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 회사원이 선넘으면 생기는일-57화 (57/263)

< 57 : 현차장님, 이과장님!(2) >

일주일 뒤, 사무실로 출근한 한록.

"이과장님!"

문을 열자마자 유선이 한록을 보고 소리친다.

"갑자기요?"

"책상 확인해보세요!"

유선의 말에 책상을 보니 [이한록 과장]이라는 이름표와 새로운 명함이 도착해 있었다.

'과장이라. 옛날 생각나네.'

한록은 자신이 과장으로 승진했던 먼 기억을 떠올렸다.

'재수 없는 새끼. 벌써 과장이라고?'

'위에 뭐 준거 아냐?'

자신을 시기하고, 질투하던 사람들.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유선뿐만이 아니라 송과장, 최대리 등 한록에게 호감을 가진 사람들이 한록의 주위에 몰려든다.

"이야...이과장이잖아?"

"서른에 과장이면 회사 최초 아냐? 기분이 어때. 이과장?"

"회사가 뭐야. 업계 최초겠지."

"사탄의 회사에 최연소 과장의 등장이네요."

한록에게 대답할 시간도 주지 않고 떠드는 사람들.

이전과는 전혀 다른 호의적인 반응들이다.

물론 지금도 한록을 탐탁지 않게 여기는 사람이 많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진심으로 한록을 대단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한록은 그저 어색하게 고맙다는 말을 할 뿐이었다.

그때 누군가 사무실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왔다.

당당하고 늠름한 모습. 그리고 은서가 만져준 머리.

현과장, 아니 현차장이었다.

"현차장 출근했습니다."

으쓱거리는 현차장. 송과장이 현차장에게 물었다.

"현과장. 너무 들뜬 거 아냐?"

"현차장이야!"

송과장의 말에 발끈하는 현차장. 그러나 기분은 매우 좋아보였다.

"대리님...아니, 과장님. 잠시만요."

송과장과 현차장이 다투는 틈을 타 유선이 조용히 한록을 부른다.

유선을 따라 복도로 나간 한록. 유선이 한록에게 작은 상자 하나를 내밀었다.

"승진 선물이에요. 과장님 남색 좋아하시죠?"

유선이 건넨 건 남색 넥타이였다.

한록이 놀란 얼굴로 물었다.

"이건 어떻게 알았어요?"

"다 방법이 있죠!"

유선이 뿌듯한 얼굴로 답했다.

*

며칠 전, 점심시간이 끝나고 다 함께 커피를 마시던 GV팀.

한록이 실수로 넥타이에 커피를 흘렸고, 밝은 회색 넥타이가 커피로 물들어버렸다.

"넥타이를 하나 사야겠네요."

별다른 생각 없이 말한 한록. 그때 갑자기 유선이 한록에게 질문을 던졌었다.

"대리님, 혹시 무슨 색 좋아하세요?"

"음...남색?"

한록의 말을 듣고 주먹을 꼭 쥐던 유선.

'그래! 이거다!'

한록의 승진 선물로 대체 뭘 줘야 하나 고민이었는데, 마침 딱 좋은 생각이 난 것이다.

*

"그래서 물어본 거였구나. 고마워요. 그래도 이런 거는 선배가 사주는 거예요."

"제가 너무 감사해서 그래요."

"맨날 뭐가 감사해요."

한록의 말에 유선이 답한다.

"맨날 다 감사하죠. 특히 영화제때는 밤새가면서 저 가르쳐 주셨잖아요."

영화제 프레젠테이션 함께한 한록과 유선.

한록은 스파르타로 유선을 교육시켰고, 유선은 정말 열심히 따라와 주었다.

"너무 지나친 게 아닌가 걱정 했어요."

"아니에요. 과장님 혼자 하면 더 잘하실 텐데, 저 가르치느라 일부러 시간 내신 거잖아요."

한록의 걱정과는 다르게 유선은 진심으로 고마워하고 있었다. 유선이 뿌듯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저 잘 배웠죠?"

"그럼요. 정말 잘했죠."

