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크호스라고 해야하나(3)
*
경쟁 프레젠테이션 당일, 아침 9시의 ck 부산 지사.
그 곳엔 침묵만이 감돌았다.
“대리님, 발표 마지막 부분 말인데요...”
한록과 로비를 걷던 유선이 무언가를 보고 숨을 멈춘다.
눈 앞의 남자. 자신의 팀과 걸어가는 중인 오과장 때문이었다.
오과장이 한록을 바라보았고, 둘의 시선이 마주쳤다.
“이한록.”
오과장의 부름에 한록이 오과장을 노려보다가 입을 연다.
“네, 유선씨. 유선씨 하고 싶은대로 하면 돼요.”
그렇게 말하며 오과장을 스쳐지나가는 한록.
오과장은 눈에 보이지도 않는다는 태도였다.
“대리님...이래도 괜찮은 거예요?”
“괜찮아요. 신경쓰지 마세요.”
한록은 잔뜩 긴장한 얼굴의 유선에게 속삭이고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엘리베이터에 함께 탄 오과장, 한록과 유선, 그리고 TF팀들.
엘리베이터에서는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
회의실에 도착하니, U자형 긴 테이블이 회의실 앞부분에 있었고 그 뒤 빈공간
에 의자들이 놓여있었다.
“일찍 오셨네요, 이대리님, 유선씨.”
그 의자 맨 앞에 앉아있는 최대리가 한록을 향해 손을 흔든다.
‘벌써 피곤하군...’
한록은 최대한 최대리에게서 멀리 떨어진 곳에 앉았고, 유선이 곁에 앉았다.
하나 둘 도착해 자리를 채워가는 사람들.
부산영화제 10개 팀의 팀장들.
모두 영화 사업본부 최고의 엘리트들이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한마디도 하지 않고 인쇄한 대본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사장님 오십니다.”
그 말에 모두가 몸을 일으켰다.
회의실로 입장하는 하정엽. 그 뒤의 최경준과, 영화 사업본부의 임원들.
그들이 U자형 테이블에 자리를 채워 앉는다.
“발표 시작합시다. GV팀.”
그리고 상무의 지시로 미리 지정된 순서대로 발표를 하려는 순간-
“아뇨, 순서 바꿉니다.”
하정엽이 말했다.
“해외 영화팀부터 시작합니다.”
갑작스러운 순서 교체.
“대리님, 저희가 처음 아니었어요?”
유선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지만 한록은 차분하게 답했다.
“사장님이 생각이 있으신가봐요. 괜찮아요. 뒷순서가 더 좋아요.”
“순서는 지금부터 제가 지정하겠습니다. 또한, 발표 후 각 팀 팀장들도 자유
롭게 질문하세요.”
하정엽의 말과 갑작스럽게 순서가 바뀐 프레젠테이션. 그 첫 타자는-
“안녕하십니까, 마케팅부서 최윤일 대리입니다.”
바로 최대리였다.
각 프로그램의 팀장이 발표를 하러 온 상황에서, 한록과 더불어 유일하게 대
리인 최대리.
그가 이 프로그램의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걸 도맡았음을 의미했다.
“발표에 앞서, 질문드릴게 있습니다. 혹시 잠시 영어로 발표를 진행해도 되겠
습니까?”
영어란 말에 술렁거리는 임원들.
한록이 어리둥절한 유선에게 속삭였다.
“알렉산드로 로게즈가 오면 담당자와 소통할 일이 필요할 수 있으니까요. 본
인은 그게 가능하단걸 어필하는 거예요.”
“그치만...다른 분들이 이해하실까요?”
“그건 상관없어요. 결정을 내리는 건 사장님이고, 이 발표는 사장님 마음에만
들면 되는거예요.”
발표의 핵심을 정확히 파악한 최대리.
그 말에 유선이 충격받은 얼굴로 최대리를 바라보았다.
최대리는 여전히 자신만만한 미소를 짓고 잇었다. 그리고-
“해보세요.”
하정엽의 답.
<감사합니다. 가장 먼저, 현재 부산 영화제에서 저희 <해외 영화선>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설명 드리겠습니다.>
유학파인 최대리의 유창한 영어가 이어진다.
‘이 프로그램을 맡은 나는 이런 사람이다.’
‘이 프로그램이 어떤 프로그램인지, 이 영화제가 어떤 영화제인지, 나는 알렉
산드로에게 지금과 똑같이 설명할 수 있다.’
‘여기서 누가 그걸 할 수 있는가.’
‘나뿐이다.’
