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4 : 모든 걸 걸어야 하는 순간이 온다(3) >
*
"부장님. 목요일날 오과장님에 대한 감사가 있을 예정입니다."
[그래. 얘기 들었다.]
영화제 중 오과장의 전화를 받았던 정부장.
정부장은 한록의 손을 들어주기로 결정했으나, 한록이 정부장에게 제안을 하나 했다.
'정부장님. 절 좀 도와주시겠습니까.'
'오과장님께는 오늘 전화를 얘기하지 말아주십시오. 그리고 오과장님의 연락을 계속 받아주셨으면 합니다.'
그 이후 정부장은 오과장의 움직임을 한록에게 전달해주고 있었다.
[오늘 나한테도 감사팀에서 연락이 왔다. 너와 오과장의 사이에 대해 물어봤어.]
"오과장님이 뻔한 짓을 했군요."
전형적인 수법이다. 오과장은 한록이 자신과 사이가 좋지 않기 때문에 자신을 모함하는 거라고 증언을 했을 게 분명했다.
[그래. 문제는 그 말에 힘을 실어주는 사람이 많다는 거야.]
정부장이 심각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미 눈앞에서 감사팀이 한록을 조사하기 시작한 걸 목격했으니 걱정이 되는 것도 당연했다.
'김현조. 우정택. 최철민. 박선양. 기병욱.'
오과장이 말한 자신의 라인들. 그리고 한록을 끌어내리고 싶어하는 자들.
그들이 아마 오과장의 편을 들어 거짓 증언을 했을 것이다.
[뇌물 사건은 뚜렷한 증거가 없어. 그러니 결국 증인들의 얘기로 결판이 나지. 오과장의 편이 네 편보다 많다면 네가 패배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야.]
"저한테도 증인이 있습니다."
[유대리의 말은 아마 본인의 책임을 회피하려는 발언으로 보일거야. 오차장이 이 일에 엮여있다는 건 알 수 있겠지만, 그게 결정적인 증거가 되진 못해.]
정부장의 지적은 정확했다.
지금껏 한록이 모아온 자료와 녹음들. 이것만으로도 오과장이 얼마나 비열하게 회사를 다녔는지 밝히는 것은 충분했다.
다만, 오과장이 '직접적으로 돈을 받았다'고 말할 만한 것은 최대리가 알려준 시계 하나뿐이었다.
[이한록. 내가 얘기했지. 아무리 본부장님이 네 편이라고 해도 오과장을 적으로 두는 건 너무 위험한 짓이야.]
"괜찮습니다, 부장님."
그러나 한록의 대답은 여전히 차분했다.
"저는 오과장님을 잘 알고 있고, 이길 방법 역시 알고 있습니다."
[....]
한록의 말에 정부장은 답이 없었다. 한참 후 정부장이 입을 열었다.
[목요일 감사는 감사가 아니고 청문회일거다. 그리고 너도 증인이 아니고 참석자일거야. 제보자인 널 증인으로 부른 다는 것 자체가 그 뜻이야.]
[만반의 준비를 하고 가라. 거기서 지면 네가 위험해질 수 있다.]
그리고 한록이 확답했다.
"걱정마세요, 부장님. 절대로 패배하지 않습니다."
*
그리고 3일 후. 청문회 당일.
'사장님 지시입니다. 목요일은 출근 하지 마시고, 3시에 바로 회의실로 오세요.'
감사팀의 말을 따라 한록은 3시에 회의실로 향했다.
사장의 지시. 하정엽 역시 이 사건을 지켜보고 있단 뜻이다.
회의실로 가는 골목 곳곳에 붙은 '감사 진행중' 이란 표시들. 그리고 회의실 앞의 보안요원들과, '감사 중 출입금지'의 표시.
그 광경이 주는 위압감에 아무도 회의실로 눈길을 주지 않았으나, 한록은 곧장 회의실을 향해 걸어갔다.
"마케팅부 이한록 대리입니다. 오늘 감사에 증인으로 참석합니다."
한록의 말과 함께 열린 회의실의 문.
그리고 그 곳에 앉은 오과장.
한록과 오과장의 눈이 마주쳤고, 감사팀장이 한록을 오과장의 반대편 의자로 안내했다.
숨막히는 정적 속에서 회의실에 앉은 오과장, 유대리, 한록. 그리고 그들을 지켜보는 감사팀 직원들.
감사팀장이 입을 열었고, 모두를 돌아보며 말했다.
"지금부터 오수창 과장의 비위행위에 대한 감사를 시작합니다."
*
"유정연 대리. 월요일에 있었던 감사에서 오수창 과장이 뇌물 수수를 지시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감사팀장이 유대리에게 묻는다.
한록, 유대리, 오과장.
일반적인 감사와는 다르게, 이 일에 얽힌 세사람을 모두 불러 모은 감사. 거기에 거의 취조나 다름없을 정도로 딱딱한 말투. 그건 그만큼 이 사안이 심각하다는 것을 의미했다.
"네, 맞습니다."
그러나 유대리는 떨리는 목소리로 솔직하게 대답했다. 유대리는 본인의 앞날 역시 위험한데도 불구하고 진실을 말하고 있었다.
