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 회사원이 선넘으면 생기는일-40화 (40/263)

오차장의 사람들(3)

이감독과의 전화를 끊은 한록.

한록은 담배를 피며 생각을 정리했다.

‘지금 당장 감사실에 찌르는 건 시기상조야.’

오차장의 녹음을 얻긴 했지만, 아직 오차장이 행동하기 전이다.

‘실제로 실행할 생각은 없었다’라고 말하면 끝.

‘상황을 키워야 한다. 실제로 계약에 문제가 생기고, 상부에서도 이를 알 정

도여야 해. 그래야 파급력이 커져.’

그렇다면 답은 기다리는 것이다.

한록은 유대리가 보내준 파일을 다시 들었다.

‘이한록을 두고 볼 생각은 없다.’

오차장의 말.

그건 한록 역시 마찬가지였다.

‘발뺌할 수 없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잡는다’

때가 다가오고 있었다.

*

그로부터 일주일 후, 부산.

한록과 현과장은 GV무대 설치를 위해 부산으로 출장을 갔다.

해운대 해수욕장에 도착한 그들을 반긴 것은...

“이대리님. 현과장님!”

사람 좋은 얼굴로 웃고 있는 남자.

해외 명문대 출신. 헐리웃에서 일한 경력도 있는 엄청난 스펙의 마케팅부 스

타, 최대리였다.

“최대리, 귀국하고 바로 부산으로 온거야?”

“네. 아직 집에도 못 들어갔어요.”

현과장의 말에 웃는 최대리.

CK 내부에는 부산영화제 TF팀이 설립되었고, TF팀은 대부분 해외출장과 부산

에서 근무를 하는 중이었다.

“못보던 사이에 더 잘생겨졌네. 미국물이 좋긴 한가봐.”

“현과장님도 얼굴이 훤해지셨습니다.”

현과장과 인사를 하던 최대리가 한록을 바라본다.

“이대리님도 오랜만입니다. 삼일의 삶이랑 지구특공대 한국 오자마자 봤습니다.”

“네, 오랜만입니다. 감사합니다.”

최대리의 말에 그저 짧게 대답할 뿐인 한록.

“이대리님은 변한게 없으시네요. 자, 이쪽으로 오세요.”

한록의 무뚝뚝한 대답에도 최대리는 그저 웃을뿐이었다.

“여기에 무대가 들어올 겁니다. 입구로부터 좀 멀어서 관객이 뜸할 수도 있어

요. 그래서 중간중간 팻말을 세워둘 예정입니다.”

“어우, 고마워라. 최대리가 생각한거지?”

“그럼요. 두분이 하시는 거잖아요. 저도 최고로 도와드려야죠.”

얘기를 주고받는 현과장과 최대리.

한편 한록은 눈앞의 해수욕장에 세워질 무대를 생각하고 있었다.

‘무대는 바다를 옆으로 바라보는 방향으로 세우고, 앞에는 신발주머니 부스를

만들고. 그리고...’

여러 생각을 하며 해수욕장을 둘러보던 한록의 머릿속에 장면이 하나 스쳐지

나간다.

삼일의 삶의 명장면 중 하나.

바다 위에서 노을이 지는 하늘을 배경으로 시를 읊는 어부의 모습.

‘그 씬이 나올 때 쯤에 하늘에도 노을이 지면 좋을텐데.’

자신이 영화에 나오는 장면과 똑같은 시간, 그리고 공간 안에 산다는 것.

이건 관객이 영화에 완벽하게 몰입할 수 있는 장치가 될 것이다.

한록이 최대리에게 물었다.

“최대리님. 부산은 몇시쯤 해가 지나요?”

“음, 한 8시 정도요.”

“그러면 시간이 안 맞는데...”

삼일의 삶이 상영되는 시간은 밤9시다. 생각에 잠겨 혼잣말을 하는 한록.

“뭐야, 이대리. 뭔데?”

“이대리님. 일몰 시간에 맞추고 싶으신 거죠?”

어리둥절한 현과장과 달리, 최대리가 바로 한록의 생각을 읽고 말했다.

“네. 바다낚시 장면과 노을이 지는 시간이 겹치면 좋을 것 같아서요. 그런데

상영시간을 저녁으로 잡아놔서 어려울 것 같네요.”

“괜찮아요. 앞에 프로그램 없으니까 7시까지는 옮길 수 있어요. 몇시로 바꾸

려고 하시는데요?”

“7시 반 정도면 될 것 같습니다.”

“제가 문의해볼게요.”

그리고 바로 TF팀에 전화를 거는 최대리.

