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크호스라고 해야하나(4)
유선을 바라보는 최경준.
임원들 앞에서 하는, 아니 아마 상사 앞에서 하는 첫 발표일 것이다.
그런데 떨면서도 차분히 제 몫을 다한다.
거기에 질문을 막아버리는 답변까지.
‘본부장님, 펜이랑 종이 가져왔습니다.’
지구특공대 gv에서 자신에게 종이를 가져다주던 유선.
덜덜 떨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훤한데, 이제는 그때의 모습을 찾아볼 수가 없
었다.
‘잘 키워왔군. 그리고...’
한록을 보고 웃는 유선과, 유선에게 엄지손가락을 올려주는 한록.
‘좋은 팀이다.’
최경준이 감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한록 대리.”
그때 하정엽이 한록의 이름을 불렀다.
후다닥 한록의 곁에 서는 유선과, 자세를 고치는 한록.
‘사장님이 저 녀석 이름을 알고 있다.’
팀장들이 위기감을 느끼고 고개를 번쩍 들었다.
“옆에는 저번에 말한 후임입니까.”
‘제가 실무에서 손을 떼면, 다른 사원들이 GV를 담당할 겁니다.’
한록이 저번 발표에서 말한 GV의 후임. 하정엽은 그걸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네, 맞습니다.”
그 말에 유선을 천천히 바라보는 하정엽.
유선은 다리가 후들거리는 것을 느꼈지만 주먹을 꼭 쥐고 바로 섰다.
“이름이.”
“김유선이라고 합니다, 사장님.”
“아직 사원이군요. 몇 년차입니까.”
“입사 1년입니다.”
사장 앞인데도 차분하게 말하는 유선. 손은 떨리고 있었으나, 눈은 반짝 거리
고 있었다.
본인도 오늘 자신이 잘했다는 걸 아는 것이다.
“그렇군요.”
CK의 오너일가가 계약직 사원을 바라본다.
그리고...
“잘했습니다.”
칭찬을 건넸다.
*
유선에 대한 하정엽의 칭찬.
그 말에 유선이 입을 틀어막았고, 한록 역시 고개를 숙이고 웃었다.
‘오늘 이후로 유선씨 회사생활은 많이 달라지겠지.’
같은 팀이 성장하는 것을 보는 것.
자기 자신이 듣는 칭찬보다 더욱 기쁜 일이었다.
하정엽이 이제 한록에게 물었다.
“이한록 대리. 매번 이런 식으로 발표를 합니까?”
칭찬인지, 비난인지 알 수 없는 말.
한록은 조금도 기죽지 않고 답했다.
“원하신다면 어떤 식으로든 할 수 있습니다.”
“하.”
그리고 그 패기 넘치는 말에 대한 하정엽의 반응은...
“오늘 하는 걸 보면 거짓말은 아닌 것 같군.”
한록에 대한 믿음이었다.
TF팀장 몇이 패배를 직감하고 고개를 숙였다.
“더 이상의 회의는 필요 없겠군요. 알렉산드로 감독과는 GV팀에 방문하겠습니
다.”
하정엽의 선언. 아무도 이에 대해 반박하지 않았다.
억울하거나, 아쉬울 것도 없었다.
누가봐도 한록의 완벽한 승리였으니까.
“회의 마칩니다.”
하정엽이 짧게 말하고 자리에서 일어났고, 최경준과 임원이 그 뒤를 따랐다.
그리고 문을 나서기 직전. 하정엽이 한록에게 말했다.
“다음에도 기대하겠습니다.”
*
임원진이 떠난 회의실에는 TF팀과 한록, 유선만이 남았다.
TF팀의 팀장들이 하나 둘 씩 자리에서 일어나기 시작한다.
여태까지 CK와 한국영화계를 만들어 온 사람들. 그리고 그 사람들이 최선을
다해 준비한 발표들.
사장 앞에서 자신의 능력을 보여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고, 그걸 한록이 가
져갔다.
누군가는 한록을 죽일 듯이 노려보고, 누군가는 허탈한 표정으로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누군가는 한록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오늘은 네 승리다.’
상대를 향한 존경과 인정.
한록도 그를 향해 고개를 숙여보였다.
반면 모두가 회의실을 나가고 있는데 아직 자리에 앉아있는 오과장.
그는 이를 악물고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언제나 그렇듯 분노에 찬 얼굴. 그러나 이번엔 단순한 분노만이 아니었다.
‘대답하지 못했다.’
한록의 질문. 평소라면 충분히 답변할 수 있는 질문이다. 그러나 이번엔 준비
까지 시간이 촉박했다. 그리고 한록의 질문이 너무 갑작스러웠기 때문에-
‘아니. 아니다.’
그저 그 순간.
‘그 녀석을 이길 수 없단 생각이 들었다.’
승자가 한록이 될 것이란 것을 인정해버렸다.
CK최고의 엘리트 중 한명이자 패배란 것을 모르고 살아오던 오수창. 그가 처
음으로 당한 패배.
오늘 그는 분노가 아닌 충격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유선씨, 가요.”
“네!”
