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 회사원이 선넘으면 생기는일-48화 (48/263)

부산영화제(3)

이감독이 아무 말도 못하고 자신을 바라보자, 핸드폰을 꺼내 귀로 가져가는

한록.

‘전화 받으세요.’

한록의 말에 이감독은 아직도 핸드폰이 울리고 있음을 깨달았다.

“...여보세요.”

구석으로 가 전화를 받는 이감독.

[어어, 이감독. 나 박상철인데...데뷔작 봤어. 좋더라.]

‘좋더라.’

그 짧은 칭찬에 어제까지의 고민이 모두 사라지는 것처럼 느껴진다.

이감독은 피식 미소를 지었다.

[이감독 지금 부산이지? 여기 김우석이랑 조태우랑 정욱이랑...아무튼 사람

많은데. 영화보고 이감독이랑 얘기하고 싶다네. 시간 괜찮아?]

“네, 괜찮습니다. 일정 없습니다.”

[그럼 영화의 전당 하늘영 극장으로 와.]

“감사합니다. 10분 정도 걸릴 것 같습니다.”

[그래. 영화 잘봤다, 이감독! 빨리 와야해!]

전화를 끊은 박감독이 사람들에게 말한다.

“야, 온대. 10분 정도 걸린대.”

“어차피 영화관에 우리밖에 없는데. 이감독 옆에 앉혀두고 한 번 더 볼까?”

진지하게 회의를 하던 영화인들. 그들이자신을 이곳으로 데려온 한록에게 묻

는다.

“이대리, 이감독은 어떻게 알게된거야?”

“저희 팀이 단편선에 식물을 추천했습니다.”

“아, 어쩐지. 홍보하려고 데려온거구만. 이대리 보는 눈은 알아줘야 한다니까.”

한록이 자신들을 일부러 데려온 것을 알았음에도 기분 나빠하지 않는 박감독.

그만큼 식물이 재밌었단 뜻이었다.

박감독이 한록에게 물었다.

“이대리도 보고 갈거지?”

“네, GV 리허설까지 시간이 좀 남았습니다.”

“고생이네. 부산까지 왔는데 하루종일 일만 하고.”

“우리처럼 놀러 온 게 아니라 일하러 온 거잖아. 그, 비프랜드에서 하는 GV랬

지? 보러갈게.”

“감사합니다.”

모두에게 인사를 한 한록이 슬쩍 출구쪽을 바라보았다. 이감독이 모두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오셨네요.”

“벌써?”

한록의 말에 모두가 이감독을 바라보았고, 이감독이 고개를 숙였다.

“아, 이감독. 빨리 와 봐. 여기 앉아 봐.”

장감독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영화관 앞 작은 카페로 향한다. 그리고 의

자 하나를 꺼내고 이감독에게 말했다.

“우리 얘기 좀 하자.”

*

거장 감독. 떠오르는 신예 감독. 헐리우드에서 활동중인 촬영 감독. 연기파

배우.

갓 데뷔한 신인감독을 불러모은 대선배들.

그들이 영화관 앞에 마련된 작은 카페 테이블에 이감독을 앉혔다.

그리고 이감독을 둘러싸고-

“오프닝씬 엔딩이랑 이어지는거 맞지?”

“색감은 어떻게 한거야? 후보정이야? 아니면 진짜 자연광이야? 자연광이 그렇

게 잡혀?”

“시나리오 본인이 쓴 거야? 다른 시나리오는 없어?”

“장감독! 그거 내가 물어본다고 했잖아!”

질문 공세를 퍼붓기 시작했다.

좁디 좁은 업계에서 간만에 나타난 뛰어난 재능의 신인. 영화인들이 이렇게

흥분하는 건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장감독님. 여기서 뭐하세요?”

그때 영화관을 지나가던 누군가가 장감독에게 묻는다. 오정한. 지구특공대의

출연진 중 한명이었다.

“어, 정한씨. 영화 보러왔어?”

“네. <뮌하우젠 증후군> 보러왔어요.”

오과장이 단편선 중 가장 주력한 영화 중 하나. 그 말을 들은 장감독이 고개

를 젓는다.

“그거말고 식물 보고 와.”

“네...? 이미 예매 했는데요...?”

“아, 식물 보고 와. 보고 오면 내가 왜 이러는지 알아.”

“저는 뮌하우젠이 보고싶은데...”

장감독의 말에 오정한이 미심쩍은 듯 식물의 포스터를 훑어본다. 그러더니 잠

시 후 식물의 티켓을 들고 온 오정한.

“감독님. 이거 재미없으면 술 사주셔야 해요.”