잠시 후, 최대리가 한록에게 OK사인을 보냈다.

“가능하다고 하네요.”

바다를 보자마자 바로 아이디어를 낸 한록. 그리고 한록의 의도를 바로 알아

차리고, 일사천리로 일을 처리한 최대리.

둘의 솜씨에 현과장이 감탄을 뱉었다.

“와, 진짜. 엘리트끼리 모이니 뭐가 달라도 한참 다르네.”

“감사합니다, 과장님. 제가 본사에도 연락하겠습니다.”

“아니야, 아니야. 우리 엘리트 둘이 열심히 일했는데 이런건 내가 해야지. 내

가 전화하고 올게.”

그렇게 말하며 자리를 비운 현과장.

둘만 남은 최대리와 한록 사이에 어색함이 감돈다.

“이대리님.”

그때 최대리가 한록에게 말을 걸었다.

“노을 지는 바다를 배경으로 삼일의 삶이라. 진짜 보고싶네요. 역시 이대리님

이라니까.”

“감사합니다, 최대리님.”

그러나 한록은 약간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한록과 최대리는 같은 팀이었지만 거의 모르는 사이나 다름 없는 관계였다.

뛰어난 스펙과 성과로 차기 임원으로 점찍힌 최대리.

그러나 이 시기의 최대리는 전부서를 돌며 순환 근무중이었다. 나중에 임원이

될 때를 대비하기 위한 회사 차원의 트레이닝.

거기에 한록은 마침 구과장을 때려서 회계부로 발령이 난 상황.

회귀 전, 둘은 마주칠 기회가 많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둘의 사이가 어색한 이유는 무엇보다...

‘나는 이 사람이 싫다.’

한록이 최대리를 싫어하기 때문이었다.

CK에서도 손 꼽히는 스펙의 엘리트. 헐리웃에서 일한 경력. 거기에 해외에서

배우도 했었다는 잘생긴 외모.

최대리는 회사에서 한록만큼이나 유명한 사람이었다.

“이대리님. 오차장님이랑 붙었다면서요?”

그리고 동시에 속을 알 수 없는 사람이기도 했다.

한록을 보며 웃고 있는 최대리. 그 미소 뒤에 숨은 야망.

“...”

최대리가 오차장의 사람인지, 아닌지는 모른다. 애초에 최대리는 오차장 정도

의 라인에서 만족할 사람이 아니니까.

한록은 대답 대신 고개를 돌렸다.

한록이 답이 없자 최대리가 다시 말했다.

“이대리님, 제가 미국에 있는 사이 재밌는 일을 많이 하셨더라구요. 다른것보

다 현과장님이 저렇게 일을 하시는게 가장 신기하네요.”

한록이 최대리를 싫어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

“현과장님은 회사 여유있게 다니는 분이시잖아요.”

완벽한 미소 뒤에 숨은 사람을 깔보는 거만함.

회귀 전, 담배를 피다가 최대리를 마주친 적이 있었다.

그때 현과장에 대한 얘기가 나왔었고 한록은 이렇게 말했다.

‘존경할 만한 분이시죠.’

그리고 최대리의 대답은...

‘그래요?’

현과장을 향한 비웃음.

그 일 이후로 한록은 최대리에게 거리를 뒀다.

“이대리님이 대단하시긴 하네요. 그 현과장님을 바꿔놓으시고.”

최대리는 여전히 똑같았다. 만년과장인 현과장을 무시하는 발언.

“최대리님.”

최대리의 말을 듣던 한록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그리고 회귀 전과 똑같은 말

을 했다.

“네.”

“그 말 현과장님 앞에서도 하실 수 있습니까?”

그 말에 눈을 크게 뜨는 최대리.

“본사에서도 오케이!”

그때, 저 멀리서 현과장이 소리를 치며 걸어왔다.

뭐라 말하려던 최대리가 그저 미소를 짓더니 한록에게 말했다.

“오차장님이 왜 이대리님을 싫어하는지 이제 알겠네요.”

그리고 한록의 대답.

“알면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그 말에 최대리가 졌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

그 날 저녁, 부산의 한 술집.

한록과 현과장이 함께 술을 마시고 있었다.

“크으. 우리 마케팅부 천재 이대리님이랑 단 둘이 술을 먹다니. 자랑하고 다

녀야겠다.”

“누구한테요?”

“우리 딸한테.”

“상대가 잘못 된 것 같은데요.”

“아냐, 은서도 이대리 알아. 잘생긴 오빠라고 좋아해.”

“언제 한 번 댁으로 인사드리러 가겠습니다.”