그걸 정면으로 보여주는 발표.
아이템보다는 인물에 치중하는 전형적인 스타 마케팅이었다.
주의 깊게 최대리의 발표를 듣는 하정엽.
‘그래. 괜히 스타가 아니지.’
한록이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최대리는 정말 짜증나는 인간이지만, 화려한 마케팅에는 따라올 자가 없는 사
람이었다.
“이제부터는 한국어로 진행하겠습니다.”
영어 발표를 마친 최대리의 말에 하정엽이 답했다.
“아니, 계속 영어로 진행하세요.”
그 순간 최대리가 한록을 바라보고 미소를 지었다.
*
최대리의 발표가 끝나고 이어진 순서는 이벤트 팀의 발표.
그 뒤로도 계속 발표가 이어졌다.
어느새 남은 것은 오과장의 단편선과 한록의 GV뿐.
“GV팀은 가장 마지막으로 진행합니다. 단편선 발표 진행하세요.”
하정엽이 대체 어떤 의도를 가지고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한록의 순서는 결국
맨 마지막으로 밀려버렸다.
“발표 시작하겠습니다.”
회의실 앞으로 나와 고개를 숙이는 오과장.
최경준이 서늘한 시선으로 오과장을 바라보았지만, 오과장은 잠깐 목례를 하
더니 곧장 발표를 시작했다.
“단편선에서는 총 72개의 영화가 상영됩니다. 그 중 알렉산드로 로게즈 감독
이 관람할 영화는 두개입니다.”
“첫 번째는 1년 전 스웨덴의 축제를 배경으로 한 공포영화로 유명해진 감독의
단편입니다. <뮌 하우젠 증후군>. 단편선을 위해 사전 설문조사를 했을 때 국
내 62%의 관객, 해외 95%의 관객이 이 영화를 보겠다고 응답하였습니다.”
“두번째는 한국 공포 영화감독의 졸업작품인 <최고의 잉어 요리>입니다. 사전
설문조사 결과 국내 80%, 해외 83%의 관객이 이 영화를 보고 싶다고 응답했습
니다.”
잔인한 B급 영화를 주로 제작하는 알렉산드로 제롬 로게즈 감독의 취향에 맞
춘 공포 영화들.
그중에서도 세계적으로 유명한 감독만 골랐다. 거기에 자세한 데이터까지.
‘이 역시 오과장의 스타일이다.’
오과장의 프로그램과 발표는 획기적이진 않지만, 항상 확실한 성공을 보장하
는 전형적인 대기업 스타일이었다.
역시나, 임원들 대다수가 미소를 지으며 오과장의 발표를 지켜본다.
“이상 발표 마치겠습니다.”
오과장의 발표가 끝나고, 잠깐 박수소리가 들린다.
임원들이 상당히 만족했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최경준은...
“수고했습니다.”
오과장을 보며 짧게 말했다.
임원들의 긍정적인 반응. 그리고 최경준의 격려.
확실히, 지금까지 중 가장 반응이 좋은 발표였다.
박수를 받고 돌아오며 오과장이 한록을 바라보았다.
‘자.’
‘날 이겨봐라.’
말 한마디 하지 않아도 느껴지는 생각.
한록의 발표를 제외하고 모든 발표가 끝난 상황.
TF팀. 최대리. 오과장.
영화사업본부 최고의 엘리트들이 자신의 무기로 프레젠테이션에 참여했고, 모
두에게 선전포고를 했다.
‘나는 이런 사람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을 가져왔다.’
‘그러니 날 이겨봐라.’
그리고 마지막.
“마지막으로 GV팀 진행합니다.”
하정엽의 말과 함께, 한록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
“안녕하십니까, 마케팅부 이한록 대리입니다.”
회의실 앞에 나가 인사를 하는 한록. 그리고 구석의 단상에 선 유선.
그들의 모습을 본 최경준은 생각했다.
‘이한록. 이번엔 쉽지 않을 거다.’
발표만으로 프로그램을 전부 표현하는건 불가능하다. 당연한 사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최대리는 자기 자신을 어필했고, 오과장은 유명한 감독들의 작
품이니 사람들이 좋아할 거란 사실을 어필했다.
한국에서 손 꼽히는 마케터들이 가져온 전략.
‘그럼 네 무기는 뭘까. 고작 삼일의 삶?’
신인 감독의 소박한 영화 삼일의 삶.
그걸 가지고 한록이 대체 어떤 프레젠테이션을 만들어왔을까.
최경준은 한록의 지난번 프레젠테이션을 떠올렸다.