그리고 30분 후. 식물을 보고 나온 오정한이 카페로 달려와서 말했다.

“이거 엔딩씬 오프닝이랑 이어지는거 맞죠?”

어느새 이감독을 향한 질문공세에 참여한 오정한.

“자연광 아니고, 조명 썼습니다. 콘서트 조명을 멀리서 쐈어요.”

“어쩐지! 엄청 쎄더라.”

“시나리오는 지금 이걸 시리즈로 기획하고 있습니다.”

“시리즈? 몇편짜리?”

이감독의 답에 끊임없이 이어지는 질문들.

상영관 앞에서 여러명의 사람이 모여서 떠들고 있다보니, 지나가는 사람들도

하나 둘 모여들기 시작한다.

“정한아, 거기서 뭐하냐.”

“어, 장감독님.”

“은수씨! 오랜만이에요.”

“지금 왜 다들 모여계신 거예요?”

그리고 그들 중 대다수는 영화를 보러 온 감독, 배우, 조연출, CK와 샤로떼

직원 등 업계인들이었다.

부산 영화제 기간의 영화관에는 일반인보다 업계인이 더 많기에 가능한 일이

었다.

“너도 이거 보고 와.”

“아, 식물? 내일 보려 했는데.”

“지금 봐.”

아는 얼굴이 몰려있기에 다가와 본 사람들. 그들이 오정한이 그랬던 것처럼

식물을 현장 예매 한다. 그리고 미심쩍은 얼굴로 식물을 보러 들어가고, 20분

후 나와서-

“이거 엔딩씬 뭡니까?”

대화에 끼어든다.

이감독에게 끊임없이 질문을 하는 사람들과, 답변하는 이감독.

순식간에 카페 앞에서 게릴라 GV가 열러버린 상황.

이감독이 당황한 얼굴로 한록을 바라봤지만, 한록은 그저 씩 웃을 뿐이었다.

‘부산영화제만큼 현장 마케팅을 잘 살릴 곳이 없지.’

한 다리 건너면 전부 아는 사이일 정도로 좁은 영화 업계.

그 업계 사람들이 부산 센텀시티와 해운대라는 특정 장소에 모인다. 그것도

영화를 보기 위해.

그런 환경에서 ‘이 영화 재밌다’라고 누군가 말하기만 한다면, 동네방네 입소

문이 나는건 시간문제였다.

‘식물은 원래도 입소문을 탔을거야. 그걸 며칠 빠르게 당겼을 뿐이지.’

그때 도착한 현과장의 전화.

[이대리! 지금 식물 뭐 난리 났다던데. 이대리 아는 얘기야?]

“네, 같이 있습니다.”

[대체 무슨 일이야?]

“장감독님이랑, 다른 감독님들 모시고 식물을 보러 왔는데 다들 좋아하셔서

요. 사람들이 많이 관심을 가지네요.”

[아, 또 이대리 작품이었구나. 난 오과장님이 뭔 짓 한 줄 알았다. 바쁜 거야?]

“상황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알았어, 7시 리허설 전까지만 와.]

현과장이 안도의 한숨을 짓더니 말한다.

‘7시까진 아직 시간이 남았다.’

그리고 한록은 현과장의 전화를 받으며 또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7시. 5시간이나 남았고, 프로그램 하나를 진행하기엔 충분한 시간이다.

한록의 머릿속에 든 생각.

‘판을 더 키워볼까?’

식물은 상당히 어려운 작품이다. 거기에 단편이다보니 은유와 상징이 많이 들

어간 작품.

감독들이 식물을 좋아하리란 사실, 그래서 식물감독을 불러올 것이란 사실.

그리고 질문 공세가 벌어져 이슈가 벌어질 거란 사실은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

그래서 일부러 영화관 앞에 카페가 있는 상영관으로 장감독을 데려온 것이다.

‘그래도...규모가 이렇게 커질 줄은 몰랐지.’

하지만 지금 상영관 앞에 모여든 사람은 거의 서른명이 넘은 상황.

이대로 끝내기엔 아깝다는 생각이 든다.

“현과장님, 지금 숙소신가요?”

[아니, 나 회사. 확인할게 있어서 나왔어.]

“그럼 지금 스케쥴 비는 야외무대가 있나 찾아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영화

의 전당 주위면 더 좋습니다.”

[갑자기?]

“식물 인기가 꽤 좋습니다. 게릴라 GV를 진행할 예정이에요.”

[게릴라 GV? 우리 GV 홍보도 할 수 있겠네?]

“네, 중간중간 내일 GV 얘기도 할 예정입니다.”

[좋아! 잠시만!]