“좋지. 아니, 안돼. 아니, 되는데 너무 잘생기게 하고 오지마. 나랑 너무 비

교되잖아.”

“최고로 멋지게 하고 가겠습니다.”

“이대리이!”

현과장의 말에 웃음을 짓는 한록.

현과장과의 대화는 언제나 즐거웠다.

자신을 믿어주고 도와주는 든든한 존재.

어릴 적 아버지를 잃은 한록에게 현과장은 각별한 사람이었다.

‘고발이 실패해도 절대로 현과장님과 팀원들한테는 피해가 가지 않도록 할 거

야. 내 선에서 다 끝내야해.’

고발 당사자도 리스크가 큰 내부고발.

한록은 자신을 믿어준 팀원들만은 지킬 생각이었다.

한록의 진지한 표정을 바라보던 현과장이 입을 열었다.

“이대리. 너무 혼자 다 짊어지려고 하지마.”

“...현과장님.”

“어차피 우리 다 동의한거잖아. 근데 왜 이대리가 혼자 그러고 있어.”

본격적으로 오차장의 뒤를 밟기 전, 한록은 미리 팀원들에게 이 일에 대해 얘

기했다.

그리고 놀랍게도 모두는 한록의 방식에 동의했다.

“제가 제안한 거라 거절하지 못한 걸까 봐 걱정입니다.”

“그보다는 나도, 하대리도, 유선씨도 다 느끼고 있던거지. 오차장이 이런 인

간이다. 이 인간을 막으려면 이 정도는 해야 한다.”

“...그러면 다행입니다.”

“음, 뭐 이대리 때문이 아니라고 말할 수는 없긴 하겠다.”

현과장의 말.

“다른 사람도 아니고 이한록이잖아. 반드시 성공하겠지.”

“네, 그래야죠.”

“그리고...”

“네.”

“이대리가 하는 일이잖아. 맞는 말이고, 꼭 해야하는 일들인데 아무도 안 하

는 거.”

“다들 이 생각할걸. 이한록이 하는 일이 틀린 일은 아닐거라고.”

과거 한록이 들었던 말들.

‘이대리. 그만 좀 해. 원래 다 이렇게 하는거야.’

‘적당히 못 넘어가? 이대리만 트집 잡잖아.’

‘사회생활 그렇게 할 거야?’

현과장은 그 말들이 한록의 잘못이 아니라고 말해주고 있었다.

“과장님, 감사합니다. 과장님은 정말 존경할만한 분입니다.”

한록은 오늘 최대리와의 대화를 생각하며 말했다.

그러자 현과장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대리...”

“네.”

“술이 약하구나?”

그 말에 피식 미소를 짓는 한록.

“아닙니다. 진심이에요.”

“어...아...어....”

쑥쓰러운지 머리를 긁적이는 현과장. 현과장이 한참 후 말했다.

“이대리한테 그런 말 들으니까 좀 민망하네. 진짜 멋있는 사람은 이대리인데.”

“아닙니다.”

“아니긴 뭐가 아냐. 세상 사람들 다 그렇게 생각할 걸.”

“일 잘하고, 돈 잘 벌고, 그렇다고 다 멋있는 사람은 아니죠.”

“이대리는 일도 잘하고, 돈도 잘 벌고, 책임감도 있고, 양심적이잖아. 그럼

멋있지.”

“...이런 기분이군요.”

“이제 알겠어?”

눈앞에서 칭찬을 듣는 기분. 머쓱해진 한록이 술을 마시자 현과장이 웃는다.

“그래도 진심이야. 이대리 멋진 상사고, 멋진 동료고, 멋진 후배지. 멋있다,

이대리.”

진심으로 말하는 현과장.

그에게 한록은 정말 멋진 사람이었고, 한록처럼 되고 싶다는 생각 또한 여전

했다.

그런 사람에게 도움이 되고 싶은데 한록 혼자 대부분의 일을 처리하는게 미안

할 뿐이다.

“이번 일은 도움이 많이 못 돼서 미안해.”

“아닙니다. 다들 많이 도와주셨어요. 저 혼자였으면 못했을 겁니다.”

업체들과의 친분을 활용해 정보를 가져온 현과장. 함께 오차장의 자료를 분석

한 하대리. 회사의 소문을 모아온 유선.

모두가 있었기에 이만큼 일을 끌고 올 수 있던 것이다.

그러나 현과장은 여전히 마음이 편치 않은 듯 했다.

“이대리. 만약에, 내 도움이 필요한 일이 생기면...그런 일이 없어야 하지

만...그때는 꼭 최선을 다해 도울게.”

현과장의 진지한 말에 한록이 분위기를 풀기 위해 장난스레 답한다.

