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 회사원이 선넘으면 생기는일-39화 (39/263)

오차장의 사람들(2)

“!!!”

한록이 나타나자 황급히 뒷걸음질을 치는 유대리.

한록은 신중하게 입을 열었다.

“대리님. 죄송합니다. 통화를 엿들었습니다.”

“뭐? 이대리, 지금 미쳤어?”

“오차장님과의 일 알고 있습니다.”

“...이대리!”

화를 내던 유대리가 단도직입적인 한록의 말에 행동을 멈췄다.

“이대리. 이러는 이유가 뭐야?”

떨리는 유대리의 눈이 한록의 손에 들린 녹음기로 향한다.

‘다 알고 있다.’

한록은 이미 모든 걸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유대리가 황급히 물었다.

“돈이야? 얼마나 필요한데?”

“유대리님, 진정하세요. 식물 관련해서 얘기를 좀 했으면 합니다.”

식물이란 말이 나오자 눈에 띄게 불안해하는 유대리.

유대리의 눈에 스쳐지나가는 공포와 죄책감. 그리고 갈등.

한록은 그걸 보며 생각했다.

‘유대리님은 그냥 평범한 사람이다.’

상사의 비리를 고발할 정도로는 깨끗하지 못한. 그러나 같은 학교 후배의 앞

날을 막을 정도로 못되지도 못한 사람.

우리 주위에 너무 많은 평범한 사람.

‘가능성이 있다.’

한록은 그 평범한 사람에게 가능성을 걸었다.

“오차장님이 식물 상영을 막으려고 하십니다. 신인 감독에게 부산영화제가 얼

마나 좋은 기회인지는 아실거라 생각합니다. 이감독님이 그 기회를 놓치실 수

도 있어요.”

“...그래서 나보고 어떡하라고?”

“저는 회사에 이 일을 고발할겁니다. 오차장님의 그간 비리들과 같이요. 유대

리님이 증인이 되어주셨으면 합니다.”

“하. 미쳤구만.”

유대리가 머리를 헤집으며 말한다.

“이대리. 아직도 성질 못 죽였어? 그냥 조용히 넘어가자. 응?”

“그럴거면 이감독님한테는 왜 전화하셨습니까?”

“그 인간 데뷔도 못했는데 개봉 물 건너가게 생겼으니까 그렇지! 이번에 상영

취소되면 또 한참 밀릴 거 아냐!”

“그럼 다른 업체들은요?”

대답이 없는 유대리.

“조 프로덕션. 경희 인쇄소. 구성 금속. 유대리님이 계약을 취소하신 업체들

은요?”

jk 프로덕션에 밀려서 불이익을 받은 업체들.

오차장은 항의를 하지 못할 정도로 영세한 업체들만 골라 계약을 파기했다.

“이대리. 그만. 그만하자. 그만해.”

유대리가 눈을 감고 말했다.

‘대리님. 갑자기 이러시면 저희는 어떻게 합니까.’

‘...앞으로도 계약이 어려울 수 있다구요?’

‘대리님. 잠시만요!’

기껏 외면해왔던 자신의 잘못들.

외면하면서도, 매일 밤 잠 못 이루게 하던 잘못들.

그 잘못들이 드디어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대리님. 후회하고 계신 거 압니다. 대리님이 원하신 일이 아니잖아요.”

당연한 말이다.

오차장 같은 인간이 아니면, 누가 자기 이름으로 불법계약을 쓰면서 뇌물을

받고 싶어하겠는가.

한록이 유대리에게 한걸음 다가가서 말했다.

“식물만이 아니라 그간 오차장님의 비리를 전부 고발할겁니다. 이제 그만하셔

도 됩니다.”

‘이제 그만해도 된다.’ 너무나 바라던 제안.

하지만 그걸 받아들이기엔 너무나 멀리 와버렸다.

유대리가 지친 얼굴로 한록을 바라보았다.

“이대리.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만해. 증인이 되면 내 얘기도 그대로 알려지는

거야. 나도 징계를 받을 거야.”

“언젠가는 터질 일입니다. 일이 더 커지기 전에 여기서 끝내는게 최선의 선택

이에요.”

“......”

유대리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이게 내가 바래오던 일인데.’

