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3 : 모든 걸 걸어야 하는 순간이 온다(2) >
"자네도 인생을 걸 준비가 됐나."
한국 영화의 아버지, 최경준.
그가 '자신과 함께 가겠냐'고 묻는다.
영화계에서 일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슴이 설렐만한 질문이었다.
그리고 그에 대한 한록의 대답.
"네, 준비 됐습니다."
한록의 야망이 담긴 대답에 최경준이 만족스러운 듯 미소를 지었다. 최경준이 한록에게 말했다.
"확실히 젊군. 보기 좋아."
"제가 본부장님과 함께 갈 만한 사람으로 인정받은 겁니까?"
"그래. 이한록이 아니면 누구에게 뒤를 맡기겠나. 사장님께는 오늘 승진을 말씀드리겠네."
기분 좋게 답하는 최경준. 그러나 한록의 말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본부장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뭔가."
최경준의 말에 한록이 자신의 손목을 바라보았다. 최경준의 실이 몇 번이나 칭칭 묶여 있는 손목.
'최경준은 날 내치지 못한다.'
그런 자신감을 가지고, 한록이 최경준에게 되물었다.
"본부장님. 제가 본부장님의 시험을 통과했다면 말입니다."
"저 역시 본부장님이 제 인생을 걸 만한 분인지 확인해야하지 않겠습니까?"
한록의 말에 회의실에 정적이 흐른다.
*
방금 전 한록이 한 말의 의미.
'네가 날 선택했다고 끝이 아니다. 나 역시 널 선택할 권리가 있다.'
최경준은 고작 대리인 한록이 자신을 '검증'한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 얼굴이었다.
그의 얼굴에 스쳐지나가는 놀라움, 분노, 그리고-
"그래.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들어나 볼까."
흥미.
'역시.'
한록은 손목의 실이 풀리지 않은 것을 보고 다시 한번 확인했다. 최경준은 절대로 자신을 내치지 못할 것이다.
"승진 얘기에 앞서 해야할 얘기가 있습니다."
"뭔가."
"오과장님에 대한 얘깁니다. 오과장님이 k필름 뿐만 아니라 다양한 곳에서 뇌물을 받고 있습니다."
"신빙성 있는 얘기인가?"
"네. 제가 직접 들었습니다. 오과장님은 여러 회사에서 뇌물을 받고 계셨고, 제가 그 일을 밝히려 하자 절 위협하셨습니다."
주의 깊게 한록의 말을 듣던 최경준. 그가 한록에게 되물었다.
"이 말을 나한테 하는 이유가 뭐지?"
"저는 오과장님을 고발할 겁니다. 그리고 본부장님께서 오과장님의 편을 들지 않으시기를 바랍니다."
'내 편이 되고 싶나. 그렇다면 오과장을 내보내라.'
한록은 지금 최경준에게 딜을 걸고 있는 것이었다.
한록의 말을 들은 최경준이 생각에 잠긴다.
'지금 오과장을 내보내는 건 아까운 일이다.'
최경준 역시 영화제가 끝난 후 오과장을 내보낼 생각을 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하정엽이 '가장 높은 매출을 기록한 본부에게 방송국을 넘기겠다'라고 선포한 상황.
어떻게 해서든 최고의 성과를 내야하는 시기. 이런 상황에서 회사의 중요 인력인 오과장을 내보내는 건 상당히 위험한 선택이었다.
'하지만 이한록한테 이런 말은 통하지 않겠지.'
그렇다면 남은 선택은 한 가지다.
한록을 데려가느냐. 혹은 오과장을 데려가느냐.
최경준은 눈앞에 앉은 한록을 천천히 바라보았다.
고작 서른의 대리. 그 대리에게 '나와 함께 가자'고 제안했다.
그 말을 듣기 위해 최경준의 구두라도 핥을 사람이 수백명이다. 그런데 한록은 감사해하기는커녕, 오히려 자신에게 조건을 걸었다.
