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영화제(4)
날이 밝았다.
영화제 3일차. 그리고, 삼일의 삶이 공개되는 날.
GV팀이 향한 곳은 부산 지사의 18층이었다.
[내일 아침 8시. 18층 대회의실에서 회의진행.]
어제 도착한 최경준의 문자에 tf팀 모두가 대회의실로 몰려든다.
“오과장님.”
회의실에 오과장이 등장하자 TF팀의 공기가 얼어붙는다. 그리고 한록을 흘끔
흘끔 바라보는 사람들.
오늘이 한록과 오과장 사이의 결전의 날이 되리란 사실을 다들 알고 있는 것
이었다.
한록을 노려보다가 의자에 앉는 오과장.
그러나 그 표정은 예전의 궁지에 몰린 표정이 아니고, 평정심이 깃들어 있었다.
그 얼굴에 한록이 오히려 미소를 지었다.
‘정부장님이 잘 해주고 계시는군.’
정부장에게 제안을 했던 오과장. 그 제안을 한록에게 말해준 정부장. 그리고
한록의 계획.
그 모든 게 물밑에서 조용히 진행되고 있었다.
“본부장님 오십니다.”
8시가 되었고, 최경준이 도착했다.
회의실로 들어와 자리에 앉은 최경준.
그의 등장에 모두가 고개를 숙인다.
“중간점검 회의 시작합니다.”
U자형 테이블의 맨 끝에 앉은 최경준. 그가 마이크를 잡고 말한다.
“이번 영화제의 성적은...”
모두가 가슴을 졸이며 그의 말을 기다렸다.
“실망스럽습니다.”
날카롭게 떨어지는 최경준의 말.
“투자에 비해 좋지 않은 성적입니다. 모두 알고 있을거라 생각합니다.”
그 말에 팀장들이 고개를 숙인다.
부산 영화제의 성적은 충분하지만, 사장 하정엽이 직접 신경을 쓴 것에 비해
선 아쉬운 상황이었다. 최경준은 그 점을 지적하는 것이었다.
“기대 이상의 성과를 보여주는 건 해외 영화와 단편선뿐입니다. 특히 단편선
이 이번 프로그램들 중 최다 관객이 동원됐습니다.”
한록에게 보란 듯 윙크를 하는 최대리. 그리고 당연하다는 표정의 오과장.
절대 실패하지 않는 프로젝트를 만드는 사람의 여유였다.
“하지만 그 중 40%가 식물의 관람객입니다. 단편선의 대표작인 뮌하우젠보다
높은 수치군요.”
그러나 이어진 최경준의 말에 오과장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는다.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겠나?”
최경준의 젠틀한 태도가 한순간에 바뀐다.
마이크를 들고 일어나더니, U자형 테이블 안으로 걸어들어와 팀장들 사이를
걷는 최경준.
“적당히 잘하는 걸로는 부족해. 본인들이 준비한 만큼 성과가 나오지 않고 있
어.”
최경준의 질책에 팀장들은 차마 고개를 들지 못했다.
“부산으로 올 사람을 모집할 때 내가 얘기했을텐데. 본인이 할 수 있는 최대
치를 보일 수 있는 사람만 지원하라고. 만약 그게 이 정도라면...”
“여기서 물러나야 할 사람이 너무 많군.”
바짝 긴장한 눈치의 팀장들. 그들을 바라보던 최경준이 시선을 돌려 누군가와
눈을 마주쳤다.
상대는 바로 한록이었다.
“다들 명심하도록. 오늘부터는 정말 본인의 최대를 보여야 할 거야.”
그 말에 한록이 고개를 끄덕였다.
*
TF팀 중간점검, 아니, 중간 질책이 끝난 점심.
“야, 사진 찍고 가자!”
“영화 늦었어!”
“술 한잔 하고 들어갈까?”
“그냥 영화관에서 사자. 맥주 팔아.”