"그때 일 아직도 꿈에 나와요. 엄청 뿌듯했거든요. 과장님 아니었으면 절대 못 얻었을 기회잖아요."

계약직 사원이 사장 앞에서 프레젠테이션을 한다.

유선의 실력과는 별개로, 한록이 유선을 믿어주지 않았다면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다.

유선은 그때의 고마움을 아직도 잊지 않은 것이다.

"이런 걸론 감사한 걸 다 표현할 수 없지만...그래도 정말 감사해요."

승진 후 선물이라고는 영도와 가족들에게 받아본 게 전부인 한록. 그런데 지금은 부하가 진심을 담은 선물을 건넨다.

한록 역시 유선에게 큰 고마움을 느꼈다.

"저도 고마워요. 유선씨 없었으면 그만큼 잘 끝내지 못했을 거예요. 선물 잘 쓸게요."

"다음에는 다른 거 드릴게요."

"아니에요. 유선씨 용돈 하세요."

"저 스물 일곱인데요.."

"어. 이대리...아니 이과장. 유선씨."

유선과 한록이 대화를 나누는 그때. 누군가 둘을 발견하고 소리쳐 불렀다. 현차장이었다.

"둘 다 여기 있었네. 이과장, 이거 받아."

그러면서 한록에게 상자를 내미는 현차장.

"이게 뭡니까?"

"일단 열어 봐. 깜짝 놀랄 걸?"

한록은 현차장이 내민 상자를 빤히 바라보았다. 유선이 내민 것과 비슷한 사이즈. 거기에 비슷한 포장.

'설마...?'

설마 하는 마음에 포장을 뜯어보니 보인 것은-

"이과장 넥타이 필요하지?"

역시나 넥타이였다.

*

며칠 전의 GV팀.

"음...남색?"

'이거다!'

한록의 대답에 주먹을 꼭 쥐고 생각하는 유선.

'그래! 이대리 선물은 넥타이다!'

그리고 그 옆의 현차장.

*

"어때? 그때 내가 딱 생각했지. 이대리 승진 선물은 넥타이다. 소름 돋지?"

신이 나서 말하던 현차장이 한록의 손을 바라본다.

"...이거 뭐야? 설마 유선씨도 넥타이 준 거야?"

"네..."

"나한테는 홍삼즙 사줬잖아. 유선씨, 다음부턴 이런 거 사주지 말고 친구들이랑 맛있는 거 사 먹어."

"저 스물일곱이라니까요..."

"그때면 놀아야지. 그리고 이런 거 자꾸 사주면 말이야, 다음에 또 겹친다고!"

현차장과 유선의 대화에 한록이 웃음을 터뜨렸다.

'고맙다. 그리고 미안하네.'

승진 선물을 준비한 현차장과 유선. 하지만 자신은 아무것도 준비하지 않았다.

이전에 선물을 받아본 적이 없다보니, 누군가 선물을 줄 거란 생각조차 하지 못한 것이다.

이렇게 고마운 사람들에게 제대로 보답을 못했다는 생각이 든 한록. 한록이 모두에게 말했다.

"오늘 다 같이 식사해요. 제가 살게요. 하대리님한테도 말씀드리겠습니다."

"저 왜요?"

그때 들리는 하대리의 목소리.

모두가 뒤를 돌아보자, 복도 끝에 하대리가 서 있었다.

"다들 여기서 뭐하세요?"

그리고...

"이과장님. 이거 선물이에요."

하대리의 손에 들린 넥타이 상자.

*

"여보세요. 네. 삼일의 삶 판권 때문에 연락드렸는데요. 네. 현차장입니다."

차장으로 승진 한 후, 현차장은 놀랍도록 의욕적으로 일하기 시작했다.

"현과장 대단하네. 진작 이렇게 했음 3년은 일찍 차장 달았겠다."

"현차장 이라고!"

직장인에게 주어지는 최고의 보상, 승진.

오과장에게 밀려 몇 년이나 막혀있던 승진이다. 그런데 드디어 차장을 달았으니, 현차장이 이렇게 열심히인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일주일, 이주일이 지날수록 현차장의 얼굴에선 점점 미소가 사라지기 시작했다.