"상부에 보고하지 않고 지시를 따른 이유가 무엇입니까?"
"오과장님이 일을 크게 만들어서 좋을 게 없다고 하셨습니다. 제 경력으로는 다른 회사에 가지 못할 거라고요. 그리고..."
유대리가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숙이고 말했다.
"조용히 지시를 따르면, 제 뒤를 봐주시겠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한 번 시작하고 나니 공범이란 생각에 일을 숨기게 되었습니다."
오과장의 특기라고 할 수 있는 협박과 칭찬을 통한 조종.
유대리는 거기에 넘어가버렸고, 지금 그 대가를 치르는 중이었다.
감사팀장이 한록이 제출한 녹취록을 꺼내든다.
한록을 회사에서 내쫓겠다는 발언. 현과장 역시 쫓아내겠다는 발언. 유대리에게 k필름의 서류를 가져오라는 발언. 그리고 영화제를 망치란 발언까지.
"오수창 과장. 이 녹취록과 증언이 사실입니까?"
감사팀장이 오과장을 향해 물었다. 그리고 오과장은-
"네, 사실입니다."
깔끔하게 자신의 잘못을 인정했다.
'뭐지?'
순간 웅성거리기 시작하는 감사팀.
유대리 역시 깜짝 놀란 표정으로 오과장을 바라보았다. 오과장이 이렇게 순순히 인정을 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것이다.
"뇌물을 받고, 동료를 위협하고, 영화제를 망치려 했단 것. 전부 사실입니까?"
"네, 제가 그런 발언을 했단 것은 전부 사실입니다."
감사팀장의 말에 아무런 표정 변화 없이 답하는 오과장. 그가 말을 이었다.
"다만 실행에 옮긴 적은 없습니다."
어떠한 실물 증거 없이 증언으로 이루어지는 뇌물 감사. 정부장이 염려하던 순간이 온 것이다.
"그 전에, 저 역시 제출할 자료가 있습니다."
그리고 오과장이 감사팀장에게 내민 것. 그건...
"K필름의 진술서군요."
식물의 제작사, K필름이 진술서였다.
K필름의 진술서를 살펴 본 감사팀장. 그가 유대리에게 묻는다.
"유대리님. 이 진술서에는 유대리님이 지속적으로 K필름에게 뇌물을 종용했다고 써 있습니다."
"그건 오과장님 지시였습니다. 저는 직접적으로 돈을 받은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순간 얼굴이 하얗게 질린 유대리. 그러나 감사팀장이 다시 한번 냉정한 목소리로 말한다.
"K필름에게서 유대리님 계좌로 돈이 입금된 기록이 있는데요."
"그것도 오과장님 지시였습니다. 인출해서 오과장님께 전달해드렸어요. 8월 20일 아닙니까. 날짜도 기억합니다. 회사 앞에서 전달해드렸어요!"
유대리가 해명했지만, 분위기는 바뀌지 않았다.
계약서. 입금 내역. K필름의 진술서.
모든게 유대리를 향하고 있는 상황.
"전부 오과장님이 지시한 내용입니다. 본인 흔적을 남기지 않으려고 절 이용한 겁니다!"
"그게 아니면 네가 핑계를 대고 있는 거겠지."
"오과장님! 그게 무슨 말입니까!"
유대리가 소리쳤지만, 오과장의 표정은 여전히 태연했다.
오과장은 이제 유대리를 돌아보지도 않았다. 대신 한록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한록."
한록의 이름을 부르는 오과장. 회의실에는 오과장이 대체 무슨 얘기를 할지 날카로운 긴장감이 감돌기 시작했다.
그리고 오과장은 안타까운 듯 말했다.
"자네는 유대리한테 속은 거야."
"오수창!"
흥분한 유대리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고, 오과장에게 달려들려고 했다. 그러자 감사팀 직원들이 유대리를 붙잡았다.
그러나 오과장은 이 모든 상황에도 불구하고 평온한 표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한록. 자네가 날 싫어하는건 알지만, 이렇게 유대리 말에 넘어가 오해를 할 정도인지는 몰랐군. 하긴. 이런 녹음들이 있다면 나라도 넘어갈 수밖에 없겠어."
"오수창, 이 개새끼야!"
한록이 아닌, 유대리에게 모든 책임을 돌리는 말.
유대리가 악을 쓰는데도 불구하고 오과장은 유대리의 목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는다는 듯 굴었다.
"유대리가 그걸 악용했군. 자기 일을 덮기 위해서 모든게 내가 한 짓인 것처럼 꾸몄어. 그리고 자네는 거기에 속은 거고."
오과장이 써내려가는 소설.
오과장의 실체를 아는 사람이라면 '헛소리'라고 일축할 만한 얘기였지만, 지금 상황이 좋지 않았다.
회사 최고의 엘리트 오과장. 모든 증거가 자신을 가리키고 있는 유대리. 그리고 오과장과의 트러블로 유명한 한록.
그 모든 것을 고려해서 오과장이 내린 결정.