'이한록은 내 '부하'가 될 타입은 아니야. 그저 자기 자리에서 일을 열심히 할 뿐이겠지.'
건방진 태도. 대쪽 같은 일처리. 거기에 순식간에 뒤바뀐 갑을 관계.
오늘처럼 한록은 자신의 기준에 벗어나는 일이 있다면 단호하게 거절할 것이고, 그건 최경준이 원하는 부하의 모습은 아니었다.
'난 이한록을 통제할 수 없다.'
'내가 데려가야 하는 건 이한록이 아니라 오과장이다.'
몇 번이나 고민하고, 그때마다 도달했던 결론. 그러나 최경준은 입 밖으로 거절을 말하지 않았다.
'거절해야한다.'
그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고, 몇 번이나 그렇게 생각했음에도 불구하고...
"본부장님. 저를 선택하십시오. 후회하지 않으실 겁니다."
눈앞의 한록은 너무나 매력적이었다.
'이런.'
최경준은 눈을 감고 과거 하정엽과 했던 대화를 떠올렸다.
위험한 선택인 걸 알면서도 포기하고 싶지 않은 한록이란 존재. 그리고 하정엽이 했던 말.
-지금까지 한국 영화는 본부장님과 아버지가 만들어 오셨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시대가 바뀌고 있습니다.
영화제를 싹 쓸어가버린 한록. 가장 많은 판권을 판 최대리. 그리고 허울뿐인 결과를 가져온 오과장.
'그 말이 맞았다.'
앞으로의 시대는 한록과 최대리 같은 젊은 사람들이 이끌어갈 것이고, 그 자리에 오과장은 없을 것이다.
한참이나 생각에 빠져있던 최경준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래, 이한록. 오과장은 자네가 원하는 대로 처리해."
그리고 한록에게 말했다.
"나는 자네를 선택하겠네."
*
"자네가 모은 자료를 가져오게. 검토하고 오과장에게 정직 처분을 내리겠네."
"아뇨, 정직에서 끝낼 수 없습니다."
최경준의 말에 한록이 강하게 주장했다.
"8년 이상 뇌물을 받고, 거래처에 갑질을 했습니다. 이건 회사를 나가야 하는 일입니다."
"오과장을 아예 잘라버리겠다는 건가? 그럼 너무 일이 커져."
"어쩔 수 없습니다. 오과장님이 해오신 일의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생각에 잠긴 최경준.
8년간 비리를 저질러 온 오과장. 그리고 그걸 고발하고자 하는 한록.
'내가 건드릴 문제가 아니다.'
이건 자신이 오과장을 징계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다. 최경준이 한록에게 말했다.
"오과장에게는 어떤 도움도 주지 않겠네.하지만 이건 내 독단으로 처리할 문제가 아니야. 감사팀에 정식으로 보고하도록 하게."
감사팀. CK 그룹의 회장 직속 기관.
그 말은 최경준이 오과장의 일을 덮지 않기로 결정했다는 뜻이었다.
"다만 감사가 열린다면 자네도 꽤나 곤란해질 거야. 감사팀이 엮인다면 내가 자넬 봐주는 것도 한계가 있으니까."
최경준의 말은 이미 예상한 일이었다. 구과장도 아니고, 오과장이다. 회장과 일한 적도 있는 오과장이 벌인 8년 동안의 뇌물수수. 거기에 영화제에서 뛰어난 활약을 보인 한록이 얽혀있다.
이 일은 이제 최경준의 선에서 끝날 일이 아니었다.
"절차대로 진행하게. 그리고 자네 뒤에는 내가 있다는 걸 잊지 말고."
최경준의 입에서 나온 허락. 그렇다면 남은건 정식 절차를 밟는 것 뿐이었다.
본부장실에서 나온 한록은 바로 마케팅부로 향해 자신의 노트북을 챙겼다.
1층 카페에 노트북을 펼치고 앉은 한록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카페 바로 옆의 로비.
'내가 감사팀에게 붙잡혔던 곳이지.'