“네, 나중에 제가 뇌물을 받더라도 제 편을 들어주셔야 합니다.”

“당연하지.”

“정말요?”

장난스러운 한록과 달리 진지한 현과장.

“응. 이대리가 그런 거면 무슨 일이 있었겠지. 나도, 우리팀도 전부 이대리

편 들거야. 약속해.”

더 이상 든든할 수가 없는 현과장의 말.

한록은 조용히 미소를 지으며 다시 술잔을 들었다.

‘절대 그럴 일은 없지만, 만약에 고발이 실패한다면...’

‘그래도 두렵지 않다.’

이렇게 든든한 팀이 옆에 있으니까.

*

다음날. 회사로 출근한 한록과 현과장.

도착하자마자 정부장이 현과장에게 다가간다.

정부장의 차가운 얼굴을 보니 대충 감이 잡힌다.

‘일이 시작되는 구나.’

“현과장. 계약 제대로 한 거 맞아?”

“예?”

“k필름에서 전화했어. 식물 제작사. 상영관 배정에 대해서 얘기 못 들었단다.”

“예? 그럴리가요.”

어리둥절한 얼굴의 현과장.

한록이 최대한 아무 티를 내지말라고 부탁한 것 때문이었다.

책상 반대쪽에선 오차장이 현과장을 지켜보고 있었다.

모두 본인이 벌인 일이면서, 소름끼치게 무표정한 표정이다.

“현과장. 내가 계약 깨끗한 걸로 가져오라 했을텐데?”

“부장님, k필름과 컨택은 제가 했습니다. 제가 연락드리겠습니다.”

그때 한록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록의 말에 살짝 가라앉은 정부장이 고개를 끄덕인다. 한록이 실수를 하리라

곤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과장님, 감사합니다.’

한록은 현과장에게 인사를 하고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자료를 연 뒤 k필름에

전화를 걸었다.

“안녕하세요, ck 이한록 대리입니다. 계약 문제 때문에 전화드렸습니다.”

[아, 이대리님. 안그래도 전화 드리려 했습니다. 이건 얘기가 다르지 않습니까.]

천연덕스럽게 말하는 k필름의 대표.

‘...뻔뻔하게 구는군. 오차장 마음에만 들면 된다 이건가.’

과거 k필름은 식물을 영화제에서 빼라는 오차장의 지시를 따랐고, 이후 영화

편성과 마케팅에서 큰 특혜를 받았다.

신인 감독의 단편 하나를 제물로 바쳐서, 앞으로 만들 영화 전부에 특혜를 받

는다.

k필름에게 이득이 가는 거래임은 분명했다.

피해를 보는 것은 현과장, 그리고 식물 감독. 오로지 두 사람.

효율적인 만큼 선량한 사람만 피해를 보는 거래다.

“대표님. 영화제 이후 상영권은 ck가 독점한다고 설명 드렸습니다. 계약서에

도 써 있고요.”

[그 말씀만 하셨잖아요. 일반관이 아니라 아트씨네에서만 개봉한다고 말씀하

셨으면 계약 안했죠. 거기 관객이 몇이나 들어온다구요.]

일부러 계약서에 없는 부분을 지적하는 k필름의 대표.

“상영관은 같이 보내드린 자료에 명시되어 있습니다. 이후 확대될 수 있다고

도 설명 드렸습니다.”

[저희는 받은 적이 없는데요? 뭐 착각하시는거 아닙니까?]

뻔뻔하기 그지 없는 발뺌.

“보내드렸습니다. 받으시지 못했으면 k필름 쪽의 문제겠죠.”

[대리님. 본인 잘못이면서 너무 강압적인거 아닙니까? 왜 이렇게 나오십니까?

대리님 성격 강하신건 알지만, 본인 잘못에도 이런식으로 나오시면 같이 일

못합니다.]

일부러 한록을 건드리는 k필름의 대표.

“이한록. 일단 끊고 나랑 얘기해.”

얘기가 길어지는 것을 보고 다가온 정부장이 말한다.

한번 계약이 망가져서 상부에서 혼이 났는데 또 똑같은 일이 반복되고 있다.

그것도 믿었던 부하인 한록에 의해서.

정부장의 얼굴에 차가운 분노가 떠오른다.

“대표님, 착오가 있을 수 있으니 다시 한 번 찾아보시고 연락주시기 바랍니다.”

k필름에게 마지막 기회를 준 한록.

“일단 끊으라고 했어.”

어느새 한록의 뒤에 선 정부장.

“어떡해...”

겁먹은 얼굴로 정부장을 바라보는 부서 사람들.