부산 영화제를 즐기는 사람들의 경쾌하고 여유로운 분위기. 그러나 부산 곳곳
의 CK 직원들은 엄청난 긴장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건 리허설 중인 GV팀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 그. 질문이 뭐라고 하셨죠?”
GV팀의 무거운 분위기에 바짝 긴장한 지훈.
“영화 끝나고 어떻게 지내고 있냐고. 지훈씨. 너무 긴장하지 마.”
“아, 네...”
“잘하고 있는데 왜 이리 긴장을 해.”
그나마 어부 배오성은 침착함을 유지하고 있는 중이지만, 지훈은 날카로워진
분위기에 맥을 못 추는 상황이었다.
거기에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배오성이 긴장을 풀어주려 할수록 지훈은 얼어
붙는 것처럼 보였다.
“어쩌죠...?”
쩔쩔매는 지훈을 바라보던 유선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한록에게 물었다.
그에 대한 한록의 답.
“일단 되도록 멀리가서 밥부터 먹읍시다.”
“네? 지금 7시간 밖에 안 남았는데...도시락 사와서 먹기로 하지 않았나요?”
“분위기가 너무 안 좋으니까 밥이라도 먹으면서 환기를 하는게 낫겠어요. 지
금 계속 리허설 진행해봤자 지훈씨 말 못합니다.”
“네! 그럼 가볼만한 식당 찾아볼게요.”
그렇게 리허설을 일단 접고 밥을 먹으러 가는 GV팀.
윤감독과 배오성은 가족들과 함께 식사를 하러 갔고, 지훈만이 GV팀과 함께
했다.
현과장의 강력한 추천으로 복국을 먹은 GV팀. 식사를 마친 GV팀은 근처 카페
로 향했다.
“복국 맛있었어요. 이런게 있는지도 몰랐는데...”
“아, 지훈씨. 나랑 입맛이 좀 맞으시네. GV 끝나면 냉채족발에 술 한잔해요.”
“네, 좋아요.”
점심식사와 현과장의 부단한 노력으로 긴장이 조금 풀린 지훈. 지훈이 편안한
목소리로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역시 현과장님. 예상대로 흘러가서 다행이다.’
그리고 한록이 생각할 때, 유선이 한록 앞의 테이블을 살짝 두드렸다.
유선이 곁눈질을 한 곳에 보인 것은...
“과장님. 감사합니다.”
오과장, 그리고 그의 팀원들이었다.
“...자리 잘못 잡았네요.”
작게 중얼거린 하대리.
부산 영화제다보니 어느 카페를 가든 CK 직원들을 만나는건 당연한 일이었지
만, 하필 오과장의 팀과 마주치게 된 것이다.
“한시간 내로 돌아와.”
“네, 알겠습니다.”
다행히도 오과장은 법인카드를 건네고는 카페 밖으로 향했다. 거기에 한록의
팀이 구석에 앉아서인지, 아무도 gv팀을 발견하지 못한 듯 했다.
“나갈까요?”
“뭐..굳이 그럴 필요 있나? 우린 우리 얘기하면 되지.”
그러나 현과장의 얘기가 무색하게, 오과장의 팀에서 대화가 들려오기 시작한다.
“오과장님 말씀 들었지? 우리 단편선이 관객수 1위다. 이대로만 하면 돼. 오
늘 무대인사 신경쓰고.”
“관객수 그거 식물 때문이잖아요. 이한록이 한거.”
그리고 대화에서 빠질 수 없는 한록의 이름.
“에이씨...초 치기는. 그 새끼 얘기하지마.”
“선배, 저도 그 새끼 싫어요. 갑자기 부산 내려온 것도 짜증나는데 여기저기
설치고 다니고.”
신나게 한록을 욕하는 사람. 투자부의 정영석 과장과 주남진 대리.
“내가 말하고 올게.”
“괜찮습니다. 그냥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기는게 좋겠네요.”
계속 들려오는 욕설에 현과장이 자리에서 일어났지만 한록이 만류했다.
