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영화제(1)
“많이 알진 않아요. 오과장님이 업체들과 커넥션이 있다는 것 정도?”
최대리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언제부터 알았습니까?”
“반년 전이요. 오과장님이 갑자기 예고편 업체를 바꾸라고 하셨어요.”
“영화 분위기에 딱 맞는 곳으로 골라왔는데, 갑자기 다른 곳으로 바꾸라잖아
요. 짜증나서 뭐하는 짓인가 지켜봤죠. 시계도 바꾸고, 만년필도 바꾸고, 차
도 바꾸시더라구요.”
반년 전. 오과장의 비리를 최소한 그때부터 지켜봐 왔다는 뜻이다.
“알면서 그냥 덮어왔습니까?”
“굳이 말할 필요 있나요? 전 길어야 몇 년 있다가 부서 옮길 건데. 회사에 적
을 만들 필요는 없죠.”
최대리는 현재 ck그룹의 전 회사를 순환근무 하고 있는 중이다. 최대리의 입
장에서는 1,2년 있다가 옮길 부서에 큰 신경을 쓰고 싶지 않다는 뜻이었다.
“그럼 왜 이걸 저한테 말해주는 겁니까?”
“이대리님이 오과장님이랑 붙으려 하니까요. 지금 아예 오과장님 목을 날리려
하시는 거잖아요.”
한록이 오과장을 잡기 위해 칼을 갈고 있다는 사실을 파악한 최대리.
그러나 그 답은 한록의 의문을 해결하지 못했다.
“그런데 왜 제 편을 드시는 겁니까.”
‘귀찮은 일을 만들고 싶지 않다면서, 왜 나한테 오과장에 대해 말해주는가.’
최대리의 실은 여전히 한록의 어깨 주위를 맴돌고 있었고, 한록은 도무지 이
실의 의미를 이해할 수 없었다.
“글쎄요. 왜 이대리님 편을 들까요?”
최대리는 대답 대신 한록에게 반문하였고, 한록은 최대리의 실을 지켜보았다.
자신에게 이어질 듯 말 듯 주위를 맴도는 최대리의 라인.
이 라인이 이어진 곳은 어디일까.
‘ck 기획이다.’
최대리의 원래 소속이자, 한국 제일의 광고 회사 ck기획.
거기까지 파악하고 나자 바로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오과장님의 비리를 고발해서 ck enm자체에 타격을 주고 싶으신가보군요.”
한록의 말에 최대리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ck 기획. ck그룹의 핵심 계열사이자, 매출만 해도 ck enm의 몇배에 달하는 곳
이다. 그리고 최대리는 원래 ck 기획 소속이었다가 전 회사를 순환근무하는
상황.
한록은 회귀 전의 일을 떠올렸다.
“방송국 합병 때문입니까?”
ck enm의 방송국 합병 전쟁.
모든 본부장들이 방송국장이 되기 위해 피튀기는 전투를 벌였다. 오늘 최경준
이 경쟁 프레젠테이션을 벌인것 역시 그 일환.
그러나 실제로 방송국을 인수한 것은 ck 기획이었다.
‘ck enm이 문화계에서 엄청난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은 사실이야. 하지만 문
화만으로는 돈을 벌 순 없다.’
음악, 공연, 영화. ck enm이 만든 문화의 토양.
그걸 광고매체로 사용해서 실제로 돈을 벌어오는 기업은 ck 기획이었고, 결국
ck 그룹은 방송국을 ck기획에 넘겨주었다.
“오과장님의 비리가 크게 터진다면 ck enm의 입지가 위험해지겠죠. 그러면 ck
기획이 방송국을 인수할 확률이 커질거고요.”
한록의 말에 최대리가 재밌다는 듯 웃더니 한록에게 답했다.
“이대리님. 진짜 많이 변하셨네요.”
오로지 일에 미쳐있던 한록. 그런 한록이 회사의 인수전을 생각한다는 게 놀
라운 것이었다.
“이런 문제를 모르는 게 아니라 관심이 없는 척 하셨던 거군요. 그간 내숭을
부리셨네요.”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생겼어요.”
“갑자기 왜요?”
“개인적인 문제입니다.”
“음, 그래요. 물어봐도 대답 안 해줄테니까 안 물어볼게요.”
그러더니 한록을 찬찬히 바라보는 최대리. 잠시 후 최대리가 솔직하게 말했다.
“이대리님한테는 뭘 숨길 수가 없네요. 맞아요. ck 기획측은 이걸로 오과장님
을 날려버릴 수 있다면 좋은 기회가 되겠죠.”
‘역시 최대리는 믿을 수 없는 사람이다.’