의욕적으로 전화를 끊은 현과장. 잠시 후, 다시 전화가 걸려왔다.

[영화의 전당 사이드 무대에서 가능하대. 5시까지.]

“감사합니다.”

전화를 끊은 한록은 모두를 돌아보았다.

치열하게 질문하는 감독들.

‘컨텐츠 완료.’

차분하게 대답하는 이감독.

‘출연자 준비 완료.’

그 모습을 기웃거리는 사람들.

‘관객 동원 완료.’

거기에 장소 섭외까지 끝났다. 준비는 완벽했다.

“감독님들. 잠시만요.”

한록이 열띤 토론을 펼치는 사람들 사이로 들어갔다.

“잠깐! 내 질문 먼저야! 어...이대리님.”

“아, 이대리. 무슨 일이야?”

서로 먼저 말하겠다고 열심히 대화에 끼어들던 사람이 한록을 보고 말을 멈춘

다. 그리고 조용해진 틈을 타 한록이 사람들에게 물었다.

“장소를 좀 옮겨서 얘기해볼까요?”

대답은 당연히...

“좋지! 어디로?”

*

영화의 전당 앞 야외무대. 그곳에서 갑자기 벌어진 게릴라 GV.

단편선을 보기 위해 영화의 전당을 찾은 사람들이 모두 스쳐지나가는 위치다.

“뭐야. 오늘 무대 있어?”

“아니...팜플렛에 아무 얘기도 없는데.”

아니나 다를까, 이게 대체 무슨 일인지 무대를 기웃거리는 사람들.

“헐. 저거 오정훈 아냐? 지구 특공대!”

“뭐 행사 하는거야?”

“몰라. 옆에는 박상철 감독 같은데? 야, 배우들 엄청 많다.”

영화관에서 보던 연기파 배우들. 그리고 명작 감독들이 작고 협소한 야외무대

앞에서 열심히 질문을 하는 모습.

그리고 그 옆에 A4용지에 매직으로 써 있는 글자.

[단편선 <식물> 게릴라 GV]

[시간: ~종료시까지.]

“식물?”

팜플렛, 포스터, 현수막 하나 없이 A4용지에 쓰인 단 두글자.

“아. 이거 단편선 중 하나야.”

“재미없어 보이던데.”

“그래? 난 괜찮아 보이는데.”

“그럼 뭐해. 매진일 걸?”

“현장예매 하면 되지.”

그 두글자에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고...

“야.”

“우리 그냥 이거 볼까?”

예매를 시작한다.

*

“아니, 거기선 무당 말을 듣는게 맞지.”

“그 무당이 일본인이랑 한 패라니까? 이감독. 그거 맞지?”

“잠시만요. 감독님들. 저도 말 좀 할게요.”

어느새 토론장이 된 GV현장. 배우, 감독, 일반인이 할 것 없이 섞여서 의견을

교류하고 있었다.

“10분만 쉬었다 가겠습니다.”

관객들끼리 불이 붙은 틈을 타 한록이 GV를 잠시 중단했다. 그리고 이감독에

게 물을 건넸다.

약간 얼이 빠진 표정의 이감독이 한록에게 묻는다.

“이대리님. 이렇게 될 거 알고 계셨습니까?”

“네.”

“어떻게요?”

“부산 영화제잖아요. 영화 좋다는 얘기 한번만 나오면 매진은 순식간이에요.

그리고 영화계는 언제나 신인을 기다리고요.”

한록의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지금도 영화인들의 연락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

둘 GV에 모여드는 중이었다.

“감독님. 저는 이제 리허설 때문에 가보겠습니다. 여긴 하대리가 담당할 겁니

다.”

“안녕하세요, 감독님.”

한록의 연락을 받고 온 하대리가 인사를 하자 이감독이 꾸벅 고개를 숙였다.

“대리님. 정말 감사합니다. 이대로가면 정말 영화제가 끝날때쯤엔 매진이 될

것 같습니다.”

“영화제가 끝날때쯤이요?”

이감독의 말에 하대리와 한록이 서로를 보며 웃었다. 어리둥절한 이감독을 보

고 한록이 말했다.

“그럼 나중에 뵙겠습니다.”

그 말과 함께 사라진 한록. 그리고 잠시 후 도착한 문자.

한록이 보낸 것은 매표소 앞에 끝없이 줄을 서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매표소 앞에 붙어있는 글귀.

<식물 매표소>

[감독님, 이미 매진이에요.]

한록의 문자에 이감독이 고개를 들고 먼곳을 바라보았다.

야외무대와 조금 떨어진 곳의 매표소. 그 곳에 서있는 사람들 손에 들린 식물

의 포스터와 굿즈.