누군가 오차장을 고발하는 것. 오차장의 비리와 그간 자신이 해왔던 잘못을

끝내는 것. 그 순간이 다가왔다.

“이대리. 나도 알아. 언젠가는 들킬거고, 일이 더 커지면 돌이킬 수 없겠지.

근데...”

그런데, 증인이 되겠다고 말을 할 수가 없다.

“그럴 용기가 없어.”

당장 눈앞에 다가올 일들. 감사실. 징계. 업계에서의 소문. 회사에서의 입지.

‘내가 그걸 감당할 수 없을까?’

어리석은 걸 알면서도, 한록의 손을 잡을 용기가 없다.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한록은 유대리의 마음을 이해했다.

“이대리가 뭘 알아?”

신경질적으로 말하는 유대리.

“회사에서 잘 나가지, 사람들도 좋아하지, 하고 싶은 말 다 하면서 살지. 그

런 이대리가 뭘 아냐고.”

“저도 오차장님 밑에 있었습니다. 구과장님과 같이 일하는거 보셨지 않습니까.”

잘못된 걸 알면서도, 더 나은 길이 있는 걸 알면서도 나쁜 선택을 하는 나날

들. 오차장의 밑에서 일하던 시간들.

그런 날들이 한록에게도 있었다.

“...”

유대리는 말이 없었다.

한록이 구과장과 일하면서 고생한건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자신처럼 매일 아침 창백한 얼굴로 출근을 하던 한록.

그런 한록이, 지금은 너무나 달라졌다.

유대리가 한록에게 물었다.

“지금은...아니잖아.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잖아.”

“달라지려고 노력했으니까요.”

‘이대리. 솔직해져 봐.’

현과장의 말을 떠올리며 차분히 얘기하는 한록.

“저라고 오차장님과 맞서는게 무섭지 않겠습니까. 저도 무섭고, 용기가 안 나

지만 노력하는 겁니다.”

“...왜 그렇게까지 해야하는데?”

그 질문에 대한 답은...

“후회하고 싶지 않으니까요.”

지난 5년의 삶이 알려준 경험이었다.

두 번째 기회. 후회하지 않겠다고 결심한 삶.

“유대리님. 지금 용기를 못내면 평생 똑같은 삶을 사실 겁니다.”

그건 과거의 한록 자신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후회할 선택을 하지 마세요.”

한록의 말에 유대리는 여전히 답을 하지 못했다.

*

결국 대답을 하지 못한 유대리.

한록은 유대리를 두고 창고에서 나왔다.

‘유대리님은 증인이 될 거다.’

현과장이 그랬던 것처럼, 유대리도 올바른 선택을 할 거라 믿는 한록.

‘유대리님은 대단한 호인은 아니다. 그저 평범한 사람이지.’

‘그리고 나는...’

‘평범한 사람도 좋은 사람이 될 수 있다고 믿는다.’

“이대리.”

그때 유대리가 한록의 팔을 붙잡았다.

“오차장님 이길 수 있다고 믿는거야?”

유대리의 불안한 물음. 아니, 애원.

그 말에 한록이 확답했다.

“네.”

한참이나 망설이던 유대리가 겨우 입을 연다.

평범한 사람도 좋은 사람이 될 수 있을까.

평범한 사람도 달라질 수 있을까.

“내가 증인할게.”

그렇다.

*

유대리가 한록에게 물었다.

“이대리. 식물만은 제대로 처리해줘. 얼굴은 몰라도 같은 학교 후배야.”

“네, 알겠습니다.”

“증인이 필요한 거지?”

“맞습니다”

“그걸로 되겠어? 그걸로 오차장님이 무너질까? 오차장님 라인 알잖아. 본부장

님이야.”

최경준의 총애를 받는 오차장.

최경준이 과연 이감독과 유대리의 증언만으로 오차장을 내치려 할까.

솔직히, 한록으로서도 장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생각해둔 방법이 있긴 하지만...유대리님 도움이 필요합니다.”

“내 도움?”

“네.”

다시 한번 망설이던 유대리. 잠시 후 유대리가 이를 악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한번 해볼게.”

*

그날 저녁, 서초구의 일식집.

그곳엔 구과장, 남과장, 유대리, 그리고 오차장이 있었다.

모두 오차장의 사람들이었다.

일식집의 분위기는 말 그대로 싸늘했다.