한록이 그런 생각을 할 때, 최대리가 말을 이었다.
“하지만 이건 제가 그냥 말씀드리는 거예요. 오과장님이 물러난다면 좋긴 하
겠지만, 그게 방송국 합병 건에 그렇게 큰 영향을 줄 거라고 생각은 안 해요.”
“진짜 이유가 따로 있다는 겁니까?”
“맞아요.”
“그게 뭡니까?”
“아, 역시 본인은 모르는구나.”
한록의 질문에 최대리가 피식 미소를 지었다.
“ck enm 직원은 다 아는데, 대리님만 모르시는 사실이 있어요.”
그러더니 최대리가 한록을 바라보며 말하기 시작했다.
“제가 잘생기고 능력도 좋아서 사람들이 많이 오해하는데 저도 평범한 회사원
이거든요.”
“하고 싶으신 말이 뭡니까.”
“만약에 이대리님이 이번 일에서 밀린다면 목이 날아가는건 오과장님이 아니
라 이대리님이겠죠?”
“네. 각오하고 있습니다.”
“그래요? 저는 그건 싫은데.”
전혀 생각지도 못한 말.
의외의 대답에 굳은 한록을 보고 최대리가 말을 이었다.
“만약 저한테 누구랑 같이 일 하고 싶냐고 묻는다면 말이에요. 저는 당연히
이대리님이라고 말할 거예요.”
그리고는 아주 솔직한 답을 해주었다.
“회사원이라면 누구나 이대리님이랑 일해보고 싶을 거예요. 그게 전부고 다른
이유는 없어요.”
*
한록이 최대리와 대화를 하고 있는 사이.
오과장은 호텔에서 생각에 잠겨있었다.
‘나는 이 녀석을 이길 수 없다.’
오늘 발표에서 들었던 생각. 그리고 그 생각이 현실이 될 거란 예감.
‘분명 내 뒤를 캐고 있을거다.’
k필름과의 일을 눈치채고, 완벽히 대비해 온 한록. 한록의 ‘끝이 아니다’란 말.
한록의 공격은 여기서 끝나지 않을게 분명했다.
‘수를 써야 한다.’
책상에서 이마를 짚고 있던 오과장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오늘 일로 인정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자신은 성과로 한록을 이길 수 없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오과장의 방식이었다.
사람이 가진 욕망과 공포, 시기심.
그것들로 누군가를 조종하는 것.
‘최경준은 이미 나와 이한록을 저울질하고 있다.’
애초에 최경준은 자신의 술수가 먹힐만한 사람이 아니다.
‘현과장. 김유선. 그 녀석들은 절대 이한록을 배신하지 않을 거다. 송과장.
박과장. 그 녀석들은 이 일에 개입하지 않을거야. 유대리는 이미 나와 너무
많이 엮여 있다.’
분명 회사에서 믿을 사람 하나 없는 한록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한록을 공격
할만한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젠장!”
책상을 한번 걷어찬 오과장이 핸드폰을 바라보았다.
한록이 아닌 오과장의 편을 들만한 사람.
사내 정치에 깊게 관여할 만큼 야망이 있는 사람.
그리고 동시에, 한록에게 위기감을 느끼고 있을 사람.
그런 사람은 단 한명뿐이었다.
오과장은 핸드폰을 들어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잠깐의 신호음 후, 누군가 전화를 받았다.
오과장이 전화를 건 곳은-
“이 시간에 무슨 일이야?”
정부장이었다.
*
“부장님.”
“...”
오과장의 낮은 목소리에 답이 없는 정부장.
무언가 심각한 얘기가 나오리란 걸 눈치챈 것이었다.
“부장님. 이한록을 믿으십니까.”
오과장의 단도직입적인 질문.
“...그 녀석의 능력을 믿지.”
“이한록이 저를 보내려고 하고 있습니다.”
“...”
답이 없는 정부장. 오과장이 정부장에게 다시 한번 물었다.
“부장님은 얼마나 갈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오과장.”
“차장을 날렸습니다. 다음은 부장이겠죠. 그 녀석이 부장이 되기까지 3년이면
충분할 겁니다.”
“자네는 비위행위로 징계를 받은거야. 그게 이한록 탓이라고 생각하나?”
정부장의 날카로운 말. 그러나 오과장은 물러나지 않았다.
“모르는 척 하지 마십시오. 제가 징계를 받은건 비위행위 때문이 아니고, 이
한록이 저를 잡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
“그리고 본부장님이 이한록을 선택하려 하시기 때문입니다.”
오과장의 말은 모두 사실이었다.
