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8 : 5억입니다.(1) >
"일하는 사람을 붙잡아뒀군. 가보게."
최경준이 그렇게 말하며 몸을 일으켰다. 직접 문을 열어주려던 최경준이 한록을 돌아보더니 말했다.
"이한록. 올해 샤로떼 엔터테인먼트의 라인업이 대단한 건 알고 있겠지."
영화 수입. 해외 제작사의 영화 상영권을 수입해 국내에서 상영하는 분야다.
이 분야에서 역시 CK와 샤로떼는 국내 최고의 라이벌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올해의 헐리웃 대작은 샤로떼가 거금을 주고 싹 쓸어가 버린 상황.
"그쪽도 나름대로 발버둥치고 있는 모양이야."
CK ENM이 방송국 인수를 위한 전쟁 중이라면 샤로떼는 영원한 라이벌인 CK를 이기기 위해 이를 가는 중이었다.
'그리고 올해는...CK가 최초로 샤로떼에 패배했지.'
과거를 떠올리는 한록.
그만큼 올해 샤로떼 엔터테이먼트의 활약은 대단했다. 그리고 이는 CK ENM이 CK기획에 방송국을 뺏긴 이유 중 하나이기도 했다.
'패배자에게 보상을 줄 순 없다.' 는 하정엽의 단호한 의견.
회상을 마친 한록이 최경준에게 답했다.
"네, 압니다."
"관리자의 입장에서 볼 때, 매출을 잘 나오게 할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이 있다네."
오늘 한록과의 대화로 기분이 좋아 보였던 최경준. 그의 눈빛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경쟁자를 다 죽여 버리는 거지."
여전히 품위 있는 목소리. 그러나 최경준의 말투에 묘하게 강압적인 어투가 섞이기 시작한다.
"그냥 매출 증대로는 만족할 수 없다네. 원하는 건 무엇이든 들어줄테니, 샤로떼의 목을 조르게."
당황스러울 정도로 친절하다가도, 또 금방 태도를 바꾸는 최경준.
'왜 이 사람이 이 자리까지 올라왔는지, 왜 이 사람이 모두의 존경을 받는지 알겠다.'
사람을 손바닥에서 가지고 노는 최경준. 왜 오과장과 정부장을 비롯해 모든 사람들이 그의 인정을 받고자 분투하는지 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네가 이런 걸 좋아하지 않는다는 건 알아. 하지만 내 사람이 되었으면 내 말을 따라야지."
은근한 협박이 담긴 말. 그에 대해 한록이 답했다.
"네, 그런 건 좋아하지 않습니다."
누군가와 경쟁하고, 상대를 짓밟는 것. 최경준의 말마따나 한록이 좋아하지 않는 방식이다. 그러나 최경준은 단호하게 답했다.
"내 앞에서 못하겠다는 말은 안 통해."
"못하겠다고 말씀드린 적 없습니다."
"그럼?"
"좋아하진 않지만..."
한록이 최경준을 바라보았고, 씩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제 특기중 하나입니다."
그 말에 최경준이 웃음을 터뜨리며 문을 열었다. 그리고 한록에게 말했다.
"그래, 이래야 내가 고른 사람이지."
*
회의실에 모인 GV팀.
한록이 <퀸>을 담당하는 게 결정된 직후 팀 회의가 소집되었고, 현차장이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오늘부터 우리팀은 '퀸'을 맡게 될 거야."
"갑자기 퀸이라니...규모가 엄청 커졌네요."
하대리가 약간 불안한 얼굴로 말했다.
CK ENM은 보통 한명이 하나의 영화를 담당한다. 거기에 유선 같은 계약직 사원들이 sns 관리 등 자잘한 도움을 주는 구조.
하지만 제작비가 100억이 넘어가는 '대작'에는 팀 단위로 사람들이 달라붙는다.
그만큼 기대작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실패할 경우 CK 역시 큰 타격을 받기 때문이었다.