다른 부서와의 트러블. 그리고 뒷담화.
거기에 한록에 대한 질투가 섞여있을 뿐, 회사에서 흔히 일어나는 일이다.
gv가 얼마 남지 않았고 지훈도 있는 상황에서 일을 크게 만들고 싶진 않았다.
“거기 gv 오늘 저희 <뮌 하우젠 증후군> 무대인사랑 시간 겹치는데...사람 다
빠져나가는거 아니겠죠?”
“이번엔 지 맘대로 안 될거다. gv 한답시고 삼일의 삶 들고 왔으니 망할 때도
됐지.”
“그거 인기 많아요. 매진이잖아요.”
“영화가 재밌는 거지, gv가 인기 많겠냐? 너 같으면 배우랑 감독 보러 갈래,
회사원 얘기 들으러 갈래?”
“그건 그렇죠. 출연진을 왜 그렇게 잡았을까요? 재미없어 보이긴해요.”
그 말에 눈에 띄게 어두워지는 지훈씨의 얼굴.
“자, 자. 빨리 나갑시다.”
현과장이 몸을 일으켰을 때.
“그게 이한록 특기잖아.”
“어떤거요?”
“떨거지들 데려와서 잘난 척 하는거.”
그 말에 모두의 얼굴이 굳었다.
“떨거지요?”
“어. 현과장, 그 계약직 애. 그런 애들 데려와서 내가 이만큼 만들었다 자랑
하는 거. 걔 맨날 그래. 삼일의 삶도 그래서 가져갔을 걸. 독립영화잖아.”
“선배, 여기 다 회사 사람들인데 말이 좀...”
“야. 들으라고 해. 다들 나랑 같은 생각일걸? 니가 tf팀 회의에 들어와 봤어
야 안다. 그 계약직이 잘난 척 하는걸 봤어야 해.”
최경준 앞에서 완벽한 프레젠테이션을 해낸 한록. 그리고 유선.
‘그래. 이한록. 분하지만 네가 이겼다.’
거기까지는 tf팀도 납득할 수 있는 상황.
그러나...
“완전 미친거지. 사장님 모신 발표에 계약직을 데려와?”
‘내가 계약직 사원한테 밀렸다고?’
영화사업본부의 최고 엘리트인 자신들이 유선한테까지 밀렸다는 사실.
그 사실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갑작스럽게 부산에 나타난 다크호스 GV팀. 그리고 GV팀의 활약.
아마 정영석과 오과장뿐만이 아니라 모든 TF팀이 한록에게 이를 갈고 있을 것
이다.
“건방진 새끼들. 내가 꼭 GV 망하는거 보고 간다.”
그리고 모두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었다.
‘못 봐주겠군.’
정영석의 말을 듣고 있던 한록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현과장에게 말했다.
“과장님. 제가 정리할테니까 나중에 와서 말려주세요.”
“어?”
“과장님까지 나서시면 일이 커지니까요.”
그렇게 말한 한록이 오과장의 팀을 향해 걸어갔다.
“안녕하십니까.”
“네? 누구-”
자신의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린 정영석.
그를 내려다보며 한록이 말했다.
“GV팀 이한록이라고 합니다.”
*
한록의 등장에 얼어붙은 오과장의 팀원들.
삽시간에 카페의 분위기가 조용해진다.
모두 정영석의 말을 들으며, 속으로 동의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뭐, 뭐야. 뭡니까.”
“저에 대해 얘기하시길래요.”
“...우리 얘기 엿들었어요?”
얼굴을 확 찌푸리는 정영석.
“네. 전부 엿들었습니다. 삼일의 삶 GV가 재미없을거라 하셨고, 제 팀원들이
별 볼일 없다고 하셨고, 저희 GV가 망할거라고 하셨죠.”
“아, 이대리. 우리가 미안해요. 그런 뜻 아닌거 알지? 그만 가볼게요. 정말
미안해.”