"현차장님. 결재가 안 돼서요."

"어, 어. 미안, 이과장."

넋을 놓고 있다가 한록의 말에 후다닥 컴퓨터를 바라보는 현차장.

그러나 이전처럼 게으름을 부리거나, 일을 하기 싫어하는 듯한 모습은 아니었다.

오히려 무언가 부담을 느끼는 것 같은 모습.

'집에 무슨 일이 있으신가?'

한록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현차장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날 점심. 담배를 피우기 위해 옥상으로 올라온 한록.

한록은 옥상 구석에서 현차장이 심각한 얼굴로 서 있는 것을 발견했다.

"차장님. 무슨 일이십..."

한록이 말을 걸자 입에 손가락을 가져다 대는 현차장.

조용히 다가가보니, 조금 떨어진 곳에서 현차장에 대한 얘기가 나오고 있었다.

"차장 자리는 결국 현주훈이 가져갔네."

"마케팅부에 그렇게 사람이 없나?"

"없기는. 송과장도 남과장도 오과장 때문에 밀려있던 거지."

"현주훈이 날로 먹은 거네."

현차장에 대한 뒷담화들. 뒷담화를 듣는 현차장의 표정은 심각했다.

그러나 일이 커지는 건 원하지 않는 듯, 현차장은 그저 조용히 얘기를 들을 뿐이었다.

"현주훈이 한 게 뭐가 있다고 승진을 하냐. 그거 다 이한록이 한 거잖아."

"부하 잘 만난 것도 현주훈 복이지."

"그게 잘 만난 거 같아? 저러다 이한록한테 밀리겠지."

"하긴. 오래 못 갈 거다."

그러나 한록은 자신에 대한 말을 참을 생각이 없었다.

"실례하겠습니다."

한록이 사람들 사이로 걸어 들어갔고, 사람들이 깜짝 놀란 말을 멈췄다. 그리고는 얼른 담배를 끄더니 황급히 자리를 떠났다.

"나 때문에 자꾸 이과장 이름이 오르내리네. 미안하다."

"차장님 잘못은 아니죠."

"아니지. 내가 제대로 된 상사가 되어야하는 건데 말이야."

담배를 한 모금 마시더니 한숨을 쉬는 현차장.

"그게 좀 어렵긴 하네."

"이미 좋은 상사십니다."

한록이 진심으로 말했다.

'사람이 한 순간에 변할 수는 없어.'

자신도 그랬고, 유선도 그랬다.

남들은 한록과 유선이 한순간에 성장했다고 생각하지만, 그 성장을 위해선 보이지 않는 곳에서의 노력이 있었다.

현차장도 이런 일을 겪으며 점점 변화할 것이다. 지금은 그저 시간이 필요할 뿐이다.

"어우, 이과장이 그렇게 말해주니까 승진 한 것 보다 뿌듯하네."

한록의 위로에 일부러 밝게 말하는 현차장.

그러나 그게 오히려 지켜보는 사람의 마음을 불편하게 했다.

"너무 신경쓰지 마세요. 위로 올라갈수록 떠드는 사람은 많아지는 법입니다."

"이과장이야말로 위로하지마라. 상사가 위로받는 거 아니다!"

"차장님, 오늘 술 한 잔 하시겠습니까?"

"됐어. 우리 은서 보러 집에 빨리 가야돼. 이제 그만 농땡이 부리고 내려가자."

밝게 말하고 등을 돌리는 현차장.

그러나 한록의 표정은 여전히 풀어지지 않는다.

그 모습을 보며 현차장이 한록의 등을 툭툭 두드렸다.

"이과장, 인상 그만 써! 잘생긴 얼굴 다 구겨지겠네."

"안 쓴 겁니다."

"내 걱정도 말고. 난 지난번에 이과장이랑 함께 가기로 한 순간부터 마음 독하게 먹었어. 이깟 일은 아무렇지도 않아."

한록을 위해 강한 모습을 보이는 현차장. 그 모습을 보고 한록이 생각했다.

'날 걱정시키고 싶지 않으신 거구나.'

현차장의 마음을 이해한 한록이 고개를 끄덕였다.