"<퀸>제작비가 얼마였지?"
"600억이요."
"삼일의 삶 제작비가 1억이었지."
독립 다큐 영화를 다루다가 이제 세계적인 밴드를 다룬 헐리웃 영화를 담당한다.
갑자기 600배 커져버린 영화의 규모. 그 말이 의미하는 것.
현차장이 한록에게 물었다.
"홍보비는 얼마나 써도 된대?"
"10억까지 가능합니다. 원래 15억인데, 오과장이 이미 5억을 썼습니다."
GV팀이 다룰 수 있는 비용도, 그리고 그에 따른 부담도 엄청나게 상승했다는 것이었다.
"10억..."
기대보다는 가라앉은 목소리의 현차장.
10억. 자그만치 삼일의 삶 총체작비의 열 배나 되는 비용을 오로지 홍보를 위해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10...10억이요? 이 영화 하나에 10억이요?"
"유선씨. 홍보비만 천억대로 들어가는 영화들도 있어요."
깜짝 놀란 유선에게 담담하게 말하는 한록.
과거 한록이 <식물> 헐리웃 마케팅을 담당했을 때 역시 천억에 달하는 금액을 다루었다.
영화라는 게 전 세계의 모두가 보는 매체기에, 그리고 수 조원대의 현금이 오가는 연예계의 일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 일하다 보면 가끔 돈 감각이 이상해져. 내 월급은 몇 백대인데, 내가 다루는 돈은 억대잖아."
"저도요. 가끔 이게 뭔가 싶기도 하죠."
"저도 그렇게 될 거 같아요..."
여전히 놀란 유선과, 그런 유선을 이해한다는 표정의 현차장, 하대리.
다들 너무 오랜만에 규모가 큰 영화를 맡아 긴장이 되는 모양이었다.
"예산이 큰 만큼 부담이 되겠지만, 대신 그간 해보고 싶었던 걸 전부 시도해 볼 수 있을 겁니다."
넷 중 유일하게 차분한 한록.
회귀 전 이미 헐리웃 영화들과 제작비 수천억대의 영화를 다뤄봤기 때문에 침착함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래. 제작비가 1억이든, 600억이든, 우리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을 해야하는 거지."
한록의 말에 정신을 차린 현과장이 말했다. 하대리 역시 충격에서 빠져나와 고개를 끄덕인다.
"자, 그럼 일합시다."
한록이 모두에게 영화 내용과 예산 등이 적힌 프린트를 나눠주었다.
프린트를 보던 유선이 말했다.
"이거 외국에서 반응이 좋을 거 같긴 해요. 퀸이 워낙 유명하니까요."
그러나 유선의 목소리에는 의문이 담겨있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그리고 유선의 말을 잇는 하대리의 단호한 목소리.
"락이 죽었죠."
하대리는 노트북에 락밴드의 스티커가 덕지덕지 붙어 있는 사람이었다. 락덕후인 그가 솔직하게 말했다.
"우리나라에서 퀸 얘기를 보고 싶어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젊은 층은 이름이랑 보헤미안 랩소디만 들어봤을 걸요."
본인이 락을 좋아하는 만큼, 퀸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 크지 않다는 걸 냉정하게 파악한 것이다.
하대리와 유선의 지적에 한록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맞는 말이에요."
'한국에서 누가 퀸 영화를 보러 오냐?'
음악영화. 그것도 오래된 외국 밴드의 전기 영화. 락에 대한 관심이 죽은 한국. 실제로 <퀸>을 수입할 때도 나왔던 얘기들이었다.
'돈만 많이 들이고 수익은 기대하기 어려울 거다.'
그런데도 CK ENM이 거금을 들여서 <퀸>을 수입한 것은 최경준의 결정이었다.
샤로떼에서 이미 기대작들을 가져갔기 때문에, 남아있는 영화들 중 가능성 있는 영화들을 수입해야 하는 상황.