[찾아보고 말고 할 것도 없습니다, 대리님. 일처리는 철저하신 줄 알았는데

실망입니다. 이감독님 데뷔 또 밀리게 할 순 없습니다.]

이감독을 들먹이며 기회를 걷어찬 k필름과-

미소를 짓는 오차장.

‘더 이상의 기회는 없다.’

“이한록-”

정부장이 한록의 어깨를 잡으려는 순간. 한록이 정부장에게 잠깐만 기다려달

라는 듯 손을 올렸다.

“대표님. 제가 말씀 좀 드리겠습니다.”

성격을 죽이며 제작사와는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고 노력하는 한록.

하지만 이렇게까지 뻔뻔하게 나온다는 건, 자신과 이감독을 어지간히 우습게

보고 있다는 뜻이다.

비리를 저지르고, 영화 하나와 한사람의 커리어를 망쳐놓고는 뻔뻔하게 구는

k필름의 대표.

그런 상대에게 예의를 지킬 필요는 없었다.

한록이 숨을 한번 쉬고 입을 열었다.

“저희 저녁 7시 16분에 만났습니다. 맞습니까?”

[네.]

“k필름 본사 3층 302호에서 만났고, 대표님이랑 변호사님 같이 오셨죠.”

[...네.]

“제가 들어가자마자 ‘대표님, 오랜만에 뵙습니다.’라고 했습니다. 대표님이

‘이대리님 요즘 너무 유명해져서 뵙기가 어렵네요.’ 라고 하셨죠.”

답이 없는 k필름의 대표와, 컴퓨터를 바라보고 있는 한록.

거기엔 k필름과의 대화 녹취본이 있었다.

[이대리님, 설마 대화 녹음 하셨습니까? 이게 뭐하는 짓이에요?]

“하면 안 됩니까? 계약 중인데요.”

[그거 불법-]

“제가 대화에 참여중이니 불법 아닙니다.”

k필름의 말을 칼 같이 자른 한록. 한록이 다시 물었다.

“제가 상영계획 서류 드렸고, 아트씨네에서만 상영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

때 대표님이 뭐라고 하셨습니까?”

[....]

답이 없는 k필름의 대표. 그러나 한록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대표님. 대표님께서 뭐라고 하셨습니까?”

[...]

“기억 못하십니까? 그러면서 저한테 일처리 제대로 하라고 말씀하신 겁니까?”

[이대리님-]

“대표님. 마지막으로 묻습니다. 제가 아트씨네에서만 상영한다고 할 때 뭐라

고 하셨습니까.”

[...알겠다고..했던 것 같습니다...]

드디어 꼬리를 내리는 k필름.

한록이 이 정도로 나오는데 이길 수 없다는걸 눈치챈 것이다.

“이제 기억이 나시나 봅니다.”

[...네.]

한록의 말에 건너편에 앉아있던 오차장의 표정이 빠르게 굳는다.

[죄송합니다, 대리님. 제가 착각을 했나봅니다.]

“착각 맞으십니까?”

이제 변명을 하려는 k필름의 말을 가로막는 한록.

“대화는 기억하고 계시면서, 영화제가 얼마 안 남은 시점에서 이런 식으로 나

오시는게 착각이란 말씀입니까?”

[대리님, 그게-]

“그 착각 때문에 실제로 계약 무산됐으면, 식물 상영 못 했으면 어쩔 뻔 했습

니까?”

실제로 회귀 전 상영이 취소되고, 1년간 충무로를 떠돌던 식물.

“저희 직원들이 그 착각으로 받을 피해는요?”

그리고 누명을 써야했던 유선과 법무팀, 현과장.

“이대리. 그만해.”

“냅둬.”

현과장이 한록을 말렸으나. 정부장이 저지한다.

“ck에 장난을 건 대가를 보여줘야지.”

정부장의 오싹한 말에 현과장이 몸서리를 쳤다.

[이대리님, 죄송합니다. 아트씨네에서만 상영하긴 아깝다는 말에 제가 큰 실

수를 했습니다. 대리님. 정말 죄송합니다.]

그리고 k필름 대표의 말.

그 말에 한록이 바로 물었다.

“누가요.”

한록의 말에 바닥을 노려보던 오차장이 고개를 든다.

[대,대리님. 그게-]

“누가 대표님한테 바람을 넣고, 저한테 이렇게 굴라고 얘기했습니까.”

고개를 든 오차장.

오차장을 바라보고 있는 한록.

둘의 시선이 마주쳤고, 한록이 말했다.

“대표님, 다시 한번 묻겠습니다.”

“누가 그따위로 말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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