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영화제(2)
저녁 7시.
[지금부터 2022년 부산영화제가 시작됩니다.]
부산 영화제의 개막식이 시작 되었다.
해운대와 영화의 전당, 그리고 부산 곳곳의 영화관이 모두 부산영화제의 현수
막을 건다.
일주일간 진행되는 부산 최대의 영화축제, 부산영화제.
“빨리 와! 개막식 놓친다!”
그 화려한 개막식에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센텀시티에 위치한 야외극장에서 진행되는 개막식.
“김은수다!”
“박감독님! 여기요!”
배우들과 감독들이 야외무대 앞에 마련된 레드카펫을 지나가며 사진을 찍는다.
한국 최고의 영화배우와 감독들이 줄을 서서 레드카펫에 입장한다. 그리고 해
외 유명한 감독과 실력파 배우들까지.
“와...규모가 생각보다 크네요.”
유선이 야외극장을 가득 메운 관객들과 쟁쟁한 스타들을 보고 놀란 표정을 짓
는다.
부산 영화제를 그저 영화인들과 시네필들만의 축제정도로 생각했는데, 막상
보니 사람이 꽤 많이 들어찬 것이다.
“사장님이 신경을 많이 쓰셨으니까요. 알렉산드로 감독도 그렇고, 유명한 분
들을 많이 섭외했죠.”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저희는 뭐 할 거 없는거 맞죠?”
줄을 맞추느라 정신이 없는 경호원들과 자원봉사자, 그리고 이벤트팀.
반면 한록과 gv팀은 레드카펫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유선은 며칠 밤을 새서 일하다가 남이 일하는걸 지켜보기만 한다는게 어색한
모양이었다.
“네. 여기서 저희가 할 건 없죠.”
영화제는 시작되었고, 기획팀이 할 일은 끝났다.
남은 것은 자기 프로그램의 진행상황을 살피는 것 정도다.
“그래도...헉!”
레드카펫을 보고 놀란 표정을 짓는 유선.
유선만이 아니라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다들 깜짝 놀라며 레드카펫의 끝을 바
라보았다.
[알렉산드로 제롬 로게즈 감독입니다.]
큰 키로 레드카펫을 성큼성큼 걸어오는 남자. 알렉산드로 로게즈.
그의 등장에 ck의 모든 직원들이 바짝 긴장한다.
‘이 사람의 평가에 따라서 부산 영화제의 결과가 달라질거다.’
하정엽이 직접 섭외에 참여하고, 이틀이나 영화제를 둘러보도록 초청한 알렉
산드로 로게즈 감독.
그가 미국으로 돌아가서 부산영화제를 어떻게 얘기하느냐에 따라 부산영화제
가 부산만의 축제가 될지, 세계적인 영화제가 될지가 결정 될 것이었다.
포토존에 도착한 알렉산드로 감독은 인사를 하고 바로 자리를 빠져나갔다.
‘아마 하정엽을 만나러 가겠지.’
알렉산드로 감독은 내일은 하정엽과 경쟁 부문 영화를 관람할거고, 내일 모레
비경쟁 부문 프로그램을 보게 될 것이다.
바로 삼일의 삶을.
한록은 저 멀리서 레드카펫을 바라보는 윤감독을 떠올렸다.
삼일의 삶이 전세계에 공개될 날이 정말로 머지 않은 것이다.
“헉..!”
한록이 생각에 잠겨있을 때, 유선이 또 깜짝 놀라 어딘가를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에요?”
한록도 유선을 따라 레드카펫 끝을 바라보자-
그곳에선 지구특공대의 장감독이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등장하고 있었다.
[아, <지구 특공대>의 장감독님이 들어오시네요. 올해 영화계에서 가장 뜨거
운 반응을 얻은 작품이었죠.]
사회를 맡은 유명 배우의 소개. 그 소개를 듣자 장감독의 어깨가 한껏 올라간다.
멋진 턱시도까지 차려입고 사람들에게 손을 흔들어주는 장감독.
“저 양반도 참 관심받는거 좋아한단 말이지. 이대리가 gv 안 만들어줬으면 어
쩔뻔했어.”
현과장의 말에 gv팀이 겨우 웃음을 참았다.
“장감독님 지구특공대 망할까봐 죽어가던게 몇 달전인데, 저렇게 출세했네.”
현과장이 장감독을 보며 애틋한 듯 말했다.
“다 이대리님 덕분이죠!”
“지구 특공대 영화가 좋아서 그런거죠.”