만약 오과장의 비리가 드러났어도, 최경준은 고발 대상이 한록이 아니었다면
상황을 덮었을 것이다.
마치 정부장이 그랬던 것처럼.
“이번에 제가 물러나게 된다면 다음은 부장님 차례일겁니다. 부장님이 하실
건 많지 않습니다. 제가 판을 짜오겠습니다. 부장님은 그저 조금만 거드시면
되는 겁니다.”
“오과장. 자네 일에 날 끼우지마.”
정부장의 거절. 그러나 오과장은 끈질기게 정부장을 몰아세웠다.
“부장님. 이한록은 우리랑 다른 인간입니다.”
아들이 교통사고로 입원을 한 날도 출근을 했던 정부장.
수원에서 서울로 돌아오기 위해 수많은 사람의 목을 날렸던 정부장.
오과장의 잘못을 덮으려 했던 정부장.
오과장의 말처럼, 정부장은 한록과는 다른 유형의 사람이었다.
“그 녀석이 부장님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까?”
과거 한록이 모두에게 외면 받은 이유이자 오과장이 한록에게 누명을 씌운 이유.
한록이라는 너무 뛰어난, 그리고 절대 설득이 불가능한 사람에 대한 상사의
불안.
“아니, 부장님이 그 녀석을 감당하실 수 있겠습니까?”
그 불안을 자극하는 말에 정부장은 답을 하지 못했다.
*
gv팀 회의가 끝나고, 모두가 호텔로 향한 새벽.
그 시간에도 정부장은 고민에 빠져있었다.
‘이한록을 감당하실 수 있겠습니까?’
오늘 오과장이 한 말.
정부장은 그에 대해 아무런 답 없이 전화를 끊었다.
하지만 사실 정부장도 알고 있었다.
그 말에 대한 답은, 당연히.
‘아니. 나는 그 녀석을 감당할 수 없다.’
‘아니다’ 였다.
오과장의 말이 맞았다. 출세와 야망을 위해 회사를 다니는 정부장, 그리고 오
과장.
오과장처럼 직접적으로 비리에 손을 대지 않았을 뿐, 정부장 역시 한록처럼
깨끗하게 회사생활을 하진 않았다.
‘부장님의 부패에 대해서 변명하지 마세요.’
그리고 한록은 그걸 눈감아 줄 사람이 아니었다.
‘부장이 되기 위해선 어쩔 수 없었다.’
방해가 되는 사람은 제거하고, 도움이 되는 사람은 자신의 편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게 정부장이 지금까지 회사를 다녀오던 태도였다.
그리고 지금.
너무나 강력한 존재지만, 그렇기 때문에 자신에게 위협이 될 수도 있는 한록
이 나타났다.
‘그 녀석이 부장이 되기까지 3년이면 충분할 겁니다.’
한록을 자신의 편으로 만들면 그 3년 후 자신은 임원이 될 것이다.
하지만 한록을 자신의 편으로 만들지 못한다면.
아니, 한록이 자신을 선택하지 않는다면.
그렇다면 3년 후 자신의 자리는 한록으로 교체될 것이다.
-이한록을 감당하실 수 있겠습니까.
‘나는 이한록과 함께 갈 수 있나.’
‘내가 살아온 방식. 나를 부장까지 올려준 방식. 내가 옳다고 믿는 방식.’
‘그걸 버리고 이한록을 선택할 수 있나.’
‘그 녀석이, 그 녀석의 능력이 그렇게 대단하다고 믿나.’
긴 고민에 빠진 정부장.
몇 번이나 거실을 맴돌던 정부장. 몇시간 후, 정부장은 드디어 결정을 내렸
다. 정부장은 한록에게 전화를 걸었다.
[부장님.]
새벽 3시가 넘었지만 아직도 일을 하는 중인건지, 한록은 바로 전화를 받았다.
정부장이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이한록. 오늘 오과장이 전화를 했다.”
‘나는 이한록과 함께 갈 수 있나’
그에 대한 답.
-아니다.
“자기가 널 끌어내릴 판을 만들테니, 자기 편을 들어달라고 하더라.”
‘내가 살아온 방식. 나를 부장까지 올려준 방식. 내가 옳다고 믿는 방식. 그
걸 버리고 이한록을 선택할 수 있나.’
-아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나는...”
‘그 녀석이, 그 녀석의 능력이 그렇게 대단하다고 믿나.’
-아니다.
“나는 네가 너무 위험하게 일한다고 생각한다.”
정부장이 창밖을 바라보며, 아주 깊은 한숨을 쉬고 말했다.
-이한록이 얼마나 대단하든, 얼마나 깨끗하든, 평생 아무 흠집도 없이 회사생
활을 할 수는 없다.