지금 이 극장 앞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전부 식물을 보러 왔다.’

모두 자신의 관객이었다.

*

그날 밤. GV 리허설을 마친 한록에게 걸려온 전화.

[대리님. 이성재입니다. 오늘 술 한잔 하시겠습니까?]

이감독이었다.

이감독의 부름에 해운대로 나간 한록.

“어, 이감독. 식물 재밌더라.”

“나도. 나 GV도 봤다.”

“이대리. 내일 GV지? 거기도 갈게. GV재밌더라.”

이감독과 함께 걷자, 부산 길거리 곳곳의 영화인들이 이감독에게 아는 척을

한다.

오늘 이감독이 서울로 올라갔다면 만날 수 없었을 광경들이었다.

해운대의 한 이자카야로 들어온 한록과 이감독.

이미 술을 마시고 온 건지, 이감독은 살짝 취기가 오른 얼굴이었다.

“오늘 식물이 전부 매진 됐습니다. 내일 표를 잡으려고 사람들이 밤새서 줄을

서고 있습니다. 부산 어딜 가든 식물에 대한 얘기가 들려요.”

“네, 축하드립니다.”

기분좋게 웃으며 이감독이 건넨 술을 마시는 한록.

원래 낯선 사람과의 만남은 싫어하는 편이지만, 이감독은 회귀 전 한록과 오

래 합을 맞춰온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기쁨에 겨워서 부른 자리다보니, 한록 역시 기분이 좋았다.

“대리님이 만들어주신 기회란거 압니다. 감사합니다.”

“식물은 제가 아니어도 이번 영화제에서 인기작이 됐을 겁니다. 저는 그냥 시

기를 조금 빠르게 한 것 뿐이에요.”

“그 시기가 영영 안 와서 실패하는 작품이 대부분이죠. 이대리님 덕분입니다.”

이감독의 진솔한 모습.

이감독이 머뭇거리다가 한록에게 말했다.

“서울로 돌아가려고 했을 때...패배자가 된 기분이었습니다.”

그러더니 술을 한 잔 더 마시는 이감독. 정말로 고민이 많았던 모양이었다.

“자기 시기가 안 와서 영화를 접은 사람들, 정말 많이 봐왔습니다. 존경하던

선배는 회사원이 됐고, 천재다 싶던 후배는 장사를 하고 있습니다.”

그 말을 듣자 떠오르는 사람이 있었다.

유대리.

‘감독이 되고 싶어서 오래 조연출을 하셨는데, 결국 데뷔를 못하셨대요.’

그러나 이감독이 유대리를 말한 것은 아닐 것이다.

감독이, 배우가, 예술가가 되겠다고 생각하다가 꿈을 접은 사람들이 이 바닥

엔 셀수도 없이 많으니까.

“그렇게는 되고 싶지 않았어요. 무슨 일이 있어도 계속 영화를 찍자고 생각했

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계속 데뷔가 밀리니까...그 사람들 마음이 이해가 갔

습니다. 그 사람들도 이런 과정을 겪어서 포기하게 된 거겠죠.”

“그렇겠죠.”

“전 그렇게 되진 않을 겁니다. 계속 영화를 찍을 거예요. 이대리님 덕분에 시

간이 조금 더 생겼습니다.”

신인 감독의 포부와 열정이 담긴 말.

“전 패배자가 되진 않을 겁니다.”

그리고 젊은 감독이기에 할 수 있는 오만한 말이었다.

‘영화는 대중을 위한 거야. 자기가 뭘 원하는지도 모르고, 뭘 하면서 살아가

는지도 모르고 살아가는 대중들 말이야. 그 사람들을 깨우치게 하는게 예술이

지.’

회귀 전, 천재 예술가들이 그렇듯 자신만만하고 오만했던 이감독의 모습.

그 모습이 떠오른다.

‘사람은 정말 변하지 않는구나. 아니, 한참 어릴 때니까 그런 생각이 더 심하

겠지.’

옛 추억을 생각하며, 한록이 이감독에게 물었다.

“감독님. 이 술 감독님이 사시는거 맞습니까?”

“네. 내기를 했으니까요.”

‘식물이 매진이 된다면 술을 사라’던 한록의 말.

“이건 제가 사겠습니다. 대신 다른 부탁을 들어주세요.”

“무슨 부탁이요?”

“내일 삼일의 삶이 상영됩니다. 그걸 보러오세요.”

“이대리님이 진행하시는 GV말씀이십니까?”

“네, 맞습니다.”

한록의 말에 얼굴을 찌푸리는 이감독.

평범한 회사원. 그리고 어부를 다룬 소박한 다큐멘터리 영화 삼일의 삶.