머리가 남겨져서 그대로 회떠진 생선. 한 마디도 없이 앉아있는 오차장. 마찬

가지로 숨을 죽이고 있는 사람들.

오차장이 자리에서 일어나 담배에 불을 붙이더니, 구과장을 향해 다가갔다.

아무 말도 없이 담배를 피면서 구과장을 내려다보는 오차장.

‘미치겠다.’

유대리는 토할 것 같은 기분을 겨우 참았다.

오차장의 담배가 타들어가고, 담뱃재가 아슬아슬하게 구과장의 옆으로 떨어진다.

“히, 히익...”

담뱃재가 귓가를 스치고 떨어질때마다 구과장이 몸을 움찔거렸다.

구과장의 양복에 남는 담배자국.

오차장이 드디어 자리로 돌아가 앉았고, 구과장이 남몰래 한숨을 쉬었다.

“이한록이 또 설치고 있어.”

유대리는 한록의 이름에 심장이 튀어나갈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저는 오차장님을 아주 잘 압니다. 곧 저한테도 손을 쓰려 할 거예요.’

유대리의 품에서 조용히 돌아가고 있는 녹음기.

‘오차장님을 만나러 갈땐 반드시 녹음기를 가져가세요.’

그건 바로 한록의 작품이었다.

“두고 볼 생각은 없다.”

오차장의 담배가 거의 다 타들어갔다.

‘이대리가 영악한 타입은 아닌데. 과연 오차장을 이길 수 있을까?’

그리고 유대리의 불안 역시 타들어간다.

*

그 시간. 한록은 회의실에서 생각에 잠겨있었다.

-이대리. 오차장님이 오늘 보자고 하신다.

유대리의 연락.

-대리님. 제가 말씀드린 대로만 하세요.

한록의 계획.

갖은 비리를 저지른 오차장. 그러나 최경준 역시 책에 나오는 대쪽같은 사람

은 아니다.

‘최경준이 오차장을 내치는 상황이 있다면, 그건 오차장이 비리를 저질러서가

아니라 자신에게 해가 되기 때문일 것이다.’

-성공할까?

-네.

유대리의 물음에 한록은 단호하게 답했다.

‘와라, 오차장.’

당신에게는 똑같은 방식으로 돌려주겠다.

*

“유정연.”

오차장이 유대리를 불렀고, 유대리가 얼른 고개를 숙였다.

“내 라인이 되고 싶으면 제대로 일해. 네가 하겠다고 한 일 아닌가.”

오차장의 말.

‘오차장님은 대리님한테 책임을 넘기는 식으로 말할 거예요. 거기에 흔들리지

마세요. 대리님이 원한 일이 아닙니다.’

그리고 한록의 말.

“식물 제작사에 연락해. 그리고 서류 하나를 빼와.”

‘식물에 대한 얘기를 할 겁니다. 거기서 솔직하게 말하세요.’

“할 수 있겠나?”

“차장님, 그, 그게...이감독이 저와 동문입니다.”

싸늘한 눈으로 유대리를 바라보는 오차장.

“그럼 그만 둬. 여태 네가 한 짓은 전부 감사실에 말하면 되겠군.”

‘오차장은 대리님이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걸 보고, 오히려 대리님을 더욱 공

범으로 만들려고 할 거예요.’

‘그러면 제 얘기를 하세요.’

“차장님. 그치만...이대리가 가만있지 않을겁니다.”

한록에 대한 말이 나오자 오차장의 눈에 차가운 불꽃이 튄다.

“유정연.”

“네, 네.”

“입 다물어.”

다 타버린 담배를 손에 든 오차장이 유대리를 바라보았다.

담배를 생선의 대가리에 눌러 끄는 오차장.

끔찍한 광경에 유대리가 눈을 질끈 감았다.

“현주훈이랑 이한록의 잘못인 것처럼 만들어. 무슨 짓을 하든 상관없다. 삼일

의 삶도 같이 건드릴 수 있다면 더 좋지.”

‘제 얘기가 나오면 오차장은 흥분할 겁니다.’

‘그때...영화제에 대해 얘기하세요.’

“차장님, 그,그럼 gv에 문제가 생길지 모릅니다...그럼 영화제가...”

