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6 : 현차장님, 이과장님!(1) >
"멍청하시군요."
한록을 바라보는 오과장.
그 순간 오과장이 한록을 향해 달려들었고, 한록을 로비 바닥에 깔아 눕혔다.
"당장 잡아!"
"말려!"
오과장에게 달려드는 감사팀. 그러나 한록의 행동이 더 빨랐다.
-쿠당탕!
오과장의 멱살을 잡고 몸을 뒤집은 한록. 이제는 한록이 오과장을 바닥에 내리누른 상태가 되었다. 한록이 오과장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추한 꼴 좀 그만 보이세요."
"이한록!!!"
"붙잡아!"
오과장이 다시 몸을 일으키려 했으나, 감사팀 사람들이 오과장을 바닥으로 눌렀다.
"오과장님. 지금 당장 나가세요. 당장요!"
오과장에게 소리치는 감사팀 사람들과 구겨진 옷을 펴고 일어난 한록.
한록은 감사팀 사람들에게 붙잡혀 자신을 노려보는 오과장을 바라보았다.
똑바로 선 한록. 바닥에 눕혀져 한록을 올려다보는 오과장.
그 모습을 보고 한록이 말했다.
-정말 멍청하군, 이한록.
"멍청하고."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어.
"아직도 본인이 대단한 줄 알고."
-아무도 너와 일하고 싶지 않아해.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 사람."
과거에는 한록을 향하던 말들. 그리고 지금은...
"지금 오과장님 모습이군요."
오과장의 처지가 되어버린 말들.
"이한록!!"
오과장이 몸부림치며 말했지만, 한록은 무시하고 걸음을 돌렸다.
"이한록, 당장 이리 와. 당장!"
뒤에서 오과장의 고함소리가 들렸지만 전혀 신경 쓰이지 않는다.
"수고가 많으십니다."
한록은 감사팀 사람들에게 인사를 했고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로비를 지날 때마다 따라붙는 사람들의 시선. 그러나 그건 회귀 전 한록이 받았던 경멸하는 시선이 아니었다.
'무서운데...'
'멋지다.'
한록을 향한 동경과 선망.
'추하다.'
그리고 오과장에 대한 혐오.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른 한록이 몸을 돌려 로비를 바라보았다.
여전히 감사팀 밑에서 발버둥치는 오과장. 오과장을 둘러싼 사람들. 그리고 흘끔흘끔 자신을 바라보다가 마주치면 미소를 짓는 사람들.
그걸 보니 느껴지는 감정.
'아, 그래.'
'나는 두 번 다시 이런 일은 겪지 않을 거다.'
완벽히 달라진 자신에 대한 확신이었다.
"이한록!"
오과장의 고함소리를 뒤로하고, 한록이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
주말이 지나고 월요일. 한록은 늘 그렇듯 일찍 회사에 도착했다.
사무실로 향하니, 한록의 맞은편인 오과장의 책상이 싹 비워져 있었다. 한록이 오과장의 책상을 바라보자 현과장이 말했다.
"주말 동안 짐 다 빠졌다. 퇴사 절차 밟을 거래."
"오과장이 순순히 물러났나요?"
"절대 아니지. 일이 좀 많았다고 들었어. 근데 어쩌겠냐. 그런 짓을 했으면 결국 나가는 거지."
평소 성격과 달리, 오과장에 대해 냉정하게 얘기하는 현과장. 비리를 저지른 사람에게 동정은 없다는 모습이었다.
'...'
한록 역시 오과장 따위는 신경쓰이지 않았다. 다만 걱정되는 사람이 따로 있었다. 바로-
"유대리님."
자신의 짐을 담는 중인 유대리였다. 유대리가 한록을 보고 쓴웃음을 지었다.
"어, 이대리."
"잠깐 얘기 좀 하시겠습니까."
복도로 나온 한록과 유대리. 한록이 유대리에게 물었다.
"대리님 징계는 어떻게 됐습니까?"
"6개월 정직이야. 그 뒤는...모르겠다. 아마 다른 부서로 보낼 거 같아. 내가 버티면 남는 거고, 못 버티면 나가야지."
불미스러운 일로 인한 다른 부서로의 이동. 한록 역시 겪어본 일이었다.
업무가 변하는 것도 문제지만, 가장 큰 건 사람들의 시선이었다.
그냥 부서를 옮기는 것도 힘든데 사고로 인해 부서를 옮긴다.
새로운 사무실에 들어가는 순간 느껴지는 적대적 시선. 아무도 말을 걸어오지 않는 하루.
한록이 겪었고, 유대리가 앞으로 겪을 고난이었다.
한록의 표정이 굳자 유대리가 변명하듯 말했다.
"안 짤린 것만으로도 대단한 거야. 본부장님이 그나마 날 봐주신 것 같네."
이번 일로 오과장의 편을 들어 증언을 조작한 많은 사람들이 숙청당했다.
'내 아래에서 장난질을 치고 일을 키운 대가를 치러야 할 거다.'