"우리 둘다 유대리의 일에 휘말렸군. 나 때문에 미안하게 됐어."
타겟을 한록이 아닌 유대리에게로 돌리는 것이었다.
'널 이기는 방법은 수백가지야.'
그 말에 숨은 뜻.
'아니, 널 이길 필요도 없지.'
'조금만 손을 쓰면 내 적은 이한록이 아니라 유정연이 되는 거니까.'
상대가 이길 수 없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이 아닌 다른 사람을 공격한다.
이게 바로 오과장이 지금까지 살아남은 방식이었다.
"오수창! 이 뻔뻔한 새끼가! 어떻게 그런 말을 해!"
오과장의 뻔뻔한 사과에 유대리가 치를 떨며 소리를 질렀다.
피가 싹 식은 것은 한록 역시 마찬가지였다.
'미안하다'. 한록이 오과장에게서 처음으로 들은 말이었다. 그리고 그 말은 자신의 부하에게 잘못을 넘기기 위해 사용되었다.
한록, 구과장. 그리고 이제는 유대리.
'예상했던 대로다. 또 이런 식이구나.'
자신과 구과장에게 뇌물 혐의를 넘기던 것처럼 이제 유대리에게 혐의를 넘기는 오과장. 회귀 전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는 모습.
자신이 겪었던 일이기에 이미 예상한 바이지만, 막상 그 모습을 눈앞에서 보자니 혐오스럽기 짝이 없었다.
한록이 날카로운 목소리로 오과장에게 물었다.
"과장님. 절 회사에서 내쫓아 버린다고 한게 오해입니까?"
"그저 말만 했을 뿐이야. 지금은 후회하고 있지."
"과장님의 시계와 만년필, 차가 바뀐것도 우연입니까?"
"모두 내 돈으로 구매한 거야. 전부는 아니지만, 몇 개는 구매 내역서 역시 가지고 있어."
현금을 받아서 물건을 구매한게 뻔하다. 그러나 오과장은 여전히 당당했다.
태연하게 답한 오과장이 자신의 앞에 놓인 서류를 가리킨다.
"여명 프로덕션. 제주 프로덕션. 희성 인쇄소. 유대리로부터 뇌물을 강요받았다는 업체들의 증언이야. 자네도 한번 기록을 읽어보는게 좋겠군."
모두 오과장과의 커넥션이 있는 업체들.
오과장은 한록을 공격하리란 모두의 예상을 깨고, 이 일을 유대리에게 뒤집어씌우기 위해 모든 것을 준비해온 것이다.
"오과장님. 역겨운 소리 그만하십시오."
한록이 말했고, 오과장은...
"이한록."
"넌 나를 모른다고 했지."
미소를 지었다.
'참을 수 없다.'
오과장의 역겨운 미소에 결국 한록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회의실 문을 향해 다가갔다.
"이대리님. 자리에 앉아주십시오. 이대리님."
감사팀이 한록을 붙잡았지만, 한록이 뿌리쳤다. 그러나 한록은 문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문 밖에 있는 누군가에게 말했다.
"들어오세요."
한록의 부름에 회의실에 누군가가 나타났다.
"...어!"
새로운 인물의 등장에 모두가 웅성거리기 시작한다. 특히 유대리가 익숙한 얼굴에 놀라 눈을 크게 떴고, 곧 소리쳤다.
"구과장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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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을 열고 나타난 덩치 큰 남자, 구과장.
구과장의 등장과 동시에 오과장의 얼굴에서 미소가 싹 사라진다.
자신의 죄를 뒤집어쓰고 지방으로 발령이 난 부하.
그 부하가 눈앞에 나타났다.
그것도 자신의 죄를 고발하기 위한 자리에.
"오차장님. 아니, 오과장님. 아니. 오과장."
구과장이 이글거리는 눈으로 오과장을 바라보았고, 한록이 회의실 문을 닫으며 말했다.
"오과장님. 전부 오해였다는 그 말."
"지금 구과장님한테도 해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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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 저녁. 한록과 오과장이 지하주차장에서 다툰 그날 밤. 구과장에게 문자가 하나 도착했다.
[목요일 오후 3시. 오수창 과장의 비위행위에 대한 감사조사.]
발신인은 한록.
"이 개새끼야, 빨리 받아!"
구과장이 계속 전화를 걸었지만 한록은 묵묵부답이었다. 대신 몇분 후 도착한 한록의 문자.
[참석하세요.]
그 문자가 말하는 것은 명백했다.
-모든 걸 밝히고, 오과장을 끌어내려라.
'그렇게 되면 나 역시 위험해진다.'
이 감사에 참여한다면. 그리고 오과장의 비리를 밝힌다면, 오과장과 했던 모든 일이 드러날 것이다.
'안돼. 그렇게 되면 나는 모든 걸 잃는다.'
구과장이 한록의 문자를 보고 고개를 젓는다. 그리고 몇분 후...
[참석한다.]
한록에게 답장을 보냈다.
*
문자를 보낸 구과장은 핸드폰을 보며 생각했다.
'그래, 복수를 위해서...'
'내 모든 걸 걸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