-이 부분, 생략하겠습니다.
ck 임원들을 상대로 한 기선제압. 그건 아주 훌륭하게 먹혀들었다.
‘하지만 사장님은 이미 그 프레젠테이션을 보셨지. 똑같은 방법은 통하지 않
을 거야.’
압도적인 기선제압. 반박이 불가능할 정도로 찍어누르는 논리.
최경준과 하정엽은 이미 한록의 프레젠테이션을 본 상황이니, 한록의 전략이
그때처럼 잘 통하지 않을 것이란 건 기정사실이었다.
“발표 시작하겠습니다. 첫 페이지, gv 프로그램의 필요성에 대한 페이지입니다.”
이전과 달리 평범하게 발표를 시작하는 한록.
‘기선제압은 포기한 건가?’
최경준은 의외의 모습에 눈을 찌푸렸다. 의외인 건 하정엽 역시 마찬가지인
듯 했다.
턱을 괴고 한록을 바라보는 하정엽. 확실히 예전과는 다르게 발표에 집중이
되지 않는 듯한 표정이었다.
‘이한록. 대체 뭘 해 온 거냐? 고작 이거냐?’
그리고 최경준이 그렇게 생각할 때-
한록이 고개를 들었고, 최경준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무래도 이 부분, 생략하길 원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 순간 최경준은 생각했다.
‘또 당했다.’
*
발표 전 날 저녁. 호텔 근처 24시간 카페.
그곳에선 gv팀이 모두 함께 밤을 새고 있었다.
‘대리님. 저 궁금한 게 있어요.’
‘네. 말씀하세요.’
‘프레젠테이션 한 번도 진적 없다고 하셨잖아요. 대체 어떻게 하시는 거예요?’
유선의 질문에 한록이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저는 이기기 위해선 뭐든 다 하거든요.’
*
“아무래도 이 부분, 생략하길 원하시는 것 같습니다.”
마치 최경준과 하정엽의 반응을 예상이라도 한 듯한 말.
그 말에 최경준이 저도 모르게 눈을 번쩍 뜨고 한록을 바라보았다. 그건 하정
엽 역시 마찬가지.
“중요한 부분만 말씀드리겠습니다.”
한록은 이제 아예...
“화면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화면 종료하겠습니다. 유선씨, 불 켜주세요.”
화면을 끄고 불을 켠 채 말을 하기 시작했다.
어두컴컴하던 회의실이 갑자기 환해진다. 거기에 마이크를 잡고 회의실 중앙
으로 나오는 한록.
눈이 부실정도로 번쩍이는 조명들. ppt화면 하나도 없이, 오로지 자신 하나만
믿고 진행되는 발표.
갑작스럽게 바뀐 환경에 임원들이 저도 모르게 늘어진 몸을 일으킨다.
앞선 11개 팀의 발표에 지쳐있던 임원들은 어느새 한록의 행동을 눈으로 쫓고
있었다.
‘이한록. 사람을 이런 식으로 가지고 노는구나.’
최경준이 짜릿한 쾌감에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지었다. 그때 한록과 최경준의
눈이 마주쳤다.
최경준을 보고 씩 미소를 짓는 한록.
“알렉산드로 로게즈 감독의 방문에 가장 중요한 것은 프로그램의 퀄리티도,
영화의 유명세도 아닙니다.”
“그럼 가장 중요한건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본부장님,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본부장을 대놓고 지목하는 질문.
다들 놀라 숨을 들이켰지만 한록은 당당했다. 그리고 최경준은 헛웃음을 지으
며 답했다.
“뭔가?”
“저는 알렉산드로 로게즈 감독이 과연 그 프로그램을 ‘좋아할지’가 가장 중요
한 점이라고 생각합니다. 본부장님도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그렇게 생각하네.”
아예 최경준과 대화하듯이 프레젠테이션을 진행하는 한록.
‘사람들은 프레젠테이션을 잘하려고만 하죠. 그저 외워 온 대본을 완벽히 말
하는거 말이에요.’
‘저는 다른 걸 생각해요. 제 발표 순서가 어딘지. 프레젠테이션을 보는 사람
과 제가 어떤 관계인지. 어떻게 사람들의 집중을 끌어올 수 있는지.’
‘지금 이 순간 뭘 해야 사람들이 내 말을 들을지를 생각해요.’
이미 한록의 발표를 지켜본 최경준과 하정엽. 한록과 나름의 친분이 있는 최
경준. 긴 발표에 지친 임원들.
그 모든 상황을 고려한 발표.