“그걸 살린게 이대리지. 장감독도 그렇게 생각할걸? 장감독한테 전화할때마다
이대리 잘 지내냐고 물어봐.”
“그거 감사하네요.”
재능있지만 빛을 보지 못하던 감독과, 운이 안 좋아 망해가던 영화. 그 영화
가 자신의 손에서 살아났다.
그것만으로도 마케터에게는 큰 기쁨인데, 장감독 또한 자신의 수고를 알아준
다고 생각하니 고마울 따름이었다.
“저는 좋은 감독님들을 배정받는 것 같습니다.”
“어어, 이대리 담당 감독님들이 순한 편이긴 한데...그보단 이대리가 좋은 사
람이고, 작품 살려주니까 다들 고마워하는거지. 우리도 그렇잖아.”
“...감사합니다.”
칭찬 받으려고 한 말은 아닌데 칭찬을 받아버렸다. 머쓱해진 한록이 고개를
들었고, 장감독과 눈이 마주쳤다.
‘오셨습니까.’
장감독에게 살짝 목례를 한 한록. 그리고...
“이대리님!”
진짜로 대답해버린 장감독.
“자...장감독님 왜 저래?”
현과장의 질문과 함께, 장감독이 레드카펫 저편에서 한록을 향해 열심히 손을
흔들기 시작했다.
“이대리님! 제가 레드카펫을 다 밟아봅니다! 다 이대리님 덕분이에요! 이따
밤에 술 한잔해요!”
“뭐야?”
“누구한테 얘기하는거야?”
장감독을 따라 고개를 돌린 사람들. 사람들의 시선이 한록에게 꽂혔다.
“어...그 사람이다.”
“누구?”
“지구특공대 gv 스탭. 익스트림 시네에 올라왔잖아.”
“그 잘생긴 사람? 어디? 어디?”
부산영화제까지 찾아올 시네필들이다 보니, 한록을 알아보는 것은 당연했다.
사람들의 시선이 쏟아지자 슬금슬금 자리를 피하는 현과장과 하대리. 한록의
뒤에 숨는 유선.
배신자들이 모두 떠나버린 상황에서 한록은 도망가지도 못하고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대리님! 이따 봐요! 전화드릴게요!”
“아...장감독님이 아는 분이 계신가봐요. 즐거운 시간 보내시길 바랍니다.”
끝까지 한록에게 손을 흔드는 장감독과 멘트를 치는 mc. 그 모습에 관객들이
한바탕 웃음을 터뜨렸다.
상황이 겨우 진정되자 현과장이 한록의 곁으로 돌아왔고, 어깨를 두드렸다.
“현과장님.”
“응.”
“이렇게까지 감사받고 싶진 않았습니다...”
한록의 말에 현과장이 배를 잡고 웃기 시작했다.
*
개막식이 끝나고나면 개막작 상영이 시작된다.
개막작은 곧 올해 부산영화제의 대표작을 의미한다.
올해의 개막작은 ‘당신의 이야기’. 어느날 지구에 찾아온 외계인과 언어학자
의 만남을 다룬 sf영화였다.
꼭 보고싶었지만, 삼일의 삶 gv리허설이 있는 상황.
gv팀은 아쉽게 해운대로 발걸음을 돌렸다.
“대리님! 잘 지내셨죠?”
해운대 해수욕장 비프랜드에 도착하자 오랜만에 만난 삼일의 삶 윤감독이 반
갑게 인사를 건넨다.
“네. 감독님도 잘 지내셨죠?”
“그럼요. 오늘 저희 애들이랑 같이 왔습니다.”
“자녀분들이요? 어디 계시나요?”
“지들끼리 놀러 갔습니다. 아빠 일하는거 관심없다고...”
영화계에서 아무리 뜨거운 관심을 받는 감독이라도, 애들한테는 그냥 우리 아
빠일 뿐.
평범하고 화목해보이는 가족의 모습에 한록이 미소를 지었다.
“두분은 곧 오신다고 합니다.”
“아, 네. 그분들도 오랜만에 뵙네요.”
누군가가 도착하길 기다리는 gv팀과 윤감독. 10분 정도가 지났고, 드디어 한
록이 기다리는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안녕하세요.”
“오랜만입니다.”
머쓱하게 인사를 하는 젊은 청년. 그리고 그 옆에 까맣게 탄 얼굴의 중년남자.
“지훈씨, 배선생님. 안녕하십니까.”
삼일의 삶의 주인공인 회사원과 어부였다.
*
윤감독이 준비한 GV는 바로 삼일의 삶 출연자 인터뷰였다.