“오과장을 적으로 돌린건 큰 잘못이야. 넌 큰 기회를 놓친거다.”
-앞으로도 수많은 오과장이 나타날거고, 내가 나타날 거다. 그럼 이한록의 미
래는 정해져 있을 거다.
정부장의 말에 한록이 날카롭게 답했다.
[부장님. 제 의견은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말이다.”
‘하지만.’
“나는 네가 여기서 끝나길 원하지 않는다.”
‘그걸 알면서도, 나는 오과장의 편을 들고 싶지 않다.’
“오과장 일은 걱정하지 마라. 네가 신경쓰지 않을 수 있게 끝낼 거다.”
‘이 녀석과 함께갈 수 없더라도. 적어도 방해를 하고 싶진 않다.’
“나는...”
‘왜냐하면...’
“나는 너랑 일하는 게 즐겁다, 이한록.”
그간 한록이 보여준 퍼포먼스. 솔직한 진심. 일에 대한 열정과 애정.
그 모든 것이 외면하기에는 너무나 매력적이었다.
“지금은 영화제에만 집중해라. 오과장이 바라는대로 되진 않을 거다.”
[...감사합니다.]
“그래. 끊는다.”
[부장님.]
말을 마친 정부장이 전화를 끊으려 할 때, 한록이 정부장을 붙잡았다.
[부장님. 아직 오과장님께 답변 안 하신 상황 맞습니까.]
그리고 정부장에게 새로운 제안을 건넸다.
[그럼 절 좀 도와주시겠습니까?]
*
정부장과의 대화를 마친 한록은 침대에 누웠다.
오늘 하루만에 너무 많은 일이 일어났다.
‘나는 너랑 일하는게 즐겁다.’
정부장의 말.
‘회사원이라면 누구라도 이대리님이랑 일하고 싶을 거예요.’
그리고 최대리의 말.
내 옆 사람이 잘나면 나는 초라해지고, 내 아랫사람이 치고 올라온다면 나는
물러나야 하는 회사생활.
그래서 언제나 한록은 모두의 경계 대상이었다.
하지만 오늘 정부장은, 그리고 최대리는 한록을 보며 다른 생각을 해주었다.
옛 열정을 되살려주는 부하. 승부욕을 자극하는 라이벌.
‘아, 저 사람이랑 일하고 싶다.’
그것이 최대리와 정부장이 오과장이 아닌 한록을 선택하게 만들었다.
한록은 자신의 손목을 바라보았다.
완전히 매듭지어진 현과장과 유선의 실.
반대로 서툴게 감겨있는 정부장과 영도의 실.
그리고 아직 이어지지 않은 최대리의 실까지.
‘내가 편협했어.’
정부장과 최대리는 아직 완전히 한록의 사람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
구하고 둘은 오과장과 한록 사이에서 한록의 편을 들었다.
‘나랑 완전히 같은 곳을 보지 않더라도, 서로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
유선과 현과장처럼 완전한 신뢰가 없더라도. 어떤 면에서는 경쟁하고, 어떤
면에서는 대립하더라도.
그럼에도 동료가 될 수 있다.
늘 견제 받던 한록이 알지 못하던 사실. 그러나 오늘 정부장과 최대리가 알려
준 사실이었다.
‘지금이 몇시지?’
생각에 잠겨있던 한록이 시계를 바라보았다.
새벽 4시. 내일 출근까지는 4시간밖에 남지 않은 상황.
이제 부산영화제까지도 6일밖에 남지 않았다.
‘준비는 완벽하다.’
영화제와 gv준비. 거기에 정부장과 얘기한 오과장에 대한 반격까지.
모든건 완벽했고, 이제 남은 것은 영화제 뿐이었다.
‘잘 될까?’
그런 걱정은 잠시였다.
‘잘 될 거야.’
‘우리가 한 거니까.’
한록은 옷도 벗지 않고 잠에 빠졌다.
*
며칠 뒤 새벽.
“대리님. 부산에 도착했습니다.”
부산에 도착한 식물 감독과 윤감독.
[한국의 여름은 덥군.]
한국에 도착한 알렉산드로 감독.
‘여기에 내 운명이 담겨있다.’
오과장.
“이대리님. 무대 완성됐으니 한번 보러 가세요.”
최대리.
“내일이면 영화제라니. 믿기지가 않네.”
“그러게요.”
현과장과 유선.
“네, 이제 시작이네요.”
그리고 한록.
모두가 부산에 모였고-
[지금부터 2022년 부산 영화제가 시작됩니다.]
그토록 기다리던 영화제가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