'한국에서 음악 영화는 입지가 크지 않다. 하지만 가끔씩 이례적으로 성공하는 영화들이 있다.'
'이제 음악영화가 성공할 시기가 됐다.'
라는 최경준의 판단에 CK ENM은 <퀸>을 수입하게 된 것이다.
"퀸에 대한 얘기가 아니라 음악 영화로 접근해야 해요. 퀸의 일대기 영화라고 하면 기껏해야 락을 좋아하는 사람이나 보러오겠죠."
한록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하대리.
"네, 맞는 말이에요. 생각 중인 마케팅 방안 있으세요?"
"*싱어롱 상영을 할 겁니다."
*싱어롱-영화관에서 대사나 노래를 따라 부르는 방식의 상영.
과거 <퀸>은 개봉 초기에는 모두의 예상처럼 망하는 듯 보였으나, 싱어롱 상영 이후 엄청난 흥행을 보였다.
'다만 결국 천만을 채우진 못했지.'
싱어롱 상영으로 한국 영화 마케팅의 한 획을 그은 <퀸>. 그런 <퀸>마저 천만 관객을 달성하지 못했다.
-음악 영화로서 천만 관객을 달성한다는 건 오로지 디즈니만 가능한 일이다.
<퀸>의 천만 실패 이후로 모두의 머릿속에 파고든 생각. 그러나 한록은 이에 동의하지 않았다.
'오과장이 좀 더 일찍 싱어롱을 결정했으면, 그리고 싱어롱을 대대적으로 홍보했으면 천만 이상의 결과가 나왔을 거다.'
언제나 안전하고, 결과가 보이는 방식을 선택하는 오과장.
오과장은 늘 그렇듯 포털 사이트와 TV 광고에 많은 돈을 투입했고, 싱어롱은 그저 얻어걸린 결과 중 하나였다.
"싱어롱 상영이라...저도 한번 해보고 싶었긴 하거든요."
한록의 아이디어를 듣던 하대리가 말한다. 하대리는 설렘과 두려움이 동시에 느껴지는 듯한 얼굴이었다.
외국에서는 싱어롱 상영, *댄서롱상영 등 다양한 방식의 상영이 시도되지만, 아직 한국에서는 조용한 관람이 대부분인 상황.
*댄서롱 상영-영화관에서 함께 춤을 추는 상영
그런 상황에서 한록이 '싱어롱 상영' 자체를 홍보 키워드로 잡겠다는게 걱정이 되는 것이다.
"싱어롱 상영이 잘 될까요? 쉽게 따라 부를 수 있는 노래도 아니고, 무엇보다 가사가 영어잖아요. 그리고 퀸의 노래를 모르는 사람도 상당히 많고요."
하대리의 걱정은 두가지였다. 한국의 정적인 관람문화. 그리고 퀸에 대한 관심도.
과거 오과장이 초반에 싱어롱 상영을 반대한 이유기도 했다.
-그리고 그건 싱어롱 상영의 매력 포인트를 전혀 파악하지 못한 생각이다.
한록이 하대리에게 말했다.
"하대리님. 싱어롱 상영의 포인트가 뭔지 아십니까."
"노래가 좋아야하겠죠?"
"아뇨, 노래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 말에 한록이 단호하게 답했다.
"중요한 건 노래가 아니라 관객입니다. 관객들이 잘 노는 거요."
싱어롱 상영을 보러 오는 관객들은 조용히 영화를 보러오거나, 노래를 감상하러 오는게 아니다.
"그 사람들은 영화관에서 콘서트를 즐기고 싶어서 오는 겁니다."
콘서트만큼 신나는. 그러나 영화만큼 감동적인 경험.
싱어롱 상영에 참여하는 관객은 두 개의 욕구를 가지고 영화를 보러 오는 것이다.