‘사람들이 출연자들이 어떻게 살고 있나 궁금해할겁니다. 저도 마찬가지고요.’
‘영화를 보고 어떤 생각을 했는지, 요즘은 어떻게 살고 있는지...제가 그 두
분을 인터뷰하고 싶습니다.’
출연자 인터뷰. 다큐멘터리 영화만이 할 수 있는 기획이다.
거기에 감독이 인터뷰를 받는게 아니라 직접 인터뷰를 한다니.
삼일의 삶 GV는 예매창이 열리자마자 매진이 될 정도로 뜨거운 화제가 된 상
황이었다.
“그...저...대본 같은거는 없나요?”
그러다보니 회사원 지훈씨는 크게 긴장을 한 모양이었다.
“대본은 없습니다. 인터뷰 질문 미리 보내드린 거에서 나올테니 너무 긴장하
지 마세요.”
“그래도...대본 같은게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아니면, 이렇게 대답했으면 좋
겠다고 얘기를 해주시거나...”
“지훈씨가 생각하시는 그대로 말씀해주시면 됩니다.”
여전히 바짝 긴장한 지훈.
반대로 어부 배오성은 담담한 모습이었다.
“선생님, 지금 리허설 해도 괜찮으시겠습니까?”
“네. 좋습니다.”
무대에 오르는 지훈과 오성.
장감독의 질문에 지훈과 오성이 대답을 하고, 사람들이 지나가면서 그 모습을
흘끔흘끔 지켜봤다.
GV를 지켜보던 현과장이 한록에게 묻는다.
“어때?”
“지훈씨가 너무 긴장하네요. 자기 얘기를 전혀 못하고 있습니다.”
“그렇지. 일반인이 사람들 몇백명 앞에서 인터뷰를 한다는 게 쉽지가 않아.
잘 되려나 모르겠네.”
걱정스러운 얼굴로 지훈을 바라보는 현과장.
“이대리. 이대리가 같이 올라가보면 어때? 감독님이랑 지훈씨 긴장도 풀어주
고. 아니면 내가 할까?”
“그 생각을 안 한건 아닌데, 그래도 영화랑 직접적으로 관련된 사람들만 나오
는게 좋을 것 같아서요. 무대에 적응만 하신다면 세분이 나오는게 가장 그림
이 좋을 겁니다.”
“음, 그건 그렇지. 일단 내일 리허설까지 지켜보자.”
“네. 내일이면 지훈씨도 좀 적응이 될 겁니다.”
현과장의 말에 한록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무대에 올라간다라.’
한록도 윤감독의 제안을 들었을 때 처음 했던 생각.
다만 기존의 gv와는 달리, 이 gv는 다큐멘터리 영화의 출연진을 인터뷰하는
내용이다.
다시 말해 영화의 세계관이 gv에 그대로 이어지는 것이다.
‘회사원을 지켜본 감독이 회사원에게 질문을 하고, 영화에서 어부에게 물었던
질문을 다시 한번 묻는다.’
말이 gv지, 거의 속편이라 말할 수 있는 상황.
그러다보니 영화와 동떨어진 사람이 올라가는건 좋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훈씨가 적응을 잘 해야할텐데.’
걱정이 되긴 했지만 이 부분은 한록이 컨트롤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래도 gv는 부가적인거고, 진짜 목적은 사람들과 알렉산드로 감독이 삼일의
삶을 현장에서 보게 하는거니까.’
gv가 잘 끝난다면 고맙지만, 아니라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한록은 약간의 안타까움과 불안함으로 지훈을 지켜보았다.
*
11시. 부산영화제의 개막일정이 모두 끝난 밤.
하지만 진짜 영화인들의 밤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영화제에 방문한 감독, 배우, 조연출, CK, 샤로떼, 쇼스퀘어의 직원들. 그리
고 해외 감독과 배우, 관계자들까지.
그들이 해운대 술집마다 꽉꽉 들어찼다.
“이대리님! 한잔 받으세요!”
한록 역시 GV팀, 장감독과 함께 해운대 근처의 횟집에 들어간 상황.
“저는 잠깐 담배 좀 피고 오겠습니다.”
“대리님! 어디 가세요! 대리님!”
“선배...왜 이렇게 흥분하신 거예요...”
“내가 오늘 레드카펫을 밟았다고! 나는 이제 스타 감독이다아아!!!”
잔뜩 흥분해서 술잔을 비우는 장감독. 그런 장감독을 뒤로하고 한록은 가까스
레 밖으로 빠져나올 수 있었다.
술자리에서 빠져나온 한록은 골목으로 가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오늘 내내 신경이 쓰이던 사람.