한록과 유선은 짐을 챙겨 회의실 밖으로 나왔다.
“사람이 너무 많네요. 다음걸 탈까요?”
“네.”
엘리베이터 앞에선 한록이 유선에게 말했고, 유선이 고개를 끄덕였다.
엘리베이터가 도착했고 사람들이 엘리베이터에 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유선과 한록은 오늘 회의에 대한 얘기를 하고 있을 때, 누군가 한록을
불렀다.
“이대리님.”
또 최대리였다.
최대리가 한록을 스쳐지나가 엘리베이터에 오르며 말했다.
“이번엔 진짜 멋있네요.”
그리고 평소의 그 얄미운 미소가 아니라, 아주 솔직한 미소를 짓는 최대리.
엘리베이터의 문이 닫혔고, 최대리가 시야에서 사라졌다.
*
회의가 끝난 후 사장실로 향한 하정엽과 최경준.
최경준이 하정엽에게 물었다.
“사장님. 왜 발표 순서를 바꾸신 겁니까?”
오늘 갑자기 한록의 순서를 맨 뒤로 바꿔버린 하정엽. 하정엽이 드디어 그 이
유를 밝혔다.
“그 사람이 처음으로 발표를 하면 다른 팀은 제대로 된 발표를 못할테니까요.”
현장을 휘어잡는 발표를 하는 한록. 하정엽은 이미 한록의 발표를 눈여겨 보
고 있었던 것이다.
“고심해서 결정하신 걸텐데, 마지막에 이한록이 또 난리를 쳤군요.”
“네. 난리란 말이 딱 맞습니다.”
마지막 순서가 되자 앞 순서의 발표를 모두 반박해버린 한록.
그 모습을 떠올린 하정엽이 얼굴을 살짝 찌푸리며 웃었다.
하정엽의 미소를 지켜보던 최경준이 묻는다.
“사장님, 그래서 오늘은 어떠셨습니까.”
하정엽이 바로 대답하는 대신 턱을 괴고 최경준을 바라보았다. 하정엽이 잠시
생각하다 말했다.
“선생님. 선생님이 제게 경쟁 프레젠테이션을 제안하신 이유를 알고 있습니다.”
그 말에 대답 대신 미소를 짓는 최경준.
“방송국을 탐내시는군요.”
CK ENM의 방송국 합병.
영화사업본부 내부에서 최고의 화제가 부산영화제라면 CK ENM 전체, 그리고
임원들 간의 최고의 화제는 방송국 합병 건이었다.
방송. ‘매스 미디어’ 그 자체.
영화나 음악과는 차원이 다른 파급력을 가진 매체다.
‘합병된 방송국의 국장을 맡는 사람이 CK ENM의 실세가 될 거다.’
모두가 예상하고 있는 일이었고, 최경준이GV를 빠르게 추진한 이유이기도 했다.
“제가 가진 카드가 마음에 드십니까?”
그리고 오늘 최경준이 경쟁 프레젠테이션을 실시한 이유였다.
앞으로 CK와 영화사업본부를 이끌어갈 인재들이 정면으로 붙는 모습을 선보이
는 것.
젊은 사장의 심장을 뛰게 하기엔 충분한 일이었다.
“늘 말하지만 선생님은 무서운 분이십니다.”
“이 바닥에서 살아남으려면 무서운 사람이 되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최경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하정엽.
하정엽이 오늘의 발표에 대한 소감을 말하기 시작한다.
“최윤일. 아버지가 눈여겨 보는 사람이죠. 매력적입니다.”
명문가 출신에 외국 유학파인 최대리. CK 그룹 회장이 직접 차기 임원으로 점
찍은 사람이었다.
“제가 알기론 본부장님의 사람이 아니라고 들었습니다.”
“예, 아쉬울 뿐입니다.”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는 최경준.
“유한성. 본부장님이 직접 미국에서 데려온 사람이죠. 그럴 가치가 있습니다.”
고전영화 팀장 유한성. 37살의 젊은 나이로, 한록이 나타나기 전까지 최연소
차장이었던 사람이었다.
“김창준도 좋았습니다. 유한성이 키운 사람이죠.”
유한성의 후배 김창준. 이번 알렉산드로 감독 섭외에서 큰 역할을 했다.
“그리고 오수창.”
하정엽의 입에서 오과장의 이름이 나온다.
“대단한 사람이었죠.”
한국영화를 이만큼 키워온게 누구냐고 묻는다면. 영화업계 사람들은 아마도
CK의 회장과 최경준을 꼽을 것이다.
그리고 그 얘기가 오갈 때 빠지지 않는 이름, 오수창.
그도 한때는 한국 영화계를 밑바닥부터 키워온 인물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물러날 때가 왔습니다.”
하정엽의 날카로운 말.
오수창의 과거가 어땠든, 그가 한국 영화에 어떤 공헌을 했든, CK ENM에서 어
떤 활약을 했든.
“더 뛰어난 사람들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의 쓸모는 여기까지다.
하정엽은 한록을 떠올렸다. 그리고, 그 옆의 유선까지.
대리, 사원. 고작 서른이 된 신참들이다.