"참여하는 관객들이 얼마나 열정적으로 느끼는지에 따라 영화의 흥행이 달라질 겁니다. 어쩌면 영화보다도 관객이 더 중요할 거예요."
"그래도 이건 영화잖아요. 그리고 진짜 가수가 공연을 하는 것도 아니고요. 싱어롱 상영이 정말 효과적일 수 있을까요?"
한록의 말에 반발하는 하대리. 그때 한록이 하대리에게 물었다.
"하대리님. 락을 좋아하시죠."
"...네, 좋아합니다."
"공연은 자주 보러 가십니까?"
"그렇죠. 영화만큼 보러 가요."
"대리님이 공연을 보러 가는 이유는 뭡니까?
"그야 당연히, 라이브 들으려고..."
"집에서 음원으로 들어도 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굳이 라이브를 들어야 하는 이유가 뭔가요?"
"그건..."
한록의 말에 하대리가 말을 멈춘다.
공연장을 찾아가는 자신의 모습을 떠올리는 하대리.
공연장까지 1시간. 줄서는데만 2시간. 콘서트가 진행되는 3시간. 덥고, 좁고, 사람들의 환호성으로 잘 들리지도 않는 가수의 목소리.
그럼에도 사람들이, 하대리가 공연장을 찾는 이유.
"그 분위기가 좋아서요."
오로지 지금 이 순간을 즐기기 위해 모인 수백명의 사람들. 그 사람들과 함께 열광하는 순간들.
그 순간을 위해서다.
하대리가 무언가 깨달은 듯한 얼굴로 한록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한록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래요. 수백명의 사람들과 교감한다는 즐거움. 지금 이 순간을 즐긴다는 감정."
"우리는 영화를 파는 게 아니라 그 감정을 파는 겁니다."
*
싱어롱 상영에 대한 만장일치로 끝난 GV팀 회의.
한록이 회의 결과를 보고하기 위해 정부장을 찾았다.
"퀸에 대한 관심이 너무 낮다는 하대리 의견도 타당합니다. 그래서 라디오에 계속 퀸 노래를 요청할 겁니다."
"그래, 그 부분은 같이 해야지."
고개를 끄덕이는 정부장. 정부장이 아이디어를 하나 낸다.
"TV광고도 내는 건 어때? 영화 말고, 퀸 자체로."
"돈이 아깝습니다."
단호하게 대답하는 한록. 그 모습을 보고 정부장이 의외라는 듯 말했다.
"이한록이 돈을 아낄 때가 다 있네."
"TV광고는 돈이 너무 많이 들어갑니다. 그리고 돈을 써야 하는 곳은 따로 있습니다."
TV광고는 각종 마케팅 방안 중 가장 돈이 많이 들어가는 광고이고, 몇 주 방영하면 1,2억이 우습게 들어가는 마케팅 방안이었다.
그런만큼 삼일의 삶과 지구특공대 때는 쓰지도 못했던 방법. 그런 강력한 수단을 퀸을 홍보하는 것에 쓸 마음은 없었다.
"아껴서 어디에 쓰려고?"
"이번 마케팅의 핵심은 싱어롱 상영 자체에 대한 홍보입니다. 이 부분에 힘을 많이 실어줄 생각입니다."
"그래서 얼마나 쓸 건데."
오과장이 그랬듯, 전통적인 마케팅 방안에 익숙한 정부장은 싱어롱 상영에 대해 달갑지 않게 생각했다.
그러나 부서에서 가장 유능한 한록이 추진하겠다는 상황이니 내버려두고 있는 것.
그런 상황에서 한록이 초강수를 던진다.
"5억입니다."
총 홍보비의 50%. 영화 하나의 제작비에 맞먹는 금액.
그걸 전부 싱어롱 상영 홍보에 쓰겠다는 한록.
정부장이 충격을 받은 얼굴로 한록에게 물었다.
"이한록. 너..."
"제정신이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