‘그러면 질 수가 없죠.’
한록이 언제나 프레젠테이션에서 승리하는 이유였다.
“네, 중요한 건 ‘알렉산드로 로게즈가 이 프로그램을 좋아할까’입니다. 이 외
에 다른 내용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내가 준비한 것 외에 다른 내용은 아무 의미 없다.’
앞선 11팀의 발표를 순식간에 무력화시키는 말이다.
“다른 팀에게 질문을 드려도 되겠습니까?”
한록의 거침없는 말.
그 말에 하정엽이 무표정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해외 영화팀, 발표 잘 봤습니다. 질문 드리고 싶은 내용이 있습니다.”
재밌다는 듯 한록의 발표를 지켜보던 최대리. 최대리가 경계하며 한록을 바라
보았다.
“알렉산드로 로게즈가 해외 영화를 좋아할거란 근거가 있으십니까?”
“네, 물론입니다. 알렉산드로 로게즈 감독이 이런 인터뷰를 했죠. ‘나는 영미
권이 아닌 다른 나라 영화에 더 관심이 많다.’”
한록의 갑작스러운 질문에도 미소를 지으며 답하는 최대리.
그러나 한록의 질문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그 인터뷰 뒷부분은 이런 내용이었죠. ‘그러나 내가 관심있는 건 그 나라의
삶을 보여주는 내용이지, 종교나 전통에 대한 내용이 아니다.’”
삽시간에 최대리의 얼굴이 굳는다.
“그리고 애니메이션팀.”
한록의 시선이 자신을 향하자 소스라치게 놀라는 애니메이션팀 팀장.
“‘수산시장.’ 저도 재밌게 본 영화입니다. 좋은 영화를 선택하신 것 같습니다.”
“...그래서요?”
“알렉산드로 감독 역시 이 영화를 좋아합니다. ‘인간사회를 생선에 비유한 한
국 작품. 한국 영화 중에서는 나쁘지 않았다.’ 알렉산드로 로게즈 감독의 블
로그에 올라온 평가입니다.”
한록이 잠깐 말을 멈추더니 강조의 말을 한다.
“이미 봤단 뜻입니다.”
애니메이션팀 팀장이 이를 악물고 신음을 흘렸다. 시간이 너무 촉박하다보니
미처 알렉산드로 감독의 블로그까지는 확인하지 못한 것이다.
‘유선씨. 경쟁 프레젠테이션과 그냥 프레젠테이션의 차이가 뭔지 알아요?’
‘뭔데요?’
‘경쟁 프레젠테이션은 저만 잘하면 되는게 아니에요. 다른 팀보다 더 잘해야
하는 거예요.’
‘어, 그러면...’
‘네. 다른 팀을 공격해야해요.’
‘아주 박살이 날 정도로.’
작정이라도 한 듯이 다른팀에게 질문을 던지는 한록.
“이벤트 팀장님.”
“고전 영화 팀장님.”
“한국 영화 팀장님.”
그리고 한록의 호명에 몸을 움찔하는 팀장들.
“고전 영화. 알렉산드로 감독이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13인의 성난 사람들’
외에 고전 영화는 다 쓰레기다.’”
“지난 칸 영화제 초청작이군요. 알렉산드로 감독은 칸 영화제 심사위원이었죠.”
“이 영화의 감독과 알렉산드로 감독이 최근 시나리오 문제로 다툰 것 알고 계
십니까?”
한록의 질문에 하나하나 무너지는 팀장들.
모든 질문이 끝났고, 한록은 이제 오과장을 바라보았다.
한록과 오과장의 시선이 마주쳤다. 한록은 오과장의 시선을 조금도 피하지 않
은채 입을 열었다.
“그리고, 오과장님.”
오과장이 얼음처럼 차가운 얼굴로 한록을 노려보았다.
“관객 데이터 잘 봤습니다. 아마 이번 프로그램들 중 가장 많은 관객들이 단
편선 영화를 보러 갈 것 같습니다.”
“그런데.”
부정을 강조하는 어조. 한록의 말과 함께 오과장의 손이 분노로 떨리기 시작
한다.
“그 관객 설문조사 데이터, 알렉산드로 감독과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한록의 질문.
그리고 오과장의 정적.
정적이 3초가 지난 순간, 한록이 입을 열었다.
“질문 끝내겠습니다.”
한록은 질문을 던졌고, 오과장은 대답하지 못했다.
단 3초.
그 3초 때문에 오과장은 완벽히 패배했다.
*
“그럼 지금부터 저희 프로그램에 대해 소개하겠습니다.”