주남진이 황급히 상황을 마무리하려고 했지만 이미 늦었다.
“단편선에서 어떤 영화를 맡으셨습니까.”
“이대리. 지금 나한테 시비거는겁니까?”
“대답하세요. 무슨 영화를 맡으셨냐고요.”
정영석을 내려다보며 말하는 한록. 키가 큰 한록이 내려다보는 위압감에 정영
석이 저도 모르게 대답해버리고 만다.
“뮌하우젠 증후군 했다. 왜?”
“뮌하우젠 증후군으로 고작 그 정도 성적을 내셨군요.”
“어떡해요...!”
반말이 된 정영석. 그에 맞춰 거칠어진 한록의 말투. 깜짝 놀라서 일어나려는
유선을 현과장이 말린다.
“유선씨. 여기서 그냥 넘어가면 우리 팀 전체가 우스워지는거야.”
“야, 너 뭐라고 했어?”
“<스웨덴 축제>. 작년에 가장 인기 있던 공포영화였죠. 작품성도 인정받았고
요. 뮌하우젠 증후군은 그 감독의 단편 영화입니다. VOD도 없으니, 영화제에
서 꼭 봐야겠다는 사람이 많았을 겁니다.”
“그래서 어쩌라는-”
“제 말 안 끝났습니다.”
정영석에게 성큼 다가가는 한록.
의자에 앉은 정영석이 저도 모르게 몸을 웅크렸다.
“회의에 참석하셨다니 아시겠죠. 오과장님이 가져온 통계가 있습니다. 부산
영화제 관람객 중 대부분은 뮌하우젠 증후군이 보고 싶었을 겁니다. 그런데
왜 단편선팀이 홍보도 해주지 않은 <식물>한테 밀린 것 같습니까?”
한록의 말에 대답을 하지 못하는 정영석.
통계에 비해 좋지 못한 결과. 오과장의 팀이 지금까지도 풀지 못한 숙제였다.
“뮌하우젠이 생각보다 영화 파워가 약해서-”
“본인 잘못을 영화 탓으로 돌리시네요. 부끄럽지도 않습니까?”
그 말에 정영석이 입을 다문다.
‘뮌 하우젠 증후군을 가지고 성적이 고작 이 정도냐. 왜 상황이 이렇게 된 거
냐.’
오과장과 최경준이 닦달했지만, 본인도 답을 찾을 수 없던 문제였다.
“단편선 팀은 절대 답을 못 찾으실테니 제가 알려드리죠.”
한록이 책상위에 한 손을 짚고 정영석을 바라보았다.
“관객들이 부산 영화제에 뮌하우젠 하나만 보러 오는 줄 아십니까?”
그 말에 정영석이 얼굴을 찌푸렸다. 여전히 한록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부산영화제를 위해 먼 곳에서 찾아온 사람들입니다. 하루, 이틀 안에 원하는
영화들을 보고, 부산도 구경한 후 집으로 돌아가야 하죠.”
“그 사람들이 30분짜리 단편 영화 하나를 보겠다고 영화의 전당까지 올 것 같
습니까?”
오과장의 팀이 놓친 것. 그리고 한록은 알고 있던 것. 마케팅의 영원한 숙제.
‘소비자는 너무나 바쁘다.’
“30분짜리 단편 영화 하나를 보러 영화의 전당까지 오는 사람이 몇이나 될 것
같습니까?”
그 부분에서 오과장이 악수를 둔 것이다.
“뮌하우젠 증후군을 한 시간마다 배치하셨더군요. 최대한 많은 시간대의 사람
들이 보러오길 원하셨겠죠. 그런 건 대규모 영화나 할 수 있는 겁니다. 그 영
화 하나를 보러 사람들이 찾아오는 영화요.”
“그래서 지금 성적이 이 모양인겁니다.”
한록의 말에 정영석이 벌떡 일어나 삿대질을 한다.