오만한 예술가 이감독의 취향과는 거리가 먼 작품이다.

“제 취향 영화는 아닙니다.”

“아직 보지도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한록에게 입은 은혜가 있기에, 무엇보다 한록이 담당한 영화라기에 궁

금증이 생기는 것도 사실.

결국 이감독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대리님이 진행하시는 거니까요.”

그 말에 한록이 미소를 지었다.

예술가가 되지 못한 삶은 실패작이라고 생각하는 어린 감독.

그리고 시인이 되지 못한 어부가 나오는 영화.

그 영화를 보고 이감독이 어떻게 생각할지, 한록은 이미 알고 있었다.

“네, 꼭 보러 오세요. 생각이 바뀔 겁니다.”

한록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이감독에게 술을 따라주었다.

*

한록과 이감독이 술을 마시는 밤.

알렉산드로 감독은 호텔로 돌아온 상황이었다.

‘역시 오는게 아니었어.’

아직 경쟁부문 영화가 상영을 하는 중이고, 각종 프로그램이 벌어지고 있었지

만 흥미를 끄는건 하나도 없다.

‘칸 영화제를 보다가 이런 소규모 영화제를 보고 있으려니 따분하기 짝이 없군.’

CK와 부산이 힘을 합쳐 만든 한국 대표 영화제 부산영화제.

하지만 세계적인 영화제의 심사위원을 맡는 알렉산드로 감독의 기준에 차기에

는 한참 부족했다.

‘내일 일정만 끝내고 빨리 돌아가야겠어.’

그런 생각을 하며 내일 일정표를 보는 알렉산드로 감독.

‘<삼일의 삶>. 소규모 다큐멘터리 영화라. 더 재미없겠군.’

오늘처럼 영화제의 하이라이트라 할 수 있는 경쟁부문도 아니고, 비경쟁부문

독립영화다. 프로그램도, 영화도 수준이 떨어지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아예 내일 일정에 대한 기대를 접은 알렉산드로 감독.

‘...바닷가에서 상영한단 건 마음에 드네.’

그러나 이미 기대가 바닥에 떨어진 상황. 알렉산드로 감독이 일정표를 덮고

생각했다.

‘한국 영화계 수준이 겨우 이 정도인가?’

그리고 알렉산드로 감독은 호텔의 바로 향했다.

*

같은 시간. 부산지사의 사장실.

최경준과 하정엽이 대화를 하고 있었다.

2일차까지의 결과보고서를 보고 있는 하정엽.

오과장의 단편선과 최대리의 해외 영화 등이 좋은 성적을 올리고 있고, <식

물> 등 몇 개의 신작이 포털사이트 검색어에 오르고 있다.

나름대로 좋은 성적을 보여주고 있지만, 하정엽이 기대한 만큼은 아니다.

“알렉산드로 감독의 반응이 좋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이것이었다.

싸늘한 표정으로 말하던 하정엽이 최경준을 바라보았다.

“선생님.”

“네.”

“저는 부산영화제가 세계적인 영화제가 되길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전폭

적인 지원을 했습니다.”

“네,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직 결과는 만족스럽지 않군요.”

하정엽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최경준.

“영화사업본부의 최선이 이정도입니까?”

하정엽의 서늘한 질책.

그 말에 최경준이 한록을 떠올렸다.

알렉산드로 감독의 남은 일정. 내일 오전에 있을 경쟁부문 상영과, 저녁에 있

을 삼일의 삶 GV.

알렉산드로 감독이 이미 경쟁부문에 만족을 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남은 것은

삼일의 삶 뿐이다.

‘이번 영화제가 삼일의 삶에, 아니 이한록에게 달려있다.’

최경준에게 닥친 엄청난 위기.

그러나 이상하게도 전혀 불안하지 않았다.

최경준은 한록과 삼일의 삶을 떠올렸다. 그리고 한록이 그리던 GV의 모습도.

밤바다와 파도소리. 바다냄새. 그리고 멀리서 들려오는 뱃고동 소리.

모두의 추억을 불러일으킬 그 장면.

“사장님.”

“네, 본부장님.”

“하루만 더 시간을 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저희가 준비한게 뭔지 알게 되실 겁니다.”

그 장면을 하루 빨리 선보이고 싶을 뿐이었다.

하정엽이 최경준을 빤히 바라보았다.

최경준을 알고 지낸 20여년의 시간들. 그동안 깨달은게 있다.

최경준이 이렇게 말할때면, 반드시 무언가 사건이 일어난다.

'...기대를 안 할 수가 없군.'

하정엽이 결국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네, 기다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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