“이감독님, 안녕하세요. CK 이한록 대리입니다.”
식물의 이감독이었다.
어제 부산에 도착했다는 연락 이후로 아무런 소식이 없는 이감독.
레드카펫엔 어떻게 참여하는지, 본인의 영화인 식물은 어디서 봐야하는지 등
궁금한게 많을텐데 아무런 연락이 없는게 걱정이 됐던 것이다.
[아, 대리님. 안녕하세요.]
“감독님, 식물 초대권 드리려 했는데 답장이 없으셔서요.”
[아...네.]
이감독의 목소리는 확실히 가라앉아 있었다.
‘무슨 일이지?’
한록은 회귀 전 식물의 마케팅을 담당했고, 칸 영화제까지 식물을 데려갔다.
소규모 영화를 천만 영화로 만들고, 해외까지 진출 시킨 한록과 이감독. 둘
사이에는 나름의 유대가 있는 상황.
그런 사람이 데뷔작 발표를 앞두고 풀이 죽어 있으니 신경이 쓰일 수 밖에 없다.
한록이 이감독에게 물었다.
“감독님. 무슨 일 있으신 거 아니죠?”
[...]
[저 내일 서울로 돌아가려 합니다.]
그리고 이감독의 대답.
“무슨 일이세요?”
[제가 여기 있을 이유가 없습니다. 식물을 보러오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아.’
그 말을 들으니, 이제야 이감독이 이렇게 가라앉은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갑작스럽게 부산영화제에 합류하게 된 식물. 거기에 신인감독의 단편 영화다.
‘오과장님이 단편선을 쟁쟁하게 꾸려왔지. 그 영화들 사이에서 식물을 보러
올 사람이 많지는 않을거야.’
식물은 다른 단편선에 비해 예매가 절반도 안 된 상황.
전 세계 영화인들이 찾아오는 부산영화제. 그 화려한 축제에서, 아무도 자신
을 찾아주지 않는다.
이감독은 그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아 서울로 돌아가겠다는 것이었다.
몇 년 뒤 부산영화제가 아닌 칸 영화제의 황금종려상을 수상하는 이감독.
그러나 지금의 이감독은 고작 30대의 젊은 신인감독이었다.
아직 아무것도 증명하지 못하고, 인정받지 않은 예술가.
‘내가 아는 이감독은 자신만만한 천재였는데.’
그 사람에게도 이렇게 불안하고 어린 시절이 있었다는 사실이 놀랍고, 재밌
고, 또...안쓰러웠다.
'며칠만 참으면 입소문이 나서 제일 인기작이 될 텐데. 지금 그걸 기다리는것
도 힘든거구나.'
안타까운 마음에 한록이 이감독에게 물었다.
“감독님, 며칠만 더 지켜보고 가시면 어떠십니까.”
[더 있어도 달라질 건 없습니다.]
시니컬하게 답하는 이감독.
나름대로 담담한 척하지만, 얼마나 심경이 복잡할지 이해가 간다.
[그간 감사했습니다, 대리님. 덕분에 개봉도 하고 부산영화제까지 와 봤습니다.]
거의 모든 걸 포기하려는 듯한 이감독의 말.
‘이감독한테도 이런 시절이 있었구나.’
회귀 전 이감독은 오과장 때문에 부산영화제에 오지도 못했고, 식물 단편선은
아예 개봉을 하지 못했다.
그때 이감독이 겪은 고통은 더욱 컸을 것이다.
하지만 이 감독은 다시 몇 번이나 영화를 만들었고, 결국 모든 사람의 인정을
받았다.
‘그만큼 영화를 사랑하는 거야. 그래서 더 고통스럽겠지.’
“감독님. 감독님은 잘 되실거예요.”
[...대리님이 뭘 아십니까.]
날카로운 대답이 돌아오지만 전혀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자신의 목표를 위해 끝이 보이지 않는 터널을 걷는 삶.
꼭 예술이 아니더라도, 간절한 목표를 가진 사람이라면 모두가 겪는 일이다.
그게 얼마나 외롭고 힘든지 어렴풋이나마 짐작이 가기 때문이었다.
“감독님. 제가 이 일을 하면서 느낀 건...누구나 자기의 때가 따로 있다는 겁
니다.”
언젠가 올 자신의 순간. 그 순간을 위해 기다려야 하는 인내의 시간들.
그냥 견디라고 말하기엔 너무나 고통스럽고, 어떤 위로도 통하지 않는 시간들.