최경준의 강력한 의지가 들어간 숙청.
그에 비해 유대리의 처벌은 규정대로였고, 거기엔 사정이 있었다.
며칠 전 한록을 불러낸 최경준이 말했다.
'관련자들은 전부 최고 수준으로 징계할거라네. 회사를 혼란스럽게 한 것. 그리고 이한록을 건드린 것. 전부 가중처벌의 사유가 되지.'
그러나 한록의 표정은 달갑지만은 않았다. 한록이 말했다.
'제가 얽히는 것은 원치 않습니다. 그저 규정대로 처리해주시면 됩니다.'
'아니, 내가 용납할 수 없지.'
'...유대리는 제 설득으로 이 일을 고발했습니다.'
'자수를 했든, 아니든, 난 관심 없어. 애초에 이 일에 끼어들지 말았어야 해.'
최경준의 말에는 흠잡을 구석이 전혀 없었다. 단념한 한록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알겠습니다.'
그러자 한록을 바라보던 최경준이 물었다.
'유대리를 살리고 싶나?'
'회사 규율을 따르는 게 좋겠다고 말씀드린 것뿐입니다.'
'살리고 싶나 보군. 그 부분은 고려해보지.'
한록과 최경준과의 대화 후, 유대리의 징계 수위는 해고에서 한 단계 줄어들었다.
최경준이 한록을 신경써준 것이다.
'유대리님이 버틸 수 있을까.'
최경준은 기회를 줬고, 그 기회를 어떻게 잡을지는 이제 유대리의 몫이었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유대리님."
"고생은 무슨. 부끄럽다."
유대리가 한록의 말에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이대리는 일 봐. 나는 사람 없을 때 빨리 가려고."
그러나 한록은 물러나지 않고 유대리가 짐을 빼는 모습을 계속 지켜보았다.
짐을 다 싼 유대리가 마케팅 부서를 한 바퀴 돌아보더니 밖으로 나선다.
아무도 유대리에게 인사를 하지 않았고, 유대리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 모습을 보던 한록이 유대리를 따라 나갔다. 그리고 손에 짐이 가득한 유대리를 대신 해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러주는 한록.
한록이 엘리베이터 숫자가 올라오는 것을 보며 유대리에게 말했다.
"유대리님."
"응. 이대리."
막상 말은 꺼냈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생각이 나지 않았습니다.
유대리가 한참동안 한록을 바라보았다.
'잘하셨습니다. 그건 아니야.'
한록은 유대리가 정말 옳은 선택을 했다고 생각하지만, 어쨌든 회사를 나가는 사람에게 할 말은 아니었다. 고민하던 한록은 결국 유대리를 보고 가장 처음 떠올렸던 말을 했다.
"후회하지 않으실 겁니다."
한록의 말에 살짝 긴장하는 듯 보이던 유대리가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이대리, 고맙다."
문이 닫히고, 유대리의 모습이 사라졌다.
*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는 유대리.
오늘이, 아니 지금 이 순간이 이 회사에서의 마지막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 그 사실이 머리로는 와닿지만 가슴으로는 믿겨지지가 않는다.
'...기분이 이상하네.'
통쾌하거나 뿌듯하다고 말한다면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분명 후련한 마음도 있었다.
'이놈의 회사가 뭐라고 내가 그런 짓까지 했지?'
6개월간의 정직. 그 이후에도 회사로 복귀할 수 있을지, 없을지는 모른다.
그런데 오히려 그런 상황이 되자 더욱 뚜렷하게 느껴지는 감정이 있었다.
'그래. 일이 이대로 이어진다면 나는 후회했을 거다.'
그리고 이번에 한록은 유대리에게 후회하지 않는 방법을 알려주었다.
-띵!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고, 눈앞에 로비가 나타났다.
한록이, 오과장이 끌려갔던 그 로비.
두 사람 다 참을 수 없는 분노에 몸부림치던 그곳.
그러나 유대리는 오과장과는 다르게 후련한 마음으로 로비에 발을 내딛었다.
어쩌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는 길.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래.'
'잘했다, 유대리.'
조금도 후회되지 않았다.
그런 자신을 깨닫고, 유대리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오과장과 함께 하던 순간들에는 절대로 알 수 없던 감정. 그걸 알려준 사람, 이한록.
'정말 고맙다, 이대리.'
유대리가 회사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
"이한록."
그날 오후. 정부장이 한록을 자신의 자리로 불렀다. 그리고 얘기를 시작했다.
"너도 들었겠지만, 오과장 건은 대충 마무리 됐다. 오과장은 나갔고, 오과장 라인들도 한동안 맥을 못 출거다. 너 과장얘기도 확정됐어."
연이은 기쁜 소식에 한록이 고개를 숙였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고마울 건 없다. 나도 내 입장 생각해서 한 거니까. 그거 말고, 네가 결정해야 할 게 있다."
"말씀하십시오."
"오과장이 나가고 2팀 팀장 자리가 비었다. 거기로 현과장을 옮길 거다. GV팀은 네가 맡아라."