“야! 너는 뭐 얼마나 대단하길래 그런 소리를 해?”
“지금 그쪽 단편선을 먹여살리는 건 식물입니다.”
그리고 그 말에 정영석도, 정영석의 후배도, 팀원들도, 아무도 반박하지 못했다.
사실이니까.
“저는 경쟁부문 장편 영화 앞뒤로 식물을 배치해달라고 했습니다. 그럼 장편
을 보러 오는 사람들이 식물을 함께 볼 수 있죠.”
반면 한록은 전략적으로 시간대를 노렸다.
“기왕이면 장편 영화의 앞이 좋습니다. 두 편을 연속으로 보면 뒷 영화를 볼
때 피곤하니까요. 대신 뒤에 볼 장편이 잔잔한 내용이어야 식물을 잊지 않을
수 있죠. 그래서 <작은 숲> 앞으로 배치해달라고 말한 겁니다.”
한록이 오과장의 팀을 둘러보고 말한다.
“본인들 프로그램이면서, 제가 왜 그런 요청을 했는지 아무도 파악하지 못하
셨군요. 그러면서 남의 프로그램에 입을 대고요.”
오과장의 팀원들은 모두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상황. 다들 씩씩거리고 있지
만, 차마 입을 열 수 없었다.
어느새 카페 곳곳에 있던 CK직원들이 자신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창피하고, 부끄럽고, 분하다.
“과장님. 남보고 무능하다고 말하려면 말입니다.”
그리고 가장 분한 것은-
“이 정도는 해야 하는 겁니다.”
한록의 말에 아무런 반박을 할 수 없단 것이었다.
쥐 죽은 듯 조용해진 카페.
현과장이 한록에게 다가와 말했다.
“이대리. 이제 그만하자. 미안합니다. 가보겠습니다.”
조금도 진심이 담기지 않은 사과. 심지어 현과장은 잘했다는 듯 한록의 등을
두드리고 있었다.
“앞으로 저희 팀을 욕하고 싶으면 제가 보여준 정도의 성과는 가져오시기 바
랍니다. 그러면 상대해 드리겠습니다.”
오과장의 팀. 아니, 카페에 있는 모두에게 말한 한록이 몸을 돌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말했다.
“그럼 GV에서 뵙겠습니다.”
*
그렇게 말하고는 카페를 나가버린 한록.
“좆같은 새끼가!!”
“하, 씨발...”
정영석이 책상을 걷어찼고, 오과장의 팀들이 욕설을 뱉었다.
만년과장. 계약직. 트러블 메이커의 조합. 그 조합이 회사 최고의 엘리트인
자신들을 짓밟았다.
오과장의 팀만이 아닌, TF팀 모두가 하는 생각.
‘이한록. 네 놈이 얼마나 대단한 걸 하나 보자.’
그리고 동시에 마음 한켠에 고개를 드는...
‘나는, 절대로...’
‘이한록이랑 싸우고 싶지 않다.’
한록에 대한 두려움.
“이제 우리 팀에 대한 얘기는 못할 겁니다.”
카페를 나선 한록이 산뜻하게 말했다.
*
카페를 나와 다시 해운대로 돌아온 GV팀.
“...분위기가...왜 이렇게 전투적이에요?”
“뭐 싸우고 왔습니까?”
윤감독과 배오성이 돌아온 GV팀을 보고 깜짝 놀라 묻는다.
“아뇨, 아무 일도 아닙니다! 리허설 바로 들어가죠?”
“네, 다시 무대 세팅하겠습니다!”
카페에서의 일 이후 GV팀은 기가 죽기는커녕, 독기와 자신감이 충전된 상태였다.
‘우리한테는 이한록이 있다.’
그런 자신감.
‘다시는 날 무시하지 못하게 해주겠다.’
그리고 독기.
“다시 한 번 갈게요!”
계속 이어지는 리허설.
“가림막은 제가 신호하면 걷어주세요.”
