대를 담은 최경준의 얼굴.

"더 필름과의 일이라면 걱정하지 말게. 아무 걱정하지 않을 수 있도록 처리해주겠네."

"네, 걱정하지 않습니다. 본부장님이 막아주실 거라 예상했습니다."

"하하! 날 이용하겠다는 건가?"

"맞습니다. 본부장님의 사람에게 이 정도는 해주실 거라 생각합니다."

"배짱도 좋군. 그리고 건방져."

최경준의 말처럼, 건방지다고도 볼 수 있는 한록의 말.

그러나 최경준은 조금도 기분 나빠하지 않는 얼굴이었다. 오히려 한록과 최경준 사이의 실이 더욱 굵어진다.

'마음에 들어 하시는군.'

"그래. 내 사람이라면 이 정도 배짱과 영악함은 있어야지. 잘 생각했네."

한록의 배짱, 자신을 적재적소에 이용하는 능력, 그리고 자신에 대한 한록의 신뢰. 그 모든 것이 최경준의 마음에 쏙 든 것이다.

"더 필름과의 일이 아니라면, 하고 싶은 얘기가 뭐지?"

한참을 웃던 최경준이 한록에게 물었다.

최경준의 흐뭇한 미소. 그리고 더 필름과의 에피소드 덕분에 굵어진 실.

'좋아. 지금이라면 허락해줄 거다.'

그 모든 것을 고려한 한록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부탁드릴 게 있습니다."

"자네가 이런 말을 할 때면 대체 무슨 짓을 할까 불안해."

그러나 말과 달리 최경준은 여전히 기대하는 듯한 얼굴이었다.

"그래, 원하는 게 뭔가?"

"싱어롱 상영 홍보에 5억을 쓸 예정입니다."

"마음대로 해보게. 난 자네가 뭘 할지 매우 기대하고 있거든."

정부장과 다르게 상당히 긍정적인 최경준의 반응. 한록이 조금 더 자신감을 가지고 말했다.

"네, 감사합니다."

"이게 끝인가?"

"아뇨. 본부장님의 승인이 필요한 일이 있습니다."

"뭘 하려는 거지?"

"곧 열릴 락 페스티벌에서 한 타임을 빌리고 싶습니다."

"락 페스티벌이라고?"

두달 뒤 열리는 CK 주관의 락 페스티벌. 공연사업부에서 진행하는 사업이었다.

영화와는 전혀 관련이 없는 다른 본부의 사업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한록. 한록의 말에 최경준이 얼굴을 찡그리며 물었다.

"그건 왜지?"

그리고 한록이 답했다.

"<퀸>의 개봉을 거기서 할 예정입니다."

영화의 개봉을 락 페스티벌에서 하겠다는 한록의 말.

"허락해주십시오."

그리고 당당하게 승인을 요청하는 모습.

"...내가 정부장에게 충고를 할 때가 아니었군."

한록의 말에 최경준이 당했다는 듯 헛웃음을 터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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