그 말에 한록이 얼굴을 찌푸리고 물었다.
"또 조직 개편을 하신단 말씀이십니까?"
"그래. 네가 과장이 되면 너희 팀에 과장이 둘이다. 사실상 네가 리던데, 현과장을 팀에 냅두는 게 모양새가 안 맞아. 그러니까 현과장이 옮겨야 한다."
"GV팀을 만든 지 얼마나 됐다고 또 팀을 바꿉니까."
"널 도와주는 거다. 너한테 팀장 자리를 주려는 거야."
"절 도와주시려면 지금 이 팀을 유지하셔야 합니다. 저는 현과장과 같은 팀에 남을 겁니다."
단호한 한록의 태도에 정부장이 단호하게 말했다.
"그러려면 계속 이대리로 남던가."
"네, 상관없습니다."
당당히 말하고 돌아선 한록. 그리고 예상했다는 듯, 돌아서는 한록에게 묻는 정부장.
"현과장을 왜 그리 아끼는 거냐?"
그 말에 한록이 명쾌하게 답했다.
"능력 있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현과장이?"
정부장의 '말도 안 된다'라는 태도. 그러나 한록의 대답은 변하지 않았다.
"네. 장감독 GV 섭외도 현과장이 했고, 식물을 발굴한 것도 현과장입니다. 제가 돋보이고 있을 뿐, 현과장이 없었으면 지금과 같은 결과는 없었을 겁니다."
"네가 너무 현과장을 과대평가하는 거야."
정부장이 한록의 말을 잘랐다. 한록이 정부장을 빤히 바라보았다.
"부장님이 현과장을 낮잡아 보는 건 아닙니까?"
그 말에 답이 없는 정부장.
한록과 정부장 사이에 팽팽한 긴장감이 오간다.
"알았다. 본부장님한테 말씀드린다."
마침내 정부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
"이한록. 정말 다루기 어려운 놈이군."
최경준에게 상황을 전달한 정부장. 최경준이 정부장에게 물었다.
"현주훈이 과장으로 승진한지 얼마나 됐지? 꽤 됐을텐데."
"이제 7년 정도 됐습니다."
"실적이 안 됐나? 왜이렇게 오래 과장으로 있었지?"
"오과장이랑 트러블이 크게 있었습니다. 그 뒤로 차장 승진이 막혔었어요."
"연차도 찼고, GV와 삼일의 삶도 성공했고. 현과장이 차장이 되면 GV팀 구조도 깔끔해지고."
"그건 맞습니다."
"각 사업부간 매출 전쟁이 있을 거야. 그걸 위해선 이한록이 필요해."
방송국 인수를 위한 사업부간의 전쟁. 그리고 최경준의 카드, 한록.
"이제부터 이한록한테 천만 영화들을 맡길 생각이네. 승진의 명분은 충분하니 지금은 그 녀석이 원하는 대로 해주자고. 현주훈을 차장으로 승진시키고, GV팀은 유지시켜."
최경준이 이렇게까지 말했지만, 여전히 정부장은 망설이는 듯한 얼굴이었다.
"왜 그러지?"
"현과장은 차장이 되기엔 리더십이 부족합니다."
정부장의 솔직한 생각이자, 정부장이 여태 현과장의 승진에 반대한 이유였다.
"부하들을 도울 순 있지만 휘어잡을 순 없는 사람입니다. 성격이 너무 무릅니다. 본인이 차장 자리를 감당하지 못할 겁니다."
나름 일리가 있는 정부장의 말. 그러나 최경준은 유선을 떠올렸다.
고작 몇 달 사이에 부쩍 자라온 유선의 모습. 그건 한록의 작품이 분명했으며, 유선의 발전한 모습은 나름대로 나쁘지 않았다. 아니...꽤나 좋았다.
'이한록. 네가 어디까지 하나 봐야겠다.'
결정을 내린 최경준이 정부장에게 말했다.
"아니, 승진시켜."
"본부장님."
"자네 말대로 제대로 된 모습을 보여주지 못한다면. 그러면 물러나게 만들면 그만이야."
최경준의 칼 같은 말에 정부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승진. 그로 인한 책임.
"현과장이, 아니...이한록이 그걸 버틸 수 있나 확인해보지."
최경준이 말했다.
*
그리고 며칠 후 사내 게시판에 올라온 공지.
[부산 영화제 특별승진 대상자.]
[현주훈]
[이한록]
"은서야아아!!!아빠 승진했다!!!"
현과장이 공지를 보자마자 사무실을 뛰쳐나가며 소리쳤다.
"이한록. 본부장님이 너 때문에 결정하신 거다. 이 일엔 네가 책임을 져야 할 거야."
정부장이 엄격한 목소리로 말했고, 한록이 당당하게 대답했다.
"부장님. 제가 선택한 사람들입니다."
"믿을 이유는 충분합니다."
현차장. 하대리. 유선. 그리고 한록.
이제 완벽한 GV팀이 완성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