“알렉산드로 감독 7시 도착이래.”
무대 체크, 참석자 파악.
시간은 6시. 모든 준비가 하나씩 끝나고 있었고, 슬슬 무대 주위를 기웃거리
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그들 사이로 최경준이 나타나 객석에 앉는다.
“본부장님. 뮌하우젠의 무대인사가 곧 진행됩니다.”
“난 여기에 있겠네.”
비서의 말에 짧게 답하는 최경준.
오과장이 가장 많은 관객이 몰릴 것이라 예상한 뮌하우젠의 무대인사. 그리고
그와 동시에 진행되는 삼일의 삶 GV.
그 중 최경준은 삼일의 삶을 택한 것이다.
[30분 후 ‘삼일의 삶’과 GV가 시작됩니다.]
낮의 떠들썩한 열기가 빠지고, 살짝 조용해진 해운대에 울려퍼진 안내 방송.
그 말에 사람들이 야외무대로 모이기 시작한다.
“우와, 슬리퍼 봐.”
객석에 입장한 관객들이 입구에서 나눠준 슬리퍼로 갈아 신고 걷기 시작한다.
발바닥을 간지럽히는 기분좋은 모래의 감촉과, 시원한 바람.
“아..재밌겠다.”
관객들은 벌써 웃는 얼굴이었다.
[이거 봐. 슬리퍼 받음 ㅋㅋ]
[해운대 백사장~!]
부산영화제에 온 친구들, 혹은 자신의 SNS에 삼일의 삶 GV소식을 전하기 시작
하는 사람들.
“...무대인사말고 gv 보러갈까? 무대인사는 다른데서도 볼 수 있는거잖아.”
"그러자. 택시 잡아."
오과장의 무대인사로 향하던 사람들이 삼일의 삶으로 몰려들기 시작하고-
[최대리님, 프로그램 잘 봤습니다. 진행을 정말 잘하시네요.]
[감사합니다, 감독님. 이제 어디로 가시나요?]
[삼일의 삶을 보러 갑니다.]
최대리의 프로그램을 본 사람들 역시 GV무대로 모여든다.
어느새 야외무대를 가득채운 관객들. 그리고 객석에 앉지 못해 뒤에서 있는
사람들.
그들 사이에서 보이는 유명 배우들과 감독들의 얼굴.
그리고 7시가 되기 직전.
"오셨습니까, 사장님."
알렉산드로 감독과 하정엽이 등장했다.
*
[오늘의 마지막 일정이시군요.]
[네, 맞습니다.]
최경준의 말에 알렉산드로 감독이 말한다. 예의는 차렸지만 따분함을 감출 수
없는 말이었다.
그 말에 최경준이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이제 오늘 중 가장 재밌는 순간을 경험하게 되실 겁니다.]
[그랬으면 좋겠군요.]
시니컬한 알렉산드로 감독의 말. 하정엽은 그저 침묵으로 둘의 대화를 지켜볼
뿐이었다.
그 모습을 무대 뒤편에서 지켜보는 GV팀.
“...숨 막힌다...”
열심히 무대를 준비하던 하대리가 자리에 앉아 중얼거렸고, 현과장 역시 잔뜩
굳은 표정으로 자리를 뱅뱅 돌고 있었다.
잠시 후.
<지금부터 영화 ‘삼일의 삶’과 GV가 시작됩니다.>
영화 시작을 알리는 유선의 안내멘트. 그리고-
“바람 분다.”
그 순간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 그리고 바다냄새.
사람들이 기분 좋은 광경에 신기한 듯 주위룰 둘러보다가, 영화가 시작되자
이내 조용해졌다.
그 모습을 보고 한록이 조용히 속삭였다.
“바다가 도와주네요.”
백사장과 바다. 그리고 불어오는 바람.
그 곳에서 상영되는 영화.
TF팀 모두가 망하길 바라는. 그리고 부산영화제의 모두가 기다리는 <삼일의
삶>의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