'현차장님은 잘 하실 거야. 아니, 이미 잘하고 계시지.'

현차장은 이미 충분히 좋은 상사의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한록은 더 이상 현차장을 위로하지 않았고, 둘은 함께 사무실로 향했다.

*

다음날. 출근을 하자마자 최경준이 한록을 찾았다.

"난 약속을 지켰네."

한록에게 말하는 최경준.

"오과장을 내보냈고. 현차장도 진급시켰지. 이제 자네가 약속을 지킬 차례야."

'나한테 인생을 걸 수 있겠나.'

'본부장님이 어떤 분인지 저도 검증이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몇 주 전 본부장실에서 오간 대화. 최경준은 지금 그 얘기를 하고 있는 것이었다.

이제는 한록이 보답할 차례다. 한록이 고개를 끄덕이곤 말했다.

"네. 말씀하십시오."

"인수전 얘기는 말 안 해도 알겠지.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 매출이 중요한 상황이야."

'제일 매출이 높은 본부가 방송국을 가져갈 거다.'

하정엽의 말로 인해 불이 붙은 본부장들의 전쟁.

"자네가 소규모 영화를 좋아하는 건 나도 알고 있네. 그런데 이제는 대작을 맡아야 해. 이번 분기 영화들은 무조건 천만을 달성시키게."

"네, 알겠습니다."

"대답이 시원하니 마음에 드는군. 이래야 내가 고른 사람이지."

눈에 띄게 부드러워진 최경준의 말투.

'무조건 천만 영화를 만들어라'란 말도 안 되는 요구. 그리고 그 말도 안 되는 요구에 자신감 있게 대답하는 한록.

한록의 태도에 최경준이 만족한 듯 미소를 보였다. 그리고는 서류를 하나 내밀었다.

"이번 분기 최대 기대작들이네. 이 중에서 자네 팀이 가져갈 영화를 고르도록."

한록이 최경준에게 서류를 받아 읽기 시작했다.

웹툰 원작인 저승에 대한 영화 '지옥'. sf계의 걸작 'stay'. 다이아몬드를 위한 범죄자들의 모임 '도둑'.

모두 엄청난 반향을 이끌었고, 크게 흥행한 영화들이었다.

'관심없다.'

그러나 한록의 마음에는 차지 않았다.

영화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게 아니라, 흥미로운 마케팅 포인트를 잡을 만한 부분이 보이지 않았다.

'어차피 다 좋은 영화들이야. 그렇다면 내 마케팅으로 더 빛을 볼 작품을 선택하고 싶다.'

그렇게 빠르게 서류를 넘기던 한록이 어느 영화를 보고 손을 멈춘다.

그 영화를 보는 순간 머릿속에 그려지는 장면들.

바닷가에서 삼일의 삶을 보고 흥분했던 사람들. 그런 광경을 만들 수 있을 거란 확신.

'좋아, 이거다.'

"이걸로 하겠습니다."

한록이 서류를 건네자, 최경준이 재밌다는 표정을 지으며 영화 소개를 읽기 시작했다.

"자네가 음악 영화에 관심이 있는 줄은 몰랐군."

한록이 고른 영화는 밴드 퀸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 '퀸'.

그러나 그것보다 더 최경준을 흥미롭게 만드는 일이 있었다.

"이건 오과장이 담당하던 영화라네."

이번 분기 최고의 기대작. 그래서 오과장이 담당하던 영화.

한록은 지금 그 영화를 가져가겠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개인적 원한인가?"

"아뇨. 그저 해보고 싶은 게 있을 뿐입니다."

자신 있게 답하는 한록. 오과장과의 일로 한동안 사나웠던 한록의 얼굴이 오랜만에 열정으로 반짝거렸다.

"자네가 그런 말을 할 때면 말이야, 나도 괜히 긴장이 된단 말이지."

최경준이 한록의 얼굴을 보고 기분 좋게 말했다. 그리고는 의자에 몸을 기대며 말했다.

"뒤는 내가 책임 지겠네. 아무 걱정 없이 하고 싶은 건 전부 해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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