‘그러면 오차장은-’

“gv에 문제가 생긴다라. 그건 내 알 바 아냐.”

“아니...”

“나한텐 좋은 일이지.”

‘본색을 드러낼 겁니다.’

‘이대리...’

유대리가 눈을 감고 생각했다.

‘완벽한 성공이야.’

*

일식집에서 나온 유대리는 바로 한록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대리. 성공이야.”

그 말에 한록이 조용히 주먹을 움켜쥐었다.

“네, 고생하셨습니다. 덕분에 식물은 잘 끝날겁니다.”

“그래, 식물은 잘 끝나겠지...”

유대리가 한참 후 말을 이었다.

“그리고 난 잘리겠지.”

“아닙니다, 대리님. 징계 선에서 끝날 수 있도록 제가 최대한 노력하겠습니다.”

“자를거면 자르라 그래. 강남에 널린 게 회산데, 내가 왜 여기서 양심을 팔면

서 일했는지 모르겠다.”

유대리가 시니컬하게 답했다.

많은걸 내려놓은 듯한 유대리의 목소리.

“이대리. 나...회사 다니면서 너무 많은걸 잃었다.”

내가 가진 걸 팔아서 돈을 받는 곳. 그게 회사다.

누군가는 시간을 팔고, 누군가는 행복과 희망을 판다.

그리고 유대리는 양심과 꿈을 팔았다.

“무서워. 걱정도 돼. 그래도 후회는 없다.”

유대리의 허심탄회한 말.

“고맙다, 이대리.”

그리고 진심.

“저도 감사합니다, 대리님.”

“나한테 왜 감사해? 나는 비리직원인데.”

유대리가 그렇게 말하며 웃다가 전화를 끊었다.

유대리의 목소리는 많이...편안해져 있었다.

한록은 밤하늘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비리직원.’

유대리의 말은 사실이었다.

아무리 오차장의 협박이었다고는 하나, 선택은 유대리가 한 것.

유대리 역시 책임을 피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그게 유대리님만의 잘못인가?’

내부 고발자가 불이익을 겪는 사회.

오차장의 잔인함을 알면서도 곁에 두는 최경준,

부하들의 고충 한 번 살피지 않는 정부장.

용기를 낸 사람을 도와주지 않는 부서 사람들. 그리고 한록 자신.

그런 상황에서 누가 옳은 선택을 할 수 있는가?

그러나 유대리는 고민했고, 용기를 냈으며, 후회없는 선택을 했다.

‘대단한 사람이다.’

그리고...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만들거다.’

한록의 다짐.

‘나는 최경준만큼 올라갈거다.’

정부장과 같은 한록의 각오.

‘그러나 최경준 같은 상사가 되진 않겠다.’

그리고 정부장과는 다른 마음가짐.

회사란 어때야 하는가. 어떤 상사가 좋은 상사인가. 어떤 상사가 되어야 능력

있고 양심있는 직원들이 회사에 남아있는가.

한록은 오늘 그에 대한 답을 배웠다.

*

그날 밤, 11시.

식물의 이감독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늦은밤에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감독님.”

“.....”

한참이나 말을 잇지 못하는 이감독.

“감독님, 무슨 일 있으십니까?”

그 말에 이감독이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제 선배라는 사람한테서 전화가 왔습니다. 식물 개봉이 어려워질 수 있다

고...그리고 제작사와 문제가 있을 수 있다구요.”

“...전화를 드려야하나 오래 고민했습니다. 그래도 그 사람이, 대리님만 믿으

라고 말해서...그래서 전화드렸습니다. 지금 무슨 문제가 생기고 있는 것 같

습니다.”

이감독의 말에 한록이 답했다.

“네. 제가 잘 처리할테니, 너무 걱정하지마세요. 감독님은 말씀드린 것처럼

녹음을 해주시고, 특별한 일이 있으시면 이렇게 저한테 전화주시면 됩니다.”

“대리님.”

식물 감독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정말 괜찮은건가요?”

그에 대한 한록의 답.

“네.”

“곧 모든게 끝날겁니다.”

작가의말

가슴:재밌는 작가의 말을 쓰고 싶다.

머리:지금 이 분위기에?

가장 공감가는 사람을 고르라면 저는 유대리를 고르겠습니다. 유대리가

후회 없는 선택을 해서 다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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