그래서 지금 한록이 이감독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은 이것 뿐이었다.
“감독님. 조금만 기다리세요.”
“감독님은 천재고, 역사에 남을 감독이 될 겁니다.”
그게 언제일지는 몰라도, 당신의 때는 반드시 온다.
그러니까 조금만 참아달라는 부탁.
[하하...]
핸드폰 너머 들리는 이감독의 웃음소리.
[그럴수만 있다면...]
젊은 예술가의 목소리에서 기대와 희망, 안도, 고마움, 그리고 비참함과 외로
움이 느껴졌다.
[감사합니다, 대리님. 제가 오늘 너무 무례했네요.]
다시 평소의 젠틀한 모습으로 돌아온 이감독. 이감독에게 한록이 물었다.
“여전히 서울로 돌아가실 생각입니까?”
[네. 여기 있어봤자 할 것도 없으니까요.]
“감독님. 저랑 내기하나 할까요?”
[어떤 내기요?]
“이번 부산 영화제에서 식물이 매진되는 날이 있으면 저한테 술 한번 사주세요.”
[하하, 그래요.]
이감독이 아무 기대없이 한록의 말을 수긍했다. 그리고 작게 중얼거렸다.
[제 영화가 매진이라. 그게 대체 언제일까요.]
그리고 그 목소리에 한록이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아마...”
“내일이요.”
*
이감독과의 전화를 마치고 술자리로 돌아온 한록.
“이대리님! 어디 갔다 오세요!”
이미 술에 잔뜩 취한 장감독에게 한록이 제안을 하나 건넸다.
“장감독님. 내일 저랑 영화 보러 가시겠습니까?”
*
다음날 오후 2시. KTX 부산역.
‘돌아가자. 그리고 다시는 영화를 찍지 말자.’
KTX에 앉아있던 이감독이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한록에게 고맙다고, 서울로 올라간다고 메시지를 보내려던 이감독. 그리고 그
에게 도착한 메시지 하나.
[감독님, 서울로 돌아가지 마세요.]
[곧 감독님의 때가 올 겁니다.]
한록의 메시지에 이감독이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이를 악물고 몇 번이나 창
밖을 바라보고, 가방을 들다가...
[곧 열차가 출발합니다.]
안내방송과 함께 열차에서 내렸다.
*
KTX에서 내린 이감독은 식물이 가장 많이 상영되는 영화관으로 이동했다.
마침 지금 식물이 상영중인 영화관.
‘그래. 가더라도 사람들 반응은 한번 보고 가자.’
이감독은 의자에 앉아 초조하게 식물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10분, 20분, 30분.
적막속에서 영화가 끝나기만을 기다리는 시간들. 그리고 세상에 처음으로 자
기 영화를 선보이는 젊은 감독.
긴 시간이 흘러 마침내 영화가 끝났고, 사람들이 상영관에서 나오기 시작했다.
“어땠어?”
“난 재밌었어.”
“그러게. 사람이 너무 없어서 아깝다.”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객석에서 나오는 관객들.
그러나 300석 영화관에서 관객은 단 13명 뿐이었다.
‘그래. 내가 멍청했다.’
‘나의 때 같은건 오지않는다.’
그리고 이감독이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가방을 들었을 때.
마지막으로 상영관에서 한무리의 사람들이 몰려나왔다.
“이거 누가 만들었다고?”
“그...이한철이.”
“시나리오 직접 쓴거지?”
“그렇겠지. 데뷔작이니까.”
“이야...기깔나네.”
자신의 이름을 알고 있는 낯이 익은 얼굴들.
지구특공대의 장감독을 비롯해, 한국에서 손꼽히게 유명한 영화감독과 촬영감
독, 그리고 배우들이었다.
“이한철? 이한철이 누군데?”
“오감독 조연출 하던 애.”
“아는 애야?”
“그냥 번호만 있는 정도.”
그들이 상영관 앞에서 모여 이감독에 대해 얘기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전화해 봐. 얘기 좀 하자고 하자.”
진동이 울리기 시작하는 이감독의 핸드폰. 그리고 진동과 함께 떠오르는 한록
의 말.
-감독님은 천재고, 역사에 남을 감독이 될 겁니다.
‘그 사람의 말이 맞을 수도 있다.’
‘내 노력이 헛되지 않은 것일 수도 있다.’
이 어둠을 뚫고 나가면, 언젠가 나에게도 나의 때가 올 수 있다.
이감독의 생각과 함께 누군가 마지막으로 상영관에서 걸어 나왔다.
그리고 이감독을 보며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제 말 맞죠?”
한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