그러나 그들을 보면 느껴지는 게 있었다.
“본부장님. 지금까지 한국 영화는 본부장님과 아버지가 만들어 오셨습니다.”
CK 회장과 최경준이 만들어온 한국 영화계.
그 판에...
“이제는 시대가 바뀌고 있습니다.”
새로운 사람들이 등장하고 있었다.
*
그날 밤, 호텔 주위의 카페.
단 일주일 남은 영화제 때문에 tf팀 사이에서는 살벌한 기류가 불고 있었다.
호텔 회의실과 로비, 근처 카페는 모두 ck 직원들로 들어찼다.
그리고 그 열기는 gv팀 역시 마찬가지였다.
카페 스터디룸 하나를 빌려 밤새 회의를 하는 gv팀.
저녁도, 야식도 그 자리에서 해결하며 1초도 쉬지 않는 중이었다.
“지붕이 이 정도면 될까? 햇빛 때문에 초반부가 잘 안 보일 것 같은데.”
“야외 상영이니 어쩔 수 없는 문제예요. 감수해야죠. 가림막도 있으니 아예
보기 어려울 정도는 아닐 거예요.”
“알렉산드로 감독 자리는 어떻게 잡죠?”
“한줄마다 한 자리씩을 비워놔요. 그리고 원하는 곳에 앉으라고 하면 됩니다.”
-똑똑.
모두가 열을 올리고 있을 때 스터디룸의 문을 두드리는 누군가.
“누구세요?”
예민해진 하대리가 날카롭게 질문했다.
그리고 그 질문에도 기죽지 않고 스터디룸의 문을 연 사람은-
“접니다. 최대리요.”
역시나 최대리였다.
*
“무슨 일이야?”
“이대리님 좀 빌려가고 싶어서요.”
“최대리, 우리 바빠. 나중에 해.”
현과장이 답지 않게 단호하게 말했다. 그만큼 gv팀은 최고로 집중한 상황이었다.
현과장의 거절에도 최대리는 늘 그렇듯 생글생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최대리도 마찬가지로 피곤한 얼굴이었지만, 이 곳에 있는 사람 중 유일하게
웃는 얼굴이다.
참 대단한 인간이란 생각이 들 정도였다.
“꼭 해야하는 말이 있어서 그렇습니다. 10분이면 돼요.”
“하...최대리. 바쁘다니까.”
이마를 짚는 현과장. 그러더니 한록을 바라본다.
‘이 놈 처리한다?’
라는 눈빛.
언제나 일이 최우선일뿐더러, 최대리를 좋아하지도 않는 한록이 당연히 거절
하리라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오늘 한록은 다른 곳을 보고 있었다.
바로 문고리를 잡고 있는 최대리의 손에서 뻗어나온 실이었다.
‘당연히 쫓아내야 한다.’
이 능력이 없을 때의 한록이라면 현과장의 예상처럼 최대리를 쫓아냈을 것이다.
그러나 한록은 이 실이 의미하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한록의 주위에서 나풀나풀 움직이는 최대리의 실. 그게 뜻하는 것은-
‘최대리는 나의 적이 아니다.’
최대리가 한록에게 최소한 호의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건 뭐지?’
한록은 고민에 빠지기 시작했다.
한록의 어깨 주위를 맴돌고 있는 최대리의 실.
-이번엔 진짜로 멋있네요.
오늘 최대리의 말.
“이대리님. 그러지말고 시간 한번 내주세요.”
평소와 같이 능글맞은, 그러나 어딘가 진지한 최대리.
‘뭔가 있다.’
결정을 내린 한록이 자리에서 일어나 말했다.
“갑시다, 최대리님.”
*
최대리와 함께 밖으로 나온 한록.
최대리가 한록에게 사람 좋게 물었다.
“나 담배 안 가져왔는데. 한 대만 빌려줄래요?”
한록이 담배를 내밀자, 최대리가 갑자기 손을 젓는다.
“저 던힐은 안 펴요. 됐어요.”
그러더니 자신의 담배를 꺼내는 최대리.
‘대체 뭐하는 놈이지?’
어이가 없어진 한록. 최대리가 담배를 피며 한록에게 물었다.
“이대리님. 이대리님은 명품 같은거 좋아해요?”
“관심 없습니다.”
“저는 좋아해요. 시계나 넥타이도 관심 많고요. 그래서 남의 옷차림도 많이
보는 편이에요. 이대리님은 잘 입고 다니시는 편이죠.”
“최대리님. 용건을 말하세요.”
한록이 묻자, 최대리가 할 수 없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이대리님은 부산에 온지 얼마 안 되셔서 모르실 것 같아서요.”
“뭘 말입니까?”
“한달 전에 오차장님 시계 바뀌었어요. 비싼 걸로요.”
시계.
환금성이 좋다보니 뇌물로 자주 애용되는 종목이다.
‘오차장의 시계가 뇌물의 증거다.’
최대리는 그 사실을 한록에게 알려준 것이다.
그 순간 한록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생각 하나.
한록이 최대리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당신 어디까지 알고 있습니까. 아니.”
“당신 대체 누구 편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