회귀 전, 다짜고짜 자신을 붙잡은 감사팀과 자신을 둘러싸고 웅성거리던 사람들. 생각하기도 싫은 기억이었다.
'이번엔 그게 당신 일이 될 거다.'
오과장이 한록에게 떠넘긴 죄.
이제 그 대가를 치룰 시간이다.
한록이 감사팀에게 메일을 전송했다.
*
다음날 아침 8시 반.
"오과장님.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감사팀장 윤형우. 그가 의자에 앉은 오과장을 내려다본다.
"사원증 반납하시고, 컴퓨터도 반납하세요."
한록의 메일에 의해 오늘 아침 마케팅부에 들이닥친 감사팀.
시간이 걸리리라 생각했으나, 사안이 워낙 크기 때문인지 감사팀은 바로 행동에 착수했다.
감사팀장은 '제보를 받은 게 있다'면서 오과장에게 모든 자료와 물품을 반납할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오과장은 쉽게 물건을 넘겨주지 않았다.
"이런 식으로 개인 소지품을 압수하는 건 불법입니다."
"감사가 실행될 시 감사에 필요한 모든 물건을 회수한다. 회사 규정에 이미 명시되어 있습니다."
"그 말씀은 법정에서 하시죠."
감사팀장과 오과장 사이에 팽팽한 신경전. 그 말에 감사팀장이 말한다.
"아뇨, 회장님께 말씀 드리겠습니다."
CK 그룹에서 감사팀이 엄청난 파워를 가지는 이유. 바로 회장이 직접 지켜보는 직속 기관이기 때문이다.
회장이란 말에 오과장이 감사팀장을 노려보다가 결국 사원증을 건넸다.
감사팀은 사원증과 컴퓨터뿐만 아니라 오과장의 모든 소지품을 수거하기 시작했다. 오과장의 물건을 챙긴 감사팀이 오과장에게 말했다.
"퇴근시까지 1203호 회의실에서 대기해주시기 바랍니다."
감사팀의 말에 오과장이 몸을 돌렸고, 감사팀이 그 뒤를 바짝 따라붙었다.
감사팀에게 끌려가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상황. 그리고 그 모습을 지켜보는 다른 부서 사람들.
마치 범죄자처럼 모든 물건을 빼앗겼단 것도, 그 모습을 모두가 지켜본다는 것도, 오과장에게는 치욕스러운 일일 것이다.
"아, 좀...너무 무서운데..."
복도에 서 있던 누군가가 동료에게 중얼거렸다.
출근도 전에 들이닥쳐서 오과장의 모든 것을 가져간 감사팀. 누군가에겐 이 상황만으로도 충분한 트라우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아니. 아직 한참 부족하다.'
그러나 한록은 여기서 멈출 생각이 없었다.
*
그날 저녁. 늦은 시간에 퇴근을 하기 위해 주차장으로 향한 한록. 한록이 자신의 차로 다가가는 순간-
"!"
누군가가 한록을 벽으로 세게 밀쳤다.
'역시.'
벽에 부딪힌 한록이 상대를 확인했다. 역시나 오과장이었다.
오과장이 차가운 분노가 담긴 눈으로 한록을 바라본다. 오과장의 등에서 나타난 채찍같은 검은 실이 한록을 감쌌다.
여태 한록에게 단 한번도 직접적인 손찌검을 한 적이 없던 오과장.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이한록. 건방진 애새끼."
오과장이 한 손으로 한록의 멱살을 잡고 말했다.
"네가 꾸민 짓인 걸 내가 모를 줄 아나?"
"숨길 생각도 안했습니다, 과장님."
그 순간 오과장이 주먹으로 한록 곁의 벽을 내려쳤다. 그러나 한록은 눈도 깜박 하지 않았다. 한록이 신경 쓰는 것은 오로지 차에 설치된 블랙박스 뿐이었다.
"김현조. 우정택. 최철민. 박선양. 기병욱."
오과장이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한다. TF팀의 팀장들이자, 영화사업본부의 중역들.