한록의 말에 팀장들이 다시 한 번 고개를 번쩍 든다.
한참이나 자기들 프로그램을 비판한 이한록. 그 녀석이 이제 본인의 프로그램
을 소개하겠다고 한다.
-이한록이 무슨 말을 하든 가만두지 않겠다.
그들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알렉산드로 감독이 이런 인터뷰를 했습니다.”
구석에 서 있던 유선이 가운데로 걸어나와 말하기 시작했다.
‘이한록. 또 무슨 짓을 하려는거냐.’
유선의 등장에 눈을 찌푸리는 최경준.
그 순간 회의장의 모두는 같은 생각을 했다.
‘저걸 왜 데려온 거지?’
그건 처음 제안을 들은 유선 역시 마찬가지였다.
‘유선씨. 제가 다른 팀들 발표에 반박을 하고 나면 유선씨가 이어서 발표를
해주세요.’
‘제가요? 현과장님이 아니구요?’
‘네. 저는 이미 공격적으로 나간 후니까, 다음 파트를 맡을 사람이 필요해요.
감성적으로 나긋나긋하게 말해주세요. 그리고 최대한 문학적으로요. 그런식으
로 말할 수 있는 건 유선씨 밖에 없어요.’
‘저...저는 계약직인데...사장님 앞에서 발표를 한다구요?’
아무도, 심지어 유선조차도 유선을 믿지 않는 상황.
‘왜 이한록이 나오지 않는 거야?’
모두가 짜증이 난 표정으로 한록을 바라볼 때, 오직 한록만이 유선을 지켜보
고 있었다.
떨리는 마음으로 바닥을 바라보던 유선이 고개를 든다. 그리고 하정엽을 보며
말하기 시작한다.
“‘22살의 저는 멍청이였죠. 무작정 집을 나왔는데 갈 곳은 없었어요. 아무 마
을이나 가서 비디오 가게 취직을 했죠. 거기서 하루종일 영화만 봤어요.’”
알렉산드로의 인터뷰를 그대로 옮기는 유선.
대본 한번 보지 않고 완벽하게 모든 인터뷰를 읊는다.
“‘3년 동안 손님들한테 영화를 추천하고, 영화에 대해 토론했습니다. 가게에
들어온 영화 중 제가 안 본 영화가 없었죠.’”
“‘그러다보니 어느 날 헐리우드에서 연락이 오더라구요. 디렉터가 전화로 그
랬어요.’”
“너. 니가 그 바닷가 영화광 맞지?”
잠시 숨을 멈추고 말을 잇는 유선.
“나는 그 전화를 받은 날 바로 시골 바다 마을에서 헐리우드로 향했다.”
“바닷가에서의 3년. 그게 내 인생을 바꿨다.”
“이게 내가 바다를 사랑하는 이유이며.”
“그 3년을 잊지 못하는 이유이다.”
유선의 말에 회의장에 감도는 정적.
잠시 후, 고전영화 팀장이 겨우 입을 열었다.
“알렉산드로 로게즈 감독이 바다를 좋아하는거랑, 삼일의 삶을 봐야하는 거랑
무슨 상관입니까? 삼일의 삶을 본다고 과거에 대한 향수가 떠오른단 보장은
없습니다.”
고전영화 팀장. 영화 기획부의 차장. 유선에게는 하늘같은 상사였다.
유선이 한록을 바라보았고, 한록이 고개를 끄덕였다.
‘유선씨 하고 싶은 대로 해요.’
오늘 아침 한록의 말. 그리고...
‘왜냐면 유선씨, 내가 저번에 얘기했죠.’
‘유선씨 잘하고 있다고요.’
그 이유.
한록의 말을 떠올린 유선이 용기를 내서 말한다.
“팀장님.”
“영화가 아름다운 기억을 떠올리게 만들지 못한다면...”
“그럼 뭐가 우리를 추억하게 만들 수 있죠?”
섬세하고 아름다운, 그러나 핵심을 파고드는 말.
유선의 말에 한록이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오과장을 바라보았다.
자기 자신을 내세운 최대리. 영화의 유명세를 내세운 오과장. 그리고.
‘자.’
‘이게 내 무기다.’
‘너희가 그렇게 무시하는 사람들.’
‘그 사람들이 내 다크호스고.’
‘그 사람들이 내 팀이다.’
'너희야말로 날 이겨봐라.'
강력한 팀을 만들어 온 한록.
“...자기랑 똑같은 인간을 하나 더 만들어왔군.”
최경준이 한록을 보며 졌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