"네 놈을 죽이기로 결정한 사람들이야."
그리고 오과장의 사람들이었다.
'부장님이 이한록을 감당하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정부장에게 전화를 걸어 불안을 부채질했던 오과장. 오과장은 아마 똑같은 방식으로 TF팀 사람들을 회유했을 것이다.
'이한록이 나를 제치고 가 버릴지도 모른다.'
'다음은 내 목이 날아갈지도 모른다.'
영화제에서 엄청난 성과를 거둔 한록에 대한 불안. 그리고 한록이 승진을 한다는 소식.
'오과장이 총알받이로 나선 지금. 지금이 이한록을 잡을 기회다.'
그런 생각 아래 똘똘 뭉친 TF팀.
오과장이 한록에게 물었다.
"너 혼자 우리를 이길 수 있을 것 같나?"
분명 한록과 오과장의 싸움이었던 판. 그런데 오과장은 어느새 '우리'를 만들어 왔다.
'이미 예상한 일이다.'
그러나 한록은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말했다.
"과장님. 과장님이 싸우셔야 할 건 제가 아니라 본인의 비리입니다."
그 말에 오과장이 손을 번쩍 든다.
그러나 한록을 때리지는 못하고 부들거리는 오과장.
여기서 한록을 때리면 감사의 빌미를 주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이다.
'폭력까지 갈 생각은 없는건가. 아쉽군.'
자신의 차량에 달린 블랙박스를 생각하던 한록.
하지만 이미 오과장이 자신을 협박하는 장면과 벽으로 밀치는 장면은 녹화가 되었을 것이다.
'이쯤이면 충분하다.'
그렇게 생각한 한록이 오과장의 어깨를 강하게 밀어냈다. 강한 힘에 오과장이 비틀거리다 균형을 잡았고, 한록이 오과장을 스쳐지나가며 말했다.
"저한테 화풀이 하지 마시고, 본인 잘못을 반성할 시간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오과장을 지나친 한록이 자신의 차로 향했다. 차에 시동을 거는 한록.
자동차 엔진 소리 사이로 오과장의 목소리가 들린다.
"이한록. 넌 내가 아직 어떤 사람인지 모른다. 널 이길 방법은 수백가지야."
그 말에 한록이 피식 미소를 지었다.
'아니, 나는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누구보다 잘 안다.'
회귀. 부산 영화제. 그리고 지금.
"아뇨, 잘 압니다."
누구보다 오과장을 깊게 격어온 한록. 그런 한록이 오과장에 대해 내린 결론.
도저히 이기지 못할 것 같던 상사. 벗어날 수 없을 것 같던 오과장의 마수. 한록이 충분히 성장한 지금, 이제 그런 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지금 한록에게 오과장은 그저-
"과장님은 부패하고 무능한 사람입니다."
처벌을 기다리는 부패한 회사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
오과장과의 다툼 후 지하주차장을 빠져나온 한록. 운전 중, 한록에게 전화가 한 통 걸려왔다.
차를 멈춘 한록이 핸드폰을 확인했다. 감사팀이었다.
[이한록 대리님. 오과장님 건과 관련해서 목요일날 감사가 실시됩니다. 증인으로 참석 바랍니다. 대리님과 유정연 대리님, 오수창 과장님의 진술이 일치하지 않아 삼자대면을 실시할 예정입니다.]
감사를 진행하는 와중에, 제보자와 당사자 둘을 불러서 삼자대면을 시킨다. 어지간해서는 일어나지 않는 일.
다시 말해 오과장이 일을 진흙탕 싸움으로 만들고 있다는 뜻이었다.
'아니, 나한테는 오히려 기회다.'
하지만 동시에 이건 한록의 '카드'를 쓸 절호의 기회이기도 했다.
"네, 알겠습니다. 참석하겠습니다."
한록은 감사팀에게 짧게 답변하고 통화를 끊었다. 그리고 바로 어딘가를 향해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긴 신호음 후 전화를 받은 무거운 목소리.
[무슨 일이야.]
정부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